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원우

 




'''조원우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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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원우의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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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방울 레이더스''' 등번호 36번'''
최해명
(1992~1993)

'''조원우
(1994~1999)
'''

팀 해체
''''''SK 와이번스''' 등번호 36번'''
팀 창단

'''조원우
(2000~2001)
'''

곽국희
(2002~2003)
''''''SK 와이번스''' 등번호 9번'''
곽국희
(2001)

'''조원우
(2002~2005.6.1.)
'''

조영민
(2005.6.2.~2006)
''''''한화 이글스''' 등번호 27번'''
조영민
(2005~2005.6.1.)

'''조원우
(2005.6.2.~2008)
'''

디아스
(2009)
''''''한화 이글스''' 등번호 88번'''
배성서
(1985~1987)

'''조원우
(2009)
'''

데폴라
(2011)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74번'''
박동수
(2006~2010)

'''조원우
(2011~2012)
'''

정민태
(2013~2014)
''''''두산 베어스''' 등번호 78번'''
고정식
(2012)

'''조원우
(2013)
'''

최해명
(2014~2020)
''''''SK 와이번스''' 등번호 74번'''
조웅천
(2011~2013)

'''조원우
(2014~2015)
'''

박진만
(2016)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74번'''
서한규
(2015)

'''조원우
(2016~2018)
'''

최기문
(2019)
''''''SK 와이번스''' 등번호 74번'''
최상덕
(2017~2020)

'''조원우
(2021~)
'''

현역


'''조원우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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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0000> '''SK 와이번스 No.74'''
<colcolor=#ffffff> '''조원우
趙原佑 / Cho Wonwoo'''
'''생년월일'''
1971년 4월 8일 (52세)
'''국적'''
[image] 대한민국
'''출신지'''
[image] 부산광역시 수영구[1]
'''학력'''
수영초 - 부산중 - [image] 부산고 - [image] 고려대
'''포지션'''
외야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94년 2차 5라운드 전체 34순위 (쌍방울)
'''소속팀'''
'''[image] 쌍방울 레이더스 (1994~1999)'''
[image] SK 와이번스 (2000~2005)
[image] [image] 한화 이글스 (2005~2008)
'''지도자'''
[image] 한화 이글스 2군 수비코치 (2009)
[image] 롯데 자이언츠 1군 수비코치 (2011~2012)
[image] 두산 베어스 1군 수비코치 (2013)
[image] SK 와이번스 1군 주루코치 (2014)
[image] SK 와이번스 1군 수비·주루코치 (2015)
[image] SK 와이번스 1군 수석코치 (2015)
'''[image] [image] 롯데 자이언츠 감독 (2016~2018)'''
LA 다저스 산하 마이너 코치 (2019)
[image] SK 와이번스 2군 감독 (2021~)
'''응원가'''
SK 시절: 소방차 - 어젯밤 이야기[2]
한화 시절: 동요《금강산》[3]
1. 개요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2.4. FA
2.5. 한화 이글스 시절
2.6. 총평
3. 지도자 경력
5. 기타
6. 연도별 성적

[clearfix]

1. 개요


쌍방울 레이더스, SK 와이번스, 한화 이글스 소속의 외야수이자 現 SK 와이번스 2군 감독. 2016년부터 2018년까지 롯데 자이언츠의 감독을 맡기도 했었다.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부산 출신의 선수로, 수영초, 부산중, 부산고를 졸업하고 동기 강상수와 함께 고려대학교에 진학하여 임수혁, 마해영, 강상수[4], 박정혁, 심재학, 조경환 등과 함께 1990년대 고려대학교의 불과 같다고 표현되던 극강의 타선에 일익을 담당하던 선수였다.

