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올로 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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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탈리아의 前 축구 선수.
장구한 월드컵의 역사에서도 대회 MVP와 득점왕에 동시에 오르면서 팀까지 우승으로 이끈 인물은 단 3명 뿐이다.[1] 그 중 한 명이 바로 파올로 로시다. 1982 스페인 월드컵에서 대회 기간 동안 가장 큰 활약을 한 선수에게 수여되는 골든볼이 처음 생긴 후 로시가 그 위업을 달성한 이래 지금까지 단 한 명도 그것을 성취하지 못했다.[2]
2020년 12월 9일 병환으로 사망했다. 아르헨티나에서 디에고 마라도나가 11월 25일 죽은 지 2주일만에 축구계를 빛낸 또 다른 스타가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게르트 뮐러는 타고난 골잡이라 불러 마땅할 선수로, 골을 넣을 수 있는 위치를 누구보다 먼저 포착할 뿐 아니라 어떻게든 볼을 골문 안으로 들어가게끔 하는 본능적인 솜씨를 지닌 사나이였는데, 이 뮐러의 시대가 저물어갈 때쯤, 이탈리아 축구에도 그에 비견될 만한 천부적인 골잡이가 출현했으니 그가 바로 파올로 로시다.
로시는 어린 시절 유벤투스 유스 팀과 함께했지만 유벤투스는 무릎이 좋지 않았던 그를 코모로 임대 보냈고 결국 그는 1976년 세리에 B 클럽 비첸차에 둥지를 틀게 된다. 비첸차는 로시에겐 행운의 장소였다. 그 곳에서 로시는 윙어에서 중앙 공격수로 포지션을 바꾸게 되는데, 이것이야말로 또다른 기막힌 골잡이를 탄생시킨 출발점이 됐다.
1976-77 시즌 로시는 곧바로 21골을 터뜨려 비첸자의 승격에 절대적인 공헌을 했지만, 이는 그 다음 시즌 그가 세리에 A에서 24골을 잡아내며 비첸차를 2위까지 끌어올린 놀라움에 비하면 아주 작은 것이었다. 로시는 세리에 B와 세리에 A에서 연거푸 득점왕에 오른 최초의 선수가 되었고, 이는 훗날 유벤투스의 알레산드로 델피에로가 2007년과 2008년 세리에 B와 세리에 A에서 연속 득점왕이 되기까지 유일한 기록으로 남아 있었다. 거액을 들여 로시를 완전 영입한 당시의 비첸차는 ‘레알 비첸차(Real Vicenza)’라는 별명으로까지 불리기도 했다.
1979년 비첸차가 강등을 당하자 로시는 페루자 임대를 선택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로시의 축구 인생이 끝나는 것처럼 보이는 사건이 터졌다. 1980년 AC 밀란, SS 라치오, 볼로냐 FC, US 팔레르모, AC 페루자 칼초 등이 연루된 축구 도박 스캔들, '토토네로 스캔들'이 이탈리아를 뒤흔들었고 이 사건에서 로시는 뇌물 수수 혐의로 3년 자격 정지라는 중징계에 처해진다.[3] 이탈리아 축구의 새로운 희망은 이렇게 그라운드로부터 자취를 감추게 됐다.
1981년 유벤투스 FC로 소속을 옮긴 로시는 1982 스페인 월드컵 직전인 1982년 4월 29일 징계로부터 돌아온다.
1982 스페인 월드컵 이후 로시는 유벤투스에서 클라우디오 젠틸레, 마르코 타르델리, 안토니오 카브리니, 가에타노 시레아 등의 대표팀 동료들, 그리고 플라티니, 즈비그니에프 보니에크 같은 월드컵 스타들과 더불어 활약하면서 크고 작은 트로피들을 계속 들어올렸다. 그 가운데에서도 ‘헤이젤 참사’가 발생했던 1985년 결승전에서 리버풀을 꺾고 차지한 유러피언컵은 로시의 클럽 축구 인생 최대의 트로피로 기록된다. 이후 그는 밀란으로 이적해 1985-86 시즌 밀란 더비에서 두 골을 터뜨리기도 했다.
이후 잦은 부상 덕에 결국 로시는 31세라는 이른 나이에 은퇴를 선택하게 됐다. 그러나 이탈리아 축구 역사에 파올로 로시는 결코 잊지 못할 위대한 골잡이로 남아 있다.
2.2. 국가대표 경력
1977년에 국가대표에 데뷔한 로시는 엔초 베아르초트가 이끄는 이탈리아 월드컵 대표팀의 일원이 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 로시의 활약은 관점에 따라선 4년 후보다 낫다고 여겨질 만큼 매우 인상적이었다.[4][5]
이탈리아 대표팀에서 로시는 유벤투스 선수들인 로베르토 베테가, 프랑코 카우시오와 매우 훌륭한 호흡을 과시했으며 특히 자신의 옛 포지션인 측면 위치로 돌아 나아갈 경우에도 좋은 플레이를 펼쳐보였다. 로시는 1차 조별 리그에서 첫 경기 선제골, 두 번째 경기 선제골, 세 번째 경기에서 이 대회 우승국인 아르헨티나에게 맞서 1:0 승리를 일궈내는 어시스트를 연결하며 3전 전승을 이끈다.
