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원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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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前 쌍방울 레이더스, SK 와이번스, 한화 이글스 소속의 외야수이자 現 SK 와이번스 2군 감독. 2016년부터 2018년까지 롯데 자이언츠의 감독을 맡기도 했었다.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부산 출신의 선수로, 수영초, 부산중, 부산고를 졸업하고 동기 강상수와 함께 고려대학교에 진학하여 임수혁, 마해영, 강상수[4] , 박정혁, 심재학, 조경환 등과 함께 1990년대 고려대학교의 불과 같다고 표현되던 극강의 타선에 일익을 담당하던 선수였다.
2.2. 쌍방울 레이더스
이후 1994년 쌍방울 레이더스의 2차 5순위(전체 34번)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7]복도에선 김 감독이 조원우를 붙잡고 뭔가를 확인하고 있었다. LG 3차전 노아웃 상황에서 2루로 나간 조원우가 왜 도루를 하지 않았는지. 싸인을 기다렸던 것인지. 거기가 그날 '''승부처'''였던 것이다. - 방송 내용 중
조원우의 부친은 육상선수 출신이었고, 그래서인지 조원우 역시 발이 빠른 편이었는데,[8] 이 덕에 쌍방울 시절에는 1번 내지는 3번타자로 활약했다. 96-97 쌍방울의 전성기에는 상위타선에 최태원과 김실이 있었고, 이어 조원우-김기태-심성보-박경완에 이르는 클린업이 상대를 공포로 몰아넣는 타선을 구축했다. 1997, 98 시즌에는 연속 3할을 기록했으며, 1997년에는 3루타왕(9개), 1998년에는 홈런 12개를 기록할 정도로 장타력도 있던 선수다. 특히 1997년에는 팀이 타율/출루율/장타율은 해태를 넘어선 2위를 기록했는데,[9] 그 중심에서는 조원우가 있었다. 97 준플레이오프 2차전에서는 김태한을 상대로 선두타자 홈런을 때려내며 큰 경기에서도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 해 비록 쌍방울은 삼성에게 준플레이오프에서 패배했지만, 그의 한방으로 쌍방울이 마지막까지 희망을 불태울 수 있었다.
1998년에는 149안타로 최다 안타 부문 2위에 오르기도 했고 유일하게 그 해에 두자리수 홈런(12홈런)을 기록했으며, 또한 희생타 1위(39개)의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큰 기대를 가지고 0.314로 고감도 타격을 보여주던 1999년 5월, 주간 수비 훈련 도중 공을 잘못 밟아 왼쪽 고관절 인대에 부상을 입었고 시즌 아웃되었다.[10] 다른 팀에는 주간에 이런 무리한 훈련을 실시하는 경우가 없었지만 지옥훈련으로 유명한 김성근은 체력 저하 및 부상 우려 논란에도 이런 훈련을 지속했었다. 이 과정에서 군입대를 연기시키는 추태를 보였다.
2.3. SK 와이번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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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원우가 재활을 하는 동안 쌍방울은 재정난 끝에 해체되었고 그 선수단을 이어받아 2000년 SK 와이번스가 창단되어 SK의 창단멤버가 되었다. 2000년 부상에서 복귀했으나, 부상 직전 리그 수위급 타자의 기량을 결코 회복하지 못했고 은퇴할 때까지 나머지 9시즌 동안 2할대의 평범한 타자에 머물고 말았다.
SK 와이번스로 인계되어 첫 시즌을 마친 2000년에 공인회계사인 황미화 씨와 결혼했다.
2003년부터 타격감을 다시 되찾기 시작하였고 그해 SK가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면서 프로 데뷔 첫 한국시리즈 무대를 밟게 되나, 팀은 준우승에 그쳤다.
2004년에는 등장곡으로 숫자송을 사용했는데 시즌 중후반엔 응원가 원곡이기도 한 '어제밤 이야기'로 등장곡을 변경하기도 했다. 이 시즌에는 주장도 겸했었다.
2.4. FA
2004 시즌이 끝난 후 FA 자격을 얻어 FA를 행사하였으며 4년간 17억 5천만원의 조건을 요구하여 원 소속팀 SK와 이견을 보인 끝에 시장에 나왔고, 김재현을 놓친 LG 트윈스와 정수근의 이적 이후 외야요원의 공백을 메꾸는데 실패했던 두산 베어스 등에서 조원우를 노리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하지만 요구조건이 너무 셌던 탓인지 다른 팀과 계약을 하지 못한 채 2005년 1월까지 FA 미아로 남아있다가 결국 원 소속 팀 SK와 계약 기간 2년 총액 4억 5천만원에 계약하였다.