2.2. 쌍방울 레이더스


[image]
'''쌍방울 레이더스 시절'''
[image]
1999년 쌍방울 시절 그의 모습[5]

복도에선 김 감독이 조원우를 붙잡고 뭔가를 확인하고 있었다. LG 3차전 노아웃 상황에서 2루로 나간 조원우가 왜 도루를 하지 않았는지. 싸인을 기다렸던 것인지. 거기가 그날 '''승부처'''였던 것이다. - 방송 내용 중

[image]
사진에서 왼쪽에 앉아있는 사람이 조원우[6]
이후 1994년 쌍방울 레이더스의 2차 5순위(전체 34번)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7]
조원우의 부친은 육상선수 출신이었고, 그래서인지 조원우 역시 발이 빠른 편이었는데,[8] 이 덕에 쌍방울 시절에는 1번 내지는 3번타자로 활약했다. 96-97 쌍방울의 전성기에는 상위타선에 최태원김실이 있었고, 이어 조원우-김기태-심성보-박경완에 이르는 클린업이 상대를 공포로 몰아넣는 타선을 구축했다. 1997, 98 시즌에는 연속 3할을 기록했으며, 1997년에는 3루타왕(9개), 1998년에는 홈런 12개를 기록할 정도로 장타력도 있던 선수다. 특히 1997년에는 팀이 타율/출루율/장타율은 해태를 넘어선 2위를 기록했는데,[9] 그 중심에서는 조원우가 있었다. 97 준플레이오프 2차전에서는 김태한을 상대로 선두타자 홈런을 때려내며 큰 경기에서도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 해 비록 쌍방울은 삼성에게 준플레이오프에서 패배했지만, 그의 한방으로 쌍방울이 마지막까지 희망을 불태울 수 있었다.
1998년에는 149안타로 최다 안타 부문 2위에 오르기도 했고 유일하게 그 해에 두자리수 홈런(12홈런)을 기록했으며, 또한 희생타 1위(39개)의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큰 기대를 가지고 0.314로 고감도 타격을 보여주던 1999년 5월, 주간 수비 훈련 도중 공을 잘못 밟아 왼쪽 고관절 인대에 부상을 입었고 시즌 아웃되었다.[10] 다른 팀에는 주간에 이런 무리한 훈련을 실시하는 경우가 없었지만 지옥훈련으로 유명한 김성근은 체력 저하 및 부상 우려 논란에도 이런 훈련을 지속했었다. 이 과정에서 군입대를 연기시키는 추태를 보였다.

2.3. SK 와이번스 시절


[image]
조원우가 재활을 하는 동안 쌍방울은 재정난 끝에 해체되었고 그 선수단을 이어받아 2000년 SK 와이번스가 창단되어 SK의 창단멤버가 되었다. 2000년 부상에서 복귀했으나, 부상 직전 리그 수위급 타자의 기량을 결코 회복하지 못했고 은퇴할 때까지 나머지 9시즌 동안 2할대의 평범한 타자에 머물고 말았다.
SK 와이번스로 인계되어 첫 시즌을 마친 2000년에 공인회계사인 황미화 씨와 결혼했다.
2003년부터 타격감을 다시 되찾기 시작하였고 그해 SK가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면서 프로 데뷔 첫 한국시리즈 무대를 밟게 되나, 팀은 준우승에 그쳤다.
2004년에는 등장곡으로 숫자송을 사용했는데 시즌 중후반엔 응원가 원곡이기도 한 '어제밤 이야기'로 등장곡을 변경하기도 했다. 이 시즌에는 주장도 겸했었다.

2.4. FA


2004 시즌이 끝난 후 FA 자격을 얻어 FA를 행사하였으며 4년간 17억 5천만원의 조건을 요구하여 원 소속팀 SK와 이견을 보인 끝에 시장에 나왔고, 김재현을 놓친 LG 트윈스정수근의 이적 이후 외야요원의 공백을 메꾸는데 실패했던 두산 베어스 등에서 조원우를 노리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하지만 요구조건이 너무 셌던 탓인지 다른 팀과 계약을 하지 못한 채 2005년 1월까지 FA 미아로 남아있다가 결국 원 소속 팀 SK와 계약 기간 2년 총액 4억 5천만원에 계약하였다.

