아다치 미츠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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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로필
2. 아마추어 시절
3. 프로 시절
4. 은퇴 이후
5. 에피소드


1. 프로필


이름
아다치 미츠히로(足立光宏)
생년월일
1940년 3월 10일
출신지
일본 오사카부
포지션
투수
투타
우언우타
소속팀
한큐 브레이브스(1959~1980)
지도자 경력
한큐 브레이브스 투수 코치(1980~1985)
<color=#373a3c> '''1967년 퍼시픽리그 최우수 선수(MVP)'''
1966년
노무라 카츠야
(난카이 호크스)

'''아다치 미츠히로
'''(한큐 브레이브스)'''
'''

1968년
요네다 테츠야
(한큐 브레이브스)

'''1967년 퍼시픽리그 최우수 평균자책점'''
1966년
이나오 가즈히사
(니시테츠 라이온즈)
1.79

'''아다치 미츠히로'''
'''(한큐 브레이브스)'''
'''1.75'''

1968년
미나가와 무츠오
(난카이 호크스)
1.61
전직 일본프로야구 선수, 지도자. 한큐 브레이브스 에서만 21시즌 동안 플레이 한 프랜차이즈 스타이며 팀 후배인 야마다 히사시와 더불어 퍼시픽 리그를 대표하던 언더핸드 스로 투수였다.

2. 아마추어 시절


중학교 시절에는 오버핸드 스로 투수였지만 오사카시립 니시고교 1학년 때 팔꿈치 연골 이상으로 1년을 통째로 쉬면서 팔의 통증을 줄이기 위해 서서히 투구 각도를 내리며 언더핸드로 전향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사회인 야구 '''오사카 다이마루'''에 입단하여 플레이 했고, 1958년 도시대항 야구대회에 출전한 '''가네보'''의 보강 선수로 합류하여 호투를 보였다. 비록 준준결승에서 아쉽게 완투패했지만 이를 계기로 아다치는 프로 스카우트 들의 눈도장을 받았다.

3. 프로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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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한큐 브레이브스에 입단한 아다치는 1961년 시즌까지 등판 기회는 제법 많았지만 강한 인상은 남기지 못했다. 그러나 1962년 언더핸드 스로 투수 특유의 밑에서 솟아오르는 속구를 무기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5월 24일 대 난카이 호크스 전에서 '''17탈삼진'''으로 당시 1경기 최다 기록을 수립했다. 아다치는 그 해 8승을 거두며 요네다 테츠야, 가지모토 타카오의 뒤를 잇는 한큐 마운드의 유망주로 떠올랐다.
1964년 에는 데뷔 후 처음으로 두 자릿수 승수(13승 15패)에 평균자책 2.78로 좋은 모습을 보였고, 1967년 시즌 '''20승 10패, 평균자책 1.75'''로 평균자책 타이틀을 획득하면서 한큐의 첫 퍼시픽 리그 우승에 크게 공헌함과 동시에 리그 MVP에 뽑히는 영광을 안았다. 그 해 한큐는 일본시리즈 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2승 4패로 패퇴했지만 아다치는 팀의 2승[1]을 모두 거두면서 시리즈 감투상을 받았다.
이듬해인 1968년 어깨 고장으로 5경기 등판에 그치고 1969년 시즌도 부상 여파로 구속이 떨어지며 2승에 머물렀지만, 싱커를 연마하면서 부활한 아다치는 1971년 '''19승 8패, 평균자책 2.49'''라는 좋은 성적으로 건재함을 과시했고 1972년 시즌에도 '''16승'''을 거두며 요네다 테츠야, 가지모토 타카오, 야마다 히사시와 더불어 한큐 황금기의 한 축을 떠맡았다.
1973년 체력 저하로 인해 4승으로 부진했지만, 1974년 동계 캠프때 기존 무기인 커브를 갈고 닦아 2종류의 커브로 세분화하면서 타자의 타이밍을 빼앗는 법을 익혔고 1976년 시즌까지 각각 '''10승, 11승, 17승'''을 거두며 베테랑의 면모를 잃지 않았다. 또한 한큐가 우에다 토시하루 감독의 지도 하에 1975~1977년 일본시리즈를 3년 연속 제패하면서 아다치는 야구선수로서 최고의 순간을 만끽하기도 했다.
하지만 흘러가는 세월을 아다치는 이겨내지 못했고, 1978년 시즌 도중 무릎 부상을 당하며 그의 기량은 완전히 하락세로 돌아섰다. 1979년 4경기 등판에 그친 아다치는 1980년 선수 겸 투수 코치로 임명되어 등판기록 없이 시즌을 마감하고 그 해를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아다치의 21시즌 통산 성적은 '''676경기 출장, 187승 153패 3세이브, 1482탈삼진, 평균자책 2.91''' 이며, 리그 MVP와 평균자책 1위, 베스트 나인을 각 1회씩 수상하고 다이아몬드 글러브를 4회 받았다.[2]

4. 은퇴 이후


유니폼을 벗은 아다치는 1981년 부터 1985년 까지 한큐 브레이브스의 2군 투수 코치로 일했고, 1986년 이후 한큐와 오릭스의 스카우트로 근무했다. 현재는 '''간사이학원 대학''' 야구부의 투수 코치를 맡고 있다.

