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초 베아르초트
1. 개요
이탈리아의 축구선수 출신 감독. 1975년부터 1986년까지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1966 잉글랜드 월드컵 이후 침체된 이탈리아 대표팀을 되살리고, 1982 스페인 월드컵 결승전에서 강적 브라질을 격파하고 3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또한 그는 이탈리아 축구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대표팀을 이끈 감독이다.
2. 축구인 생활
2.1. 선수
베아르초트는 1927년 9월 26일 은행 상담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우디네에서 고등 교육을 받았고 1946년 19살의 나이로 AS 프로 고리치아에 입단하여 축구 선수로서의 인생을 시작했다. 그는 곧 이탈리아에서 꽤나 뛰어난 센터백으로 각광받았다. 베아르초트는 고리치아에서 2년 동안 활동하였고 1948년에 인터 밀란으로 이적했다. 이후 그는 인테르에서 3년간 19경기를 출장했고 1951년 카타리나로 이적해 1954년까지 세 시즌 동안 95경기 5골을 기록했다.
1954년, 베아르초트는 토리노로 이적했다. 당시 토리노는 수페르가의 비극 이후 팀을 재정비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고 베아르초트는 이 리빌딩 작업에서 필수불가결한 선수가 되었다. 그는 토리노에서 2 시즌 동안 65경기를 출장하여 1골을 기록하며 토리노의 핵심 멤버로 활약했다. 이러한 그의 활약을 주목한 인터 밀란이 1956년 그를 재영입하였지만 그는 인터 밀란에서 잔부상에 시달리며 한 시즌 동안 27경기 출장에 그쳤고(그나마도 대부분이 교체 출장이었다) 이듬해에 토리노로 귀환했다.
토리노에 세번째로 당도한 베아르초트는 이후 1964년까지 7년간 팀의 핵심 센터백으로서 훌륭한 경기력을 선보였다. 그는 164경기를 출전하여 7골을 기록하며 팀의 든든한 수비수로 군림했다. 그러다가 1964년, 베아르초트는 37세의 나이로 선수 생활을 정리하고 코치로서의 인생을 시작했다. 그는 세리에A에서 통산 251경기를 출전했다. 또한 그는 대표팀 선수로서 1955년 11월 27일에 뽑해 중부 유로피언 인터네셔널컵에서 헝가리와의 경기에 출전했으나 이탈리아는 2:0으로 패했다. 이후 베아르초트는 다시는 선수로서 대표팀에 뽑히지 못했다.
2.2. 감독
2.2.1. 초창기
선수 생활을 정리한 뒤, 베아르초트는 토리노의 유스팀 감독으로서 3년간 일하다가 1967년 팀을 떠났고 이후 1968년에 세리에 C의 AC 프라토 감독으로 부임해 한 시즌 동안 팀을 이끌었다. 하지만 그는 클럽 감독으로서 경력을 중단하고 이탈리아 축구 협회에서 일하기로 결정했고 1969년 이탈리아 U-23 축구 대표팀의 감독으로 부임해 1975년까지 유소년팀을 이끌었다. 또한 그는 1974 서독 월드컵 당시 대표팀의 수석코치로 부임하여 감독을 보좌했지만 이탈리아가 예선 탈락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2.2.2. 이탈리아 대표팀
2.2.2.1.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
1975년, 베아르초트는 이탈리아 축구 대표팀의 새 감독으로 부임했다. 당시 이탈리아 축구 대표팀은 기나긴 암흑기로 침체되어 있었다. 수페르가의 비극 이후 국제 대회, 특히 월드컵에서 경쟁력을 상실한 이탈리아는 1966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북한에게 충격적인 패배를 당하며 조별 리그에서 탈락하는 굴욕을 겪었고 1970 멕시코 월드컵에서는 결승까지 진출했지만 브라질에게 4:1로 대패했으며, 1974 서독 월드컵에서는 폴란드, 아르헨티나에게 밀려 조별 라운드에서 탈락하는 굴욕을 당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한 베아르초트는 팀을 재정비하고 카테나치오를 이탈리아 대표팀에 적용하는데 성공해 경기력을 한층 끌어올렸다. 그 결과 이탈리아는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 선전을 거듭해 4강까지 진출하였지만 4강전에서 패해 4위에 만족해야 했다. 이후 이탈리아는 1980년 유로 대회에서도 4위를 기록해 과거와는 다른 준수한 면모를 보여줬다.
