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레이 치카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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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어: Андрей Романович Чикатило (안드레이 로마노비치 치카틸로-(발음)안드례이 라마노비치 치까찔라)'''살인만큼 황홀한 경험은 없을 거예요.'''
1. 개요
로스토프의 백정(Ростовский Потрошитель)이라고 불리는 소련의 연쇄살인자. 소련에서 연쇄살인범이 이 자밖에 없던 것은 아니지만, 안드레이 치카틸로처럼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잔인하게 죽임을 당하는 사례는 그 이전까지 없을 정도였다.
2. 어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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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안드레이 치카틸로
1936년,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가난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선천적으로 병약한 체질이었던 그는 가난한 집안 환경이 겹쳐 굶기를 밥 먹듯 했고, 그로 인해 점점 시력을 잃어갔다. 게다가 유아 시절 만성적인 야뇨증으로 인해 어머니로부터 매우 혼났다고 한다.[3] 그리고 사춘기 과정에서 자신이 발기부전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심한 고민에 빠졌고, 이에 정력제를 먹거나 나뭇잎을 갈아서 으깬 것을 성기에 바르는 등의 여러 방법을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로 끝나자 매우 절망했다고 한다. 그래서 치카틸로는 그 대안으로 독서와 공부에 열중하며 마을 안에서 수재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으나, 당대 최고 명문 대학이었던 모스크바 대학 법학부 수험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치카틸로 본인은 조국 전쟁 때 아버지가 독일군 포로로 끌려갔다는 기록 때문에 불이익을 받아서 떨어졌다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학교 성적이 부족해서였다. 치카틸로는 재수를 하지 않고 공업전문대학교에 들어갔고, 졸업하고 여러 기술직을 전전하다가 로스토프 대학에 입학, 35살이 넘어서야 러시아 문학과 철학 과목에 대한 교원 자격을 취득했다. 그리고 로스토프 주의 노보샤흐틴스크 시에서 교직 생활을 시작했다.
치카틸로의 어머니는 항상 어린 그에게, '네 큰 형은 반체제사상가로 몰려 공산당원들에게 산 채로 잡아먹혔단다.'라며 말을 하곤 했고, 이로 인해 생긴 극도의 강박관념과 형을 잡아먹은 존재에 대한 공포를 갖게 되었다.[4] 거기에 시력을 잃음으로써 생긴 콤플렉스가 더해져 정신적인 문제까지 생기게 되었다. 또한 몸이 약하고 발기부전이라는 병을 가지고 있어서 성생활이 매우 힘들었고, 이것이 '''훗날 범죄 행각에서 성폭행보다는 잔혹한 살해에 더 집중하는 원인이 되었다.''' 한편으로 어린 시절에는 왕따를 굉장히 심하게 당했는데 그의 여동생의 증언에 따르면, "오빠는 항상 혼자였습니다. 오빠는 아이들이 자신을 따돌리는 것을 무서워하여 항상 건물 구석에 숨어있는 불행한 사람"이라고 했다. 이러한 일들로 인하여, 그는 '''자신의 콤플렉스와 세상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기 시작했다.'''
3. 교원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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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원 시절의 치카틸로
그렇게 힘든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1963년, 여동생의 친구와 결혼하였다. 여기에는 치카틸로가 술을 즐기지 않는다는 사실이 큰 이유 중 하나였다.[5] 한편 치카틸로는 발기부전을 숨기고자 자신의 아내에게 결혼 전 순결을 지켜주고 싶다는 변명으로 성관계를 피했지만, 그래도 불임은 아닌지라 아이는 가질 수 있었다. 그렇게 슬하에 아들인 유리와 딸인 류드밀라 두 아이를 두었지만, 허약한 체질로 인해 생긴 성기능 장애 때문에 가정생활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눈도 거의 실명상태가 된지라, 제대로 된 직업을 구하는 것도 어려웠다. 군 제대 후 대학에서 교원 자격증을 딴 그는 광산 지역에서 어린이들을 가르쳤지만 생활은 녹록치 않았다. 당시 학생들은 가난한 형편 때문에 제대로 먹지 못해 마른 몸이었던 치카틸로를 '거위'라고 부르며 비하했다. 그러다가 수영장에서 어린이들과 수영을 같이 하다가 여성 어린이를 성폭행하고 싶다는 욕망이 느껴져 여성 어린이를 성폭행하려고 했으나, 여성 어린이가 격렬히 반항하기도 하고 게다가 발기부전으로 인하여 실패하였다. 그리고 여자아이가 수치심으로 인해 이야기하지 않아서 결국 그냥 유야무야 넘어가 버렸다. 그러다가 학생 중 일부가 우연히 그의 집안에 불순분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는 이 사실을 학교에 고발, 결국 교단을 떠나야 했다. 이후에 몇몇 공장에서 일도 하다가, 80년대 와서는 지방의 작은 기숙사 학교 사감으로 일하게 된다.