2.5. 한화 이글스 시절


[image]
[image]
한화 이글스 시절
그의 특유의 타격폼
FA 과정에서 미운 털이 박힌 탓인지, 외야진의 핵이었던 채종범이 병풍으로 빠져나갔음에도 불구하고 트레이드로 영입된 박재홍이 중견수 자리를 차지했다. 여기에 좌익수 자리마저 군에서 제대하고 합류한 조동화가 차지하며 벤치 신세를 면하지 못하다가 2005년 시즌 중 투수 조영민을 상대로 한화 이글스에 트레이드되었다.
트레이드 당시 1971년생과 1981년생의 트레이드였기에 많은 반발이 있었으나, 조원우가 연일 불꽃타를 휘두르면서 여론을 잠재웠다. 시즌 후반에는 규정타석을 채우며 막판까지 이병규, 김재현과 함께 타격왕 경쟁을 하기도 하였다.[11] 분위기를 탄 한화는 4위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였고[12] 조원우는 친정팀 SK와의 준플레이오프에서 맹타[13]를 휘두르면서 팀을 플레이오프까지 이끌었다.
이후 2006년과 2007년에도 100경기 이상 출전하며 주전 좌익수로서 활약하였지만, 2005년의 모습같지는 않았으며 배트 스피드가 눈에 띄게 느려져 빗맞는 타구, 특히 수직으로 높이 뻗기만 하는 내야 플라이를 대거 양산하였고 이를 본 한화 팬들은 로켓타구만 날린다하며 '''조로켓'''이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하였다. 2008년에는 1군 5경기 출전에 머물렀고 동년 10월에 결국 방출되었다.

2.6. 총평


15년 동안 1,368경기에 출전해 통산 타율 0.282, 68홈런, 443타점, 123도루를 기록했다.
커리어 최다 홈런이 12홈런으로 거포 스타일도 아니며 도루도 20개를 넘긴적이 한 번 뿐이라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준족도 아니였지만 2루타와 도루는 매 시즌 어느정도는 기록하였고, 타율 또한 2할 7푼 이상을 기대할 수 있는 교타형 타자였다.
이것만 보면 그저 그런 선수시절을 보냈다고 생각 할수 있지만, 조원우에게는 '''세계 1위'''의 대기록이 하나 있는데 ''''외야수 부문 연속 경기 무실책 기록''''이다. '''총 494경기 연속 무실책'''[14] 을 기록하였으며 2001년 7월 5일 청주 한화전을 시작으로 이어진 이 기록은 팀을 한화로 옮긴 후인 2006년 5월 23일 대전 삼성전에서의 중계플레이 실책을 범하면서 마감했다. 한화 시절에는 실책이 나올 플레이를 안 해서 실책이 없었다는 말도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외야 수비에 능통했던 것은 사실이다.
우승 경력은 없으며 준우승은 SK 시절인 2003년과 한화 시절인 2006년에 경험했고, 쌍방울-SK 시절 동료였던 김원형이 2007년 SK에서 우승을 맛보면서 조원우에 대해 아쉬워했기도 했다.[15]

3. 지도자 경력


주로 외야수비 코치를 맡았으며, 수비코치로의 평가는 꽤 좋았다. 그의 손을 거친 의 수비가 꽤 향상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3.1. 한화 이글스 시절


2008년 11월에 한화의 2군 코치로 합류했다.
2009년 1시즌 동안 한화 이글스에서 코치로 활동한 후, 김태균치바 롯데 마린즈에 입단하자 그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지도자 연수를 받았다.

3.2. 롯데 자이언츠 시절


[image]
고향 연고 팀으로 돌아온 후 외야 수비코치를 맡게 된 조원우.
치바 롯데 마린즈에서 연수를 마치고 귀국한 그는 고향 팀 롯데 자이언츠의 외야수비코치로 임명되었다. 부임 당시 손아섭, 김주찬, 전준우의 글러브가 길도 제대로 안 들어있었다며 황당해했다고 한다.[16]
1루 코치 겸 외야 수비코치라는 이례적인 기용이었지만, 역할을 제대로 해내고 있다. 스프링캠프부터 훈련을 받았던 손아섭김주찬의 외야 수비가 가면 갈수록 늘고 있기 때문. 수비에선 도저히 답이 안 나오던 '''김주찬'''마저 7월이 지나면서 정상적인 수비수로 바꿔 놨으니... 이 때문에 같은 수비코치지만 내야를 담당하는 공필성과 많이 비교되고 있는 상황. 7월 31일 경기에서 보살 2개를 기록했던 손아섭도 인터뷰에서 조원우 코치의 지도 덕에 수비 능력이 많이 좋아졌다고 말했다. 근성으로 불의의 부상을 딛고 일어난, 쌍방울 레이더스다운 선수.
2012년에는 주루코치를 맡았는데, 3루에서 이해할 수 없는 상황 판단으로 팬들에게 비난을 받았다. 어째서 이 항목에 제대로 작성이 되지 않았었는지 의문.
2012년 10월 말 부로 롯데 자이언츠 구단에 사의를 표명했는데, 양승호 전 롯데 감독의 퇴임이 결정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3.3. 두산 베어스 시절