5. 에피소드


  • 일본시리즈 에서 상당히 강한 면모를 보이며 이른바 V9 전성기를 구가하던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나름 잘 공략했던 몇 안되는 투수이기도 하다. 시리즈 통산 9승(5패)은 일본프로야구 사상 공동 3위에 해당되는 기록이며, 특히 요미우리를 상대로 8승 4패라는 좋은 성적을 남겼다. 요미우리의 1965~1973년 V9 시절, 한큐는 시리즈에서 요미우리에게 8승 20패로 절대 열세였지만 그 중 5승을 거둔 투수는 바로 아다치였다.
  • 1976년 일본시리즈나가시마 시게오 감독이 이끌던 요미우리와 맞붙은 한큐는 3연승을 거둔 후 내리 3연패 하며 리버스 스윕 위기에 놓였다. 그런 상황에서 36세의 노장 아다치는 막중한 부담을 갖고 7차전 선발로 마운드에 올랐는데, 당시 고라쿠엔 구장을 꽉 채운 5만명의 요미우리 팬들은 맹렬한 응원으로 한큐 선수들의 기를 죽이려 했지만 아다치는 오히려 그래 너희들은 떠들어라, 나는 그냥 던질란다 라는 담담한 마음으로 요미우리 타선을 2실점으로 틀어막고 완투승을 거두며 한큐의 2년 연속 일본시리즈 제패에 크게 공을 세웠다.

  • 1978년 아다치는 무릎 부상으로 시즌을 말아먹었지만 야쿠르트 스왈로즈와의 일본시리즈에 촛점을 맞춰 몸을 만들었고, 일본시리즈의 사나이 답게 3차전에서 완봉승을 거두며 한큐의 시리즈 4연패가 실현되는가 했지만 야쿠르트의 반격으로 승부는 7차전까지 이어졌다. 결국 7차전 6회말, 한큐가 0대 1로 뒤지던 1사 주자 없는 상황에서 오오스기 카츠오가 아다치의 3구째를 잡아당겨 좌측 폴대 위로 넘어가는 타구를 날렸는데 심판이 이를 홈런으로 판정했고, 감독이던 우에다 토시하루가 그라운드로 뛰쳐나가 심판진에게 그게 왜 홈런이냐며 맹렬히 항의하는 통에 경기는 무려 1시간 19분이나 중단되었다. 이 와중에 아다치는 어깨가 식어버리고 안 좋은 무릎에 물이 차는 바람에[3] 시합이 재개되자 바로 마츠모토 마사시에게 마운드를 넘기고 내려와야 했다. 그리고 그날 7차전은 아다치의 생애 마지막 일본시리즈 등판이 되고 말았다...
  • 직구 중심의 투구만으로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낀 팀 후배 야마다 히사시가 아다치에게 싱커 던지는 법을 알려달라고 간청했지만, 아다치는 "아직 직구가 통한다면 싱커는 던지지 않는 편이 좋다" 라며 거절했다. 그러나 야마다는 굴하지 않은 채 혼자서 싱커 던지는 법을 연구했고, 결국 야마다의 열의에 마음이 바뀐 아다치는 그에게 싱커를 전수해 주었는데 하나 하나 세세히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닌 "나는 이렇게 싱커를 던지지만 투수마다 던지는 법이 다르니 나머지는 알아서 생각해 보라"며 힌트를 주는 정도로 조언했다.[4] 훗날 아다치는 "야마다같이 젊고 힘 좋은 투수가 싱커까지 던질 줄 알면 내 자리가 위태로울 것 같았다. 한 팀에 같은 유형의 투수가 두 명이나 필요하겠는가" 라며 당시의 심정을 솔직히 털어놓기도 했다.
[1] 완봉승과 구원승을 각각 하나씩 거두었다.[2] 아다치는 1972년 퍼시픽 리그 투수부문 초대 다이아몬드 글러브 수상자이기도 하다.[3] 당시 아다치는 무릎에 고인 물을 빼내면서 등판하고 있었다.[4] 야마다는 아다치의 이런 조언에 대해 "되려 선배가 그 정도로만 알려준 덕분에 내가 갈고 닦은 싱커를 온전히 던질 수 있었다. 만약 처음부터 끝까지 가르쳐 주었다면 나의 싱커는 아다치의 아류작에 불과했을 것이다"라며 고마움을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