2.5. 한화 이글스 시절
FA 과정에서 미운 털이 박힌 탓인지, 외야진의 핵이었던 채종범이 병풍으로 빠져나갔음에도 불구하고 트레이드로 영입된 박재홍이 중견수 자리를 차지했다. 여기에 좌익수 자리마저 군에서 제대하고 합류한 조동화가 차지하며 벤치 신세를 면하지 못하다가 2005년 시즌 중 투수 조영민을 상대로 한화 이글스에 트레이드되었다.
트레이드 당시 1971년생과 1981년생의 트레이드였기에 많은 반발이 있었으나, 조원우가 연일 불꽃타를 휘두르면서 여론을 잠재웠다. 시즌 후반에는 규정타석을 채우며 막판까지 이병규, 김재현과 함께 타격왕 경쟁을 하기도 하였다.[11] 분위기를 탄 한화는 4위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였고[12] 조원우는 친정팀 SK와의 준플레이오프에서 맹타[13] 를 휘두르면서 팀을 플레이오프까지 이끌었다.
이후 2006년과 2007년에도 100경기 이상 출전하며 주전 좌익수로서 활약하였지만, 2005년의 모습같지는 않았으며 배트 스피드가 눈에 띄게 느려져 빗맞는 타구, 특히 수직으로 높이 뻗기만 하는 내야 플라이를 대거 양산하였고 이를 본 한화 팬들은 로켓타구만 날린다하며 '''조로켓'''이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하였다. 2008년에는 1군 5경기 출전에 머물렀고 동년 10월에 결국 방출되었다.
2.6. 총평
15년 동안 1,368경기에 출전해 통산 타율 0.282, 68홈런, 443타점, 123도루를 기록했다.
커리어 최다 홈런이 12홈런으로 거포 스타일도 아니며 도루도 20개를 넘긴적이 한 번 뿐이라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준족도 아니였지만 2루타와 도루는 매 시즌 어느정도는 기록하였고, 타율 또한 2할 7푼 이상을 기대할 수 있는 교타형 타자였다.
이것만 보면 그저 그런 선수시절을 보냈다고 생각 할수 있지만, 조원우에게는 '''세계 1위'''의 대기록이 하나 있는데 ''''외야수 부문 연속 경기 무실책 기록''''이다. '''총 494경기 연속 무실책'''[14] 을 기록하였으며 2001년 7월 5일 청주 한화전을 시작으로 이어진 이 기록은 팀을 한화로 옮긴 후인 2006년 5월 23일 대전 삼성전에서의 중계플레이 실책을 범하면서 마감했다. 한화 시절에는 실책이 나올 플레이를 안 해서 실책이 없었다는 말도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외야 수비에 능통했던 것은 사실이다.
우승 경력은 없으며 준우승은 SK 시절인 2003년과 한화 시절인 2006년에 경험했고, 쌍방울-SK 시절 동료였던 김원형이 2007년 SK에서 우승을 맛보면서 조원우에 대해 아쉬워했기도 했다.[15]
3. 지도자 경력
주로 외야수비 코치를 맡았으며, 수비코치로의 평가는 꽤 좋았다. 그의 손을 거친 외야수들의 수비가 꽤 향상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3.1. 한화 이글스 시절
2008년 11월에 한화의 2군 코치로 합류했다.
2009년 1시즌 동안 한화 이글스에서 코치로 활동한 후, 김태균이 치바 롯데 마린즈에 입단하자 그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지도자 연수를 받았다.
3.2. 롯데 자이언츠 시절
치바 롯데 마린즈에서 연수를 마치고 귀국한 그는 고향 팀 롯데 자이언츠의 외야수비코치로 임명되었다. 부임 당시 손아섭, 김주찬, 전준우의 글러브가 길도 제대로 안 들어있었다며 황당해했다고 한다.[16]
1루 코치 겸 외야 수비코치라는 이례적인 기용이었지만, 역할을 제대로 해내고 있다. 스프링캠프부터 훈련을 받았던 손아섭과 김주찬의 외야 수비가 가면 갈수록 늘고 있기 때문. 수비에선 도저히 답이 안 나오던 '''김주찬'''마저 7월이 지나면서 정상적인 수비수로 바꿔 놨으니... 이 때문에 같은 수비코치지만 내야를 담당하는 공필성과 많이 비교되고 있는 상황. 7월 31일 경기에서 보살 2개를 기록했던 손아섭도 인터뷰에서 조원우 코치의 지도 덕에 수비 능력이 많이 좋아졌다고 말했다. 근성으로 불의의 부상을 딛고 일어난, 쌍방울 레이더스다운 선수.
2012년에는 주루코치를 맡았는데, 3루에서 이해할 수 없는 상황 판단으로 팬들에게 비난을 받았다. 어째서 이 항목에 제대로 작성이 되지 않았었는지 의문.
