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현(1975)

 



'''김재현의 수상 경력'''
[ 펼치기 · 접기 ]

'''한국시리즈 우승 반지'''
'''1994'''
'''2007'''
'''2008'''
'''2010'''

'''아시안게임 금메달(코치)'''
'''2018'''





'''KBO 한국시리즈'''
'''2007 한국시리즈 MVP'''

'''KBO 포스트시즌'''
'''1998 준플레이오프 MVP'''


'''2005 KBO 리그 출루율왕'''


'''김재현의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 펼치기 · 접기 ]



'''LG 트윈스 등번호 7번'''
김재박(1982~1991)

'''김재현(1994~2004)'''

김상현(2006~2007)
'''SK 와이번스 등번호 7번'''
신주일(2004)

'''김재현(2005~2010)'''

박진만(2011~2015)
<color=#373a3c> '''한화 이글스 등번호 85번'''
장종훈(2013~2014)

'''김재현(2015~2016)'''

최계훈(2017~ )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No.88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기술위원회 위원
김재현(金宰炫 / Jae-Hyun Kim[1])
'''생년월일'''
1974년[2] 10월 2일 (50세)
'''국적'''
[image] 대한민국
'''출신지'''
[image] 서울특별시 성동구[3]
'''학력'''
서울성동초 - 신일중 - 신일고
'''가족'''
배우자 김진희(2004년~현재)
슬하 1녀(2007년생)
'''포지션'''
좌익수[4], '''지명타자'''[5]
'''투타'''
좌투좌타
'''신체조건'''
177cm, 79kg
'''프로입단'''
1994년 고졸 연고구단 자유계약 (LG)
'''소속팀'''
[image] '''LG 트윈스 (1994~2004)'''
[image] [image] '''SK 와이번스 (2005~2010)'''
'''지도자 경력'''
[image] 한화 이글스 1군 타격코치 (2015~2016)
[image]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타격코치 (2017~)
'''해설위원'''
SBS ESPN 야구 해설위원 (2011~2014)
SPOTV 야구 해설위원 (2017~)
'''응원가'''
LG 시절 : 동요《모두 다 뛰놀자[6][7]
SK 시절 : 뚜띠 - 짝짝짝[8][9]
1. 개요
2. 선수 경력
2.1. 혜성같은 데뷔, LG 트윈스 시절
2.2. 캐넌의 재기, SK 와이번스 시절
2.3. 은퇴
2.4. 연도별 성적
3. 해설자 데뷔
4. 지도자 시절
5. 해설 복귀
6. 이야깃거리
6.1. 고관절 수술과 지명타자 전향
6.2. 기타

[clearfix]

1. 개요


LG 트윈스, SK 와이번스 소속의 외야수, 지명타자. 2019년 현재는 SPOTV의 야구 해설위원이자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타격코치다. 등번호는 LG 시절부터 7번을 달았다.
선수시절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배트 스피드와 호쾌한 타격 폼[10] 덕분에 힘이 잔뜩 실린 타구를 많이 만들었고, 그 타구가 마치 캐넌같았다하여 '''캐넌 히터'''란 별명을 갖고있다. 타구 궤적이 큰 포물선을 그리지 않고, 낮고 강하게 관중석을 향해 날아가는 라인 드라이브성 홈런, 일명 '''캐넌포''' 또한 그의 트레이드마크.[11]
선구안 또한 훌륭하여 통산 출루율이 타율보다 1할 높아 "사륜안"이란 별명도 있다. 은퇴한 시점에서 통산 사사구 역대 3위.
타석에 들어설 때 나오는 흥겨운 트로트 스타일의 홈런 송이 유명하다.

2. 선수 경력



2.1. 혜성같은 데뷔, LG 트윈스 시절


[image]
[image]
'''90년대 LG 트윈스 신바람 야구의 핵심 선수'''
1994년 2월 신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졸연고 자유계약으로 LG 트윈스에 입단했다. 입단 과정에서 '''오키나와 007 작전'''으로 불리는 유명한 비화가 있는데, 1993년연세대학교 입학이 내정된 후 국제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오키나와에 있던 김재현을 잡기 위해 LG 프런트가 급히 현지로 건너가 시한 만료 직전에[12] 계약한 사건이다. 때문에 이전부터 갈등이 있었던 대학과 프로 팀 간의 스카우팅 관련 논란이 극에 달했고, 입단 TO를 채우기 위해 친구이자 신일고 동창인 포수 조인성연세대학교에 가게 되었다고 한다. [13][14] [15]
데뷔 시즌에 20-20을 달성하면서[16][17]팀의 우승에 기여, 당해 외야수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또한 80타점으로 전체 타점 2위에 올랐는데, 8월중 한때 타점 1위에 등극하기도 했으나 시즌 막판 다소 부진하며 87타점의 양준혁에게 역전당하고 말았다. 팀 역사상 타점왕 배출이 없는 LG 트윈스가 타점왕 배출에 근접했던 사례이다. 1994 시즌은 LG 트윈스가 신인 드래프트에서 팀 역사상 최고의 대박을 친 해로 평가받는데, 그 해 입단한 선수들 중 1차 지명자이자 94시즌 신인왕으로 선정된 유격수 유지현[18]과 2차 6라운더로 입단해 당시 신인 최다 안타기록인 157안타를 기록한 1루수 서용빈[19] 그리고 김재현 셋은 데뷔와 동시에 주전 자리를 꿰차며 팀의 '''V2'''에 크게 공헌했다. 다만 이 시즌 언론에서 김재현이 신인왕 수상이 유력하다는 식으로 분위기를 몰고갔음에도 정작 신인왕 수상을 하지 못하고 물을 먹고 말았다. 고졸신인임에도 리그 역사상 신인 최초 20-20을 달성한 김재현의 임팩트가 굉장히 컸기때문에 당시 대부분의 언론은 김재현의 신인왕 수상을 유력시했지만#당시 기사 정작 유지현이 신인왕을 수상하자 당시 야구팬들의 반응은 상당히 의외라는 반응이 대세였다. 그럴 수 밖에 없는게 당시는 WAR같은 2차스탯이라는 개념 자체가 희박했던 시기였고 실제로 유지현은 득표에서 상당히 근소한 차이로 김재현을 제치기도 했다.[20] 당시 유지현이 신인왕을 수상한 비결로 전 경기 출전과 1번타자로서의 공헌도를 높이 평가받았다는 식으로 기사화가 되긴 했지만, 그 시절만 해도 MVP나 신인왕, 골든글러브는 2차스탯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그저 임팩트 + 클래식 스탯 + 팀 성적 버프로 투표하는게 대세였기 때문에 신인왕 투표 전에는 김재현이 유력하다는 식으로 기사가 많이 나왔지만, 정작 유지현이 수상하는 바람에 김재현이 기자들한테 밉보인게 아니냐는 식의 얘기도 나왔을 정도였다.
[image]
2002년 한국시리즈에서 적시타를 때려낸 후.[21]
그러나 2년 차 였던 1995년 기량 하락 을 시작으로 김재현의 LG 커리어는 여러 차례 위기를 맞았다. 주요 사건으로는 1997년 시즌을 통째로 치료에 매달린 신장염과 2000년 초 선수협 창립총회 참석과 일련의 선수협 관련 활동으로 인한 갈등, 그리고 2002시즌 내내 그를 괴롭힌 고관절 부상 등이 있다. 특히 고관절 부상은 당시 커리어 하이 수준의 페이스를 보이던 그를 시즌아웃도 모자라 현역 은퇴의 기로에 놓이게 할 만큼 심각한 것이었지만, 본인의 강력한 의지로 복귀해 한국시리즈 엔트리까지 들어갔다. 덕분에 대구에서 열린 2002년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대타로 나와 2루타성 타격을 하고 타점을 올리면서도 절뚝거리면서 1루로 간신히 걸어나가 팬들을 감동시킨 드라마틱한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바로 위에서 두번째 사진이 그 순간이다.
부상으로 자리를 비울 일이 많아지자 1999년 30-30을 기록하는 등 맹활약을 펼치면서 등장한 이병규에게 가려지기 시작했다.[22] 고관절은 수술을 통해 치료를 마쳤지만, 2004년 FA 협상에서 구단이 고관절 부상 관련 '각서'[23]를 제시하자 LG와의 협상을 거부하고 SK 와이번스로 이적하였다. LG 트윈스는 보상 선수로 SK 내야수 안재만을 받았다.

