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로
1. 1972년에 KBS에서 방영한 일일 드라마
방송기간: 1972년 4월 3일 ~ 1972년 12월 29일
불우한 운명 속에 태어난 분이(태현실)라는 여인이 아주 가난하여 영구의 시어머니와 잘 아는 건달 김달중의 소개로 영구(장욱제)의 집으로 들어갔으나 시어머니로부터 마구 구박을 당하고 쫓겨나는 수난을 겪다가 다시 부와 행복을 찾는다는 내용의 드라마이다. 다만 당시 방송자료 관리가 제대로 안되었던지라 당시 여로 방영분은 '''딱 1회분(제207회)만 남아있다.'''[1]
그래서 특집프로그램에서 여로의 방송분을 틀때 영구가 "찾았다! 찾았어!"라고 외치면서 기뻐하는 장면 정도만 볼수있고 나머지 회차는 모조리 환상의 에피소드가 되어 감상이 '''절대 불가능하다.'''
더군다나 당시에는 VHS와 베타맥스가 일반가정용으로 보급되던 시절이 아니기 때문에 나머지 회차를 보는건 운 좋게 당시의 테이프가 발견된게 아니라면 앞으로도 불가능하다 보면 된다. 그래서 당대를 추억해서 다시 보고싶다는 구입문의와 방영문의가 적지 않게 들어왔지만 KBS에서 자료가 없어서 불가능하다는 궁색한 답변만 내놓을수밖에 없는 드라마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2] 타임머신 타고 다시 1970년대로 돌아가서 녹화해올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나마 영화로 여러번 제작된게 위안점이라면 위안점. 후의 팔도강산도 마찬가지인데, 이쪽은 더욱 안습한게 당시로써는 제작비를 많이 배당받았는데도 단 1회분도 남은 게 없다... 또한 개그 프로그램에서 쓰인 김수한무 이야기도 원본 자체가 없어서 지금은 후배 개그맨들의 재현으로 쓰이는 편이다.
참고로 방영 이후 KBS가 여의도로 이사를 했는데 이것 때문에 많은 자료가 없어졌을 가능성이 크며, 무엇보다 당시에는 전량 수입품이던 비싼 녹화용 테이프를 재녹화하는 데 활용한 경우가 많아서 그렇다. 영화 필름도 상영이 끝나면 모두 조각조각 잘라서 밀짚모자 테두리나 장난감을 만들었던(!!) 터. 자료 보존에 대한 개념이 거의 없던 때였다.
텔레비전 드라마로서 70%에 달하는 시청률을 기록해 여로가 방송하는 시간에는 거리가 썰렁하고, 택시기사들도 영업을 멈추고 전파상 앞에서 여로를 봤다거나 여로가 방송되는 시간(평일 오후 7시 30분)에 아예 관객들이 영화보다말고 여로를 보는 바람에 영화상영을 20분간 중단하고 쉰다거나 여로를 보는데 집중하는 도중에 도둑맞은 집, 밥을 태워먹은 집들도 속출했다는 얘기도 나돌 정도였고, 박정희도 여로를 시청하여 국무회의가 열리기 전에 여로의 줄거리가 화제가 되었다는 후일담도 전해져 내려올 정도였다. 덧붙여서 아이들 사이에서 영구 흉내를 내는게 유행이 되는 바람에 부모들이 매우 걱정했고, 장애인 비하 등의 문제가 있어서 원래는 90회로 끝낼 예정이었지만 아주 인기가 많아서 211회까지 늘어났다. 그래서인지 시집에서 쫓겨나고 국밥집을 차렸고, 만날뻔 했지만 만나지 못했다가 1960년대가 되어서야 다시 만나게 되었다는 식으로 줄거리가 진행되게 되었다.
다만 현재는 영화판 여로가 아닌 TV판 여로는 자료가 너무 없고 단지 여로의 극본을 요약한 소설책정도나 남아있는 지라 스토리가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알기가 힘들다.[3] 군대에서는 그날 이야기가 안 좋게 끝나면 밤중에 아무 이유 없이 얼차려를 받는다거나하는 괴담이 있었을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한편으로 연장 방영 되면서 제목이 바뀌기도 했다. 원래 제목은 여자의 길이라는 뜻에서 女路였는데 연장방영되면서 旅路(여행의 길)로 바뀐 것.
극중에서 집안 재산을 가로채려고 며느리 분이를 혹독하게 괴롭히던 악독한 시어머니역을 맡은 박주아(1942~2011)[4] 씨의 회고로는 방송국에 해병대원들이 난입해서는 자신을 만나게 해달라고 하는 바람에 무서워서 숨은 일화가 있었다고 한다. 이것말고도 밖에 나가기만 하면 손가락질 받고 욕먹고 심할 경우엔 폭력을 가하려고 드는 사람이 있어서 박주아씨는 여로 방영 때는 물론이고, 종영 후에도 한동안은 시장이나 공중목욕탕 같은 곳은 가지도 못했다고 한다. 또한 이 드라마에는 이분이의 시어머니와 함께 분이를 괴롭히는 분이의 시누이 영구의 여동생 영숙(권미애)이 나온다.