[image]
두산 베어스 외야수비 코치 시절
이후 2013 시즌 두산 베어스의 외야수비 코치로 임명됐으나, 시즌 종료 후 김진욱 감독이 경질되자 김민재와 함께 사의를 표명하였다.

3.4. SK 와이번스 시절


2013년 12월 18일 SK 와이번스 1군 주루코치로 임명되었고, 이로써 조영민과의 트레이드 이후 8년만에 SK로 다시 오게 되었다.
2014년 이만수 감독을 포함 모든 코치들이 비난받는 와중에도 뛰어난 판단으로 김경기 타격코치와 함께 비난의 화살을 피했다.
2015년부터 외야수비코치로 임명되어 이명기의 막장 수비를 한번 맡겨 봐야 한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으며, 주루코치와 외야수비코치를 겸하게 되었다. SK 팬들은 이명기의 외야 수비가 만약 정말 좋아진다면 종신계약을 추진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는데, 2015년 시즌 초반 '''이명기의 수비가 진짜 좋아졌다!''' 전년도에 비해 수비에 훨씬 안정감이 생긴 것은 물론 간간이 호수비도 보여주는 중.
2015년 광복절에 김경기 수석이 재활군으로 강등되면서 1군 수석코치로 승진했다.

3.5. 롯데 자이언츠 감독 시절


[image]
2015년 10월 8일에 '''롯데 자이언츠의 감독으로 부임하며''' 양승호 감독 재임 시절 이후 3년만에 롯데로 컴백했다. 이종운 감독에 이은 외야수 출신 '''초보 감독'''으로, 이종운 감독이 경질되며 외야수 출신 감독의 맥이 끊길 뻔 했으나 이번 선임으로 외야수 출신 감독의 명맥은 2016년에도 이어지게 되었다. 또한 역대 최초 1970년대생 감독으로 최연소 감독이 되었다. 계약기간 2년에 계약금 3억, 연봉 2억.
팬들의 반응은 '''격노'''. 특히 장성우 사건까지 겹쳐 아주 제대로 유전이 터졌는데, 롯데 프런트는 "로이스터도 후보군에 있었다"''' '''라는 말로 유전에 불을 붙여 팬들의 염통을 불살라버리고 있다. 이후 선임배경에 대해 본인이 직접 인터뷰를 했는데 상황이 가관이다.

'''Q. 어제(7일) 포스트시즌 경기를 치렀다. 다음날 롯데 감독 사실이 발표됐다. 이미 얘기가 돼 있었던가.'''

A. "전혀 몰랐다. 앞서 롯데 관계자들로부터 '롯데 와야지'라는 농담같은 말을 들은 적은 있었다. 롯데에서 코치로 일한 적이 있으니 으레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고 ‘내가 지금 SK 수석코치인데 어딜 가느냐’고 말하고 잊고 있었다. 그런데, 어제 경기 끝나고 롯데 운영부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롯데 오라고 하더라. '오늘 경기 진 사람한테 무슨 소리냐' 했더니 감독으로 영입하려 한다고 하더라. 잠시 고민 했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SK 숙소에 돌아와 함께 인천으로 이동했고, '''SK 코칭스태프와 맥주 한 잔 했다. 그리고 나서 롯데 단장님과 계약서에 사인했다'''"

김용희 감독한테 얘기는 하고 사인한 건지 의심스러울 지경. 근데 이창원 사장은 "다양한 루트를 통해 파악해 선임했고, 로이스터는 생각도 한 적 없다." 며 손발안맞는 언플의 진수를 선보이고 있다. 더불어 사장 인터뷰를 보면 위의 조원우 인터뷰와 전혀 말이 안 맞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SK 구단 관계자 인터뷰로 정말 김 감독에게 '''일절 얘기도 없이''' 감독을 선임한 게 밝혀졌다.