4. 살인 행각
그에게 숨겨진 본능이 앞의 여자아이의 강간 시도를 통해 서서히 눈을 뜨게 되고, 결국 42세가 되던 1978년 무렵부터, 그는 잔혹한 살인마 '''로스토프의 백정'''의 삶을 살기 시작한다. 9살 소녀 옐레나 자코트노바를 먹을 것을 준다며 꾀어내 오두막집에 데려와 강간하려고 했으나, 옐레나가 격렬히 저항하여 강간은 하지 못하고, 잔혹하게 목을 졸라 살해한 후 시체에 자위행위를 했다. 그러면서 밤마다 거리를 지나는 소녀와 여자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준다는 등의 유혹으로 그들을 꼬여냈다. 아이들만 죽인 것이 아니라 성인 여성들을 끔찍하게 유린한 후 성폭행을 하기도 하면서 살해했다. 치카틸로의 피해자들의 연령은 다양했다. 21살의 여성을 비롯하여, 헝가리에서 온 여자 유학생 및 16살~17살 정도의 청소년 남녀도 피해자들 중에 포함되었다. '''젊은 시절의 교사 생활을 통해, 그는 아이들과 성인 여자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움직이는지를 매우 잘 알았고 이를 잘 이용했다.'''
충격적인 것은 '''치카틸로가 인육을 먹었다는 사실'''인데, 희생자들의 신체 일부를 절단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심지어 희생자들은 아직 살아있는 상태에서 자신의 신체가 잘리는 모습을 보기도 했으며, 다른 사람이 먼저 죽어 '''치카틸로가 그 사람의 인육을 잘라내는 것을 목격하며 공포를 느끼던 때도 있었다'''고 한다. 이때 그는 '''희생자가 공포심에 떠는 모습을 즐겼다고 한다.''' 남자는 성기를 잘라내고 여자는 내장을 무자비하게 파헤친 뒤 자궁을 꺼내가거나, 유방이나 눈알, 엉덩이 살 등 여러 신체부위를 잘랐는데, 이 때문에 시체는 거의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게 파헤쳐져 있었다고 한다. 수사관들이 검식을 하려고 왔을 때 너무도 잔인하고 무참히 시체가 훼손되어 있어서, 이건 짐승이 사람을 잡아먹고 시체를 찢어놓은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였으며[6] 러시아의 베테랑 강력반 형사들이나 검식관들도, '''이런 잔인한 범죄는 처음 본다'''면서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러고는 태연하게 희생자들의 인육을 집에 가져가서 '''인육을 소고기라고 속인 뒤 가족과 함께 먹곤 했다.'''
그러나 피해자들도 모두 무력하게 그냥 당한 것만은 아니었다. 당시 피해자 중 한 명이었던 15세 소년은 온 힘을 다해 차카틸로를 물고 뜯으면서 저항해 치카틸로의 손톱과 주변 살점까지 깊게 뽑히고 뜯기게 했으며 다른 피해자들이 치카틸로에게 저항하면서 그를 물어뜯어 생긴 치흔(齒很), 묶인 상태에서도 온 힘을 다해 박치기를 하여 그의 콧등이 부러졌다든지, 하이힐로 그의 손등을 찍었다든지 등 온갖 저항을 하여, 치카틸로의 몸 여기저기에는 상처가 꽤 많았다. 이는 후일 치카틸로가 용의자로 체포되었을 때, 그가 진범임을 의심케 하는 결정적 단서가 되기도 했다. 당시 수사관 이사 코스토예프는, 치카틸로의 온 몸 곳곳에 난 상처를 보고, 이 많은 상처들은 어디서 어떻게 생긴 거냐며 끈질기게 심문했다. 처음에는 넘어졌다느니 등으로 치카틸로는 거짓 해명했지만, 상처 여러 부분은 틀림없이 사람이 물어뜯은 흔적이 깊게 남았기에 이것도 증거가 되어버렸다. 그야말로 피해자들이 마지막으로 저항한 게 수사에 큰 도움이 된 셈. 후술하겠지만, 이 사건 관련 서적인 《악마사냥》에서도 이 상처 몇몇이 사진으로 나왔는데, 그야말로 피해자들이 죽기 살기로 저항했음을 보여준다. 물어뜯긴 상처를 보면, 손톱이 뽑히고 손톱 옆 살점들이 깊숙하게 뜯겨나간 깊은 상처임을 알 수 있다. 다친 지 꽤나 지나서 체포되었을 때도 흔적이 크게 남아있을 정도의 부상이었으니, 수사관들도 요모조모 캐물으며 파고든 것. 개에게 물려 다쳤다는 식으로 변명했으나, 사람이 물어뜯은 자국이라는 게 드러나자 결국 자백하게 하는 데에 일조했다.