2.2. 캐넌의 재기, SK 와이번스 시절


'''SK 왕조를 이끈 비룡의 캡틴'''
SK로 이적한 후 팀의 중심타선을 맡아 맹활약, 2005 시즌 타율 4위, '''출루율 1위'''를 기록하며 지명타자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1998년 이후 7년 만의 수상이자 두번째 전성기를 이룬 쾌거로 화려한 재기를 알렸다.
2006년에는 SK 주장을 맡았으나, 팀 자체가 부진에 빠지며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고, 박재홍과 함께 무너진 팀을 이끌었다.[24] 반대로 2년차 신인 정근우최정의 성장은 김재현 및 나머지 선수들도 왕조를 이끄는 원동력이 된다.
그러더니, 2007년에는 결국 2할도 못치는 극심한 부진 속에 1군보다는 2군에 있는 기간이 더 길었으나 포스트시즌에서 이를 극복하였다. 한국시리즈에서 1,2차전에 3번타자로 출전했던 이진영을 대신하여 3차전부터 6차전까지 3번타자로 기용되어 타율 .348, OPS 1.030, 2홈런, 4타점의 엄청난 활약을 보여 주면서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고, 2007년 한국시리즈 MVP에 올랐다. 당시 두산 투수 임태훈이 "'''던질 곳이 없다ㅠㅠ'''"며 한탄했다는 후문이 있다.
이 해 부임한 은사 김성근 감독과 잠시 동안 좋지 않았던 관계에 트레이드를 시켜 달라고 했을 정도로 감정이 좋지 않았다. 만약 한국시리즈 SK 타선에 김재현이 없었더라면 어지간히 고생했을지도.

2007년 아시아 시리즈 당시 SK 와이번스주니치 드래곤즈의 경기 영상. 투수 야마이 다이스케[25]에게 볼 한 개를 골라낸 다음 스트라이크 존에 들어온 공을 귀신같은 속도로 때려서 홈런을 만든, 김재현의 장점인 선구안과 배트스피드를 여실히 보여준 장면으로, 당연히 캐스터와 해설자들에게 극찬을 받았다.
2009년에는 부상당한 박경완을 대신해 주장[26]으로 취임했다. 신기하게 그 이후 방망이에 다시 불이 붙기 시작해 2009년 막판 SK 연승의 중심으로 활약했다.[27] 특히 9월 8일 KIA전 만루에 타석에 들어서 좌측 폴대를 아슬아슬하게 빗나가는 파울홈런을 쳐 야구계의 속설인 '파울 다음은 삼진'을 떠오르게 했지만, 곧 이를 무색하게 만드는 만루홈런을 터뜨려 1,600안타-2,500루타의 대기록을 달성, 7회 고의사구로 인한 개인통산 1,000사사구까지 묶어 하루에 대기록 3개를 세우며 노익장의 녹슬지 않은 기량을 보여주었다.

2.3. 은퇴


2009년 한국시리즈를 앞두고 2010시즌 종료 후 은퇴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항상 떠밀리듯 은퇴하는 선배들을 보면서 여력이 있을 때 멋있게 은퇴하는 걸 꿈꿨다고. 워낙에 뛰어난 선수인데다 말년 당시 기량도 여전히 출중한 상태였기 때문에, 팬들은 아쉬운 마음에 그의 은퇴를 말리고 싶어했다. 하지만 선수 생명이 걸린 부상에서도 복귀했었을 만큼 확고한 그의 의지를 이길 수는 없었다. 인터뷰에서 '''은퇴를 미룰 생각은 없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도 그는 항상 '''그럴 생각은 없다'''라는 대답만을 들려주었다.
'''자신의 현역 마지막 경기인 2010년 한국시리즈 4차전에서.'''
2010년 10월 15일 인천 문학 경기장에서 열린 삼성 라이온즈와의 2010년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3타수 2안타 1볼넷 3타점을 기록[28]했고, 팀이 스코어 5:9로 이겨서 김재현은 '''1차전 MVP'''로 선정되었다. 그의 한국시리즈 최종 성적은 7타수 2안타 2볼넷 4타점 타율&장타율 .286, 출루율 .444, 시리즈 전적 4-0의 압도적인 우승을 차지한 팀의 일원으로 활약하며 선수 생활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마무리했다. KBO 리그 역사상 데뷔 시즌과 은퇴 시즌을 모두 우승으로 장식한 유일무이의 선수로 남았다.
2010년 12월 27일, "SK 동료들이 나의 야구에 대한 열정을 깨워주었다"는 말과 함께 코치 수업을 받은 뒤 SK에 복귀하겠다고 선언했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은퇴했다. 은퇴한 나이가 35, 한국 나이로 36이다. 이병규, 이호준, 이승엽, 조인성 등 동년배 타자들이 40대까지 커리어를 이어간 것을 생각하면 상당히 이르다. 특히 신일고 동창 조인성은 친구의 은퇴 1년 후 FA가 되어 SK 와이번스로 이적하기도 했다. 아깝게 재회가 무산된 셈.
처음엔 은퇴식을 2011년 4월 중에 가질 예정이었지만, 빡빡한 코치 연수 때문에 계속 미뤄졌다. 2011년 6월 25일 문학 LG전, 드디어 은퇴식 날짜가 되긴 했는데 경기가 우천취소 되면서 그의 은퇴식도 동시에 빗물과 함께 쓸려가게 되었다. 그의 바람이 문학 LG전에서의 은퇴였기에 일부러 LG전에 은퇴식을 치르기로 계획했던 터라 다음날인 26일날로 은퇴식을 미루었지만 장마로 경기가 연이어 취소되면서 물건너 갔다. 어쩔 수 없이 9월 이후에 치뤄질 재편성 잔여경기[29] 중 주말 문학 LG전에서 은퇴식을 하려고 했으나 잔여 경기들이 전부 평일 편성, 결국 은퇴식을 치룬 날은 10월 1일 삼성전이었다. 김성근도 진즉 팀을 떠난 터라, SK팬들이나 2002년을 두 사람과 함께한 LG팬들 입장에선 그저 하늘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하늘아 너 그러기냐?)
김재현은 은퇴와 관련해 LG 트윈스 공식 홈페이지 팬 커뮤니티 '쌍둥이마당'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SK 팬 페이지에는 아이디가 없어 처제 아이디로 올렸다고 한다.
안녕하세요 김재현입니다.

