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경흠

 

[image]
'''이름'''
연경흠(延卿欽 / Kyeong-Heom Yeon)
'''생년월일'''
1983년 9월 14일 (41세)
'''국적'''
대한민국
'''출신지'''
충청북도 충주시
'''출신학교'''
청주석교초 - 청주중 - 청주기계공고 - 인하대
'''포지션'''
외야수
'''투타'''
좌투좌타
'''프로입단'''
2002년 한화 이글스 2차 12라운드(전체 90순위) 지명[1]
'''소속팀'''
한화 이글스 (2006~2013)
'''응원가'''
동방신기 - 풍선[2]
1. 소개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2.2. 프로 시절
2.2.1. 2006 시즌
2.3. 2007 ~ 2008 시즌
2.4. 2009 시즌
2.5. 2012 시즌
2.6. 2013 시즌
3. 은퇴 후
4. 여담
5. 연도별 주요 성적
6. 관련 문서


1. 소개


한화 이글스외야수이자 前 한화 이글스 육성군 스카우트.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2001년 청주기공봉황대기 돌풍 주역으로, 노병오, 박정규, 신주영과 함께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2002년 신인드래프트에서 2차 12순위(전체 90번)에 지명되었으나 송광민, 김태완과 마찬가지로 대학행을 선택했고[3], 인하대에서 4번타자를 맡았다. 위의 둘과는 달리 외야수를 봤기 때문에 미래의 외야자원감으로 꼽혔으며 졸업 후 2006년에 입단했다. 장타력이야 이미 검증되었기 때문에 차세대 거포 외야자원으로 촉망받았다.

2.2. 프로 시절



2.2.1. 2006 시즌


당시 한화 외야엔 조로켓, 남연이 형, 고봉사가 자리잡고 있었지만 김인식감독의 꾸준한 신뢰로 많은 타석을 부여 받았다.
시즌 성적은 96경기 '''9홈런 20타점 타율 .203, 출루율 .277, 장타율 .390, OPS .667'''을 기록. 장타는 확실했으나 선구안이 지옥이었다.
제이 데이비스를 제외한 나머지 둘의 성적을 보면 조원우는 106경기 1홈런 25타점 6도루 .267 .332 .305 .637, 고동진은 120경기 4홈런 29타점 16도루 '''.241 .299 .322 .621'''. 연경흠의 일발장타를 감안한다면 고동진 대신 기용하는 것도 나쁘진 않아보이나 그것은 그의 우익수 수비를 모를 때 할 수 있는 생각이다.

2.3. 2007 ~ 2008 시즌


제이콥 크루즈가 입단한 2007년에 들어서 그의 기회는 더 줄어들었는데 역시 조원우와 고동진에 밀려서 빛을 보지 못했다. 결국 2007시즌 대부분은 거의 2군에서 머물었고 1군 기록은 36경기 1홈런 7타점 .260 .305 .377 .682를 기록하였다.
2008년에는 동기이자 친구인 김태완은 빛을 보고 송광민은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본인은 이 해에 '''윤재국''', 추승우, 클락, 송광민에 밀려 별 빛을 보지 못했다. 추승우, 클락, 송광민은 그렇다쳐도 윤재국의 기록은….
2008 시즌 성적은 45경기 4홈런 9타점 .245 .317 .443 .760을 기록

2.4. 2009 시즌


1군 붙박이로 있으면서 주전 좌익수로 출전하면서 주로 2번 타선에 배치되었다. 하지만 선구안이 좋지 않고 약점도 극명해서 삼진으로 말아먹기 일쑤였다. 볼넷이 34개인 반면 삼진은 '''88개'''.
수비에서도 별 좋은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발이 느려서 수비 범위가 좁았던 데다가 타구 판단도 좋은 편이 아니었으며 어깨조차 좋은 편이 아니었다. 쉽게 말해 이영우의 몇단계 다운그레이드. 하지만 좌익수라는 포지션이 수비력이 좋지 않은 선수가 맡아도 별 문제는 없는 포지션이었기에 꾸준히 경기에 나갈 수 있었다.
이 해 122경기 11홈런 47타점 2도루 .253 .337 .414 .751을 기록하였다.
7월 16일 롯데 자이언츠와의 원정경기에서 '''프로야구 통산 2만 호 홈런의 주인공'''이 되었기에, 연경흠 본인에게 있어 본의 아니게(?) 가장 눈부신 해가 되었다.[4]
시즌 종료 후 경찰 야구단에 입대하였다. 복무 중 엄청나고 몸이 불어난 사진이 공개되어 많은 팬에게 충격을 주었는데 이후 공개된 바로는 팔꿈치 수술을 받고 재활중이었다고 한다.

2.5. 2012 시즌


제대 후 팀에 복귀했으나 눈에 띄는 활약은 보이지 못했다. 1군과 2군을 왔다갔다하다가 그대로 시즌을 종료했다.
42경기 62타수 11안타 1홈런 5타점 타율 0.177로 '''커리어 로우를 기록'''했다(…).