당시 아침마다 살덩이가 잘려나간 시신들이 발견되자, 당시 언론과 시민단체들은 이 얼굴 없는 살인자를 '시민 X(Citizen X)'라고 부르며 두려워했다. 그때까지 그에게 살해당한 이는 무려 53명 이상이었지만, 치카틸로가 체포되기 전까지 그 정체는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었다.[7]
치카틸로가 이토록 오랫동안 잡히지 않고 활개치고 다닐 수 있었던 이유들 중 하나는, 그의 지능적인 범행 수법을 들 수 있다. 희생자들 중에는 어린 남자아이도 있었고, 나이가 좀 든 소년도 있었기에 용의자를 좁히기가 힘들어 수사가 혼선에 빠지기도 했다. 거기다 정말 신기하게도, 그는 '''정액에서 검출되는 혈액형과 몸의 혈액형이 일치하지 않는, 100만 명에 한 명꼴로 나오는 특이체질'''을 지닌 인간이었다. 하필이면 이런 사람이 살인마가 되었기 때문에, 아무리 시체가 발견된 곳 주변 마을의 주민들을 모두 조사해보고, 교통기관 등으로 이동할 수 있는 범위에 사는 용의자들까지 다 조사해보아도, 피해자의 몸에 남은 정액의 혈액형과 일치하는 혈액형의 소유자를 찾을 수 없었던 것. 수사관들조차 악마가 살인을 저지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흔히 치카틸로를 잡지 못한 이유가 '''러시아 경찰의 삽질이거나 묻으려고만 했던 태도 때문에 잡지 못했다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러시아 경찰도 이 끔찍한 살인귀를 잡으려고 무지하게 애썼다.[8] 하지만 '''누가 정액의 혈액형과 실제 혈액형이 다르다는 생각을 하겠는가 말이다.'''[9] 실제 수사관들이 물증을 확보하거나 하여 치카틸로가 주요 용의자로 검거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증거를 대조해보고, “'''피해자의 몸에서 나온 정액의 혈액형과 다르잖나. 저 사람은 범인이 아니다'''”가 되어 치카틸로는 방면되었고, 검거된 적이 있지만 무혐의로 풀려난 치카틸로를 다시 의심하여 체포하기란 쉽지 않았던 것이다.
5. 체포
그러나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연쇄살인범을 끈질기게 쫓던 인구셰티야 출신의 수사관 이사 코스토예프[10] 와 수사반에 의하여 마침내 검거된다. 살인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현장을 배회하던 것이 결국 치카틸로의 덜미를 잡은 것이었다. 코스토예프는 그가 계속 살해 현장 근처에 있었으며, 그가 잡히기 6년 전에도 살인현장에서 같은 가방을 메고, 똑같은 물건과 노끈, 얼음송곳 등을 가지고 있었던 사실을 기억해내어 그를 체포하려고 했다.
1990년 11월 20일, 치카틸로를 용의자로 지목하고 체포할 기회를 노리던 코스토예프와 수사반은 그가 카페에 있는 것을 확인하고, 그를 체포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들어갔다.
다음은 당시의 대화내용.