마지막 인사를 드리려고 컴퓨터앞에 앉았는데,
무슨말부터 시작해야할지.....
올 한해 저희 에스케이 와이번스와 마지막 은퇴를 앞둔 김재현 이라는 야구선수를
응원해 주신 여러분께 고개숙여 감사를 드립니다.
이제 야구 선수 김재현은 더 이상 보실 수 없겠지만
제가 17년 동안 사랑한 야구를 그리고 그 세월동안 보잘 것 없는 저를 응원해주시고 성원해 주신 여러분께 몇 자 글로 인사를 드린다는 것이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문득 돌이켜보니 저는 참 행복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데뷔 첫해 야구가 뭔지도 잘 모르던 시절에 우승을 하게 되어 너무도 많은 사랑을 팬
여러분께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엘지트윈스에서 꼬박 10년을 함께했습니다.
고관절 수술을 하게 되면서 다시는 야구를 할 수 없을 수도 있었지만, 제가 사랑하는 야구를 아프다는 핑계로 초라하게 떠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열심히 했습니다. 당당한 모습으로 돌아오려고.
저 자신도 장담할 수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의 믿음과 저를 기다려주신 팬 분께
과연 재기하는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을까.
돌아 왔을 때 팬 여러분이 제 등번호 7번을 들고 잘 돌아왔다고 응원해주시는 모습
아직도 생생하게 제 가슴에 남아있습니다.
그때부터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전보다 훨씬 야구를 절실하게 책임감 있게 소중하게 여기며 운동하게 된 것이... 정말 소중했습니다. 매 타석 타석마다....
정들었던 친정팀을 떠나 에스케이와이번스로 이적 했을때도 저는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낯선 팀에 와서 적응하기 쉬울까 걱정도 했었지만 따뜻하게 환영해주신 우리 에스케이 와이번스 팬 여러분들과 부족한 저를 따라서 인천까지 응원을 와 주셨던 모든 팬 덕분에 다시 마음을 잡아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려 노력했던 것 같습니다.
저에게는 엘지에 있을 때나 에스케이에 있을 때나 팬 여러분들은 똑같이 소중하고 귀한 존재이십니다. 친정팀이라는 추억과 이제는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에스케이와이번스의 나의 소중한 동료들과 아름다운 팬 여러분들께 무어라 제 마음을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많은 분들이 왜 그만두려하느냐 다시 아픈 것 아니냐고 걱정하시는데, 건강에는 아무 문제없습니다. 오히려 이 체력으로는 몇 년 더 뛰고도 남을 것 같지만, 제가 생각한 인생의 새로운 시작을 해야 할 시점이 그리고 좋은 기억으로 떠날 수 있는 시점이 지금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야구선수 김재현으로 지낸 그 순간을 아마 평생 동안 그리워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후회하지는 않겠습니다.
그저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한 야구선수 김재현을 오래 오래 기억해주시면
그것만으로도 감사하고, 행복 할 것입니다.
이제 이런 글을 남길 일도 없을 것 같아 너무 길게 글을 남긴 것 같네요.
두서 없는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리고,
이 순간 까지 저를 응원해주신 사랑하는 아내와 가족들, 그리고 저를 믿고 따라준 우리 선수들과 팬 여러분께 다시한번 깊은 감사드립니다.

여러분! 사랑합니다.
잊지않겠습니다.
덕분에 그동안 행복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은퇴 후 현역 시절 입었던 유니폼과 배트가 SK행복드림구장 안에 위치한 W 갤러리[30] 레전드 플레이어 존에 진열되어 2021년 현재까지 전시되고 있다. 이 외에도 W road 와 구장 곳곳에 김재현의 흔적이 남아있다.

2.4. 연도별 성적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출장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볼넷
장타율
출루율
1994
LG
125
463
.289
'''134'''
(4위)
'''26'''
(5위)
3
'''21'''
(3위)
'''80'''
(2위)
'''81'''
(3위)
21
55
'''.495'''
(4위)
.376
1995
116
381
.255
97
19
3
15
56
55
13
45
.438
.348
1996
117
414
.283
117
20
0
11
60
57
7
49
.411
.372
1997
1군 기록 없음
1998
122
482
.295
142
'''31'''
(4위)
3
16
76
70
8
47
.471
.364
1999
121
453
.287
130
17
1
21
94
75
8
54
.468
.371
2000
131
464
.308
143
'''32'''
(4위)
2
11
62
83
6
81
.457
'''.415'''
(5위)
2001
126
428
.325
139
29
1
8
61
81
10
88
.453
'''.443'''
(4위)
2002
98
296
.334
99
14
0
16
61
50
11
54
.544
.462
2003
50
143
.308
44
8
0
6
21
13
0
17
.490
.392
2004
120
373
.300
112
18
3
14
62
56
1
66
.477
.415
연도
소속팀
출장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볼넷
장타율
출루율
2005
SK
120
400
'''.315'''
(4위)
126
17
0
19
77
63
2
80
.500
'''.445'''
(1위)
2006
109
356
.287
102
16
1
8
51
42
5
76
.404
'''.418'''
(2위)
2007
84
204
.196
40
11
0
5
19
26
4
43
.324
.337
2008
108
297
.310
92
17
3
10
60
46
4
59
.488
.426
2009
112
289
.301
87
18
0
10
51
45
8
63
.467
.433
2010
111
267
.288
77
17
0
10
48
41
7
52
.464
.404
<color=#373a3c> '''KBO 통산'''
(17시즌)
1770
5710
.294
1681
310
20
201
939
884
115
'''931'''
(5위)
.461
.402

