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우
1. 소개
前 한화 이글스의 야구 선수, 前 kt wiz의 2군 타격코치.
한화 이글스의 프랜차이즈 스타이다. 1번 타자로 활약하며 1번 타자는 안타를 치고 도루하는 똑딱이라는 당시의 고정관념에 벗어난 선수였다. 류지현(야구), 이순철, 이종범, 장성호, 최익성과 더불어 선두타자 홈런이 많은 외야수였다.
수비는 약하지만 타석에서 진가를 발휘하는 장성호와 비슷한 유형의 선수였으며, 도루 능력이 특출하지 않지만 3할을 치면서 출루가 쏠쏠한 박한이와도 비슷한 파워형 1번 타자였다는 점에서도 비슷하다.[7] 양세종, 노상수, 최계훈과 더불어 군 복무 후 급격하게 몰락한 선수다. 계속 꾸준했다면 장성호, 이병규급으로 비교할 수 있었다는점에서 매우 아쉬운 선수.
2. 선수 커리어
2.1. 신인 시절
선린상업고등학교와 건국대학교 체육교육학과(1992학번)를 졸업하고 1996년 한화 이글스의 2차 2순위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 드래프트 순위에서 알 수 있듯 아주 큰 기대를 받은 것도 아니고 기대를 안 받은 것도 아닌(...) 극히 평범한 유망주였다.
이 평범한 유망주가 데뷔 첫 해부터 1군 114경기를 출장한다. 시즌 최종 성적은 '''타율 .269 출루율 .360 장타율 .414 8홈런 39타점 12도루'''. 아주 뛰어난 건 아니지만, 신인 1년차로선 쏠쏠한 활약이었다.
그런데 이같은 활약에도 주목을 별로 못 받았다. 일단 팀 내 최고 유망주였던 1차 지명자 홍원기가 같은 해 데뷔했던 데다가, 정작 팀에서 가장 좋은 활약을 펼친 신인은 이영우도 아니고 홍원기도 아닌 '''송지만'''이라는 매우 알쏭달쏭한 결과였기 때문. 게다가 한 팀에 너무 한꺼번에 신인 유망주가 갑툭튀한 탓인지 이 당시 언론과 팬들은 이 세 선수와 임수민까지 패키지로 묶어 '''신인 4인방'''이라 불렀다. 덕분에 이영우 개인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거기다가 같은 해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가장 센세이셔널한 신인 중 한 명이었던 어느 빵의 황제가 등장하여 크보 역사상 최초의 30-30을 기록했다. 신인상은 당연히 송지만도 아니고 홍원기도 아니고 이영우도 아닌 그분에게 돌아갔다. 그야말로 안습.
어쨌든 이 당시 한화 이글스에 신인 4인방이 한꺼번에 등장할 수 있었던 까닭은 당시 팀 타선이 완벽하게 시망 상태였기 때문. 이전 해인 1995년 한화 이글스에서 20홈런 이상을 기록한 타자는 오직 장종훈뿐이었고, 3할 이상을 기록한 타자도 오직 장종훈뿐이라는 그야말로 눈물겨운 상황이었다(...). 그러니까 2010, 2012년 한화의 투수진이 '''류현진과 나머지들'''이라면, 1995년 한화의 타선은 '''장종훈과 나머지들'''이었던 셈.
이로 인해 강병철 감독은 젊은 선수들에게 적극적으로 출장 기회를 주었고, 덕분에 이영우는 일찍부터 1군에서 주전으로 기용되었다.
1996년에는 부상이었던 장종훈을 대신해 1루수로 팀내에서 가장 많이 출전하였다.