2012년 10월 말 부로 롯데 자이언츠 구단에 사의를 표명했는데, 양승호 전 롯데 감독의 퇴임이 결정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3.3. 두산 베어스 시절
이후 2013 시즌 두산 베어스의 외야수비 코치로 임명됐으나, 시즌 종료 후 김진욱 감독이 경질되자 김민재와 함께 사의를 표명하였다.
3.4. SK 와이번스 시절
2013년 12월 18일 SK 와이번스 1군 주루코치로 임명되었고, 이로써 조영민과의 트레이드 이후 8년만에 SK로 다시 오게 되었다.
2014년 이만수 감독을 포함 모든 코치들이 비난받는 와중에도 뛰어난 판단으로 김경기 타격코치와 함께 비난의 화살을 피했다.
2015년부터 외야수비코치로 임명되어 이명기의 막장 수비를 한번 맡겨 봐야 한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으며, 주루코치와 외야수비코치를 겸하게 되었다. SK 팬들은 이명기의 외야 수비가 만약 정말 좋아진다면 종신계약을 추진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는데, 2015년 시즌 초반 '''이명기의 수비가 진짜 좋아졌다!''' 전년도에 비해 수비에 훨씬 안정감이 생긴 것은 물론 간간이 호수비도 보여주는 중.
2015년 광복절에 김경기 수석이 재활군으로 강등되면서 1군 수석코치로 승진했다.
3.5. 롯데 자이언츠 감독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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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0월 8일에 '''롯데 자이언츠의 감독으로 부임하며''' 양승호 감독 재임 시절 이후 3년만에 롯데로 컴백했다. 이종운 감독에 이은 외야수 출신 '''초보 감독'''으로, 이종운 감독이 경질되며 외야수 출신 감독의 맥이 끊길 뻔 했으나 이번 선임으로 외야수 출신 감독의 명맥은 2016년에도 이어지게 되었다. 또한 역대 최초 1970년대생 감독으로 최연소 감독이 되었다. 계약기간 2년에 계약금 3억, 연봉 2억.
팬들의 반응은 '''격노'''. 특히 장성우 사건까지 겹쳐 아주 제대로 유전이 터졌는데, 롯데 프런트는 "로이스터도 후보군에 있었다"''' '''라는 말로 유전에 불을 붙여 팬들의 염통을 불살라버리고 있다. 이후 선임배경에 대해 본인이 직접 인터뷰를 했는데 상황이 가관이다.
김용희 감독한테 얘기는 하고 사인한 건지 의심스러울 지경. 근데 이창원 사장은 "다양한 루트를 통해 파악해 선임했고, 로이스터는 생각도 한 적 없다." 며 손발안맞는 언플의 진수를 선보이고 있다. 더불어 사장 인터뷰를 보면 위의 조원우 인터뷰와 전혀 말이 안 맞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SK 구단 관계자 인터뷰로 정말 김 감독에게 '''일절 얘기도 없이''' 감독을 선임한 게 밝혀졌다.'''Q. 어제(7일) 포스트시즌 경기를 치렀다. 다음날 롯데 감독 사실이 발표됐다. 이미 얘기가 돼 있었던가.'''
A. "전혀 몰랐다. 앞서 롯데 관계자들로부터 '롯데 와야지'라는 농담같은 말을 들은 적은 있었다. 롯데에서 코치로 일한 적이 있으니 으레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고 ‘내가 지금 SK 수석코치인데 어딜 가느냐’고 말하고 잊고 있었다. 그런데, 어제 경기 끝나고 롯데 운영부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롯데 오라고 하더라. '오늘 경기 진 사람한테 무슨 소리냐' 했더니 감독으로 영입하려 한다고 하더라. 잠시 고민 했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SK 숙소에 돌아와 함께 인천으로 이동했고, '''SK 코칭스태프와 맥주 한 잔 했다. 그리고 나서 롯데 단장님과 계약서에 사인했다'''"
조원우 인터뷰와 SK 관계자 인터뷰의 내용이 같은 것으로 보아 '''이창원의 인터뷰가 거짓말이 된다.''' 시즌 시작도 전에 프런트는 프런트대로 조원우는 조원우대로 좋지 않은 이미지가 형성되고 있다.롯데 자이언츠는 8일 신임 감독으로 SK 조원우 전 수석코치를 선임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조원우 신임 감독은 '''바로 전날 밤 23시 8분께까지 SK 더그아웃에서 와일드카드 결정전을 지휘'''했다. 그리고 '''충격적인 패배 바로 다음날 아침 다른 팀의 감독으로 새로운 출발'''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충분히 사전 접촉이 의심될 만한 상황이었으나 SK 관계자는 이 부분에 대해 명확하게 선을 그었다. "(조원우 전 코치가) 어제 경기가 끝난 뒤 전화를 받았다고 한다. 밤새 고민을 하셨고 오늘 오전에 (롯데행을 결정했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SK 입장에서는 물론 아쉽지만 (프로야구 감독직은) 일부 선택 받은 사람들만이 갈 수 있는 자리가 아닌가. 3년 계약을 해서 계약 기간은 내년까지였지만 기쁜 마음으로 보내드렸다"고 설명했다.
