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른스트 빌리모프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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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스트라이커
본명은 에른스트 오토 프란델라(Ernst Otto Prandella)이며, 독일 제국 슐레지엔의 카토비츠(현 폴란드 카토비체)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 모두가 독일인인데, 그의 부친은 독일군으로 제 1차 세계대전에 참전, 서부전선에서 전사하였다. 그의 고향인 카토비체가 1922년에 폴란드 제2공화국의 영토가 됨에 따라 빌리모프스키 또한 폴란드 국민이 되었다. 모친은 그를 독일인 학교에 보냈으며, 그는 아홉 살에 독일인 클럽인 1. FC 카토비체 유소년팀에 입단했다. 프란델라가 13살 때 그의 어머니가 폴란드인과 재혼하여 그 때부터 새아버지의 성인 빌리모프스키를 쓰게 되었다. 그는 집에서는 독일어를 썼으나, 밖에서는 대체로 폴란드어의 실롱스크(슐레지엔) 방언을 사용했다. 공식적으로는 폴란드 국민이었던 그는 본인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상부 실롱스크 사람"(Górnoślązak)이라고 대답했다.
카토비체가 폴란드 영토였던 터라 그는 폴란드 대표팀에 선발되었고 그의 첫 국가대표 데뷔는 1934년 5월 23일에 있었던 스웨덴과의 원정경기였다. 비록 여기에서 한 골을 넣기는 했지만 팀은 2:4로 패배하고 말았다. 그가 출전한 가장 유명한 경기는 1938 프랑스 월드컵의 브라질과의 경기로, 여기에서 그는 연장 120분을 모두 뛰면서 4골을 뽑아내었지만 팀이 5:6으로 패배하는 아픔을 겪었다.[5]
한 경기당 4득점이라는 기록은 56년 뒤인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러시아의 올레그 살렌코가 카메룬과의 경기에서 5골을 넣기 전까지는 깨지지 않은 기록이었다.[6]
1939년 8월 27일에 홈인 바르샤바에서 열린 헝가리와의 친선경기에서 0-2로 끌려가던 도중, 그의 해트트릭에 힘입어 경기를 4-2로 역전시킬 수 있었다. 이 시합 나흘 뒤에 독일군이 폴란드를 침공, 제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이것이 그의 폴란드 대표로서의 마지막 경기였다.[7]
나치가 폴란드를 점령하자 독일계였던 빌리모프스키는 독일 시민권을 다시 취득하였다. 1941년 6월 1일 루마니아와의 경기에서 처음 독일 대표로 나갔으며, 이듬해 11월의 크로아티아와의 경기까지 8경기에 출장하여 13골을 기록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폴란드 공산정권에 의해 독일 부역자로 몰리게 된 빌리모프스키는 고향을 등지고 서독 카를스루에로 이주하여 레스토랑을 경영하는 한편, 여러 클럽팀을 전전하며 43세까지 선수 생활을 한다. 1995년에 고향을 방문하기도 했지만 1997년 카를스루에에서 사망했다.
엑스트라클라사[8] 우승 3회: 1934, 1935, 1936, 1938(이상 루크 코르조프)
가우리가 바이에른 남부 지구 우승 1회: 1943(이상 1860 뮌헨)
아마투에르리가 슈드바덴 우승 1회: 1952(이상 오펜부르거르)
엑스트라클라사 득점왕 3회: 1934, 1936[9] , 1938(이상 루크 코르조프)
비운의 스트라이커
1. 유소년기
본명은 에른스트 오토 프란델라(Ernst Otto Prandella)이며, 독일 제국 슐레지엔의 카토비츠(현 폴란드 카토비체)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 모두가 독일인인데, 그의 부친은 독일군으로 제 1차 세계대전에 참전, 서부전선에서 전사하였다. 그의 고향인 카토비체가 1922년에 폴란드 제2공화국의 영토가 됨에 따라 빌리모프스키 또한 폴란드 국민이 되었다. 모친은 그를 독일인 학교에 보냈으며, 그는 아홉 살에 독일인 클럽인 1. FC 카토비체 유소년팀에 입단했다. 프란델라가 13살 때 그의 어머니가 폴란드인과 재혼하여 그 때부터 새아버지의 성인 빌리모프스키를 쓰게 되었다. 그는 집에서는 독일어를 썼으나, 밖에서는 대체로 폴란드어의 실롱스크(슐레지엔) 방언을 사용했다. 공식적으로는 폴란드 국민이었던 그는 본인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상부 실롱스크 사람"(Górnoślązak)이라고 대답했다.