2.6. 2013 시즌


개막 엔트리에 포함되었으나 주로 백업요원으로 출전했다. 4경기에 출전했으나 안타 없이 1득점만을 기록하고 2군으로 내려갔다. 타격 능력에서 컨택 능력이 늘어나지 않으면 자리 잡기가 힘들어 보였고, 자신의 포지션이었던 좌익수 자리에는 이미 최진행이 자리잡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결국 선수로서 은퇴 수순에 들어가서 한화 이글스 3군에서 코치 수업을 받았다가 2013년 6월 19일자로 정식 은퇴했다. 만 29세라는 이른 나이에 은퇴를 결심하게 된 것은 계속해서 그를 괴롭혔던 고질적인 무릎 통증과 팔꿈치 부상 때문이었다고... 계속해서 재활에 매달렸지만 회복이 힘들다는 판단 하에 은퇴를 결심했고, 구단에서도 이를 수용했다고 한다. 한화의 좌타 외야수 요원 가운데에서는 두자릿수 홈런을 기록했던 적도 있을 정도로 젊고 가능성이 있던 그였기에 적지 않은 팬들이 그의 이른 은퇴 선언에 아쉬움을 표했다.

3. 은퇴 후


은퇴 후에는 한화의 육성군 스카우트로 활동하다가 2015년 4월 퇴직했다. 이후 안영진과 함께 사회인야구 레슨을 하고 있다는 목격담이 들린다.
2016년 3월, 대전문정중학교의 스포츠 과목 강사로 활동중인 것이 확인되었다.
2017년도 대전문정중학교의 교직을 떠났다.
이후엔 2018년 대전서구유소년 야구단의 감독으로 한화에서 활약했던 외야수이자 현재 코치인 박상규 와 함께 창단 3년차에 불과하지만 양구대회에서 4강 진출, 인제군수배에서는 준우승을 거두는 등 유소년야구대회에서 굵직한 성과를 냈다고 한다..관련기사

4. 여담


  • 야수로서는 체격이 작은 편이었으며 외야수이긴 했지만 좌익수밖에 못 본다는 게 흠이었다. 게다가 리그 전체로 볼 땐 평균 이하의 수비력이었다. 빠른 뱃스피드로 공을 날려버리는 스타일이었으며 실제 그의 타구는 라인드라이브로 자주 날아갔다. 2009년 당시 SK전에서 정대현을 상대하기 위해 대타로 나왔을 때 중계하던 캐스터가 배트 스피드를 김재현에 이은 2위라고 소개했다. 진정한 선풍기가 아닐까 싶다.
올림픽 브레이크 덕분에 야구 경기가 없던 2008년 8월 3일, 해운대로 놀러갔다가 같이 간 이여상이 뜬금 뉴스 인터뷰를 따냈는데, 그 옆에 같이 있던 사람이 바로 연경흠이다. 그러나 이영상의 임팩트가 워낙 강렬해서 연경흠이 옆에 있었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 일본 진출이나 일본 유학을 간 적이 없는데도 일본어를 할 줄 안다. 2009년에 강병수라는 재일교포 선수가 입단했을 때 통역을 맡았다고. 그러나 강병수가 1년만에 팀을 떠나면서[5] 통역 역할도 할 필요가 없어졌다.

5.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삼진
출루율
장타율
wRC+
2006
한화
96
187
.203
38
8
0
9
20
25
0
19
39
.277
.390
89.0
2007
36
77
.260
20
6
0
1
7
7
0
5
16
.305
.377
91.8
2008
45
106
.245
26
5
2
4
9
13
0
12
21
.317
.443
105.5
2009
122
336
.253
85
19
1
11
47
53
2
44
88
.337
.414
91.4
2010
군복무(경찰 야구단)
2011
2012
42
62
.177
11
2
0
1
5
3
0
9
16
.282
.258
56.6
2013
4
6
.000
0
0
0
0
0
1
0
0
3
.000
.000
-131.4
<color=#373a3c> '''KBO 통산'''
(6시즌)
345
774
.233
180
40
3
26
88
102
2
99
183
.310
.393
91.7

6. 관련 문서


[1] 대학 진학으로 인해 실제 입단은 2006년.[2] 한~화 연경흠~ 한~화 연경흠~ 오~오오오오~ 오오오오 이글스의 연~경흠[3] 당시 신인드래프트는 지금처럼 지명권 2년 유효 제도가 아니어서 하위픽은 지명만 해놓고 대학으로 보내는 경우가 있었다. 대학입학에 필요한 전국대회 8강 경력이 없어 진학이 어려울 뻔 했으나 봉황대기 우승으로 극적으로 인하대 유니폼을 입을 수 있었다고 한다.[4] 2만번째 홈런인지 모른 채 그라운드를 돌았는데 당시 1루 수비를 하던 이대호가 축하해줘서 알게 되었다고 한다.[5] 일본 이름은 오오하라 헤이슈(大原秉秀)로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에서 1군 19경기에 출장했으며 야쿠르트에서 방출된 후 마지막으로 한화에 입단했는데 한화에서는 16경기에 나와 타율 .000으로 멸망하면서 1년만에 방출당했다. 이후 일본으로 돌아가서 여자프로야구 코치로 활동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