3. 해설자 데뷔


[image]

2013년 시즌부터 SBS ESPN에서 해설가로 일하게 되었다. 초보 해설자이면서도 꽤나 달변가의 면모를 보여주면서 일단은 호평. 그리고 5월 17일 롯데 자이언츠SK 와이번스의 경기가 SBS 중계로 잡히면서 처음으로 지상파 해설을 맡게 된다.
평가가 상당히 엇갈리는 해설 중 하나인데, 일단 목소리 톤은 상당히 좋다는 평. 해설가 데뷔 첫해임에도 긍정적인 평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경기 중에 화장실에서 선수를 만나 이야기를 하는 썰을 자주 푼다. 그리고 출신은 속일 수 없는지 LG 트윈스의 경기에서 실책 또는 아쉬운 플레이가 나왔을 경우 해설 중에 한숨을 쉬는 모습이 포착되며 SK에도 우호적인 해설을 많이 하는 편이라 LGSK의 상대가 된 팀의 팬들은 꺼리는 반응을 보이고, 특히 롯데 팬들은 김재현 해설을 굉장히 싫어한다. '''차라리 양준혁이 낫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 또한 어법에 안 맞는 말을 자주 구사하여 답답하다는 평도 많다.
스포티비로 이적한 후에는 표현력도 개선되고 편파중계 문제도 나아졌다는 평과 여전히 고질적인 문제점이 남아있다라는 평이 갈린다. 그렇지만, 경험이 쌓여가면서 초창기보다는 확실히 나아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4. 지도자 시절


[image]

[image]
2014년 11월 11일 김성근 감독의 부름을 받고 한화 이글스의 코치로 부임했다. 코치로서 첫 발을 뗀 것이니만큼 팀에 얼마나 보탬이 될지는 미지수지만 김성근 감독 밑에서 선수 생활을 한만큼 감독이 원하는 것을 잘 알고 있고, 현역 시절 깔끔한 타격폼과 빠른 뱃 스피드 위주의 타격 스타일을 보였으며, 은퇴 기념으로 구단이 보내주는 몇 개월짜리 해외 나들이가 아닌 자기 돈을 들여가면서 장기 연수를 받을 정도로 열성이었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코치로서 한화 선수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높다.
사람들은 더 이상 김재현의 해설을 안 들어도 된다는 것에 기뻐하였고(...) LG 트윈스 팬들은 이상훈에 이어 왜 또 레전드 출신 코치를 타팀에 빼앗기냐고 프런트에 불만을 늘어놓았다.
흥미로운 점은 두산 2군 투수코치가 된 야생마와 한화 코치로 온 캐넌 사이의 공통점이 있는데, 둘 다 LG의 1994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었으며, 모두 6668587667 초반에 LG에서 SK로 이적하여 은퇴했다는 것이다. 거기다가 같은 시기에 원 소속 팀이 아닌, 완전 다른 팀의 코치로 프로 현장에 복귀했다는 것도 일치한다. 차이점은 이상훈은 잠실 라이벌 팀 2군에서 코치 역량을 검증받은 후 친정으로 복귀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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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30일 일본 오키나와 마무리 훈련을 마치고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하는 모습.
2016년 시즌 후 사임했다.기사 일본인 코치 3명도 김성근 감독의 야구관에 비판을 표하며 스스로 물러난 것으로 보아, 김재현도 비슷한 이유로 결별했을 가능성이 크다.
사임 후 삼성 라이온즈가 그에게 김한수 타격코치의 감독 승격에 따라 공석이 된 1군 타격코치직을 제의했으나, 서로의 입장 차이가 있어서 영입이 힘들다는 기사가 떴다.

5. 해설 복귀


2017 시즌부터 SPOTV에서 다시 KBO 리그 해설을 하고 있다. 해설은 전체적으로 SBS Sports 시절보다는 많이 나아지고 있다는 평. 게다가 해설할 때의 톤과 목소리가 여전히 좋아서 평가가 확실히 좋아졌다. 사투리가 문제가 되는 해설자들과 달리 언어 구사력 및 어휘 선택 등의 문제이기에 개선의 여지가 있었고 실제로 그렇게 되고 있다.
현직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타격코치답게 세세한 타격 분석 위주로 해설한다. 다만 몸 담았던 LG 트윈스, SK 와이번스, 한화 이글스 경기 중계를 하게 되면 추억팔이도 상당히 많이 하는 편. 특히 코치 시절 지도했던 선수들에게는 애정 어린 쓴소리도 자주 한다.
그러나 아직도 답답하고 문장의 흐름이 부자연스러운 해설을 하여 까이고 있고 때로는 편파적 이라는 느낌이 든다고 평가가 있다. [31]