롯데 자이언츠는 8일 신임 감독으로 SK 조원우 전 수석코치를 선임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조원우 신임 감독은 '''바로 전날 밤 23시 8분께까지 SK 더그아웃에서 와일드카드 결정전을 지휘'''했다. 그리고 '''충격적인 패배 바로 다음날 아침 다른 팀의 감독으로 새로운 출발'''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충분히 사전 접촉이 의심될 만한 상황이었으나 SK 관계자는 이 부분에 대해 명확하게 선을 그었다. "(조원우 전 코치가) 어제 경기가 끝난 뒤 전화를 받았다고 한다. 밤새 고민을 하셨고 오늘 오전에 (롯데행을 결정했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SK 입장에서는 물론 아쉽지만 (프로야구 감독직은) 일부 선택 받은 사람들만이 갈 수 있는 자리가 아닌가. 3년 계약을 해서 계약 기간은 내년까지였지만 기쁜 마음으로 보내드렸다"고 설명했다.

조원우 인터뷰와 SK 관계자 인터뷰의 내용이 같은 것으로 보아 '''이창원의 인터뷰가 거짓말이 된다.''' 시즌 시작도 전에 프런트는 프런트대로 조원우는 조원우대로 좋지 않은 이미지가 형성되고 있다.
다만 감독 자리라는 게 야구인 생활 평생 한번 하는 것도 쉽지 않다는 점도 감안할 필요는 있다. 보통 김성근을 생각하지만 김성근은 커녕 선동열 정도만 돼도 감독으로서는 크게 성공한 축에 속하는 것이 현실이다.[17] 그리고 프로구단 감독 경력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야구계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으로 꼽히기에 수많은 감독 후보군들이 1년짜리 감독이라도 해보려고 줄을 서는 것이 현재 프로스포츠의 현실이다. '''즉 구단이 철저하게 갑이라는 이야기.'''[18] 조원우 만한 인재가 야구계에 널린 상황에서 만약 조원우가 조건 때문에 망설이다가[19] 이 기회를 놓치게 되면 나중에 기회가 온다는 보장은 전혀 없다. '''즉 당시 제의를 승낙하는 건 조원우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당연한 선택이었던 것.'''

3.5.1. 2016년


[image]

'''아직 승부처가 아니다.'''[20]

감독감이 부족한 KBO에서 그의 행적은 KBO의 비전에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 하지만 2016년 결말은...
해당 문서로.

3.5.2. 2017년


해당 문서로.

3.5.3. 2018년


[image]

'''수차 지적하지만 롯데는 감독이 상식적인 경기 운용만 보인다면 치고 올라갈 힘이 충분한 팀입니다.''' - 케이비리포트 #


결국 비극으로 끝난 시즌. 잔여 계약을 2년 남기고 재부임 1년차에 경질되었다.
해당 문서로.

3.5.4. 성적


'''역대 감독 전적'''
'''연도'''
''''''
'''경기'''
''''''
''''''
''''''
'''정규리그'''
'''포스트시즌'''
2016
'''롯데 자이언츠'''
144
66
78
0
8위

2017
144
80
62
2
3위
3위[21]
2018
144
68
74
2
7위

<color=#373a3c> '''통산'''
<color=#373a3c> 432
<color=#373a3c> 214
<color=#373a3c> 214
<color=#373a3c> 4
<color=#373a3c>­
통산 승률은 정확히 5할이다. 다만 2017년 한 해에 거둔 성적이 워낙 좋았던 덕분에 다른 두 시즌의 부진을 상쇄해 나온 결과라고 봐야 할 듯.

