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트 3세

 



[image]
'''왕호'''
아우구스트 3세 (August III Sas)
'''출생'''
1696년 10월 17일
작센 선제후국 드레스덴
'''사망'''
1763년 10월 5일 (66세)
작센 선제후국 드레스덴
'''재위'''
폴란드의 왕, 리투아니아의 대공
1734년 ~ 1763년 10월 5일
'''배우자'''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요제파 (1719년 결혼 / 1757년 사망)
'''자녀'''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 마리아 아말리아, 마리아 마르가레타, 마리아 안나 소피아, 프란츠 크사버, 마리아 요제파, 카를, 마리아 크리스티나, 마리아 엘리자베트, 알베르트 카지미어, 클레멘스 벤체슬라우스, 마리아 쿠니군데
'''아버지'''
아우구스트 2세
'''어머니'''
브란덴부르크바이로이트의 크리스티아네 에베르하르디네
1. 개요
2. 일생
2.1. 초기 경력
2.2.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
2.3. 7년 전쟁
3. 자녀


1. 개요


작센 선제후 겸 폴란드 국왕이며 폴란드-리투아니아 왕국의 사실상 마지막 국왕이다.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을 통해 폴란드의 국왕이 되었고 7년 전쟁 시기엔 오스트리아와 손을 잡아 프로이센에 대항했다.

2. 일생



2.1. 초기 경력


아우구스트 3세는 1696년 10월17일 작센의 수도 드레스덴에서 태어났다. 그는 작센 선제후 겸 폴란드 국왕 아우구스트 2세가 낳은 수많은 자식들[1] 중 유일한 적자다. 그의 어머니는 브란덴부르크-바이로이트의 크리스티안 에버하딘이었다. 1712년 폴란드 국왕이 되기 위해 가톨릭으로 개종한 아버지를 따라 가톨릭으로 개종한 그는 작센 내 개신교 귀족들의 반란에 직면했으나 어렵사리 진압했다.

2.2.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


1733년 폴란드 국왕이었던 아버지가 사망하자, 아우구스트 3세는 작센 선제후 직위를 물려받은 후 자신이 폴란드 왕위에 선출되어 한다고 주장했고, 러시아 제국과 신성 로마 제국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대북방전쟁 당시 스웨덴의 지원을 받아 아우구스트 2세를 축출하고 폴란드 왕위에 올랐다가 스웨덴이 패한 뒤 프랑스로 망명갔던 스타니스와프 1세는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폴란드의 국왕으로 즉위했다. 이에 프랑스 왕국+'''폴란드 연합'''(스타니스와프 1세)과 '''작센'''(아우구스트 3세)+신성 로마 제국+러시아 제국 동맹 간의 갈등이 폭발하면서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이 벌어졌다. 2년간의 치열한 전쟁을 치른 양 세력은 1735년 10월 3일 영국과 네덜란드의 중재를 받아들여 잠정적으로 전쟁을 중단한 뒤 1738년 빈에서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스타니스와프 1세는 폴란드 왕위 주장을 포기하고 로렌을 영지로 받았고, 아우구스트 3세는 폴란드의 국왕으로 등극했다.
그러나 아우구스트 3세는 전쟁까지 치르면서 얻어낸 폴란드에 정작 관심이 없었고 사냥, 오페라, 미술품 수집에 열을 올릴 뿐 정치 자체에 손을 땠다. 그는 30년 동안의 폴란드 통치 기간 중 불과 3년 미만을 폴란드에서 보냈고 폴란드 유력 가문들간의 정쟁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이를 수습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는 폴란드 관리의 총체적인 책임을 폴란드 총독 하인리히 폰 브륄에게 위임했고 브륄이 폴란드에서 난정을 일삼는 걸 방치했다. 이 때문에 폴란드는 갈수록 쇠락해졌고 훗날 폴란드 분할을 당하는 신세로 전락한다.

