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대항야구대회
1. 개요
일본의 사회인야구 대회. 줄여서 도시대항전이라고도 불리운다. 마이니치 신문에서 창단한 대회며[2] 1949년 20회 대회부터는 일본야구연맹과 공동개최로 변경되었다.
사회인야구 대회 중에는 압도적인 인기를 자랑해서 10,000명 이상 관중이 들어오는 경우도 매우 흔하며, 결승전 같은 경우 도쿄돔 45,000명을 꽉 채우는 경우도 많다. 일본의 스포츠 채널에서는 전 경기를 중계해주기도 하는데, 결승전은 보통 NHK에서 해준다.
2. 역사
1927년에 전일본도시대항야구대회(全日本都市対抗野球大会)라는 이름으로 창설되었다. 이 당시 일본야구는 프로리그가 없었고 도쿄 6대학을 필두로 한 학생 야구가 주류였던 시절이었는데 도쿄니치니치신문[3] 의 기자였던 하시도 신이 와세다대 야구부 시절 미국을 방문했을때 본 메이저리그 베이스볼의 지역 연고제를 토대로 '''일본의 각 도시를 대표하는 야구팀간의 대회'''를 만들자는 제안을 하게된다. 이후 1년간 각 클럽 관계자들을 끈질기게 설득한 결과 1927년, 대망의 첫 대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하시도는 사후 도시대항전을 창설한 공로를 인정받아 1959년에 일본 야구전당에 헌액된다.
1935년에 만주국이 건국되면서 대회명이 현재의 명칭인 도시대항야구대회로 변경되었다. 괴뢰국이긴 하지만 어찌됐건 이 만주국에서 대회를 참가하는 팀이 있었기 때문에[4] 더이상 '전일본'. 즉 일본 국내 팀들만 참가하는 대회가 아니게 되었으니 대회 명칭 변경이 불가피했다.
1941년은 전시상황에 따른 집회 금지령으로 인해 예선이 종료된 직후 대회가 중단되었고 1943~1945년은 태평양 전쟁의 영향으로 대회가 미개최되었다. 전황이 좋았다고 판단된 1942년에는 정상적으로 대회가 진행되었다. 이 대회에서 경성부 야구팀인 "전경성(全京城)"이 우승을 차지하였다.[5]
이후 1946년에 다시 대회가 재개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3. 개최 시기
매년 7월 중순~8월 초[6] 에 열리기 때문에 "한 여름의 야구축제(真夏の球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개최구장은 여러번 변경되었는데 초기에는 메이지진구 구장을 10년간 사용했으나 이후 고라쿠엔 스타디움으로 이전했고, 도쿄돔이 완공된 이후에는 이곳을 메인 스타디움으로 쓰고 있다. 2011년 한정으로 도호쿠 대지진으로 인한 절전 정책으로 인해 82회 대회는 교세라 돔 오사카에서 열렸다.
도쿄올림픽이 예정되어 있었던 2020년은 11월 22일부터 12월 3일까지를 일정으로 잡고 있었으며 코로나19의 여파가 커지기 전에 해당 기간 동안 도쿄돔을 사용하는 것으로 사전에 협의된 사항이었다. 때문에 일본시리즈 진출에는 성공했지만 프로야구 일정이 연기되는 바람에 도시대항전과 일본시리즈 일정이 겹쳐서 홈구장을 못 쓰게 된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군말없이 도쿄돔을 내주어야 했다.
4. 대회 방식
대회에 출전하는 난이도는 고시엔에 비하면 쉬운 편이다. 342개 팀들 가운데 32팀이 본선에 진출하는 것이니 단순 확률상으로는 고시엔보다 높다.
하지만 대회에 출전하는 팀들은 기업팀이 절대다수다. 업무와 훈련을 주중에도 병행할 수 있고 야구 인프라도 갖춰져있으며 급여도 받을 수 있다는 점 때문에 기업팀으로 많은 선수들이 몰리게 되는데 이러한 차이 때문에 기업팀과 클럽팀 간의 수준 차이가 현격하게 벌어지게 된다. 이렇다 보니 고정된 연습 장소도 없고 생업과 야구를 함께 할 수 없는 클럽팀이 불리할 수밖에 없다.