여로 드라마에는 악질 일본순사 무라까미가 나오는데 무라까미 일본순사는 분이와 분이의 시아버지(정민)를 주재소로 연행하여 영구네집에 숨어 있다가 독립운동하러 중국 샹하이로 간 김성준(최정훈)의 행방을 말하라며 분이를 못들이 박힌 상자에 발을 얹어놓게 하고 발로 누르는 고문을 하고 분이의 시아버지를 전기고문하여 분이의 시아버지를 장애인으로 만드는 잔학성을 보여준다.
무라까미 순사는 나중에 독립군 김성준이 쏜 권총탄을 맞고 죽는다. 무라까미 순사의 연기를 한 배우는 정래협씨이다. 또한 여로 드라마에는 분이 시어머니에게 분이를 소개했던 건달 김달중은 무라까미 순사에게 빌붙어 독립군 김성준을 감시하고, 임신한 분이를 낙태시키려는 분이의 시어머니와 결탁하여 밀가루를 애를 때는 약이라고 속이고 밀가루를 분이에게 보약이라고 속여 먹게 했다.김달중의 연기를 했던 배우의 이름은 김무영이다.
일제 때 독립운동을 했던 김성준은 6.25전쟁 때에는 국군 장교가 되어 참전했다가 김달중을 만나 권총을 쏘아 죽이려고 했으나 분이의 만류로 김달중을 죽이지 않고 6.25전쟁 뒤에는 부자가 되어 딸(최유리)을 낳는데 뒤에 분이와 영구는 김성준의 집에서 만난다.
여담으로 분이와 영구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기웅 역을 맡은 배우가 난타의 연출가로 유명한 송승환이었다.[5]
태현실은 이 드라마 인기 뒤에도 팔도강산, 대하 드라마 강 등 여러 드라마에서 꾸준히 나왔지만 영구를 맡은 장욱제[6] 는 바보 이미지가 고착화되어서 고전하다가 1976년 결혼과 함께 방송계를 떠났다.[7] 그리고 2001년에 아버지와 아들이란 SBS 드라마로 25년만에 재기했는데, 여기서 태현실과 거의 30년만에 다시 같은 드라마에 나왔다.
영구는 1980년대 중후반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여로 제목으로 나오다가 나중에 KBS의 유머 1번지 방송 코미디 프로그램에 영구야 영구야라는 제목을 바꾼 코너에서 심형래가 맡아서 영구없다~라는 유행어로 인기를 모았다. 그리고 영구와 땡칠이같은 남기남 감독의 어린이 영화시리즈에 나오기도 했다.
물론 원작 영구 캐릭터도 인기가 없는건 아니었다. 시청률이 높게 나온 만큼 당시 아이들 사이에서 영구놀이가 유행해서 사회 문제가 되었을 지경이라는 기사도 나왔을 정도인데다가 흑백TV시절 원작 영구 배우 장욱제가 나온 과자 광고도 있었으니...
2. 최지룡의 만화
3. 극장판 여로
4. 메이플스토리의 지역 소멸의 여로
5. 식물의 종류
[1] KBS <오래된 TV> 참고. 그나마 화면손상이 있어서 온전한 부분은 5분 정도라고 한다.[2] 다만 자료가 있는 80년대 중후반 이후의 드라마도 자료가 없다고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경우에는 여러가지 문제가 중첩되거나 특정드라마의 발매가 사규를 통해 금지된다거나 하는 사정이 있다.[3] 방영 시기로 보면 줄거리를 알고 있는 세대가 충분히 생존해 있긴 하지만, 당시 주 시청자층은 2018년 현재 적어도 60대 중반 이상이다.[4] 생몰연도를 보면 알겠지만, 당시 30대 초반에다 미혼이었다. 70년대 방송에는 노인 역을 할만한 나이 든 배우가 적어서 많은 젊은 배우들이 노인 분장을 했다. 지금은 진짜 노인이 된 이순재, 사미자 등도 당시엔 새파란 젊은이라, 노인 역을 하기 위해 분장을 했다. 물론 영화계엔 나이든 배우들이 좀 있었는데, 자존심이 있어서 그런지 80년대 말에 한국영화가 사양길로 접어들기 전까지는 TV로는 많이 넘어오지 않았다.[5] 원래 아역 배우였다. 아역 1세대가 안성기, 2세대가 김정훈(영화), 송승환(TV) 등이었다. 강수연은 3세대.[6] 당시 어머니 배역을 맡은 박주아와 '''동갑'''이었다(...), 참고로 며느리인 태현실은 박주아보다 한 살 더 많다...[7] 신부가 파라다이스 전낙원 회장의 조카였는데, 전낙원 회장이 그에게 파라다이스호텔 호텔리어직을 제의하면서 은퇴했다고 한다. 이후 제주도에서 생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