6. 이야깃거리



6.1. 고관절 수술과 지명타자 전향


고관절 부상[32]으로 선수 생명이 끝났다라는 말까지 나왔지만, 수술을 받고 기적적으로 재활에 성공한 케이스. 일반인이 아닌 운동선수인지라 무리하다 재수술을 할 수도 있었다고 카더라. 그러나 원래 포지션인 외야수 수비는 거의 보기 힘들게 되었고, 이후 지명타자로 주로 출장했다. 부상 복귀 이후에도 수비에 많이 나섰다면 은퇴가 더 일렀을 수도 있다. 매년 20도루 이상은 가능했던 준족이었지만, 수술 이후 도루 능력을 상실한 것도 아쉬운 점. 헌데 지명타자 전환 이후 은퇴시즌까지 통산 성적을 보면 알겠지만 도루숫자가 매년 5개 ~ 8개 정도를 꾸준히 기록한걸 보면 그럭저럭 준수한 발은 유지한듯 하다.
사실 컨디션이 가장 좋던 시절에도 우수한 타격과는 별개로 외야 수비력이 장성호, 김기태처럼 좋지 못했던 만큼 허벅지 수술 이후 지명타자에 전념한 것은 본인 커리어를 위해서도 잘 한 일이다. 1990년대에 LG 트윈스에서 뛰었을 당시에 상당한 미남으로 팬들에게 인기가 많아 잠실 3루 외야쪽 좌익수 자리가 홈팀 자리보다도 먼저 찼다고 알려져 있지만, 정작 거기에 모여있던 팬들도 수비력에 대해서는 좋은 소리를 하지 않았다. 2005년 SK 와이번스 입단 후 2010년 은퇴까지 6시즌을 치르면서 소화한 수비이닝은 고작 24이닝으로, 그마저도 대부분 교체로 인한 대수비 출장이었다. 2005년과 2006년은 수비 출장 기록은 없고, 2007년 중견수로 1경기 2이닝, 2008년 우익수로 2경기 11이닝, 2009년 1루수와 좌익수로 각각 4경기 7이닝과 2경기 2이닝, 2010년 1루수와 좌익수로 각각 1경기 1이닝씩 나섰다. 그래도 수비 연습은 꾸준히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2009시즌 1루 '''대수비'''로 나와 그것도 플라이를 놓치는 '''실수'''를 저질렀고, 그 후 수비 연습도 안 끼워준다며 한숨을 쉬기도 했다(…). 2010시즌에도 한번 좌익수로 나온 적이 있었다. 당시 유격수를 보던 김연훈이 좌익수 수비 위치까지 달려가 플라이를 잡아냈는데 그때 김재현의 표정이 오묘(...)했다.
고관절 괴사의 원인[33] 중에 약물이 있기 때문에 즉각적인 장타력 상승을 위한 스테로이드계 약물 복용이 의심되는 선수 중 하나로 지목되곤 한다. 하지만 김재현의 홈런 커리어 하이는 21개를 친 94년[34] 데뷔 해와 99년[35]으로 발병 시점에 비해 상당히 과거의 일이다. 발병 직전 시즌에는 오히려 홈런을 8개 밖에 못 쳤을 만큼 장타력이 떨어져 있었으므로 약물 복용설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또한 약물 복용의 대표적인 부작용인 급격한 체중 증가 또한 현역을 넘어 은퇴한지 10년이 다 되어가는 현재까지도 김재현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다. 게다가 SK 와이번스 구단부터가 아시아 시리즈에 두 번 참여하면서 도핑테스트도 받았기 때문에 KBO 팀 중에선 약물에서 그나마 깨끗한 팀일 가능성이 높다. 결국 김재현 약물설은 호사가들의 의혹일 뿐 확실히 알려진 바 없는 음모론 수준에 가깝다. 그래도 LG에 있을때는 두 자릿 수 홈런을 곧 잘 치고 3할 타율도 쓰고 그랬다. 단지 구장이 국내에서 가장 넓은 '''잠실 야구장'''이라 손해 볼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하게 비슷한 케이스로 성적을 좀 까먹어도 어마어마하게 기록을 쓴 동갑내기 라이벌 심정수[36] 김동주도 비슷했다.[37]
오히려 이 고관절 부상에 가장 유력한 요인으로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소싯적 문란한 사생활(…)이다. 1990년대 후반 LG에서 심재학, '''최향남'''[38] 과 더불어서 가장 잘 노는 선수였던 만큼 ''', 나이트''' 등 목격담도 수두룩하며, 고관절 악화가 과다한 음주 등에 의해 발생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약물보다 오히려 가능성은 높은 편이다. 일례로 당시 한 집에서 같이 살던 장인어른[39]이 참다못해 김재현의 차 키를 압수했다는 유명한 카더라가 있고, 가끔 구리 시내에서 LG 2군 경기장을 가기 위해 택시를 타면, 나이 지긋하신 기사분 중에 젊을 때 김재현이 워커힐에서 술이 쩔어서 택시를 타고 숙소로 데려다줬다는 증언도 나온다고 한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서 김성근 감독과 그 당시 LG로 트레이드됐었던 양준혁을 만나 많은 걸 배웠고[40], 그 이후로 LG의 정신적 리더로 발돋움하였다[41].
그리고 김재현의 고관절 부상지명타자 전업은 앞에서도 말했듯 이병규에게 밀리는 계기를 제공[42]했으며, SK에서도 플래툰 시스템으로 묶이면서 누적 스탯을 상당히 손해봐야 했다.

6.2. 기타


  • 잘 알려지지 않은 흑역사로, 재활 중이던 2003년에 음주측정 거부로 입건된 적이 있다.[43] 문제는, 그 전에 이미(1995년) 음주운전하다가 중앙선 침범해서 추돌 사고를 낸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나마 사람을 치지 않아서 다행이기 망정이지 한 번 그런 사고를 내고 또다시 그런 일을 저질렀다는 것은 쉴드의 여지가 없는 악질 범죄다. 1995년 음주운전 당시에는 사고가 난 5일 뒤에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올스타전에 출장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같이 올스타전에 출장하기로 예정된 홍현우는 폭행 혐의로 구속되었다가 풀려났지만, 한화 이글스정경훈[44]으로 대체되었었다. 2010년대 중후반인 현재야 시민 의식이 개선되어 오히려 단순 폭행보다도 음주운전이 더 질이 나쁜 범죄로 취급되지만, 90년대2000년대 초반 정도까지만 해도 사회적으로 음주운전에 대한 인식이 매우 미비했기에 벌어진 촌극. 2005년 김상혁의 그 유명한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하지 않았다 발언, 잇따른 음주운전 사고로 인한 정부 차원의 적극적인 인식 개선 노력 등 여러가지 요인이 겹쳐 오늘날처럼 음주운전이 중범죄라는 인식이 잡히게 되었다. 요즘 저랬으면 임의탈퇴까지도 가능한 중범죄이고 2017년에는 앞으로 KBO에서 음주운전자들에 대해 선수 자격을 박탈하겠다는 의사까지 표시할 정도로 처벌이 강력해졌으니, 시대를 잘 타고난 어찌 보면 본인의 표현대로 운이 좋은 선수.
  • SK 선수였던 이진영LG로 옮긴 후 SK와의 홈 경기 때 SK 선수들에게 찾아와 "LG 선수들은 팬서비스를 위해 항상 펜을 들고 다녀. 사인해 줘야 하거든."이라고 말하자, 옆에서 보고 있던 김재현이 "야, 팬들에게 싸인이 아니라 승리를 줘라."는 말을 하여 이진영을 한 큐에 데꿀멍시킨 적이 있다. 이는 OBS 불타는 그라운드에 방송된 장면.[45]
짤이 처음 나온 2000년대 후반에는 성적은 제대로 못 내면서 연예인 행세만 하고 다니는 선수들에 대한 일침으로 주목받았지만, 팬 서비스의 중요성이 부각되기 시작한 2010년대 중후반부터는 이진영의 발언 또한 팬을 대하는 선수들의 기본 자세로 재평가를 받게 되었다. 세월의 변화를 엿볼 수 있는 부분. 그리고 김재현이 당시 저렇게 말하긴 했지만, 왕년의 잠실 아이돌답게 팬 서비스에도 결코 소홀하지 않았던 선수였다. 후배 이진영 역시 팬서비스는 좋은 편이였다.
  • 쓴소리의 대가. 워낙 쓴소리를 잘 해서, 앞서 말한 이진영을 단번에 데꿀멍시킨 승리 발언은 뭐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다. 하지만 어쩌면 그런 똑 부러진 성격 때문에 친정인 LG 프런트에 제대로 찍혔을 지도.
  • 목소리가 대단히 좋은 편이다. 해설자로서 첫 시즌을 보냈을 때 호평받는 이유 역시 거북하지 않게 나오는 목소리 덕분일 것이다.
  • 해설자 시절 정말 말도 안 되는 비문 표현이 많아서 당당히 최악의 해설자로 꼽혔다. 특히 김정준과 더블해설이라도 하는 날에는 늘 포털사이트 중계창 댓글에는 둘의 해설을 욕하는 댓글이 폭발했었다.(...) 반대 예로는 양준혁 위원 & 이동근 아나운서가 있는데 양 위원[46]은 그렇다 치는데... 이 위원은 왜인지는 의문. 당시에도 가끔은 정우영 아나운서 톤이 비슷하다고 해서 까이는 것도 그럴듯하다.
  • 조인성과 신일중, 신일고 동문이며 둘이서 신일고 야구부의 26연승을 이끌었다. 여담으로 조인성은 중학교 때부터 앉아쏴를 시전했다고 증언했다. 사실 '앉아쏴'는 당시 신일중 감독이었던 양승호의 작품인데, 당시 조인성이 비만이라 제대로 일어나지를 못해서 앉아쏴를 가르쳤다고 한다(...). 그리고 함께 LG의 한국시리즈 경험을 한 적 있다. 이듬해는 6668587667가 시작되는 것도 같이 하였다.

