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트 괴링

 

[image]

1. 개요
2. 생애
2.1. 2차 세계 대전 당시의 업적
3. 전후 생활
4. 관련 문서


1. 개요


독일의 사업가이자 기술자이다. 나치 독일의 2인자 헤르만 괴링의 동생이었다. 형과 동생의 체형이 다른 건 형 헤르만이 중간에 약물중독에 빠져살았기 때문이다. 형이 약물로 인해 뚱땡이가 되고 동생은 탈모로 대머리이긴 하지만 실제로 두 형제 모두 미남형의 얼굴이다. 실제로 헤르만의 청년기 때에 찍힌 사진을 보면 중년 때의 그 사람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진중한 신사의 느낌이 날 정도다.

2. 생애


알베르트 괴링은 베를린 교외에 1895년 3월 9일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나미비아 총영사관에 근무했던 에른스트 하인리히 괴링으로, 에른스트 괴링은 나미비아에서 벌어진 헤레로족 학살의 주범이었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나미비아에는 '괴링로(路)'라는 길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총, 균, 쇠>에서 서술된 에피소드인데 저자는 이걸 보고 그야말로 기겁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알베르트 괴링의 임신 기간에 에른스트 괴링은 나미비아에 있었기 때문에 알베르트 괴링의 친부는 헤르만 괴링의 대부이자 어머니의 애인이었던 에펜슈타인 백작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그렇다면 에펜슈타인 백작이 유대계였으니 알베르트 괴링은 자기의 동족을 구한 게 된다.
즉 헤르만과 알베르트는 이부형제인 셈. 당시 유럽 상층부에서는 이런 건 허다한 일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헤르만과 알베르트 사이의 사이는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고. 심지어 헤르만은 알베르트의 반나치 지하운동을 알고 있음에도 묵인할 정도였으며, 알베르트도 형이 자신을 눈감아 준다는 걸 알고 있었으며 오히려 여차하면 도움을 청했는데 헤르만은 또 이걸 도왔고, 알베르트는 전후 이것을 증좌로 형을 구하려 했다[1]. 한마디로 우애 자체는 진짜였던 셈.

2.1. 2차 세계 대전 당시의 업적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공군의 에이스로 독일 최고훈장을 수훈받고 정치에 관심을 가져 히틀러나치 정권을 위해 노력한 형 헤르만과 달리 동생이었던 알베르트는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영화계에 생업을 두어 상대적으로 평범한 인생을 보낸다. 하지만 나치가 집권하면서 알베르트는 나치의 반유대정책과 폭력성을 경멸하고 혐오하게 된다.
이런 알베르트의 나치에 대한 태도는 다음과 같은 일화에서 잘 나타나는데, 1962년 오스트리아 시나리오 작가 에른스트 노히바흐가 한 주간지에 기고한 글에 따르면 나치 독일 당시 의 한 상점에서 그의 노모가 수모를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독일군 병사가 75세가 된 그의 노모에게 '더러운 유대인'이라는 팻말을 건 채로 상점의 진열대에 앉아 있게 한 것이다. 그때 '''알베르트가 괴링의 성이 기입된 그의 신분증을 보여주어 그의 노모를 구해준다.'''
다른 이야기는 그가 일했던 회사의 전 사장이었던 유대인 오스카 필처가 체포되기 전에 빼돌렸고 반나치 인사들의 탈출을 위해 형의 사인을 위조하여 통행증을 만들었고 발각되어 체포되었을 때는 형의 배경을 이용하여 풀려났다.
이렇듯 나치의 유대정책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곧 독일을 떠나 오스트리아로 향한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반나치·반히틀러를 주장하기 시작했지만 1938년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으로 위기에 빠진다. 하지만 그는 무사했는데 위에 상술했다시피 형이 다름아닌 나치의 제2인자였던 만큼 게슈타포도 그에게는 손을 쓰지 못했다.
이후 체코슬로바키아스코다 사에서 수출감독을 맡게 되었는데 여기서도 그는 유대인 노동자의 사보타주를 독려하는가 하면 체코의 레지스탕스와 몰래 접촉하여 그들을 지원하였다.[2]
거기에 한술 더 떠서 수용소에서 유대인과 소련군 포로들을 데려와서는 중립국스위스모나코에 풀어주기까지 하였다.

3. 전후 생활


전후 알베르트는 연합국과 체코 정부에 의해 두번의 재판을 받게 되지만 그가 구해주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증언으로 그는 무사히 풀려났다. 형이 자살하기 직전에 한번 면회를 올 수 있었는데 가족들을 잘 부탁한다는[3] 말을 듣게 된다. 당시에 크게 슬퍼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성씨인 괴링은 전후 혐오의 대상으로 변모했고 그는 이 때문에 어려운 삶을 살게 된다. 독일 정부가 지급하는 연금으로 생활을 하던 그는 작가 또는 번역가로 일을 하였다.
알베르트는 죽기 전에 결혼을 한 경우, 자신이 사망하게 되면 자신의 연금이 아내에게 전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의 밑에서 일하는 가정부가 있었는데 자신의 사후에 자신의 연금을 받을 수 있도록 그 동안의 감사의 표시로 1966년에 알베르트는 그의 가정부와 결혼했다. 일주일 후, 그는 자신의 전시 활동을 공개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4. 관련 문서


  • 헤르만 괴링
  • 못된 형과 착한 아우
  • 하인츠 하이드리히[4][5]

[1] 하지만 헤르만 괴링의 범죄전력이 너무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결국 헤르만은 사형된다.[2] 헤르만 괴링도 이러한 사실을 측근들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모른척 넘어가 주었다.[3] 여자를 갈아치우다시피했던 괴벨스와는 달리 헤르만은 가족들에게 충실했었다. 다만 괴벨스는 제국의 다산 정책에 충실해 애는 많이 낳았고 나중에 가서는 부인과 관계도 그리 나쁘진 않았다. 그리고 부인 마그다 괴벨스가 열렬한 나치, 총통 추종자로 히틀러에게 호감을 사고 있었고(이는 괴벨스의 위치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허튼 짓 했다가는 바로 히틀러의 신경질적인 불호령이 떨어지므로 여자를 갈아치우고 어쩌고 할 처지가 아니었다.[4] 아이러니하게도 이양반도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남동생이었다. 게다가 이 사람은 진짜 슈츠슈타펠이다. 예전에 알베르트 괴링이 무장친위대라고 했던 사람이 있었는데, 이분과 헷갈린 것 같다.[5] 이 분은 군인용 신문이었던 Die Panzerfaust의 편집장이었는데, 그렇게 우애가 깊었던 형이 홀로코스트의 책임자였다는 걸 알게 된 뒤 의사소통이 불가능할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그 후에 그는 신문을 이용해서 유대인들의 신분을 위조하여 그들의 탈출을 도왔는데, 1944년 11월 신문에 대한 조사가 이뤄지자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자살해 버렸다. 안타까운 점은, 신문을 조사한 이유는 하인츠의 행각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그저 종이의 부족과 관련된 것이었다는 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