3.6. SK 와이번스 2기 시절


2020년 11월 6일 이종운의 사퇴에 따라 공석이 된 SK 와이번스 2군 감독으로 복귀한다는 기사가 나오면서 5년 만에 SK로 돌아오게 되었다.[22] 아이러니하게도 롯데 자이언츠 감독 시절에는 김원형 코치가 수석코치였으나 같은 날 SK의 새 감독이 김원형으로 발표되면서 상황이 바뀌게 되었다.[23] 이로써 조원우와 김원형의 사이는 매우 깊다는 것이 또 다시 드러나게 됐다. 김원형이 SK 코치에서 물러났을 때 아무런 연고도 없는 롯데로 가는 결정적 계기가 조원우의 러브콜 때문이었고 반대로 야인 생활을 하던 조원우가 SK로 복귀하는 계기가 김원형의 러브콜이기 때문이다.

4. 평가




5. 기타


  • 이상하게도 컴투스 프로야구 2013에서는 조원우98카드가 SK 레전드 카드가 아닌 한화 레전드 카드로 되어 있다.
  • 별명은 돌격대장. 쌍방울 레이더스 타선의 주축이자, 이후 4번타자 김기태 등으로 이어지는 쌍방울 득점라인의 선두였기 때문에 팀명의 별명인 '돌격대'에서 따온 별명이다. 선수 생활 말년에는 조로켓이라는 별명도 얻었다.[24] 롯데 자이언츠의 감독이 되고나서는 돌머리라는 뜻의 조석두로 자주 불린다. 잘하는 날에는 보석두, 다이아몬두 등으로 불렸는데, 자기 이름 자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아이러니.
  • 여러모로 쌍방울 시절의 동료이자 친한 형님인 김기태와 비슷한 점이 많다. 우선 둘 다 쌍방울의 연고인 전북 지역이 아닌 타 지역 사람으로[25] 쌍방울 레이더스에서 전성기를 보냈으며, 그 후 SK 와이번스에서 재회하게 된다.[26] 감독으로 임명될 당시 최연소 감독 타이틀을 얻은 것도 공통점.[27] 둘 다 현역 시절에는 팀에서는 뛰지 못하였지만 둘 다 팀의 감독을 맡았다. 둘의 차이점이라고 하면 조원우는 수비 능력이, 김기태는 장타력이 월등했다는 점.

6. 연도별 성적


'''역대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94
쌍방울 레이더스
86
223
.274
61
5
1
4
13
26
15
13
.359
.312
1995
38
87
.230
20
5
1
1
7
14
3
5
.345
.272
1996
122
284
.268
76
7
1
2
29
39
8
27
.320
.328
1997
126
424
'''.321'''
(8위)
'''136'''
(8위)
18
'''9'''
(1위)
5
49
61
15
26
.441
.355
1998
126
479
'''.311'''
(6위)
'''149'''
(2위)
20
'''4'''
(8위)
12
62
'''80'''
(6위)
'''23'''
(7위)
42
.445
.365
1999
47
188
.314
59
9
2
6
22
25
11
13
.479
.358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2000
SK 와이번스
29
77
.221
17
0
0
1
10
5
0
6
.260
.267
2001
111
307
.244
75
15
1
7
39
43
7
46
.368
.339
2002
116
297
.269
80
8
2
8
36
42
4
23
.391
.320
2003
128
452
.281
127
18
0
8
48
65
13
49
.374
.349
2004
119
386
.277
107
17
2
3
35
59
5
53
.355
.361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2005
한화 이글스
95
351
'''.302'''
(9위)
106
17
1
6
42
43
7
35
.407
.362
2006
106
341
.267
91
10
0
1
25
48
6
35
.305
.332
2007
114
319
.266
85
15
1
4
26
36
6
30
.357
.329
2008
5
5
.200
1
0
0
0
0
0
0
0
.200
.200
<color=#373a3c> '''KBO 통산
(15시즌)'''
<color=#373a3c> 1368
<color=#373a3c> 4220
<color=#373a3c> .282
<color=#373a3c> 1190
<color=#373a3c> 164
<color=#373a3c> 25
<color=#373a3c> 68
<color=#373a3c> 443
<color=#373a3c> 586
<color=#373a3c> 123
<color=#373a3c> 403
<color=#373a3c> .381
<color=#373a3c> .342