그러자 그는 저항 없이 순순히 붙잡혔는데, 그가 체포되었을 때 보인 태도는 수사관들을 상당히 의아하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범행현장의 잔혹성으로 보아, 범인은 광기에 가득 차 있고 대단히 폭력적이며 잔인한 인물일 것이라 생각해서, 건장한 형사들을 대거 대동하고 출동했는데, 정작 체포된 범인은 한때 교사였을 뿐 아니라 무척이나 침착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혐의를 완강히 부인하던 그였지만, 거듭되는 심문에 결국 범행 일체를 자백했고, 자신을 잡아주어서, 그리고 이 살인을 끝내준 당신에게 감사하다고 하였다.[11] 그의 자백 내용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그는 '''약 50명이 넘는 사람들을 살해했고, 인육을 먹거나 온갖 성적이고 잔인한 행위들을 했다는 것'''을 자백해 수사관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범행 현장들을 기억해서 그곳들에서 범행을 재현했으며, 어떻게 하면 피를 묻히지 않고 사람을 죽일 수 있는가를 설명하고, 어떻게 범행을 들키지 않았는지를 알려주었고, 소름 끼칠 정도로 날짜와 시간, 살해 방법 등을 세세하고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으며, '''살인하던 순간이 떠오르는 듯이 즐겁게 웃으며 범행 재현에 임했다.''' 그러다보니 수사관들도 경악을 할 정도였다.수사관: 당신이 안드레이 치카틸로입니까?
치카틸로: 네, 맞습니다.
수사관: 당신을 살인 용의자로 체포합니다.
그리고 11월 21일, 치카틸로의 혈액을 검사한 결과 혈액형은 AB형이었다. 그러나 치카틸로의 정액 샘플을 얻어 대조한 결과, 치카틸로의 정액은 A형이었다. 이로써 그가 계속 수사망에 걸리지 않고 빠져나갈 수 있었던 이유가 밝혀졌다. 그 자신이 꽤나 지능적인 것도 있었지만, 악마가 선사한 듯한 그의 특이한 신체가 그의 끔찍한 범죄를 계속 이어갈 수 있게 해준 셈이었다.
여담으로, 한 번 있었던 아내와의 짧은 면회에서 다음과 같은 말과 함께 가족에게 사죄했다고 한다.
"당신 말대로 병원에서 성 불능 치료를 받았어야 했어.“
6. 피해자들
대부분 여성과 아이들인 피해자의 수는 지금도 확실하게 나와 있지 않다. 법원과 경찰은 치카틸로가 53명 정도를 죽였다고 추정하고 있으나, 치카틸로 본인은 자신이 적어도 56명 정도의 사람을 죽였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건, '''이 미치광이에게 공격을 받거나 죽을 고비를 넘긴 사람들의 숫자는 약 100여 명에 달할 것'''이란 사실이다. 심지어 체포되기 직전에도 아이를 꾀어내 살해하려고 까지 했으니 말이다.
만일 미국이었다면 사법거래를 통해 치카틸로의 범행을 입증할 수도 있었겠지만, 당시 소련은 그런 제도가 없었다.
7.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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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례적으로 치카틸로의 공판 과정이 언론에 생중계되었다. 이는 '''러시아에서는 굉장히 드문 일이다.''' 그는 철제 우리에 갇혀서 재판 과정을 지켜봤는데, 희생자의 친척이나 친구들, 그의 범죄에 분노한 사람들에게 공격을 받아 재판 진행에 방해가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취해진 조치였다. 치카틸로가 재판장에 모습을 드러내자 희생자의 가족들은 모두 원성과 분통을 터트리며, 치카틸로에게 "'''이 악마야,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재판장님, 우리들에게 치카틸로를 넘겨주십시오. 우리들도 그가 했던 것처럼 똑같이 그를 죽이고 싶으니까요'''" 라고 외쳤다. 2차 공판이 끝나고, 어떤 방청객은 판사가 재판장을 떠나자마자 방청석에서 뛰쳐나와 치카틸로에게 짧은 쇠막대기를 던졌다. 치카틸로의 머리를 맞히지는 못했지만, 그의 머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그 쇠막대가 날아가 떨어졌다. 그는 희생자들 중 한명의 오빠였으며 그는 경찰들에게 잡혀 끌려갔지만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 정상참작되어 나중에 풀려났다.
