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오 다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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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前 일본프로야구 선수이자, 주니치 드래곤즈의 2군 투수코치. 주니치 드래곤즈의 핵심 중간계투 요원이자 '''지상 최강의 중간계투''' 였다. 아울러 '''NPB 태동 후 마무리도 아닌 전문 중간계투요원으로서는 사상 첫 MVP를 차지한 인물이기도 하다.'''[1] 또한 현대야구에서 매우 보기 드문 팜볼을 구사했던 선수이기도 하다.
아사오 다쿠야의 크고 아름다운 통산성적. 왼쪽부터 연도, (소속)구단, 등판(등판 횟수), 선발(선발 등판 횟수), 완투, 완봉, 무볼넷경기, 승리, 패전, 세이브, 홀드, 승률, 타자(상대한 타자 수), 투구회(이닝), 피안타, 피본루타(피홈런), 여사구(볼넷), 경원(고의사구), 여사구(몸에 맞는 공), 탈삼진, 폭투, 보크, 실점, 자책점, 방어율(평균자책점), WHIP.
2. 선수시절
2.1. 아마야구 시절
야구를 늦게 시작했다. 더군다나 중학교 때부터 시작한 야구는 경식야구도 아닌 연식야구로서 포수로 출발해서 경식야구로 전환한 후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전문포수로서 야구를 했었는데 당시 그의 고교팀에 투수가 부족해지는 상황이 벌어지자 야수중 어깨가 가장 좋았던 아사오에게 투수로서의 임무가 떨어짐으로서 그김에 투수로 전향하게 된다. 그때문인진 모르지만 고교졸업때는 프로팀에서 아사오가 누군지도 모를 정도였고 고교시절 투수로서도 인상적인 성적을 남기진 못했다. 2012년 기준으로도 상당히 마른 체구인데 고교 시절엔 뼈밖에 없다고 할 정도였던 아사오에게 관심을 가질 구단은 없었다.
그후 대학에 입학해서 그때부터 좋은 성장세를 보인다. 대학 1학년 시절만 해도 이악물고 던져도 구속이 138km/h이상이 나오지 않을 정도였으나 2학년때 140km/h가 넘더니 4학년때 152km/h를 던지게 된다. 그러나 그가 속한 대학이 강팀이 아니었고 아사오도 특급으로 불릴 정도로 좋은 투수라고 보긴 어려웠다. 대학리그에서 노히트 노런까지 기록하지만 어디까지나 2부 ~ 3부리그에서 쌓은 경력이라 크게 평가하기는 힘들었다.
2.2. 주니치 시절
그리고 대학을 졸업한 뒤 주니치 드래곤즈에 대학생 & 사회인 드래프트 3순위로 입단하게 된다. 대학 졸업하고도 3순위[2] 지명을 받은 터라 그냥저냥 로또로 평가되어서 몆 년은 2군에서 기량을 닦아야 할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런데 데뷔 그해에 의외로 스프링캠프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별로 기대를 하지 않았던 오치아이 히로미츠 감독을 비롯한 코치들도 이 삐쩍마르고 여성스럽게 생긴 비리비리한 투수가 굉장히 힘있는 공을 던지면서 가능성을 보이자 프로 데뷔 첫 해에 중간요원으로 배치를 했고 간간히 선발로도 던지며 낮은 순위의 대학신인으로썬 제법 준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그리고 두 번째 시즌부터 그는 구속이 156km/h를 넘나들게 되고 위력적인 고속포크볼까지 장착하게 되며 핵심계투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2009년 시즌에 소포모어 징크스를 겪었는지 전년도에 1점대였던 방어율이 3점대 중반으로 치솟아서 정체를 겪기도 했다. 물론 2009시즌에 자신의 커리어에서 가장 많은 이닝(113⅓이닝)을 소화했고 선발까지 오가며 던진지라 지쳤던 탓도 있었다.
2010년부터 아사오는 선발로 던지지 않고 철저하게 마무리 투수 바로 이전에 등판하는 전문 계투요원으로 탈바꿈했고 이때부터 그는 최고의 중간투수로 발돋움한다. 2010년 ~ 2011년 중간으로만 등판하며 거의 매경기 출첵을 하다시피하며 닥치는대로 던졌고, 외모에 어울리지 않는 무시무시한 패스트볼과 고속 포크볼 & 팜볼 & 슬라이더까지 구사하면서 수많은 타자들을 돌려세워 버렸다.