2.3. 7년 전쟁


7년 전쟁이 발발한 1756년 8월 말 프로이센의 국왕 프리드리히 대왕이 작센을 침공하자, 아우구스트 3세는 9월 8일 드레스덴을 떠나 피르나에 주둔한 작센군에 합류했다. 아우구스트 3세는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오스트리아군 원수 막시밀리안 율리시즈 폰 브라운은 그에게 10월 11일까지 기다려달라고 응답했다. 그러나 브라운 원수가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이 로보지츠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에게 패배하자, 피르나에 주둔한 작센 수비대는 10월 16일에 항복했고 아우구스트 3세는 10월 20일 바르샤바로 도주했다. 10월 27일 바르샤바에 도착한 아우구스트 3세는 이후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곳에서 지냈으나 별다른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고 그저 사냥과 취미 생활에 열중하기만 했다.
전쟁이 끝난 뒤, 아우구스트 3세는 1763년 8월 2일 드레스덴으로 돌아왔으나 불과 2달 후인 10월 5일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67세. 장남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이 그의 뒤를 이어 작센 선제후가 되었으나 폴란드의 왕위는 스타니스와프 2세에게 빼앗겼다.

3.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1남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
(Frederick Christian, Elector of Saxony)
1722년 9월 5일
1763년 12월 17일
바이에른의 마리아 안토니아 여공작[2]
슬하 3남 1녀[3]
1녀
스페인의 왕비 마리아 아말리아
(Maria Amalia, Queen of Spain)
1724년 11월 24일
1760년 9월 27일
카를로스 3세
슬하 6남 2녀[4]
2녀
마리아 마르가레타 공주
(Princess Maria Margaretha)
1727년 9월 13일
1734년 2월 1일

3녀
바이에른의 선제후비 마리아 안나 소피아
(Maria Anna Sophia, Electress of Bavaria)
1728년 8월 29일
1797년 2월 17일
바이에른의 선제후 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5]
2남
프란츠 크사버 왕자
(Prince Franz Xavier)
1730년 8월 25일
1806년 6월 21일
마리아 키아라 스피누치
슬하 3남 7녀
4녀
프랑스의 왕세자비 마리아 요제파
(Maria Josepha, Dauphine of France)
1731년 11월 4일
1767년 3월 22일
프랑스의 왕세자 루이[6]
슬하 4남 3녀[7]
3남
쿠를란드 공작 카를
(Carl, Duke of Courland)
1733년 7월 13일
1796년 6월 16일
프란치스카 크라시니스카
슬하 1녀
5녀
르미르몽의 수녀원장 마리아 크리스티나
(Maria Christina, Abbess of Remiremont)
1735년 2월 15일
1782년 11월 19일

6녀
마리아 엘리자베트 공주
(Princess Maria Elisabeth)
1736년 2월 9일
1818년 12월 24일

4남
테셴 공작 알베르트 카지미어
(Albert Casimir, Duke of Teschen)
1738년 7월 11일
1822년 2월 10일
테셴 여공작 마리아 크리스티나 여대공[8]
슬하 1녀
5남
트리어 대주교 클레멘스 벤체슬라우스
(Clemens Wenceslaus, Archbishop of Trier)
1739년 9월 28일
1812년 7월 27일

7녀
에센의 수녀원장 마리아 쿠니군데
(Maria Kunigunde, Abbess of Essen)
1740년 11월 10일
1826년 4월 8일

[1] 일설에 따르면 365명에 달하는 서자들을 낳았다고 한다.[2] 카를 7세의 장녀이자 요제프 1세의 외손녀이다.[3]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 안톤 등[4] 신성 로마 제국의 황후 마리아 루이사, 카를로스 4세, 페르디난도 1세 등[5] 카를 7세의 장남이자 요제프 1세의 외손자이다.[6] 루이 15세의 장남이자 스타니스와프 1세 레슈친스키의 외손자이다.[7] 루이 16세, 루이 18세, 샤를 10세, 사르데냐의 왕비 마리아 클로틸데, 엘리자베트 공주[8] 프란츠 1세마리아 테레지아의 4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