그러나 2차 조별 예선에서 서독, 네덜란드, 오스트리아와 배정되어 오스트리아와의 경기에선 그 경기 유일한 득점을 뽑아내지만 당대 최강팀들인 독일과 네덜란드를 넘어서지 못하고 탈락하고 만다. 이 대회의 로시는 활발한 움직임과 정확한 패스에 의한 어시스트들을 비롯, 이탈리아의 공격을 화끈한 것으로 만드는 일에 크게 공헌했다. 상술했듯 로시가 전체적으로 골의 거장 게르트 뮐러 계열의 선수인 것은 틀림이 없지만, 1978년의 로시는 조금 더 다재다능한 모습으로 첫 월드컵에서 세계의 주목을 끌었으며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실버볼을 수상하였다.
토토네로 스캔들로 인해 2년이라는 기나긴 공백이 있었으나 대표 팀 감독 엔초 베아르초트는 로시를 신뢰했다. 그와 동시에 베아르조트는 UEFA 유로 1980에서 공격수 가뭄을 실감했기에 로시가 아니고서는 이탈리아가 우승할 수 없다는 확신하에 로시를 발탁하고, 그가 주전이 될 것임을 천명했다.
이는 이탈리아 전역에 거센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탈리아 대표 팀이 1차 조별 예선에서 폴란드, 페루, 카메룬 등의 손쉬운 상대들로 배정되었음에도 3경기에서 단 두 골만을 기록하며 3무로 간신히 진출하자 베아르초트 감독과 대표팀에 대한 언론의 비난은 점점 더 거세졌다. 특히 실전 감각이 부족한 로시가 세 경기 동안 한 골도 기록하지 못하고, 그것도 모자라 경기장 안에서 행방불명되며 부담을 가중시켰다.
언론의 공격에 맞서 엔초 베아르초트 감독은 언론 접촉을 아예 차단하고서 본선 2차 조별 예선을 준비했다. 간신히 1차 예선을 통과한 이탈리아는 최강으로 평가받는 브라질, 전 대회 우승국 아르헨티나와 같은 조를 이뤘다.[6] 언론은 형편없는 용병술로 약체국들을 상대로도 조 1위를 차지 못하고 죽음의 조에 배정되었다며 베아르초트를 질타했다. 그러나 이러한 언론의 비난세례 속에서도 디노 조프를 위시한 이탈리아 선수단은 오히려 단단하게 결속되었고, 이러한 정신적 무장은 실로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내고야 만다. 지안카를로 안토뇨니, 브루노 콘티, 클라우디오 젠틸레, 마르코 타르델리 등이 ‘신동’ 디에고 마라도나와 4년 전 우승 멤버들이 포진한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여유있게 2-1 승리를 거둔 것. 하지만 그보다도 큰 점수차로 압도적 승리를 거둘수도 있었던 이탈리아의 전력에서, 중심적 역할을 맡아야 했을 로시의 행방은 여전히 묘연한 그대로였다.
이제 득실에서 이탈리아를 압도해서 비기기만 해도 진출하는 브라질과의 경기가 남았다. 이 경기에서도 로시가 제몫을 해내지 못한다면, 향후 이탈리아 선수들의 장래는 보장받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1982년 브라질이 얼마나 대단한 팀이었는가. 지쿠 - 소크라치스 - 호베르투 파우캉 - 토니뉴 세레주. 일명 '''황금의 사중주'''로 대표되는 브라질은 우승 전력을 넘어 요한 크루이프의 네덜란드나 펠레의 브라질, 지네딘 지단의 프랑스와 같은 역대 최강의 전력을 갖춘 팀 중 하나로 회자될 만한 전설적인 팀으로, 이탈리아와 경기 전까지 서독, 프랑스, 잉글랜드, 스페인을 포함해 24경기 무패 행진을 이어가며 패배를 모르던 막강한 팀이었다. 이미 이전 조별 리그에서 마라도나의 아르헨티나를 훨씬 아름답고 완벽하게 분쇄하는 경기를 선보였으며 이탈리아가 4경기에서 4골을 넣을 동안 그들은 13골을 퍼부었다. 간신히 승리해온 이탈리아를 상대하는 황금의 사중주 브라질의 승리를 의심하는 사람은 극히 적었으나, 그 모든 예상이 부질없게도 경기를 쥐고 흔든 건 다름 아닌 파올로 로시였다.