  • 워낙 LG와 SK 양 팀에서 쌓은 스탯이 출중한지라 마구마구 게임에서 어느쪽의 레전드로 나오는지가 논란거리였는데 결국은 LG 레전드로 나왔다. 아무래도 출장연차나 누적 스탯에서 LG 시절이 앞섰기 때문이었던 듯. 더구나 홈런 커리어 하이가 94년과 99년의 21홈런이고 통산 타율이 3할에 육박하며 장타율이 4할 6푼인 전형적인 교타자를 카드 팔아먹기 위해서 파워형으로 내놓았다. 덕분에 LG올, M-L올, LG 세트덱 유저들에게 거의 필수 카드가 돼버려서 김재현 레전드카드는 한때 300만 거니가 넘는 고가에 거래되기도 했다. 뭐 살 사람은 다 산 지금은 싸다. 이후 본래 가장 출전이 많았던 좌익수로의 듀얼 포지션도 추가.
2014년 듀얼 레전드 추가로 SK 레전드 카드도 추가 되었다. 능력과 포지션 모두 기존의 레전드와 동일.[47]
최고등급 카드인 블랙도 LG/SK 전부 나왔다.[48] 게다가 포지션도 레전드와 똑같이 우익수에 좌익수 듀포까지. LG 카드는 현역시절과 유니폼은 맞는데. SK 카드는 초기 입단 했던 푸른색 유니폼이지만, 이미지 컷 타격자세는 붉은색 유니폼 그림...
  • 박동희 기자와 인터뷰가 올라왔다. 여기서 그는 2007 시즌이 끝나고 자신을 트레이드해 줄 것을 김성근 감독에게 직접 요청했다고 한다. 인터뷰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그동안 사람들이 막연히 김성근 감독 부임 초기에 김성근 감독과 약간의 마찰이 있는 정도로만 알려졌지만, 김재현의 인터뷰에서 김성근 감독과 매우 심각할 정도의 수준의 불화가 있음이 확인되었다. 물론 김재현이 마음을 다잡고 야구에 전념하여 2007년 한국시리즈 MVP까지 탔지만. 그리고 인터뷰 말미에서 2009년 최정을 패전투수로 만든 625 대첩 때문에 결과론적으로 후반기 막판에 연승 신기록을 세우고도 정규시즌 1위를 못한 것을 지적했다. 그 경기가 1년 농사를 좌우하는 중요한 경기임을 역설하면서 김성근 감독의 실책임을 시사하는 뉘앙스를 풍겼다. 다만 이 인터뷰만으로 '김재현과 김성근이 실제로는 견원지간이었다!'라고 보는 것은 지나친 억측이고, '그 다음 해 삼성과 한국 시리즈를 보고 그런 야구를 하고 싶어 지도자의 길을 걷겠다'고 한 점, 저렇게 심각한 불화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일 존경하는 지도자중 한 명으로 뽑은 점을 통해 실제로는 애증관계라고 보는 것이 옳다. 2015년 김재현이 한화 이글스 1군 코치를 맡아 다시 한 번 김성근 밑에서 야구를 하게 된 점 때문에 적어도 증오하는 사이는 아니라는 것이 확실히 입증된 상황.[49]
  • 컴투스 프로야구 2012의 02년 레전드 카드로 올라왔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사진이 SK때 사진이다.
  • '나는 야구감독이다'에서는 05김재현이 SK덱 코레기(...)로 꼽힌다.
  • 은퇴 후 코치 전향에 대해 여러 모로 말이 많았다. 일단 그가 선수 생활을 시작하고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룬 LG 팬들은 은근히 그가 LG로 돌아와서 코치를 해 줬으면 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 SK 팬들은 당연히 SK로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김재현은 은퇴 후 해설자 생활을 거쳐 한화 이글스의 코치가 되었다가 2년만에 물러났다. 그리고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 2016년 이상훈이 LG[50]로 돌아오게 되면서 캐넌의 복귀 역시 기다리는 LG 팬들이 많았다. 근데 진짜로 김성근과 결별하면서 2016 시즌 후 계약 만료도 아니고 스스로 한화의 코치직에서 사임했다. 하지만 LG 프런트가 야생마처럼 김재현을 다시 안을 수 있는지 의문이다. 단 2017년 LG 홈 개막전 후 1994년 LG 우승멤버들의 회식 때 유지현과 함께 김재현도 같이 합석하기는 했다. 야구팬들이라면 모두가 아는 대로 유지현과 김재현은 선수시절부터 서로 성향이 정반대라 너무 맞아서 사이가 안 좋았고 은퇴 뒤에도 김기태가 LG 감독으로 있을 때 김재현이 해설위원 자격으로 구장을 찾아왔다가 유지현이 대놓고 언짢은 표정을 지어서 김기태 감독까지 무안하게 만들기도 했다.[51] 김재현이 LG 코치를 하려면 유지현이 LG를 떠나야 한다는 농담이 괜히 나온게 아니다. 2017년 APBC 대표팀에 코치로 함께했을 때 서로 "지현씨", "재현씨" 하고 호칭한걸 보면 여전히 서먹하다는 걸 알 수 있다.[52] 2019년 1월 9일에도 94년 우승멤버들 모임에 전원이 모이면서 자연스럽게 유지현과 자리를 함께했다. 기사참조 최근 들어서는 모임에서 자주 만나는 것도 그렇고 유지현 코치와의 소통도 많이 늘어난 모습들이 계속 보이고 있어서 '김재현과 유지현은 견원지간'이라고 보는 시선이 많이 줄어들었다. 2020년 현재에도 김재현 위원이 해설하는 도중 유지현 코치에 대한 칭찬을 종종 한다.