2011년에도 '''79경기 87.2이닝 7승 2패 ERA 0.41 45홀드 52홀드포인트 100K WHIP 0.82 피홈런 0개'''라는 정신나간 기록으로 중간계투 최초의 MVP와 골드글러브를 수상했다[3] . 특히 45홀드라는 엄청난 기록을 썼지만 정작 이게 NPB 역대 2위에 그쳤는데 그건 바로 전시즌에 아사오 다쿠야 본인이 47홀드를 기록해서 이미 세워놨기 때문이기도 하다. 헌데 여기에는 나름대로 사정이 있어서 아사오가 이런 괴물급 홀드를 찍는 이면에는 원래 마무리 투수급 실력인데 NPB 세이브 기록을 세우고 있는 이와세 히토키 때문에 바로 앞의 계투로 나선다는 얘기도 있다.
2012년에는 부상으로 인해 많은 경기를 소화하지 못했지만 괜찮은 성적을 거두었다.
시즌 성적은 29경기 30이닝 1승 1세이브 15홀드 16홀드포인트(구원승+홀드) 29삼진 9볼넷 0사구(死球) 0피홈런, 방어율 1.50
2013년에는 연초부터 어깨부상에 시달리면서 201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대표팀 인선에서도 탈락했으며, 이후 재활을 거듭하면서 전반기를 날려먹었다. 7월 12일 복귀전을 치뤘고, 3달동안 34경기 등판 30⅔이닝 2승 3패 1세이브 22홀드 24홀드포인트 19삼진 14볼넷 1사구 2피홈런, 방어율 1.47의 성적을 거뒀다. 스탯은 잘 쌓았지만 '''BB/9 5.57''',WHIP 1.30을 기록하며 볼넷 부분에서는 커리어 로우 성적을 기록했다. 팀 주니치도 센트럴리그 3위 히로시마와 무려 5게임차로 센트럴리그 4위에 머무르며 같이 침몰했다.
2014년에는 아래 성적을 보면 알겠지만, 완전 망했다. 방어율은 6.16로 본인 시즌 최악이었고 팀도 망했다.
2015년에는 그냥저냥 넘어가다가 감독님 선수 은퇴 시합[4] 에서 사요나라 홈런을 맞았다.
2016년은 어깨 부상 탓에 프로 입단 이후 처음으로 등판 제로를 기록하고 연봉은 25%삭감.
2017년은 554일만인 4월 2일에 1군 등판. 10월 1일,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와의 경기에서 홀드를 기록하며 일본프로야구 사상 3번째, 센트럴리그 사상 2번째로 통산 200 홀드를 달성했다.
2018년은 2군에서 시즌을 시작했고 시즌 중반 1군에 올라와 9경기를 던졌으나 신통치 않은 성적을 기록했다. 그리고 9월 26일 은퇴를 발표하며 34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선수생활을 마감하게 되었다. 2009[5] ~2011시즌 동안 219경기 280이닝을 던진것이 어깨 부상으로 돌아와 몇 년간 끊임없이 괴롭혔던 것이 결국 선수생활을 단축하게 되었다.
선수생활 마지막 경기에서는 주니치의 전성기처럼 셋업맨 아사오의 뒤에 이와세 히토키가 후속해서 등판했으며, 아사오가 마운드에서 내려가자마자 모두가 울먹였다.
3. 지도자 시절
2019년부터는 주니치의 2군 코치를 맡게 되었다. 기념다큐
4. 기타
- 선수로서 인품이나 평판은 아주 좋아서 팬들의 사인요구를 단 한번도 거절하지 않았다고 하며 팀선배들에게 귀여움을 독차지할 정도였다. 워낙 동안에다 잘생기다 못해 예쁘기까지 한 얼굴 덕에 이런저런 별명이 많이 붙었는데 사람 좋은 아사오지만 귀엽다는 소리는 그래도 그다지 좋아하진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이력에서 볼 수 있듯 구속 상승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노력가이기도 하다.
- 과거완 달리 역시 나이는 속일수 없는지 서서히 이마가 넒어지고 있다.
5. 연도별 주요성적
[1] 일본프로야구의 역사를 1936년부터 잡아도 무려 70년이 넘는다.[2] 이 시기는 고졸과 대학생/사회인의 드래프트를 따로 진행하던 때라 일반적인 드래프트였다면 대충 5~6순위 정도의 기대치라 볼 수 있다.[3] 팀 동료 요시미 카즈키가 그 해 18승 3패 ERA 1.65로 다승과 승률, ERA 부문 센트럴리그 1위를 차지하고도 리그 MVP를 놓친 기이한 사례다. 대신 요시미는 베스트나인에 선정되었다.[4] '14년과 '15년에는 감독과 선수를 겸임했으나, '16년은 감독 전임 그리고 시즌 종료 후 사퇴했다.[5] 이 시즌엔 7경기를 선발로 나서기도 했다. 선발 불펜을 가리지 않고 나와 113.1이닝이나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