이후 신인 2년차였던 1997년에는 소포모어 징크스를 보이며 '''타율 .202'''로 부진, 1년 만에 주전 자리를 빼앗긴다. 그런데 이영우 대신 주전을 다시 꿰찬 정영규 역시 '''타율 .235'''를 기록하며 이영우와 별로 다를 게 없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신인 3년차인 1998년 정영규는 동봉철을 상대로 시즌 중 트레이드되는데, 동봉철 역시 정영규와 마찬가지로 부진한 모습을 보여 주면서 결국 한화의 코너 외야수 한 자리를 당해 타율 .273의 3년차 이영우가 꿰차게 된다. 그리고 동봉철은 시즌이 끝나고 임창식을 상대로 쌍방울 레이더스에 트레이드된 후 부상으로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2.2. 전성기
이듬해 신인 4년차인 1999년, 그야말로 포텐샬이 대폭발한다. 이 해 성적은 타율 .334 13홈런 49타점 83득점 142안타. 특히 타율은 타격 6위의 훌륭한 성적. 이듬해인 2000년에도 .318로 타격 10위를 차지했고, 장타력도 늘어나 25홈런도 쳤다.
그리고 2004년까지 '''매년 기본이 3할 1푼, 못 쳐도 2할 9푼의 정확성과 잘 치면 25홈런, 못 쳐도 15홈런의 갭파워를 선보이며 맹활약한다.''' 일률적으로 비교하긴 어렵지만, 장성호와 비슷한 타입이었다고 보면 될 듯하다.
전성기(1999년~2004년) 동안의 시즌 평균 성적은 다음과 같다.
- 129.8게임, 142.5안타, 17.7홈런, 60.2타점, 87.7득점, 14도루, 9.2도실
- 타율 .312, 출루율 .410, 장타율 .508
다만 주루플레이는 안습이었다. 팀 사정상 주로 1번, 2번 타자로 출전하면서 도루를 하긴 했는데 매년 15~20개 가량의 도루를 하면서 도루 실패도 매년 두 자리수에 가까왔다는 게 문제였다. 예를 들어, 2004년엔 '''도루 20개'''를 기록하면서 커리어하이를 찍는데, '''도루실패도 12개'''를 기록했고, 심지어 2000년엔 '''7도루 12도실'''을 기록하며 당최 도루를 왜 하는지 사람 알쏭달쏭하게 만드는 주루능력을 선보였다.
이로 인해 당시 팬들 사이에선 이영우가 팀을 위해 도루를 안 하는게 더 낫다는 평가가 절대적이었다. 사실, 일반적으로 도루 성공율이 70% 미만이면 팀에 민폐라고 평가되는데, 이영우는 통산 112도루 81도실로 도루 성공율은 달랑 '''58%'''이다. 덧붙여서, 통산 100개 이상의 도루를 기록한 타자 중 이영우보다 성공률이 낮은 타자는 '''없다'''.
수비능력을 말하자면... 신인 시절에는 중견수를 보기도 했으나 제이 데이비스가 들어온 이후로는 주욱 '''붙박이 좌익수'''였다. 이것만으로 감이 올 것이다. 혹자는 그의 수비범위가 세발자국이라고...
2.3. 몰락
2004년 프로야구 병역비리 사건이 터진다. 사건 초기만 해도 당시 만 31살의 스타플레이어 이영우가 이 사건에 연루되었으리라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나...
당시 병역 비리가 발각된 선수 중에서 이영우가 '''만 31세'''로 최고령자였다. 그러니까 걸어다니는 커트라인이었던 셈(...). 이렇게 나이가 나이인지라 팬들 중에 이영우가 이 사건에 연루되었으리라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사건에 '''연루된 선수 중에서 이영우가 최고의 스타플레이어였다.''' 수치를 통해 비교해보자.