예외적으로 기업팀에서 창단한 클럽팀이라던가 기업팀이었다가 구조조정 등으로 인해 야구부 지원이 힘들어져서 클럽팀으로 전환한 팀의 경우에는 티 클럽팀들에 비해 선수 수급 형편이 나쁘지 않아 준수한 실력을 가진 선수들을 그럭저럭 보유하고 있어서 다른 클럽팀들에 비하면 본선에 진출하는 사례가 더러 있는 편이다.
4.1. 예선
4.1.1. 1차 예선
2차 예선에 출전할 팀을 가려내기 위해 실시한다. 도도부현 1곳을 1지구로 정해 최소 1팀, 많게는 여러 팀을 선발하게 된다. 해당 지역에 있는 팀 수가 적을 경우 인근 지역과 합쳐서 예선을 진행하기도 한다.
대개 1차 예선에 참가하는 팀들은 클럽 야구팀들이 대다수이며 기업팀들은 아예 참가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기업팀의 참가가 적은 이유는 클럽팀과의 수준 차이가 상당히 크기 때문에 그에 따른 양민학살이 발생할 것을 우려해 기업팀은 2차 예선으로 직행 할 수 있는 특권을 주고 클럽팀에게 많은 기회를 부여하기 위한 조치이다.
간혹 가다가 기업팀과 클럽팀 간의 교류를 장려하기 위해 기업팀을 1차 예선에 참가시키는 지역도 있긴 있다. 이런 경우에는 최상위시드를 부여받아 준결승 내지 결승에서 경기를 가지게 된다.
이외에도 기업팀 간 2차 예선의 대표 순위를 정하기 위해 별도로 경기를 치르기도 한다.
4.1.2. 2차 예선
위의 1차 예선을 뚫고 올라오면 다수의 기업팀들이 기다리고 있는 2차 예선에 나서게 된다. 12개의 지구에서 최소 1팀, 최대 6팀을 선발해 총 32팀이 본선에 진출한다.
현 시점에서 정해진 12지구는 다음과 같다. ()안은 선발팀
- 홋카이도 지구(1)
- 토호쿠 지구(2)
- 호쿠신에츠 지구(1)
- 북간토 지구(2)
- 남간토 지구(3)
- 도쿄 지구(4)
- 서간토 지구(2)
- 도카이 지구(6)
- 킨키 지구(5)
- 주고쿠 지구(2)
- 시코쿠 지구(1)
- 큐슈 지구(2)
전 대회 우승팀은 주최자 추천 자격으로 예선전이 면제되어 자동 출전이 가능하다.
본선진출팀들은 자동적으로 해당 도시를 대표하여 출전하는 것이므로 언론에서는 해당 팀명 뒤에 도시명을 별도로 표기하게 된다. 주최측인 마이니치 신문만 반대로 도시명을 앞에다 쓰고 팀명을 뒤에다 표기한다.
도쿄도 대표 출전팀은 도쿄 23구 중 한 곳이 아니라 '도쿄도 전체를 대표'하는 자격으로 출전한다. 또한 특정 도시가 아니라 여러 도시를 거점으로 하는 팀들(미츠비시 중공업 고베 · 타카사고 등)의 경우에는 복수의 도시를 대표하는 자격으로 출전한다.
4.2. 본선
토너먼트 방식으로 대회가 진행된다. 예선에서 적용 가능했던 패자부활전이 없기 때문에 경기에서 지면 곧바로 탈락. 1946년부터 1967년까지는 3위 결정전도 진행했었지만 현재는 진행하지 않는다.
개막일과 8강 마지막 날을 제외하면 준결승 전까지는 하루에 3경기를 치르며 경기시간은 각각 1경기 오전 10시, 2경기 오후 2시, 3경기 오후 6시이다.
준결승전은 각각 오후 2시와 6시에 경기를 진행하고 결승전은 오후 6시에 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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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 끝나는 토너먼트 대회 특성상 모든 선수들은 전력을 다해 경기에 임한다.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은 기본이고 잡을 수 없는 타구에도 거침없이 몸을 날리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위의 사진처럼 프로 경기에서나 볼 수 있는 수준 높은 플레이도 나오는 편.
5. 특징
- 나무배트를 사용한다. 한때 금속배트를 사용하던 시절(1979~2001)도 존재했지만 2002년부터 다시 나무배트를 사용하는것으로 확정.[7]
- 서스펜디드 게임이 적용된다.
- 지명타자 제도가 적용된다. 1989년 대회부터 적용된 규정이며 무조건 적용해야 하는 필수사항은 아니고 팀의 재량에 따라 지명타자를 사용하지 않는것도 가능하다.
