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수연

 

'''강수연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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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베니스 국제 영화제'''
[image]
'''볼피 컵 - 여우주연상'''
'''제43회
(1986년)'''

'''제44회
(1987년)'''

'''제45회
(1988년)'''
발레리아 골리노리
(사랑 이야기)

'''강수연
(씨받이)
'''

이자벨 위페르
(여자 이야기)
셜리 맥클레인
(마담 소사츠카)


'''역대'''
[image]
'''여우주연상'''
'''제12회
(1991년)'''

'''제13회
(1992년)'''

'''제14회
(1993년)'''
장미희
(사의 찬미#s-4)

<color=#373A3C> '''강수연
(경마장 가는 길)
'''

김혜수
(첫사랑)


'''역대'''
[image]
'''여우주연상'''
'''제25회
(1986년)'''

'''제26회
(1987년)'''

'''제27회
(1989년)'''
최명길
(안개기둥)

'''강수연
(우리 지금 제네바로 간다)'''

강수연
(아제아제 바라아제)

'''제26회
(1987년)'''

'''제27회
(1989년)'''

'''제28회
(1990년)'''
강수연
(우리 지금 제네바로 간다)

'''강수연
(아제아제 바라아제)'''

강수연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제27회
(1989년)'''

'''제28회
(1990년)'''

'''제29회
(1991년)'''
강수연
(아제아제 바라아제)

'''강수연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원미경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영화부문 여자 최우수연기상'''
이혜숙
(1991년)

'''강수연
(1992년)'''

배종옥
(1993)
전도연
(1999년)

'''강수연
(2000년)'''

전도연
(2001년)

'''연기대상 대상'''
고두심
(2000년)

전인화
'''강수연
(2001년)'''

안재모
(2002년)


<colbgcolor=#283593><colcolor=#FFFFFF> '''강수연
姜受延 | Kang Su-yeon'''
'''출생'''
1966년 8월 18일(58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국적'''

'''신체'''
162cm, 45kg, AB형
'''직업'''
배우
'''가족'''
2남 2녀 중 장녀[1]
'''학력'''
서울교동초등학교 (졸업)
풍문여자중학교 (졸업)
동명여자고등학교 (졸업)[2]
고려대학교 행정대학원 (석사)
'''종교'''
불교
'''데뷔'''
1969년 영화 〈핏줄〉
1. 개요
2. 상세
3. 기타
4. 출연작
4.1. 영화
4.2. 드라마
4.3. 연극
5. 수상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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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배우이다.
1990년대의 영화계를 모르는 사람들은 '''<여인천하>'''에서의 정난정으로 기억하겠지만, 한때 국내외 시상식에서 굵직한 기록을 세우며 영화계를 풍미했던 배우이기도 하다.# 당시 경계가 분명하던 시절 영화계와 드라마계에서 커리어 하이를 찍었던 흔치 않은 대배우.[3]

2. 상세


1966년 8월 18일에 출생, 1969년부터 동양방송 전속 아역 배우로서 활동하였다. 1980년의 언론통폐합 이후 KBS로 활동 무대를 옮겨 1983년, 드라마 고교생 일기로 큰 인기를 얻으며 당시 손창민과 함께 최고의 하이틴 스타로 활동하였다. 고교생 일기는 당시 하이틴 스타들의 등용문 으로 여겨졌을 정도로 청소년층에 굉장히 큰 인지도를 가진 드라마였다. 고교생 일기는 강수연이 이 학교에 전학을 오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즉 초반 주인공이었다는 이야기다. 다만 극이 진행될수록 다른 등장 인물들이 점점 부각되면서 누가 주인공이랄 것이 없는 군상극 스타일로 바뀐다. #.
본격적으로 성인 배우로 활동한 작품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1985년에 개봉한 <고래사냥 2>부터이다.