2.2.2.2. 1982 스페인 월드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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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역사상 최고의 명승부 중 하나인 4강전 브라질 vs 이탈리아 상황도
1982년, 베아르초트는 이탈리아를 이끌고 월드컵 대회에 참가했다. 하지만 당시 그는 선수 선발과 관련해 많은 비판을 받았다. 특히 파올로 로시를 선발한 것에 대해 "미친 것 아니냐"는 극언까지 나올 정도였다.
물론 파올로 로시는 이탈리아 최고의 공격수 중 하나였지만 이탈리아 전역이 발칵 뒤집혔던 '''토토네로 스캔들'''이 발생했을 당시, 뇌물 수수 혐의로 선수 자격 정지가 선고되어 2년간 선수 생활이 금지되었다.[1] 기용 자체가 거의 도박에 가까웠던 셈인데 징계가 풀리자마자 대표팀 주전으로 발탁했으니 거센 반발이 일 수밖에 없었다. 이에 베아르조트는 유로 1980 대회 당시 수비는 강력했지만 공격진이 골을 넣질 못해 빈곤한 득점력으로 고생한 것을 상기시키며 로시가 아니고서는 아탈리아는 절대로 월드컵을 우승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세간의 비난을 들어가면서 로시를 선택한 베아르조트는 대회 초반 부진을 면치 못해 다시 한 번 거센 비난을 받았다. 이탈리아는 1차 조별 예선에서 폴란드, 페루, 카메룬을 만났다. 이 세팀 모두 이탈리아에 비하면 전력이 한 수 또는 두 수는 아래로 평가받았고 이탈리아는 무난하게 다음 라운드로 진출하는 듯했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3경기에서 단 2골만 넣으며 3경기 3무를 기록해 가까스로 다음 라운드에 진출했다. 특히 파올로 로시는 세 경기 동안 한 골도 못넣었을 뿐만 아니라 경기 내내 아무런 역할도 수행하지 못했다. 이에 팬들과 언론은 이럴 거면 로시를 왜 뽑았냐며 베아르조트를 비난했다.
그러나 베아르조트는 이러한 비난에 눈 한 번 꿈쩍거리지도 않았다. 그는 선수들의 언론 접촉을 아예 원천 차단하고 2차 조별 리그를 준비했다. 이 리그에 속한 팀은 브라질, 아르헨티나였다. 그야말로 다신 나올 수 없는 역대 최악의 죽음의 조였는데 1차 조별리그에서 '''환상의 4중주'''를 앞세워 아름다운 경기력을 선보인 브라질과 디에고 마라도나를 앞세운 아르헨티나에 비하면 이탈리아는 초라해보였다. 이탈리아 언론은 베아르조트가 형편없는 용병술을 보여 꿀조에서 3무로 간신히 2위에 올라 진출하는 바람에 이런 끔찍한 조에 배정되었다며 십자포화를 퍼부었다. 그러나 베아르조트는 이런 세상의 비난을 무시하고 선수들을 단결시키는데 주력했다.