[1] WBSC 등록명.[2] 호적상 1975년생. 하지만 실제로는 1974년생이라고 한다. 기사 참조.[3]광진구. 그러나 성동구는 아직 존재하고, 1995년 이전까지 성동구 소속이던 화양동, 중곡동, 광장동, 구의동, 자양동, 군자동, 능동 등이 광진구로 분리되었다.[4] 마구마구의 영향으로 그가 전성기때 우익수를 본 줄 아는 사람들이 많지만 2002년 고관절 대퇴부 부상을 입기 전의 그의 외야 포지션 출장 비중은 좌익수가 압도적이었으며, 실제로 우익수를 본 적은 양준혁이 LG에 있던 시절인 2000년 ~ 2001년 도합 2년이 전부다. 하지만 2000년에도 거의 좌익수로 많이 나왔지 그해 플레이오프때부터 우익수를 보기 시작했다. 참고로 데뷔 당시에는 중견수로 키우려고 하였으나 타구 판단을 비롯한 모든 면에서 부실한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에 좌익수로 자리잡게 되었다. 여담이지만 1990년대 LG 트윈스의 홈경기가 열린 잠실에는 유독 3루쪽 외야가 먼저 자리가 찼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바로 좌익수 수비를 나섰던 김재현 때문이라고 한다.[5] 고관절 부상을 당한 2002년 이후 은퇴할 때까지 사실상 지명타자로 고정되었다. 사실 부상 이전에도 워낙 형편없는 수비력 때문에 지명타자로 꽤 나온 편이었다.[6] 날려라 날려라 김재현↘~ 날려라 날려라 김재현↗~ 날려라 날려라 김재현↘~ 날려라 날려라 김재현~[7] 이후 이 응원가는 김상현에게 넘어간다.[8] 따단딴단 따~라라라 김재현! 따단딴단 따~라라라 김재현! 날려라 안타! 날려라 홈런! 캐넌히터! 김!재!현! 짠짠짠짠 짠짠짠짠 짠짠짠짠 홈!런! 짠짠짠짠 짠짠짠짠 짠짠짠짠 홈!런![9] 이 응원가는 양성우가 물려받았다. [10] 코나미컵에서 일본 해설자는 김재현의 타격 폼을 보면서 '가장 완벽하다'라고 극찬했을 정도.[11] 현역/은퇴 선수 중 장효조와 가장 유사한 타격폼을 갖고 있는데, 사실 수많은 타자들이 벤치마킹한 모델이지만 감히 따라하기조차 쉽지 않다. 빠른 배트 스피드와 라인드라이브 타구가 많이 나오는 특징 또한 유사하다. 단 방망이를 굳이 짧게 잡지 않는 것은 차이인데, 컨택능력은 장효조 쪽이, 장타력은 김재현쪽이 낫다고 봐야하겠다.[12] 이 당시에는 고졸 선수는 지명 절차 없이 무한정 계약이 가능했고, 대신 일정한 날짜 내에서만 계약할 수 있었다.[13] 이 당시 공식적인 계약금은 1억원이었으나, 실제로는 더 많았다고 한다. 거기다 고대행이 확정된 김동주에 3억원 베팅을 한 구단이 있다는 설이 퍼지자 그게 사실이라면 김동주보다 한푼이라도 더 받는 조건으로 계약했다고 한다. 그러나 김동주는 예정대로 고대로 갔다. [14] 원래 고대가 더 좋은 조건을 제시했으나 부친의 뜻에 따라 연대로 가려고 했다고 한다. [15] 4년 선배이자 프로 입단 동기인 유지현은 대학교 졸업반때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해 계약 협상시 손해를 본 케이스인데, 아마추어 내내 국가대표 고정 멤버에다 대졸 1번픽으로 대부분 전문가들이 억대 계약을 예상했으나 이에 못미치는 7천5백만원에 계약하였다. 거기다 팀이 007작전까지 해가며 비싼 몸값에 고졸 후배를 모셔온데다 팀 레전드인 김재박의 상징적인 등번호 7번도 김재현에게 돌아가면서 유지현 입장에서는 빈정이 상할 수 밖에 없었고 이 둘은 시작부터 미묘한 관계로 입단 동기가 되었다. 유지현은 신인왕으로 위안 삼았다고 봐야겠다. [16] 재미있는 건 김재현의 20홈런을 허용한 상대 투수가 SK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이호준이었다는 사실. 당시 해태 타이거즈 투수였던 이호준은 이후 부상으로 타자로 전향했다. 그래서였을까. 김재현의 은퇴식에 시구를 맡은 선수 역시 이호준이었다.[17] 현재까지도 '''KBO 리그 역대 최연소 20-20 가입 기록이다.''' 당시 김재현의 나이는 만 18세 11개월 5일[18] 입단 동기임에도 유지현과는 사이가 원래 그리 좋지 못한 데다가, 결정적으로 LG 시절 선수협 창단 이슈로 크게 틀어져서 김재현과 유지현이 서로 은퇴를 한 2010년대 초중반까지도 사이가 안 좋았다. 자세한건 하단 서술[19] 이 기록은 2017년 이정후에 의해 깨지기 전까지(179안타) 무려 23년 간 최고 기록이었다. 다만 서용빈이 뛰던 당시는 1시즌 경기수가 지금보다 적은 126경기였다. 이정후도 실제로 서용빈의 안타 기록을 뛰어넘은 것은 128경기째이다.[20] 물론 클래식 스탯만 따져도 유지현은 신인왕으로 손색없는 성적을 올렸다. 전 경기에 출전했으며 타율 .305와 15홈런 51타점 51도루로 신인 시즌이 무려 본인의 커리어 하이 시즌이다. WAR에서도 해당 시즌 김재현보다 우위에 있다.[21] 오른쪽은 김용국 당시 3루 코치.[22] 팀 커리어로는 김재현이 한국시리즈 우승 4회로 앞서지만, KBO 통산 기록은 안타와 타율같은 클래식 스탯과 수비력에서 이병규가 앞서고 국가대표 커리어도 이병규가 낫다. 다만 김재현이 홈런과 OPS에서 우위를 보이고, 볼넷은 거의 2배 가까이 앞서 있어 타자로서의 생산성은 김재현이 더 낫다. 실제로 wRC+는 이병규가 119.2이고 김재현이 140.1로 상당히 앞서며 oWAR도 이병규 17시즌 55.26, 김재현 16시즌 54.42로 별 차이가 없다.