1987년, 영화 <우리는 지금 제네바로 간다>를 시작으로 '대종상'에서 '''여우 주연상을 3회나 수상'''하였으며, 영화평론가상 여우주연상도 무려 '''3차례나 수상'''했다. 그 기세를 이어받아, <씨받이>로 '''제44회 '베네치아 영화제' 여우주연상'''을[4], 1989년에 <아제아제 바라아제>로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였다.[5]
국내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휩쓴 것도 배우로서 대단한 일이지만, 특히 '''최초로 메이저 국제 영화제에서 본상 수상을 하였기 때문에''' 다른 배우와 영화인들에게 '우리도 할 수 있다.'라는 생각과 가능성을 열어준 것이 높이 평가받고 있다. '아역 출신이 성공하기 힘들다'는 편견을 최초로 깬 주인공이기도 하다.[6] 강수연은 뒤에도 나오듯이 초등학교 입학 훨씬 이전부터 연기를 시작해서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계속 인지도 높은 드라마에 출연해왔던 대중들에게 굉장히 인지도 높은 아역이었다. 그런 인지도 높은 아역이 성인 배우로도 성공한 굉장히 보기 드문 케이스다.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까지의 강수연은 가히 원탑 여성 배우였다.[7] 또 그 명성에 걸맞게, '''남녀 통틀어 배우 최초로 억대 개런티를 받았다'''.[8], 1990년대 초반이었는데도 광고 출연료가 '''편당 4억 원'''을 넘어갈 정도였다. 흥행이 잘 되지 않는 줄 아는 작품에서도 강수연이라는 이름 석 자만으로 서울 개봉관 기준관객을 2~30만 명[9]이나 동원했다.
그러나 1994년에 개봉된 스릴러 영화 <장미의 나날>[10]이 평단에게 혹평을 받았고, 상업적으로도 실패하는 바람에 조금씩 하락세로 돌아섰다.[11] 게다가 이 당시 조금씩 치고 올라오는 후배 여배우들[12]과 브라운관에서 활약하던 여배우들이 대거 영화판으로 이동하면서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그래도 그 와중에 광고와 행사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스스로도 스캔들이나 잡음을 일으키지 않았다. 일단 수십 년 동안 연기와 영화를 한결같이 좋아하며, 무엇보다 커리어도 이미 정점을 찍었기 때문에 배우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을 누렸기 때문.
2001년에는 오랜만에 브라운관으로 복귀, <여인천하>에 주인공 정난정 역할로 출연해 큰 인기를 모았다. 게다가 배우 최초로 '''회당 출연료 500만 원 시대를 열었고''',[13] 본인의 커리어 최초로 그해 전인화와 함께 'SBS 연기대상'에서 '''대상'''을 받았다.[14]
여인천하 이후에는 영화에 간간이 출연하고 있으며 영화 관련 행사에 자주 등장하고 있다.
그러다가 2015년, '부산국제영화제'의 공동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사실 영화계에 남긴 발자취로만 보면 자격은 차고 넘치지만, 보통 이 정도 자리는 고도의 행정력이 필요하기에 행정 전문가나 영화감독 등이 맡아왔는지라 다소 의외인 부분. '행정 경험이 없는 것에 비해서 일을 열정적으로 꽤 잘했다'고 호평을 받기도 했으나, 2017년 '부산국제영화제'의 직원들이 성명서에서 '소통의 단절 및 독단적 행보가 지나치다'며 비판을 하기도 했다.#
프랑스파리 테러 때문에 골치가 아픈지라, 2016 '칸 영화제'에서 검색받는 모습이 찍히기도 했다.


3. 기타


배우 이성민이 강수연을 우상처럼 여겨 왔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 강수연을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고.
경수진이 배우를 하겠다고 마음먹은 계기가 된 사람이 강수연이다.
김하늘이 연예인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배우로 강수연을 꼽았었다. 동감 홍보차 출연했던 토크쇼(이홍렬쇼)에서 언급하였는데 동감시사회때 참석한 강수연의 실물을 보고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에 감탄하였다고 한다. [15]
전성기 탑스타 시절 무명의 단역이나 스텝들 잘 챙겨주기로 유명했다. 촬영하던 영화가 끝나면 항상 본인 돈으로 뒷풀이를 하면서 저임금으로 고생하는 스텝과 무명의 단역들에게 한턱을 내곤 했다. 그때 자주 하던 말이 '''"우리 영화인이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였다. 류승완 감독은 무명시절 이 말이 너무 멋있게 들려서 자신의 영화 '''베테랑'''에서 주인공 서도철(황정민)의 대사로 써먹어서 인구에 회자될 정도로 유명한 말이 된다.
남한테 술 사주기를 좋아하는 만큼 자신도 술을 잘 마신다. 사실 잘 마시는 정도가 아니라 당대 대적할 자가 없는 전설적인 주당이었다. 영화계에 즐비한 애주가들 중 아무도 강수연을 술로 이겨본 적이 없다고 한다. 특히 무서운 점은 술을 마셔도 취한 티가 안 난다는 것인데, 일설에는 강수연이 취기가 돌면 탁자 밑에서 신발을 벗는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고 했다.
외모에 대해서는 살짝 취향이 갈리는 편이다. 그러나 이것은 시대에 따른 선호하는 타입의 변화이고, 일단 아주 어릴 때부터 나온 아역 출신이라 성형 논란도 없다. 강수연의 전성기였던 1980년대 후반에는 미인으로 평가받았고, 현재에 봐서도 상당히 예쁜 얼굴이다. 나이를 고려하면 꽤 동안이기도 하다.
왜 아직 결혼을 안 했냐는 질문에 못 했다고 답한 적이 있다. 본인도 하고는 싶은데 좀처럼 기회도 연도 닿지 않을 뿐이라고.
여인천하에 출연할 때 작품이 추가 연장되면서 정난정 캐릭터가 본인이 생각하던 점에서 많이 멀어졌고 이 때문에 배역에 상당히 부정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주인공이 드라마에서 혼자 빠질 수 없어서 계속 찍었다고. 이후엔 사극 연기에 지쳐서 다른 사극 섭외를 모두 거절했단다. 여인천하 이후 사극 연기는 한반도에서 명성황후 민씨로 짧게 등장한게 전부이다.