안토뇨니의 절묘한 패스가 오버래핑하던 카브리니에게 연결, 그리고 크로스가 로시의 머리에 닿으며 5분 만에 선제골이 터졌다. 브라질은 소크라치스와 지쿠의 2:1 공격으로 반격에 나섰으나, 로시가 브라질 수비진에게서 공을 낚아채며 재차 골을 성공시켜 2:1로 전반을 마친다. 후반전 브라질의 집중 공세 속에 호베르투 파우캉이 2:2를 만들어낸다. 그러자 경기 분위기는 다시 뒤바뀌어 브라질은 걸어잠그고 이탈리아가 두드리는 형국으로 변한다. 결국 승부는 세트피스에서 갈리는데, 코너킥 찬스에서 로시가 득점, 해트트릭으로 3-2 승리를 이끌어냈다.[7]
이후의 이탈리아는 파죽지세였다. 로시는 준결승 폴란드전에서도 2골을 터뜨려 결승에 진출한다.
서독과의 결승전에서는 후반전 0-0의 균형을 깨뜨리는 선제골을 기록, 이탈리아는 1934년, 1938년의 2연패 이래 거의 50년에 가까운 기나긴 세월을 거쳐 월드컵 대관식을 치른다. 결국 1982 스페인 월드컵 최후의 승자는 사람들이 기대했던 지쿠도, 마라도나도, 플라티니도, 루메니게도 아닌 2년 징계로부터 돌아온 로시의 차지가 되었다. 로시는 이 활약을 바탕으로 1982년 발롱도르까지 거머쥐기에 이른다.
로시는 1986 멕시코 월드컵 한국전을 대비한 중국과의 평가전에서 부상을 입게 되고 월드컵에 참가하지만 경기에 뛰지 못하게된다.[8]
3. 플레이 스타일
로시는 빠르고 훌륭한 슈팅력을 가진 선수였고, 뛰어난 위치선정으로 골을 넣는 선수였다.
4. 기록
4.1. 대회 기록
- 비첸차 (1976~1979)
- 세리에 B: 1976-77
- 유벤투스 FC (1981~1985)
- 세리에 A: 1981-82, 1983-84
- 코파 이탈리아: 1982-83
- 유러피언컵: 1984-85
- 유러피언 컵 위너스컵: 1983-84
- 유러피언 슈퍼컵: 1984
-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 FIFA 월드컵: 1982
4.2. 개인 수상
- 발롱도르: 1982
- FIFA 월드컵 골든볼: 1982
- FIFA 월드컵 실버볼: 1978
- FIFA 월드컵 골든슈: 1982
- FIFA 월드컵 올스타팀: 1978, 1982
- 유러피언컵 득점왕: 1982-83
- 세리에 A 득점왕: 1977-78
- 세리에 B 득점왕: 1976-77
- FIFA XI: 1979, 1986
- FIFA 100: 2004
- 월드 사커 올해의 선수: 1982
- 월드 사커 올해의 팀: 1982
- 옹즈도르: 1982
- 옹즈 드 옹즈: 1982
- 구에린 스포르티보 올해의 선수: 1982
- 레키프 챔피언 중의 챔피언: 1982
- 골든풋: 2007
- 이탈리아 축구 명예의 전당: 2016
5. 기타
- 2014 브라질 월드컵 당시 비자카드 광고에 브라질을 울린 또다른 웬수와 함께 등장한 적이 있다.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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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닷컴에서 시대별 최고의 공격수 5인을 선정했는데, 1980년대 공격수들 중 2위에 이름을 올렸다.
[1] 나머지 2명은 가린샤와 마리오 켐페스.[2] 그나마 가장 비슷한 활약을 한 선수는 1986 멕시코 월드컵 때의 디에고 마라도나와 2002 한일 월드컵 때의 호나우두를 들 수 있는데 마라도나는 골든볼을 수상했지만 1골 차로 잉글랜드의 게리 리네커에게 밀려 실버슈에 그쳤고 호나우두는 골든슈를 수상했지만 독일의 올리버 칸에게 밀려 실버볼에 그친다.[3] 후에 이것은 2년으로 경감됐다.[4] 사실 1982년 월드컵의 로시는 여러 모로 부침이 있었기에[5] 이는 어쩌면 로시의 비첸차 후배 로베르토 바조의 경우와도 다소간 유사성이 있다. 절묘하게 그리고 어김없이 터져 나왔던 바조의 골들이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이탈리아를 결승으로 이끈 원동력이기는 하더라도, 그 이전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더 젊은 바조가 펼쳐 보인 활약 또한 실로 인상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6] 이 '''브라질, 아르헨티나, 이탈리아'''라는 충격적인 조 편성은 월드컵 역사상 가장 치열한 죽음의 조로 회자되고 있다.[7] 로시 본인도 '''"브라질을 이긴 경기는 세기의 경기였다. 내 선수시절 전체를 통틀어서도 가장 중요한 경기였다."'''라고 말했다.[8] 결국 알레산드로 알토벨리가 1986 월드컵에서 이탈리아의 에이스 역할을 한다.[9] 브라질은 로시의 이탈리아에게 1982년, 지단의 프랑스에게 1998년, 그리고 2014년 독일에게 참패했다. 공교롭게도 이들은 16년 간격으로 반복되었다. 16년전인 1966년에는 조별리그 탈락, 그보다 더 16년전 1950년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