[1] 출생 당시는 부산직할시 동래구였다.[2] (어젯밤엔 난 네가 싫어졌어) 안타!조원우!(x2) (빙글빙글 돌아가는 불빛들을 바라보며 나 혼자 가슴 아팠지) 안타! 조원우!, 훗날 조동화가 이 응원가를 물려받았다.[3] 조원우 날려버려 안타조원우~ 조원우 날려버려 안타조원우~ 안!타! 조원우! (X2)[4] 아마추어 시절엔 타자로써의 재능이 뛰어났다.[5] 당시 쌍방울 레이더스 김성근 감독과 대화하는 모습이다. 영상 속 37분 20초부터 그의 모습이 잠깐 나온다.[6] 오른쪽은 김성래 현 한화 2군 타격코치. 말년에 김성근 감독의 부름을 받고 쌍방울에서 뛰었다.[7] 1994 드래프트에서 쌍방울이 유일하게 건진 선수가 '''조원우 한 명'''이다...[8] 빠른 발과 정확한 컨택 능력을 생각한다면 2번 타순에 기용하는 것이 적당하나 나름 클러치 능력도 있어 주로 6번 타순에 기용됐다. 1번 타자로 출전한 적도 적지 않다.[9] 팀 득점과 홈런에서는 해태에 밀린 3위를 기록했다.[10] 이 부상으로 군면제 된데다가 조원우의 시즌 아웃은 당시 당뇨병을 앓고 있었던 심성보의 이탈로 약화된 외야진과 김기태심성보가 모두 이탈한 타선에 큰 악재였다. 거기에 김원형까지 장종훈의 타구가 얼굴을 정면 강타해 시즌 아웃되자 완벽히 환승역 없는 8호선 신세가 된다.[11] 그해 타격왕은 결국 이병규가 차지하였다.[12] 2001년 이후 4년만[13] 21타수 9안타, OPS 1.097[14] 메이저리그의 경우는 대런 루이스의 392경기가 최다 기록이며, KBO 리그의 종전 기록은 김종모의 265경기였다.[15] 그리고 이 둘은 롯데 자이언츠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16] 3명 모두 프로 입단 전에는 내야수였다.[17] 김성근은 현재 논란이 많은 감독이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1000승 이상+5할 이상과 우승반지 3개(SK와이번스 3)는 그냥 얻어지는게 절대 아니니, 신임 감독과의 비교 선상에 놓일 수가 없다. 선동열의 경우 지금은 감독 커리어에 대해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고 또 언제 감독을 맡을 수 있을지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감독 하면서 두 번 우승 해보는 것도 결코 쉽지 않다.[18] 물론 구단측을 상대로 어느 정도 영향력 행사가 가능한 감독도 있지만 특급 감독 한정. 그나마도 마지막 임기 성적이 안좋으면 김재박처럼 감독 복귀가 어려워진다.[19] 연봉도 그리 좋은 편이 아니지만, 고령도 아닌 젊은 초보감독의 계약기간이 고작 2년이었다. 이종운의 예로 볼 때 이마저라도 지켜줄지 의심스러운 상황.[20] 1년 내내 언론에서 자주 언급한 말.[21] 준플레이오프에서 NC 다이노스에게 패했으나 NC가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하면서 최종순위는 그대로 3위.[22] 특이하게도 롯데 자이언츠 1군 감독 임명 당시에도 전임자가 이종운이었다.[23] 공교롭게도 롯데 감독 시절에도 전임이 이종운이었는데 이번에도 전임이 이종운이다.[24] 로켓같이 빠르다던가같은 긍정적인 별명이 아니다. 늘상 로켓같이 붕 뜨는 내야 플라이 타구를 날린다 하여 로켓...[25] 그나마 김기태는 광주광역시 출신인지라, 호남 지역 사람은 맞다.[26] 조원우는 쌍방울 해체 후 선수단을 이어받아 창단한 SK의 창단 멤버이고, 김기태는 쌍방울 시절 트레이드로 삼성에 이적했다가 이후 SK로 재트레이드되어 재회하게 되었다.[27] 김기태는 2012년 LG의 감독으로 부임할 당시 43세였으며, 조원우는 2016년 45세의 나이로 롯데 감독 자리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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