이러한 정신적 무장은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냈다. 이탈리아는 첫번째 경기인 아르헨티나전에서 강력한 수비력을 앞세워 마라도나를 꽁꽁 묶고 2:1 승리를 거두었다. 팬들은 이 뜻밖의 승리에 열광했지만 한편으로는 4:1이 될 수도 있엇던 경기였는데 로시가 영 엉망한 경기력을 보이는 바람에 그러지 못했다며 로시를 주전으로 기용하고 있는 베아르조트를 깠다. 이후 브라질은 아르헨티나를 3:1로 제압해 아르헨티나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이로서 이탈리아는 골득실에서 브라질에게 밀려 비기기만 해도 탈락하는 위기에 놓였다. 식자들은 환상의 4중주를 앞세워 4경기에서 13골을 퍼부어댄 브라질이 4경기에서 고작 4골을 넣은(그나마도 1차 예선 3경기에서 2골만 넣었다) 이탈리아를 압살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놀랍게도 이들의 예상을 뒤엎었다. 전반 4분, 파올로 로시가 카브리니가 올린 크로스를 헤더로 연결해 선제골을 넣었다. 이에 브라질의 '''판타지스타''' 지쿠의 환상적인 패스를 받은 소크라치스가 동점골을 작렬했지만, 로시는 전반이 끝나기 직전에 브라질 수비진에게서 공을 빼내 재차 골을 성공시켜 2:1로 앞서갔다. 그후 브라질은 후반전에 맹공을 가했고 팔캉이 동점골을 넣었다. 이제 경기는 종반으로 치닫았고 이대로 끝나면 브라질이 다음 라운드로 진출하게 될 터였다. 그러던 후반 막판, 로시가 코너킥 찬스에서 골을 작렬,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3:2로 앞섰다. 이후 브라질은 어떻게든 동점골을 넣으려고 맹공을 퍼부었지만 이탈리아는 특유의 짠물 수비를 발동해 이를 저지했고 마침내 승리를 거두었다.
축구 역사에 길이 남을 이 명승부에서 승리를 거둔 이탈리아는 남은 경기에서도 승승장구했다. 로시는 준결승 폴란드 전에서도 두 골을 터뜨렸으며 서독과의 결승전에서는 후반전 0-0의 균형을 깨뜨리는 선제골을 기록, 3:1 승리를 이끌었다. 이탈리아 대표팀은 로시의 대활약을 앞세워 마침내 1938년 이래 44년만에 월드컵 우승을 달성했다. 이탈리아 팬과 언론은 전혀 기대도 하지 않았던 월드컵 우승에 열광했고, 한때의 사고뭉치에서 난세의 영웅으로 떠오른 파올로 로시를 주전으로 발탁한 베아르초트의 안목에 찬사를 보냈다. 그리고 월드컵 우승을 차지한 직후 열린 기자 회견에서 베아르초트는 싸늘한 눈초리로 기자들에게 단 한 마디만을 던졌다.
기자들은 베아르초트에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이제 나에게 더 이상 질문은 없습니까?'''
2.2.2.3. 1986 멕시코 월드컵
1982년의 영광은 베아르조트가 본격적으로 대표팀에서 장기 집권하는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유로 1984 본선 진출에 실패해 다시 한 번 팬과 언론의 비난을 받았다. 또한 1986 멕시코 월드컵에서 지난 대회와 거의 동일한 멤버를 차출했는데, 이 선수들이 노쇠해서 예전만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고 결국 이탈리아는 16강에서 프랑스에 2:0으로 패하고 말았다.[2] 결국 그는 유로와 월드컵에서의 부진의 책임을 지고 11년만에 대표팀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2.3. 이탈리아 대표팀 이후
베아르초트는 대표팀 감독직에서 물러난 후 오랜 세월 야인으로 지냈다. 그러다가 2002년 이탈리아 축구협회에서 그를 불러 기술 분야 부서의 회장으로 임명했다. 그는 3년간 회장으로서 업무를 보다가 2005년 사임했다. 이후 그는 말년을 조용히 보내다가 2010년 12월 21일, 밀라노에서 숨을 거두었다.