- 사건에 연루된 선수 중 모든 타자(1군에서 단 한 경기라도 뛴 타자. 총15명)의 2004년까지 통산 홈런: 166개
- 이영우가 2004년까지 기록한 통산 홈런: 126개
특히 안습인 점은 이영우는 당시 FA를 단 1년 앞두고 있었다는 것. 게다가 이영우는 비리로 병역 면탈을 했음이 뒤늦게 밝혀져 별도의 사법적 처벌 없이 only 신검만 다시 받으라는 처분이 내려진 것이고, 그 재검을 통해 공익근무[8] 처분이 내려진 것이다. 잘못한 게 맞긴 하지만 운이 지지리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전까지 팀에 대한 공헌도와 FA를 코 앞에 두고 쪽박을 차게된 점(...)을 감안해 구단에서 2005년 연봉으로 2004년보다 8% 인상된 2억7천만을 안겨주었다는 것. 그야말로 베테랑에게 대인배 of 대인배[9] 스러운 한화 구단다웠다.
2.4. 공익근무 후
이런 우여곡절을 거쳐 이영우는 2년간 공익근무를 마친 뒤 만 34살의 나이로 복귀한다. 올드팬들은 부활 이영우를 외치며 응원했으나, 정말로 만 34세 + 2년 공백의 타자가 예전같은 활약상을 보일 것으로 믿진 않았다.
그래도 2007년부터 2009년까지 풀타임 주전은 아니지만 사실상 주전으로 매년 1군에서 80~90경기 가량 출전하며 어느정도 제 몫을 해준다. 이 3년동안의 성적은 타율 .267 출루율 .334 장타율 .378 9홈런으로 백업으론 그럭저럭 성적이긴 한데, 과거 이영우의 활약상을 아는 팬들에겐 그야말로 피눈물나는 성적. 한 마디로 말해 감각이 떨어졌다는 것.
그나마 일말의 기대감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매년 성적이 향상되고 있었다.
- 2007년 - 97게임 타율 .238 출루율 .320 장타율 .313 0홈런
- 2008년 - 89게임 타율 .288 출루율 .345 장타율 .402 2홈런
- 2009년 - 93게임 타율 .277 출루율 .345 장타율 .427 7홈런
복귀 후 3년 동안 숙녀어깨에서 소녀어깨를 거쳐 급기야는 유녀어깨(...)로 3단 변신하는 모습을 보여주며,[10] 결국 지명타자 말고 제대로 소화해낼 수 있는 포지션이 없는 상태가 되었다.
뭐, 이렇게 전부 본인 책임처럼 적어놨지만 김인식 감독의 혹사 역시 이영우가 몰락하게 된 이유중 하나. 김인식 감독 항목 참조.
2007년에는 0홈런으로 마감하고 마는데, 사실 2007년 6월 28일에 기아를 상대로 역전 만루홈런을 때린 바 있다. 군 제대 후 때린 첫 홈런이자 개인통산 3번째 만루홈런이었지만, 3회 쏟아진 거짓말 같은 폭우로 노게임 된 것.
2008년 4월 11일에는 오심으로 인해 홈런 한개를 도둑맞았다. [11]
3. 은퇴
2010 시즌이 시작되고 예전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제몫을 해주면서 팬들은 이영우가 타선에 어느 정도 보탬이 될 것이라 기대했다. 팀 상황이 그다지 좋지 않은 가운데 이도형과 플래툰으로 지명타자 자리를 채워줄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 개막 직후 달랑 3경기 지명타자로 선발 출장하더니 갑자기 4월말까지 행방불명
- 4월 21일 복귀, 열흘동안 거의 매경기 대타로 출장하더니 5월이 되자 행방불명
그리고 이영우가 자취를 감춘 5월부터 입담만 좋은 팀의 신임감독의 예전 이영우와 비슷한 타입의 좌타자를 사달라는 징징거림이 심해졌다. 단, 한대화의 장징징(...)은 오프시즌부터 시작되었다. 단지 이영우가 더이상 통하기 어렵다는 게 확인된 5월부터 기자들에게 장징징을 2배로 시전하기 시작했던 것.
사실 장성호가 한화에 입단하면 이영우의 입지가 필연적으로 좁아질 수밖에 없는데, 둘이 서로 비슷한 타입의 좌타자인데다가 둘 다 수비가 좋은 편이 아니라 맡을 수 있는 포지션이 지명타자, 1루수, 가끔 눈 질끈 감고 좌익수(...)로 완전히 겹치기 때문. 게다가 장성호는 이영우에 비하면 나이도 어리고 몸은 더 튼튼했고 부상으로 신음한 적은 없었다.