- 도시대항전의 또다른 볼거리라 하면 응원전을 빼 놓을 수가 없다. 단순히 응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응원단 대회를 별도로 개최하고 있으며 4개 부문[8] 에서 높은 평가를 받은 팀의 응원단이 최우수상을 수상하게 된다. 수상 부문은 최우수상, 우수상, 감투상, 노력상이 있으며 경우에 따라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한다.
- 본선 진출 팀은 '마스코트 걸'을 선정하여 덕아웃에 배치할 수 있다. 고교야구의 매니저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매니저 역할과 거리가 멀며 하는 일은 소속팀의 타자가 홈런을 치고 들어오면 인형을 전달해주는 것이 주 역할이다. 이름 그대로 마스코트와 같은 역할을 하는 셈. 본래는 덕아웃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지만 90회 대회에선 안전을 고려해 덕아웃 안에서 대기하게 된다. 대개는 사내의 여직원이 맡는 경우가 일방적이지만 드물게 타사의 여직원이나 인형, 심지어는 남성이 이 역할을 맡는 사례도 존재한다.
5.1. 승부치기
2003년부터는 하루에 3, 4경기 가량을 치러야 하는 대회 일정을 고려해 승부치기를 적용하였다. 현행방식대로 규정이 확립되기 이전까지 여러차례 규정이 변경되었다.
- 2003~2008년까지는 연장 13회를 넘기거나 경기시간이 4시간을 넘어가면 다음 이닝부터는 1사 만루 상황에서 승부치기를 진행했다.
- 2009년에는 위의 규정을 준결승전과 결승전에만 적용하고, 8강전 이하에서는 경기 시간에 관계없이 연장 11회를 넘기면 1사 만루 승부치기에 돌입했다.
- 2011년에는 경기 시간에 관계없이 연장 12회를 넘기면 타순을 지정하여 승부치기에 돌입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이 규정은 2016년에 준결승전과 결승전에 한하여 경기시간이 5시간을 넘어갔을 경우에 적용되도록 수정되었다.
- 이렇게 우여곡절을 겪은 승부치기 제도는 2018년이 되어서야 WBSC 기준에 맞춰 타순 선택없이 무사 1, 2루에서 승부치기를 진행하는 방식이 적용되었다.
- 2020년 대회 한정으로 코로나19 예방 대책을 적용해 연장 10회를 넘어가면 1사 만루에서 승부치기를 진행하는 방식으로 변경하였다.
5.2. 보강선수 제도
도시대항전만의 특별한 규정으로 본선 진출을 확정지은 팀이 해당 지역 예선 탈락팀에서 최대 3명의 선수를 임대형식으로 데려오는 제도이다. 다만 이 제도는 어디까지나 2차 예선까지 돌파하고 본선 진출을 확정한 팀만 누릴수 있는 제도이며 주최자 추천 자격으로 본선 자동 진출이 확정된 전 대회 우승팀은 원칙상 보강선수를 데려올 수 없다.[9]
이 제도는 1950년, 프로야구가 양대리그로 분리되고 구단이 15개로 늘어남에 따라 프로로 유출되는 사회인 선수들이 많아졌고 그에 따른 선수 부족으로 도시대항전의 대회 수준이 저하될 것을 우려해 만들어진 제도이다.
초기에는 무려 10명까지 보강이 가능했으나[10] 해가 갈수록 보강 인원수가 줄어들었고 최종적으로 2010년에 최대 3명까지로 확정되었다. 보강선수로 차출이 결정되면 설령 자신이 원치 않는 팀에서 보강 제의가 들어오더라도 거절을 할 수 없으며 보강선수들은 대개 본선 개막 2주 전부터 팀에 합류해 호흡을 맞추게 된다.
반드시 강제되는 규정이 아니기 때문에 근래 들어서는 1~2명만 선발하거나 아예 선발하지 않는 팀들이 늘어나는 추세다. 기업팀들이 하나 둘 휴부하거나 폐부되는 일이 생기면서 나머지 기업팀들의 본선 진출이 수월해지게 된 것이 주요 원인. 대체적으로 기량이 뛰어난 선수들은 기업팀, 그것도 본선을 수십차례나 경험한 강호팀에 몰리기 마련인데 이런 야구인재들로 무장한 강호 기업팀들이 본선으로 더 많이 빠져나가게 되면 보강선수로 차출할 만한 선수들이 줄어든다. 그나마 강호팀들이 여럿 뭉쳐있는 지구는 강호팀끼리 물고 뜯으며 싸우다가 본선 진출에 실패하는 사례가 종종 발생하기 때문에 보강선수 사정이 나은 편이지만 그렇지 못한 지구는 정말 운이 나쁘면 차출할 선수가 없을 정도.