4. 출연작



4.1. 영화


1975년 《핏줄》
1976년 《나는 고백한다》
1977년 《별 3형제》
1978년 《비둘기의 합창》
1978년 《슬픔은 이제 그만》
1978년 《어딘가에 엄마가》
1979년 《하늘나라에서 온 편지》
1982년 《깨소금과 옥떨메》
1985년 《W의 비극》
1985년 《고래 사냥2》
1987년 《씨받이》... 옥녀 역
1987년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 미미 역
1987년 《우리는 지금 제네바로 간다》... 순나 역
1987년 《감자》... 복녀 역
1987년 《됴화》
1987년 《연산군》... 장녹수
1988년 《업》
1988년 《미리 마리 우리 두리》... 우리 역
1989년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윤주 역
1989년 《아제 아제 바라아제》... 순녀 역
1989년 《그 후로도 오랫동안》... 선우수미 역
1991년 《베를린 리포트》... 마리엘렌/영희 역
1991년 《낙산풍》
1991년 《경마장 가는 길》... J 역
1992년 《그대 안의 블루》... 유림 역
1993년 《웨스턴 애비뉴》... 지수 역
1993년 《그 여자, 그 남자》... 은 역
1994년 《장미의 나날》... 재희 역
1995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혜완 역
1996년 《지독한 사랑》... 영희 역
1997년 《블랙잭》... 장은영 역
1997년 《깊은 슬픔》... 오은서 역
1998년 《처녀들의 저녁식사》... 호정 역
1999년 《송어》... 정화 역
2003년 《써클》... 오현주 역
2006년 《한반도》... 명성황후
2007년 《검은 땅의 소녀와》... (특별출연)
2010년 《달빛 길어올리기》... 지원 역

4.2. 드라마


1971년 동양방송 《똘똘이의 모험》
1979년 TBC 《오성과 한음》
1980년 TBC 《바람돌이 장영실
1982년 KBS 《풍운》... 명성황후 아역[16][17]
1982년 KBS 《달무리》
1983년 KBS 《고교생 일기》
1984년 KBS 《사랑하는 사람들》
1985년 MBC 《엄마의 방》
1986년 KBS 《이화에 월백하고》
1986년 KBS 《TV문학관》- 들뻐꾸기
1987년 KBS 《TV문학관》- 순금촛대
2001년 SBS 《여인천하》... 정난정
2007년 MBC 《문희》... 하문희 역

4.3. 연극


1995년 메디아[18]