그러다가 '''결국 2010년 9월 중순, 현역 은퇴를 선언한다.''' 은퇴식은 9월 18일.
4. 은퇴 이후
이후 대전광역시에서 자동차 정비센터를 차리고, 선린상고 시절에 함께하였던 감독의 소개를 받아 간간히 대전고에서 인스트럭터로 학생들의 타격을 손 봐 주는 정도에서만 야구에서의 인연을 유지하기로 했다고 말했지만, 결국 2012년 친정 팀 한화의 2군 타격코치로 복귀했다.
2군 코치라 아직 크게 눈에 띄는 역할이 없는데, 왠지 2군에 갔다온 타자들이 2군에 갔다온 직후 1주일 간 OPS 1.5를 치질 않나, 타율이 8푼까지 떨어졌다가 부활해서 월간 MVP급 성적을 내질 않나, 2년간 속 썩이던 놈이 갑자기 주전급의 성적을 내던가하는 등의 놀라운 변화를 단기간에나마 보여주면서 '''대체 2군에서 뭘 하고 있는거야!'''하고 팬들이 궁금해하고 있다. 전해지는 말로는 악동님 이상으로 독하게 선수들을 다룬다는 듯.
그리고 팀 분위기 쇄신을 위해 1군과 2군 코치가 변경될 때 1군 코치로 승격되었다.
2014 시즌부터는 육성군 타격코치로 활동할 예정이다.
2015 시즌을 끝으로 전종화, 아베 오사무 등의 코치들과 같이 해임 통보를 받았다.
이후 kt wiz의 2군 타격코치로 선임되었다.
2016년 시즌 종료 후 재계약하지 않게 되며 kt 유니폼을 벗었다.
2016년 말 부동산 사기에 연루되어 해설 자리에서 하차한 김병준을 대신해, 2017년 시즌부터 김연선 아나운서와 함께 KBS대전방송총국의 라디오 야구 중계 해설을 맡게 되었다. 더불어 KBS청주방송총국에서 이해수 아나운서와 청주구장 한화 이글스의 홈 경기 중계방송 해설도 맡고 있다.
2018년 2월경에 옥천군에 새로 생긴 리틀 야구단에서 총괄 인스트럭터를 맡게 됐다.
2018년 중순에 대전에 한 유소년야구단을 차리게된다.
5. 여담
- 일세를 풍미한 공격형 톱타자임에도 주목을 덜 받은 편이다. 그 까닭은 "비인기 지방구단 소속"인 데다가 "하필이면 50홈런이 빵빵 터지던 시대의 중거리형 타자"에 "하필이면 전성기가 프로야구 암흑기"라는 비인기 3종신기를 갖췄기 때문.
- 소집 해제되어 복귀한 후에는 한국프로야구가 인기를 끌어모으고 있었으나 팀도 막장, 본인도 막장인 탓에 WBC 이후 유입된 팬들에겐 낯선 아저씨가 되었다(...).
- 통산 1,275안타로 크보 역대 37위. 순위권이라 하기 민망한 순위이지만 공익 복무로 끌려가기 직전까지 보였던 안타 생산 능력만 놓고 보면 1,700안타도 가능[12] 했을 것으로 보인다. 또 통산 홈런과 도루를 보면 135홈런, 112도루인데, 공익복무를 끌려가기 직전까지 보였던 홈런과 도루능력을 놓고 보면 150홈런과 150도루도 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 타석에서 삼진을 당하건 안타를 치건 잘 웃는 편이다. 타석에서 여유를 찾기 위해 어렸을 때부터 이래 왔다고. 타자판 김광현. 이 때문에 농민미소 혹은 농약미소란 별명도 있다.