이 제도의 최대 메리트는 뭐니뭐니해도 팀의 약점을 덮을 수 있다는 점. 불안불안했던 자리를 보강선수로 메우게 되면 팀 전력에 상당히 도움이 된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보강선수가 소집 이후 팀에 잘 동화되었을때의 얘기. 보강선수가 소집된 팀에서 겉돌게 되면 팀의 조직력이 흔들리게 되는 부작용도 나타난다. 이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보강선수 차출을 도박이라 보기도 한다.
6. 표창
- 하시도 상(최우수 선수상) : 대회 우승팀에서 선출하며 가장 우수한 선수에게 주어지는 상. 도시대항전 창설에 기여한 하시도 신의 이름을 따서 하시도 상이라 불리운다.
- 쿠지 상(감투상) : 대회 준우승팀에서 선출하며[11] 1934년 미일야구에서 일본 대표팀 주전포수로 이름을 날렸고 1939년 대회 도중 불의의 사고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12] 쿠지 지로의 이름을 따서 쿠지 상이라 불리운다.
- 오노 상(특별상) : 대회에서 좋은 활약을 펼친 선수, 감독, 팀이 선출되는 상. 도시대항전 발전에 기여한 오노 미치마로[13] 의 이름을 따서 오노 상이라 불리운다. 오노가 세상을 뜬 1956년에 만들어졌으며 보통은 상기한대로 활약이 뛰어난 선수, 감독, 팀이 선출되지만 이 상과는 별개로 특별 표창이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다.[14]
- 젊은 사자상(신인상) : 대회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준 신인선수에게 수여되는 상. 수상자격은 고졸선수의 경우 입사 2년차, 대졸선수의 경우 입사 1년차까지만 주어진다. 수상 인원이 1명으로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2~3명이 동시 수상을 하기도 한다.
- 10년 연속 출전 : 대회 본선을 10년 연속으로 출전하면 수여받는 상. 본인이 소속된 팀 소속이 아닌 타팀의 보강선수 소속으로 출전해도 연속 출전 기록이 유지된다. 언뜻보면 프로 진출을 포기하고 사회인야구만 뛰어도 무난히 받을 수 있는 상처럼 보여지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프로구단에 비해 선수단 물갈이가 더욱 빈번하게 일어나는 사회인야구계의 특성상 10년 동안 팀의 주전으로 꾸준히 활약 할 수 있는 선수는 많지 않고 각 지역에는 여러 강호 야구부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본인의 소속팀이 매년 도시대항 본선에 출전 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다. 따라서 도시대항전 10년 연속 출전은 본인의 소속팀에서 주전을 차지하는 것은 물론이요, 타팀에 보강선수로도 꾸준히 차출될만큼 기량이 출중한 사회인야구계의 명선수라는것을 증명하는 상이다. 스즈키 마사아키(본명 : 야마네 마사아키)라는 선수가 연속 출전 기록의 끝판왕으로, 프로 입단을 2차례나 거부하고 사회인야구계에 남아 다이쇼와제지, 야마하, 프린스 호텔 야구부를 전전하며 20년 연속 출전 기록을 세웠다. 선수외에도 감독, 응원단원, 심판[15] , 심지어는 치어리더[16] 까지 출전과 관련된 표창을 받을 자격이 주어진다.
- 수위타자상 : 타격왕. 대회에서 가장 높은 타율을 기록한 선수에게 수여된다. 수상조건은 준결승에 진출한 팀에 소속되어야 하며 4경기 이상 출전해야하고 대회 규정타석, 타수인 12타석 10타수 이상을 기록해야한다.
- 타격상 : 승패가 결정되는 상황에서 인상적인 타격을 보여준 선수에게 수여되는 상. 얼마나 극적인 순간에서 나왔느냐가 평가의 기준이므로 수치상으로 기록된 스탯이 필요한 상은 아니다.