치카틸로는 법정에서 굉장히 이상한 행동을 했는데, 위의 영상처럼 갑자기 숨을 거칠게 몰아쉬거나 두 눈을 마구 굴리는가 하면서 피식피식 웃기도 했다.[13] 그의 정신감정을 맡은 알렉산드르 부카노프스키 박사도 방청객으로서 치카틸로의 행동을 관찰했으며, 그를 포함한 심리학자들은 치카틸로가 '''사형을 피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미친 행동을 한 것'''이었다. 실제로 정신병자였다면 아이들이 그를 따라가 살해당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그가 그토록 다른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들키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설명되지 않는다. 물론 부카노프스키 박사를 비롯한 심리학자들은 치카틸로가 '''정신상태가 지극히 정상인 살인마'''라고 단언했다.'''치카틸로의 이상행동. 혐오스러울 수 있으니 주의.'''[12]
재판이 진행 중일 때에도 치카틸로는 유족들을 비웃으면서 끊임없이 재판을 방해했는데, 갑자기 러시아 정교회의 성가를 불러대거나 갑자기 큰 소리를 내면서 웃거나 피해자들을 모욕하고 조롱하기도 했으며, "나는 소련 압제의 희생자"라고 외치기도 했고 급기야는 옷을 홀딱 벗어버린 채 자신의 성기를 흔들면서,'''이 쓸모없는 것을 보시오. 이것으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이오'''"라고 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언행으로 그는 끌려 나갔다가 판결을 듣기 위해 다시 들어왔다. 소련이 붕괴된 뒤에는 러시아로 처벌 권한이 넘어가 재판이 계속되었다. 검사측이 나열하는 그의 범행행각에 법원 경비원들도 심한 충격을 받아서 어떤 사람은 동료의 부축을 받으면서 의자에 주저앉을 정도였다.
그리고 1992년 10월, 공개재판에서 사형 선고가 내려졌다. 레오니드 아쿠브자고프 판사는 다음과 같은 말을 끝으로 판결을 마무리했다.
1994년 2월 14일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재판 당시 어떻게든 살아볼 생각으로 정신이상자 행세를 하였다(50여명을 넘긴 피해자를 발생시킨 범죄자에게는 정신이상자라도 웬만한 사고가 가능하기 때문에 무죄는 불가능하다). 보리스 옐친 당시 러시아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했지만, 그런 시도도 소용없이 결국 처형되었다. 이때 사람들이 환호했으며, 치카틸로만이 거짓말이라고 판사에게 격렬히 항의하였다. 관련서적인 《악마사냥》에서의 묘사나 당시 방송의 내용들을 보면, 당시 치카틸로는 항의 정도가 아니라 "난 애국자란 말이야! 왜 나를 그렇게 죽이려 드는 거지?" 라고 적반하장 격으로 판사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발광했으나, 판사는 그럴줄 알았다는 식으로 무표정하게 무시했다고 한다. 하지만 대다수의 유족들은 환호보다는 우리 아이들을 죽인 것처럼 잔인하게 죽여 달라고 요구했다. 재판 당시 아들을 치카틸로에게 잃은 한 어머니는 이성을 잃고 덤벼들었다가 제지당하자, 저 악마를 내 아들이 당한 것처럼 죽여달라고 대성통곡했다."'''그가 저질렀던 끔찍한 살인을 고려하였을 때 본 재판부는 단 한 가지 판결만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재판부는 치카틸로에게 사형을 선고합니다.'''"
결국 치카틸로는 총살형에 처해졌는데, 기록에 의하면 처형당하기 전에 죽고 싶지 않다며 울면서 살려달라고 발광했다. 이에 교도관이 "'''그럴 놈이 사람은 왜 죽이고 법정에서 좋아라 웃어? 그냥 편하게 죽여주는 것에 고마워해라'''"라고 하자 그가 발버둥쳤기에, 교도관에게 얻어맞고 사형장으로 끌려가 총살이 집행되었다고 한다. 시체는 본인이 수감됐던 교도소의 죽은 재소자 묘지에 안장되어 있는 중이다. 이때 치카틸로에게 11살 난 아들을 잃은 한 내외는, 그를 너무 편하게 죽인다며 "내 아들과 많은 피해자처럼 산 채로 찢어 죽여야 했어!"라고 형이 집행된 뒤 불만스럽게 이야기했다.[14]
8. 여담
1995년 개봉한 ‘시티즌 X’라는 영화가 이를 배경으로 한다.
안드레이 치카틸로와 그가 일으킨 연쇄살인사건을 소재로 한 《Child 44》라는 소설이 있는데, 실제 사건과는 다르게 시대를 스탈린 시대 말기의 소련으로 설정하여 시대적 차이가 있다. 이 소설은 2015년 5월에 톰 하디, 게리 올드먼 주연의 《차일드 44》라는 영화로 개봉되었다.