- 은퇴 직전에도 언론이 무관심한 편이었다. 은퇴를 발표한 9월 14일 이후 9월 18일 은퇴식까지 인터뷰 기사가 하나도 없었다. 기자들이 구단홍보자료만으로 대충 때웠다. 결국 은퇴일에 일문일답 형식의 인터뷰 하나 달랑 나왔다.#
그리고 이 날 후배들은 11:1로 깨지며 선배가 가는 마지막 길에 거하게 똥칠을 한다.
엔하위키 역시 무관심했다.[13] 이 문서는 은퇴 사흘 전인 2010년 9월 15일에서야 작성되기 시작했다(...). [14]
엔하위키 역시 무관심했다.[13] 이 문서는 은퇴 사흘 전인 2010년 9월 15일에서야 작성되기 시작했다(...). [14]
- 사람좋은 외모와 달리 꽤 성격이 있는 스타일이었다. 농구계의 국보급 센터를 배출시킨 일등공신(?)이다. 중학교 야구부 시절 후배들을 매섭게 갈구곤 했는데 이영우의 1년 후배였던 서장훈이 이를 견디다 못해 전학을 가고 농구를 시작한 것. 이영우의 똥군기가 아니었더라면 서장훈은 농구선수가 아닌 야구선수로 기억됐을지도... 초교땐 야구… 군기 잡는 중학교 선배 싫어 농구로
- 응원가가 매우 슬픈 분위기다(...).
6. 연도별 주요 성적
7. 관련문서
[1] 체육교육학과 (1992학번)[2] 선수생활 대부분을 주전 좌익수로 활약했다.[3] 3년차인 98시즌에 1루수도 겸했지만 지명타자로서 가장 많은 경기에 나왔고, 말년엔 점점 지명타자로서 출전 빈도가 많아졌다.[4] 신인시절인 96시즌을 주전 1루수로서 보냈고, 그 이후로도 경기에 가끔 1루수로 나오기도 했다.[5] (안!타!이영우!)최강한화 이영우~최강한화 이영우~최강한화이영우~X2 [6] 당시 팬들의 공모로 만들어진 응원가였다.[7] 장성호는 98~00 해태시절 3년간 1번타자로 53개의 홈런을 쳤다. 박한이는 삼성 특유의 슬러거 타선에 가려진 숨은 중장거리 타자였으나 팀 사정상 1번 타자의 임무를 도맡아야 했다.[8] 이영우가 부산 아시안 게임 금메달 획득으로 병역 특례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전혀 그렇지 않다. 정대현과 마찬가지로 기자들이 잘못 알고 있는 사례.[9] 단, 군보류 수당이 적용되어 연봉의 25%만 지급되므로 알고 보면 대인배도 아니었다.[10] 사실 복귀 이후 심각한 어깨 부상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이를 알고 있던 모 감독은 아예 한화와 경기할 땐 아예 좌익수 쪽으로 공을 많이 보내라고 했을 정도.[11] 결국 그해 5월 7일에 127호 홈런을 쳐냈고, 이 홈런은 126호를 친 이후 1,325일 만에 생산한 홈런이다.[12] 1,700안타는 역대 5위권에 해당하는 성적이다. 비슷한 타입의 장성호는 2010년까지 1,795안타를 기록하고 2년 후인 2012년 2,000안타 고지를 점령했다.[13] 이 항목이 생성된 2010년은 리그베다 위키도 아닌 엔하위키 시절이다.[14] 원 작성자가 이런 문구를 적어넣은 데는 나름대로 사연이 있다. 바로 이 때가 야빠들이 위키에 진출하여 온갖 야구 관련 항목들을 만들어 내기 시작한 시점이었는데, 문제는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B급, C급 선수들의 항목만 생성되는 와중에 나름 레전드였던 이영우의 항목은 아예 생성조차 되지 않았던 것.[15] 신경현과 박정진 정도가 당시 선수로 뛰고 있었지만 2군에서 기고 있던 탓에 우승 멤버라고 하기는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