- 우수선수상 : 포지션별로 선출(지명타자 포함). 대개 20명 안팎의 선수들이 선정된다. 선정조건은 따로 없지만 대체적으로는 준결승 이상 진출했던 팀의 소속 선수가 많이 선출된다.
7. 역대 우승팀
8. 중계 서비스
2014년부터 일본의 스포츠 전문 중계 채널인 J SPORTS에서 전 경기를 중계해주고 있다. J SPORTS의 4개 채널 가운데 J SPORTS 2와 3에서 주로 중계를 담당한다. 유료채널이기 때문에 시청하려면 결제가 필요하다.
마이니치 신문 홈페이지에서도 무료로 전 경기를 생중계해준다. 지역락도 없어서 vpn 우회 없이 한국에서도 시청이 가능하다. 다만 무료 중계인 만큼 화질은 그렇게 썩 좋다고 보긴 어렵다. 스코어보드 등 중계 UI는 J SPORTS것을 사용한다.
2020년 대회부터는 공의 회전수(rpm), 타구속도, 발사각 등의 주요 지표들을 표기하기 시작했다.
[1] 사진은 2016년 도쿄돔 도시대항 결승전에서 우승한 토요타 자동차팀[2] 이때문에 공식 가이드북이 마이니치 신문사에서 발행하는 "선데이 매일"(サンデー毎日)에 포함되어서 나오고 있다.[3] 마이니치 신문의 전신.[4] 초대 대회에서 우승한 만주 클럽이 대표적. 다만 만주 클럽의 거점도시가 1905년부터 일제의 조차지가 된 다롄시였기 때문에 전일본대회라는 조건을 충족하긴 했다.[5] 다만 한국인이 아니라 경성지역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이 팀을 꾸려 출전한 것이다. 42년 대회 이전인 1940년에도 우승을 경험했다.[6] 원래 오락가락했다. 처음에는 7월 말, 8월초였지만 2002년부터 고시엔등에 밀려 미디어 노출이 적다는 이유로 8월 말 - 9월초로 옮겼다가 2012년부터는 다시 7월말 - 8월초로 변경되었다.[7] 이 때문에 금속배트를 사용하던 시절 프로에 입단한 사회인 선수들이 나무배트 적응에 애를 먹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마츠나카 노부히코가 대표적.[8] 홍보효과, 지역특색, 통솔력과 매너, 참신함[9]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주최자 추천 자격을 포기하고 예선에 참가해 본선 진출을 확정지으면 보강선수를 데려올 수 있다. 하지만 정말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면 이런 모험을 거는 사례는 극히 드문데, 1951년 대회에서 우승을 달성하며 52년도 대회 본선 진출이 확정된 카네보 경식 야구부가 '보강선수 없이는 본선에서 이기기 어렵다'는 이유로 주최자 추천 자격을 반납하고 보강선수를 얻기 위한 모험을 강행해 본선 출전권을 따내고 보강선수를 영입하는데 성공한 사례가 거의 유일하다. 그리고 카네보는 1952년 대회까지 제패하면서 대회 3연패를 달성한다.[10] 1차 예선 종료 후 5명, 2차 예선 종료 후 5명.[11] 예외로 제 18회 대회에서는 우승팀에서 선출되었다.[12] 1루 주자로 나가있었는데, 상대 포수가 던진 견제구에 오른쪽 관자놀이를 직격당하고 그 자리에 바로 쓰러졌다. 이후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두개골 손상으로 인한 뇌출혈로 끝내 세상을 떠났다.[13] 위 문단에서 설명한 보강선수제도를 구상하였고 도입시켰다. 사후 3년뒤인 1959년에 특별 표창을 통해 일본 야구전당에 헌액되었다.[14] 2011년 제 82회 대회에서는 동일본 대지진의 피해를 딛고 대회 본선 진출을 달성한 JR 동일본 토호쿠 경식 야구부에게 '힘내자! 일본 특별상'을 수여하기도 했다.[15] 단 연속 출전 조건이 빠져있어서 본선 대회에 10번만 출전해도 상을 받는다.[16] 응원단원과는 달리 이쪽은 5년 연속 출전만 해도 상을 받는다.[17] 1966년에 후지시와 합병하면서 후지시를 거점으로 삼게되었다.[18] 技研. 기술 연구소의 줄임말[19] 1970년부터 2000년까지는 이곳을 거점으로 삼고있었다. 현재 거점인 사야마시로 이전한 것은 200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