2015년 개봉한 《구울》이라는 영화에서는, 안드레이 치카틸로가 죽은 후 여러 사람들에게 빙의하고 초능력을 부려서 주인공들이 서로를 의심하고 죽게 만들고, 인육을 강제로 먹이려는 악귀가 되어서 나온다. 그리고 이 악귀를 추종하며 일반인으로 위장하고 인육을 먹으며 사는 식인마도 나온다. 영화 자체는 그냥 싸구려 B급 영화라는 평.
미국 작가 리처드 루리가 이 사건을 상세하게 기록한 책을 쓰기도 했는데, 1994년에 한국에서 《악마사냥》이란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치카틸로의 사진과 피해자들 사진, 수사반장 코스토예프, 그리고 이전의 연쇄살인범 스토로젠코의 사진 및 기록도 사진과 사건 현장 사진, 수사기록, 치카틸로의 어린 시절 및 일생이 상세하게 나와 있다.
이 사건은 러시아와 전 세계를 뒤흔들었으며, 그의 악행이 알려지면서 그의 추종자들 또한 생겨났는데, 이들은 치카틸로를 옹호하고 추종하기도 하였다. '''이 추종자들 중 유명한 사람들이 러시아 체스판 연쇄살인사건을 일으켰던 알렉산드르 피추시킨과 할머니 살인마 타마라 삼소노바다.'''
원래 러시아에서 가장 많은 살인혐의를 유죄 판결 받았던 살인마였지만 2018년 12월 미하일 포프코프(Mikhail Popkov)가 56건의 살인혐의를 추가로 유죄판결 받아 총 78건의 살인혐의로 안드레이 치카틸로의 기록인 52건을 넘어섰다.
[1] imdb[2] # AB형 정액 혈액형 A형[3] 야뇨증이 잘 고쳐지지 않아서 어머니로부터 종종 맞기도 했는데, 어쩌면 오두막집에서 살았고 침상을 하나만 사용했기 때문에, 이러한 야뇨증이 어머니의 신경을 더욱 거슬리게 했을 가능성도 높다.[4] 이에 대해서는 다른 주장도 있는데, 치카틸로의 큰 형인 스테판은 11살 나이로 우크라이나 대기근 때 납치되어 사람들에게 잡아먹혔다는 주장도 있다.[5] 그 당시에도 소련에서는 남성의 알코올 중독이 큰 문제였다.[6] 이런 착각을 한 이유는, 치카틸로는 희생자들의 신체나 성기까지도 '''이로 깨물어 뜯어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7] 게다가 소련 정부에서는, '''연쇄살인범이라는 것은 자본주의의 부패로 생기는 부산물'''이라는 태도를 보이며 사건을 은폐하려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80년대 소련에선 여러 명의 연쇄살인범이 체포되었다.[8] 참고로 치카틸로를 잡고자 10여년에 걸쳐 수사를 진행하던 소련 수사관들이 다른 몇몇 연쇄살인범을 잡기도 했다. 악마사냥 책자에서도 엉겁결에 잡혀들어온 다른 살인마를 탐문하던 게 나온다.[9] 다만 현재처럼 DNA로 수사하면 이와 같은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10] Исса Магометович Костоев (1942 ~ 생존), 당시 러시아 연방 검찰 수사부 부장이었으며, 후일 러시아 연방 검찰총장, 인구셰티야 지역의 상원의원으로도 재직했다.[11] 물론 이 말은 그냥 빈말로 했을 가능성이 높다.[12] 배경음악은 다리오 아르젠토가 감독하고 고블린이 음악을 맡은 1975년 영화 《프로폰도로쏘》(영어제목은 《딥 레드》. 일본 개봉제목인 《서스페리아 2》로 국내 개봉했다) 음악들 중 하나. 이 음악이 나올 때 사람을 죽이는 장면이 나오기에 꽤 서늘하면서도 어찌 보면 적절한 배경음악이다.[13] 바로 본 문서의 맨 윗 사진.[14] 출처는 《식인문화의 수수께끼》 및 《악마사냥》. 식인문화의 수수께끼는 유태계 독일 교수인 한스 아스케나쉬가 쓴 책으로 한국에서도 정식 출판되었다. 지은이도 2차대전 와중에 유태인이니 숨어살면서 그야말로 먹을 수 있는 것, 아니 보통은 먹지도 못할 날벌레같은 것까지 씹어먹으며 견디던 어린 시절을 겪었기에 그거라도 없었더라면 정말이지 시체라도 뜯어먹었을지도 모른다고 회고하며 식인에 대하여 흥미를 가지고 연구를 많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