2. 폴란드 대표
카토비체가 폴란드 영토였던 터라 그는 폴란드 대표팀에 선발되었고 그의 첫 국가대표 데뷔는 1934년 5월 23일에 있었던 스웨덴과의 원정경기였다. 비록 여기에서 한 골을 넣기는 했지만 팀은 2:4로 패배하고 말았다. 그가 출전한 가장 유명한 경기는 1938 프랑스 월드컵의 브라질과의 경기로, 여기에서 그는 연장 120분을 모두 뛰면서 4골을 뽑아내었지만 팀이 5:6으로 패배하는 아픔을 겪었다.[5]
한 경기당 4득점이라는 기록은 56년 뒤인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러시아의 올레그 살렌코가 카메룬과의 경기에서 5골을 넣기 전까지는 깨지지 않은 기록이었다.[6]
1939년 8월 27일에 홈인 바르샤바에서 열린 헝가리와의 친선경기에서 0-2로 끌려가던 도중, 그의 해트트릭에 힘입어 경기를 4-2로 역전시킬 수 있었다. 이 시합 나흘 뒤에 독일군이 폴란드를 침공, 제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이것이 그의 폴란드 대표로서의 마지막 경기였다.[7]
3. 나치 독일 대표
나치가 폴란드를 점령하자 독일계였던 빌리모프스키는 독일 시민권을 다시 취득하였다. 1941년 6월 1일 루마니아와의 경기에서 처음 독일 대표로 나갔으며, 이듬해 11월의 크로아티아와의 경기까지 8경기에 출장하여 13골을 기록했다.
4. 세계대전 이후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폴란드 공산정권에 의해 독일 부역자로 몰리게 된 빌리모프스키는 고향을 등지고 서독 카를스루에로 이주하여 레스토랑을 경영하는 한편, 여러 클럽팀을 전전하며 43세까지 선수 생활을 한다. 1995년에 고향을 방문하기도 했지만 1997년 카를스루에에서 사망했다.
5. 이야기거리
6. 수상
6.1. 클럽
엑스트라클라사[8] 우승 3회: 1934, 1935, 1936, 1938(이상 루크 코르조프)
가우리가 바이에른 남부 지구 우승 1회: 1943(이상 1860 뮌헨)
아마투에르리가 슈드바덴 우승 1회: 1952(이상 오펜부르거르)
6.2. 개인
엑스트라클라사 득점왕 3회: 1934, 1936[9] , 1938(이상 루크 코르조프)
[1] 선수의 표기법이 참 다양하다. FIFA 공식 월드컵의 기록을 보면 이렇게 표기가 되고 독일식인 Ernst라는 이름도 많이 사용된다. 추가로 성인 Wilimowski가 Willimowski. 즉, l이 2글자로 쓰이는 경우도 있다. 폴란드 위키를 보면 이렇게 표기되니 본명은 이렇게 표기하였다[2]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3] 구자철의 소속팀으로 유명한 FC 아우크스부르크와는 다른 팀이다[4] 이 팀도 1.FC 카이저슬라우테른과는 다른 팀이다.[5] 월드컵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고도 패배한 다른 기록은 1986년 월드컵에서 이고르 벨라노프가 벨기에를 상대로 해트트릭을 기록했지만 팀이 3:4로 패배한 것이 있다[6] 타이 기록은 조금씩 찾아볼 수 있는데 1950년 월드컵의 아데미르(vs 스웨덴), 1954년 월드컵의 산도르 코치슈(vs 서독), 1958년 월드컵의 쥐스트 퐁텐(vs 서독), 1966년 월드컵의 에우제비우(vs 북한) 등이 있다[7] 그 이후에 폴란드 대표팀으로서 나치의 명령을 거부하고 나치에 의해 경기장에서 총살되었다는것은 사실이 아니다. 후술하겠지만 그는 독일인의 피가 흘렀기 때문에 이후 독일 국가대표로 활약했다[8] 폴란드 최고 리그[9] 테오도르 페테르크와 공동 득점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