다만 감독 자리라는 게 야구인 생활 평생 한번 하는 것도 쉽지 않다는 점도 감안할 필요는 있다. 보통 김성근을 생각하지만 김성근은 커녕 선동열 정도만 돼도 감독으로서는 크게 성공한 축에 속하는 것이 현실이다.[17] 그리고 프로구단 감독 경력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야구계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으로 꼽히기에 수많은 감독 후보군들이 1년짜리 감독이라도 해보려고 줄을 서는 것이 현재 프로스포츠의 현실이다. '''즉 구단이 철저하게 갑이라는 이야기.'''[18] 조원우 만한 인재가 야구계에 널린 상황에서 만약 조원우가 조건 때문에 망설이다가[19] 이 기회를 놓치게 되면 나중에 기회가 온다는 보장은 전혀 없다. '''즉 당시 제의를 승낙하는 건 조원우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당연한 선택이었던 것.'''
3.5.1.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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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감이 부족한 KBO에서 그의 행적은 KBO의 비전에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 하지만 2016년 결말은...'''아직 승부처가 아니다.'''[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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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2. 201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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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3. 20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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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차 지적하지만 롯데는 감독이 상식적인 경기 운용만 보인다면 치고 올라갈 힘이 충분한 팀입니다.''' - 케이비리포트 #
결국 비극으로 끝난 시즌. 잔여 계약을 2년 남기고 재부임 1년차에 경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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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4. 성적
통산 승률은 정확히 5할이다. 다만 2017년 한 해에 거둔 성적이 워낙 좋았던 덕분에 다른 두 시즌의 부진을 상쇄해 나온 결과라고 봐야 할 듯.
3.6. SK 와이번스 2기 시절
2020년 11월 6일 이종운의 사퇴에 따라 공석이 된 SK 와이번스 2군 감독으로 복귀한다는 기사가 나오면서 5년 만에 SK로 돌아오게 되었다.[22] 아이러니하게도 롯데 자이언츠 감독 시절에는 김원형 코치가 수석코치였으나 같은 날 SK의 새 감독이 김원형으로 발표되면서 상황이 바뀌게 되었다.[23] 이로써 조원우와 김원형의 사이는 매우 깊다는 것이 또 다시 드러나게 됐다. 김원형이 SK 코치에서 물러났을 때 아무런 연고도 없는 롯데로 가는 결정적 계기가 조원우의 러브콜 때문이었고 반대로 야인 생활을 하던 조원우가 SK로 복귀하는 계기가 김원형의 러브콜이기 때문이다.
4. 평가
5. 기타
- 이상하게도 컴투스 프로야구 2013에서는 조원우98카드가 SK 레전드 카드가 아닌 한화 레전드 카드로 되어 있다.
- 별명은 돌격대장. 쌍방울 레이더스 타선의 주축이자, 이후 4번타자 김기태 등으로 이어지는 쌍방울 득점라인의 선두였기 때문에 팀명의 별명인 '돌격대'에서 따온 별명이다. 선수 생활 말년에는 조로켓이라는 별명도 얻었다.[24] 롯데 자이언츠의 감독이 되고나서는 돌머리라는 뜻의 조석두로 자주 불린다. 잘하는 날에는 보석두, 다이아몬두 등으로 불렸는데, 자기 이름 자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아이러니.
- 여러모로 쌍방울 시절의 동료이자 친한 형님인 김기태와 비슷한 점이 많다. 우선 둘 다 쌍방울의 연고인 전북 지역이 아닌 타 지역 사람으로[25] 쌍방울 레이더스에서 전성기를 보냈으며, 그 후 SK 와이번스에서 재회하게 된다.[26] 감독으로 임명될 당시 최연소 감독 타이틀을 얻은 것도 공통점.[27] 둘 다 현역 시절에는 고향팀에서는 뛰지 못하였지만 둘 다 고향팀의 감독을 맡았다. 둘의 차이점이라고 하면 조원우는 수비 능력이, 김기태는 장타력이 월등했다는 점.
- 롯데 자이언츠 감독직에서 물러난 후 한동안 근황이 전해지지 않다가, 2019년 3월 28일 LA 다저스에 연수를 간다는 기사가 나왔다. 치바 롯데 마린즈에서 연수를 받은 것에 이어 2번째로 유학을 떠나는 것이며, 트레이 힐만과 류현진의 주선을 받아 성사됐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