[23] 요약하자면 경기 중에 쓰러져서 병원에 실려 가도 구단은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내용. '''생명의 위험'''을 느낀 김재현은 당연히 SK로 이적해 버렸다. 그리고 트윈스는 한없이 나락으로 빠져들었다.[24] 이 해 타율은 0.287에 그쳤지만 출루율은 무려 '''0.418'''을 기록하며 해당 부문 2위에 오르는 등 나쁘지 않은 모습을 보여줬다. 거기다가 2006년은 KBO 역사상 유례없는 투고타저 시즌이었다. 박재홍의 경우 타율 0.259로 부진했다고 서술되어 있었으나 WAR의 경우 4.80을 기록하며 팀 내 1위였다.[25] 그 해의 2007년 일본시리즈에서 퍼펙트 게임까지 1이닝을 남겨놓았으나 오치아이 히로미츠 감독과 모리 시게카즈 코치의 결정으로 이와세 히토키에게 마운드를 내줘야 했던 투수이다.[26] 박경완은 이 해 광주 원정 경기 때 아킬레스건 부상으로 시즌 아웃이 되며 백업포수인 정상호가 포수로 첫 풀타임을 뛰게 된다.[27] SK 막판 대약진의 주역 김재현, KIA의 돌풍을 이끈 김상현, 그리고 WBC에서 대활약한 KIA의 이용규 등 LG 출신 선수들이 2009년 한국 야구의 주역으로 떠오르면서 남 좋은 일만 해준 LG 트윈스 팬들은 속이 쓰렸을지도. KIA나 SK의 팬들에게 '아리가또 LG', '믿고쓰는 쌍둥이표' 등 감사 아닌 감사를 받았지만 정작 팀은 2009년을 7위로 마무리한 LG 팬들의 마음은 정말 이루 말할 수 없겠다.[28] 3:3의 동점 상황에서 흔들리는 오승환에게 적시타를 날려 제대로 일격을 날렸다.[29] 8월 2일~4일 문학 LG전은 코치 연수 스케줄과 맞지 않아 불가능.[30] SK 와이번스의 구단 역사관으로 인천야구의 변천사와 SK 와이번스 히스토리, 레전드 플레이어존 및 우승 트러피 등이 전시되어 있다.[31] 해설 자체는 괜찮아서 해설 능력으로는 비판을 그렇게 많이 받지는 않는 것 같다.[32] 정확한 병명은 대퇴골두 무혈성 괴사.[33] 고관절 괴사의 정확한 원인은 잘 밝혀져 있지 않다. 스테로이드약물이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곤 하지만 '''스테로이드와 관련 없는''' 일반인 중에서도 고관절 괴사가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34] 당시 엄청난 투고타저라서 홈런 5위권이었다. 1위는 25개를 친 당시 방위병 출신인 '''김기태'''.[35] 이 해는 KBO 역사상 손꼽히는 타고투저 시절이었다.[36] 단, 심정수는 현대로 트레이드되어 잠실에서 실질적으로 있던 시기는 약 7년에 불과했다.[37] 김동주는 풀타임으로 뛰고도 3-4-5 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운 것은 덤이다.[38] 특히나 최향남의 경우 그 유명한 '''해태'''에 지명받은 선수였다. 그 시절 놀기 좋아라 하는 성격인데 팀은 80년대 똥군기시절이고, 툭하면 거의 줄빠따 맞기 일쑤였다. 오죽하면 해태의 빡센 군기를 피하려 현역병으로 군문제를 해결했을 정도.[39] 참고로 김재현의 장인은 코스닥 상장기업이자 동국제강 제1협력업체인 기전산업의 김종원 회장.[40] 여담으로 이듬해 2002년 한국시리즈에서 김재현과 양준혁은 서로 적으로 만난다.[41] 클로저 이상용의 등장인물인 안준민이 이 시기의 김재현을 모티브로 했다는 추측이 있다.[42] 이병규도 역시 LG 2기 시절 국내로 복귀 했을때는 2년간은 풀타임 외야수 1년은 지명타자와 외야를 겸업했으며, 나머지 시즌에는 아예 지명타자로 전업을 했다.[43] 당시 김재현의 차량엔 코치였던 정삼흠이 동승하고 있었는데, 안 그래도 무능한 코치로 팬들 사이에서 원성이 자자했던 정삼흠은 이 일이 결정적인 계기가 돼서 시즌 후 LG의 코치에서 잘렸다.[44] 그리고 정경훈미스터 올스타가 되었다. 감독 추천으로 뽑혔으나 하필 그 날 따라 컨디션이 안 좋아서 선발 출전을 못한 권준헌(당시 태평양의 유일한 3할 타자)만 지못미.[45] 2009년도에 방영된 2기 22화 中.[46] 이분 유튜브에서도 "양준혁 어-예 라고" 검색을 하면 죄다 댓글부터가 가관이다.[47] 논란인 게 SK에서는 지명타자로만 99% 뛰었는데 외야까지 주는 건 좀 상식이 아니지 않냐는 반발성 분위기였는데... 나중에 그냥 값이 떨어지자 주최측이나 유저측이나 개돼지가 되었다...[48] LG 카드로 먼저나왔고 추가패치로 SK카드로도 출시.[49] 김재현은 처가가 준재벌급에 본인 집안도 금수저이므로 싫어하는 사람 밑에서 억지로 일할 필요가 없다.[50] 돌아오기 전에는 라이벌 팀인 두산 베어스 코치로 있었다.[51] 참고로 김기태와 김재현은 2005년 SK에서 한솥밥을 먹은적이 있었다. 반대로 유지현과 김기태는 선수협 창립총회 때 서로 맞디스 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김기태가 LG감독을 했을 때 유지현은 함께 있었다...[52] 그러나 본인이 LG 경기를 해설할 때 "유지현 코치에게 물어보니까..."라는 표현을 종종 쓰곤 하는 걸 보면 일반에 알려진 것처럼 견원지간 수준으로 나쁘지 않고 그냥 서먹서먹한 사이일 수도 있다. 물론 이런 부분은 관계자나 동료가 아니면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