5. 수상내역


연도
수상
2015년
제16회 올해의 여성영화인상 올해의 여성영화인상
2010년
자랑스러운 영화인상
2009년
부산국제영화제 플래시포워드상 심사위원회 위원상
2001년
SBS 연기대상 대상
2001년
SBS 연기대상 10대 스타상
2001년
그리메상 최우수여자연기상
2000년
제36회 백상예술대상 영화 부문 여자 최우수 연기상
1995년
제33회 대종상영화제 여자 인기상
1994년
제30회 백상예술대상 영화 부문 여자 인기상
1993년
제14회 청룡영화상 인기스타상
1993년
제31회 대종상영화제 여자 인기상
1993년
제17회 황금촬영상 최우수 인기여우상
1992년
제13회 청룡영화상 여우 주연상
1992년
제3회 춘사영화상 여우 주연상
1992년
제28회 백상예술대상 영화 부문 여자 최우수 연기상
1990년
제28회 대종상영화제 여우 주연상
1990년
제10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여우 주연상
1990년
제26회 백상예술대상 영화 부문 여자 인기상
1989년
제16회 모스크바영화제 여우 주연상
1989년
제25회 대종상영화제 여우 주연상
1989년
제9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여우 주연상
1988년
낭트3대륙영화제 여우 주연상
1987년
옥관문화훈장
1987년
제7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특별상
1987년
제24회 대종상영화제 여우 주연상
1987년
제24회 대종상영화제 여자 인기상
1987년
제44회 베니스국제영화제 여우 주연상
1984년
제20회 백상예술대상 TV 부문 여자 신인 연기상

[1] 오빠 2명, 친동생 1명.[2] 조용원과 동창(사실상 강수연은 야간 상업계였고, 조용원은 주간 인문계여서 100% 동창이라고 보기는 어렵다.)이며, 김현주(64년생)가 2년 선배다.[3] 물론 영화에서의 흥행과 기록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이 사실이다. 또한 드라마는 <여인천하>를 제외하면 딱히 본인의 커리어에 굵직하다고 할 만한 작품이 없기도 하고.[4]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동아시아 배우 중 최초로''' '베네치아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그 다음으로 공리가 수상했다.[5] 참고로 <아제아제 바라아제>를 촬영할 당시, 강수연은 비구니 역을 연기하기 위해서 진짜로 머리 전체를 삭발하고 촬영지였던 선암사 인근에서 몇 달 동안 숙식하는 등의 투혼을 발휘했다고 한다.[6] 남자 배우로는 안성기가 있다. 다만 강수연보다도 한 세대 전 일이고, 어릴 때만 하였기 때문에 아역 출신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이가 적기는 하다.[7] 사실 이 무렵에는 배우의 연령층이 다양하지 못한 탓도 꽤 있다. 이 시기에 최진실심혜진이 영화계에 데뷔해 눈길을 끌었으나, 연기력과 흥행을 전부 거머쥔 여성 배우는 사실상 강수연뿐이었다.[8] 1992년 영화 <그대안의 블루>로는 개런티 2억을 받았다. 1992년 시점에서는 '감히' 상상도 못 하는 수준. 2019년 현 시점에서도 개런티 2억은 무시하지 못할 거액이다.[9] 지금 관객수로 환산하면 80~100만 명 정도로 잡으면 된다. 이 당시에는 단관 상영이 대세였다.[10] 곽지균 감독이 연출을 맡았고, 강제규 감독이 시나리오를 썼다.[11] 그저 출연만으로도 각종 영화제의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던 강수연이 이 작품으로 인해 처음으로 어느 영화제에서도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르지 못했다.[12] 대표적으로 최진실, 심혜진 등.[13] 이 일을 계기로 고가 개런티를 요구하는 탑 배우들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참고로 엔딩 클로징을 오로지 자신에게만 맞추라고 요구했는데, 이유는 오랜만에 브라운관으로 복귀한 자신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기 싫었다고.[14] 하지만 강수연 본인은 정난정 캐릭터를 싫어했다고 한다. 이에 대한 내용은 여인천하 문서의 여담 문단을 참조.[15] 해당 방송을 보면 이홍렬이 연예인 중에 누가 정말 이쁜것 같냐는 질문에 김하늘이 강수연의 동감시사회 참여를 언급하며 강수연의 미모를 칭송하였는데 실제 김하늘이 강수연의 실물을 보았던건 시사회보다 훨씬 전의 일이었던듯하다. 사족을 붙히면 영화 동감에서 김하늘역에 원래 내정되었던 배우가 강수연이였다는 것도 당시에 잘 알려져있던 얘기. 유지태역 또한 초기캐스팅은 송승헌 [16] 훗날 영화 <한반도>에서 성인 명성황후 역으로 출연.[17] 이 드라마에서는 김영애가 성인 역을 맡았다.[18] 처음이자 마지막 연극 출연이다. 또 노개런티로 연기했다. 연출가 김아라의 작품에서 연기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해 노개런티라도 연기하고 싶어했고, 결국 그렇게 했다. 1994년까지 다작에 출연하였으나, 1995년 연극 출연을 기점으로 영화 출연을 한 해 한 편씩만 출연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