2.4. 스타일 : '''카테나치오의 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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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1982년 이탈리아 축구 대표팀의 주요 포메이션
베아르초트는 이탈리아 축구 대표팀에 카테나치오를 성공적으로 접목시킨 인물로 손꼽히고 있다. 사실 카테나치오는 이미 1950년대부터 이탈리아 축구 클럽팀들이 훌륭하게 구사하며 유럽 대회를 정복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이탈리아 축구 대표팀은 카테나치오를 제대로 구사하기 어려워했고 1970 월드컵에서 결승에 진출한 것을 제외하고는 국제대회에서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베아르초트는 이러한 상황에서 부임한 후 카테나치오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변형시켜 대표팀에 성공적으로 적용했다. 그의 전술은 4-4-2를 바탕으로 했지만 리베로를 적용한 독특한 형태였다.
일반적인 4백이 풀백 2명과 센터백 2명으로 이루어지지만, 베아르조트 감독의 카테나치오에선 1명의 리베로와 2명의 센터백이 지역 수비를 하고 왼쪽 풀백이 오버래핑을 하여 수비시에 유연하게 4백을 형성했다. 4명의 미드필더라인 역시 독특하게 구성하였는데, 중앙 미드필더가 수비형 미드필더와 플레이 메이커 사이에서 보조하는 역할을 했고 오른쪽 윙어를 전진시켜 공격시 3톱을 형성시켰으며 이로 인해 텅빈 우측면을 수비형 미드필더가 대신 메꿨다. 2톱은 득점을 노리는 중앙 공격수와 쉐도우 스트라이커로 구성되었는데, 이중 쉐도우 스트라이커는 왼쪽 측면으로 자주 움직여 왼쪽 풀백의 오버래핑을 도와줬다.
이 기형적인 전술은 베아르초트가 선수들을 믿었기에 가능했다. 당시 이탈리아 대표팀엔 축구 역사상 최고의 골키퍼 중 한명인 디노 조프를 비롯하여 가에타노 시레아, 클라우디오 젠틸레, 풀비오 콜로바티(또는 주세페 베르고미) 등이 수비를 이끌었다. 또한 1978년 월드컵 신인왕을 탄 바 있는 레프트 윙백 안토니오 카브리니, 플레이메이커 역할을 수행하는 라이트 윙어 브루노 콘티, 중원을 확실하게 장악해주는 세명의 미드필더(지안카를로 안토뇨니, 마르코 타르델리, 가브리엘레 오리알리)가 제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다만 공격진은 부실했는데, 1982년엔 파올로 로시가 그야말로 미쳐 날뛰면서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다.
이렇듯 베아르초트는 카테나치오를 대표팀에 성공적으로 적용시키는 데 성공했고 당대 최강이라고 불리던 브라질을 상대로 역사에 남을 명승부 끝에 격파해 전세계에 카테나치오의 위력을 알렸다. 이탈리아가 오늘날 축구 강국으로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은 이렇듯 카테나치오를 한단계 진보시키고 전 세계에 명성을 알린 베아르초트의 공헌이 컸다.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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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엔초 베아르초트상을 수여받은 클라우디오 라니에리
2010년 베아르초트가 사망한 뒤, 이탈리아 축구 협회는 그를 기리기 위해 2011년부터 '엔조 베아르초트 상'을 제작해 축구계에서 눈부신 성공을 거두어 이탈리아의 명성을 드높인 이탈리아 출신 감독에게 이 상을 수여했다. 다음은 이 상을 받은 감독들의 명단이다.
- 2011년 - 체사레 프란델리: 이탈리아 축구 대표팀 감독
- 2012년 - 왈테르 마짜리: SSC 나폴리 감독
- 2013년 - 빈첸조 몬텔라: 피오렌티나 감독
- 2014년 - 카를로 안첼로티: 레알 마드리드 감독
- 2015년 - 마시밀리아노 알레그리: 유벤투스 감독
- 2016년 - 클라우디오 라니에리: 레스터 시티 감독
- 2017년 - 마우리치오 사리: SSC 나폴리 감독
- 2018년 - 에우세비오 디 프란체스코: AS 로마 감독
- 2019년 - 로베르토 만치니: 이탈리아 축구대표팀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