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웬 하트

 

1. 개요
2. 생애
3. 사망
4. 그 외
5. 둘러보기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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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E(당시 WWF)에서 활동한[1] 프로레슬러
본명은 Owen James Hart
1965년 5월 7일 ~ 1999년 5월 23일

WWE에서 제작한 추모 영상

2. 생애


아버지는 스탬피드 레슬링을 설립하고 수많은 레슬러를 키워낸 스튜 하트, 슬하의 12남매 모두 프로레슬러로 활동하거나, 레슬링사업에 종사했거나, 프로레슬러와 결혼했다. 역시 가장 유명한 가족은 8째인 브렛 하트.
막내로 태어난 오웬은 고등학교때 아마추어 레슬링을 했으며 이때 아내가 될 마사를 만나게 된다. 처음에 오웬은 프로레슬러의 길로 나서기보다는 다른 직업을 찾아보려 하였으나[2] 실패하고 가업인 프로레슬링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던전'으로 유명한 집 지하실에서 아버지의 혹독한 수련을 받고 스탬피드 레슬링에서 데뷔했으며 신일본레슬링으로 원정을 가 쥬신라이거와 히로시 하세등과 시합을 하며 명성을 얻기 시작한다.
WWF 초기에는 가면쓴 수퍼히어로 기믹인 '블루 블레이저'로 잠깐 등장하였으며 정식으로 자신의 이름을 걸고 등장한 것은 형 브렛이 하트 파운데이션에서 싱글로 독립한 후 남겨진 파트너 짐 앤빌 나이드하트와 '뉴 파운데이션'이라는 태그팀을 결성하면서 부터이다. (앵무새를 데리고 다닌 걸로 유명한) 코코 B. 웨어와 '하이 에너지'라는 팀으로 잠시 활동한 적이 있다.[3]
홀로서기를 시작하게 된 것은 형인 브렛 하트와의 대립. 형제들과 출전한 WWF 서바이버 시리즈(1993)에서 실수로 인한 브렛과의 충돌로 오웬 자신이 제거되면서 갈등이 시작되었고, 이를 달래기 위한 브렛과 오웬의 태그팀 타이틀도전이 실패하면서 오웬은 브렛 하트를 '앞길을 가로막는 이기적인 형'이라 비난하며 악역으로 독립한다. WWF 레슬매니아 X에서 벌어진 형제간의 첫 대결에서 오웬이 브렛을 핀폴로 잡아내지만, 이후에 벌어진 요코주나와의 챔피언전에서 브렛 하트가 승리하면서 형이 WWF 챔피언에 오르는 것을 지켜보게 된다.
이후 오웬 하트는 WWF 킹 오브 더 링(1994) 토너먼트를 나이드 하트의 도움으로 승리한 후 자신을 '킹 오브 하트'라 부르며 브렛과 자존심과 챔피언 벨트를 걸고 대립하게 된다. WWF 섬머슬램(1994)에서 브렛 하트와 철장 매치에서 대등한 경기를 펼쳤으나 브렛이 먼저 탈출하면서 패했고[4], 8월의 럼버잭 경기에서도 외부 개입으로 판정이 번복되면서 챔피언 벨트를 눈앞에서 놓친 적이 있다. 이에 오웬은 WWF 서바이버 시리즈(1994)의 브렛 하트와 밥 백클런드와의 경기에서 어머니 헬렌이 타월을 던지게 만듦으로 브렛이 타이틀을 잃게 하는 것으로 복수했다.
이후 오웬은 요코주나, 브리티쉬 불독과 악역 태그팀으로 활동하며 태그팀 타이틀을 획득하였고, 브렛 하트가 악역으로 전환하면서 브렛과 오웬, (매부지간인) 불독과 앤빌, (하트던전 출신이자 친구인) 브라이언 필만과 함께 반미 악역집단인 뉴 하트 파운데이션을 조직해 활동, WWF 챔피언(브렛) - 인터콘티넨탈(오웬) - 유로피언(불독) - 태그 팀 벨트(오웬과 불독)를 싹쓸이하기도 하였다. 이때 오웬은 스티브 오스틴과 대립 중이었다. 1997년 섬머슬램 인터컨티넨탈 챔피언십 매치에서 공방 중 리버스 파일 드라이버로 오스틴의 목을 부러뜨린 것이 바로 이때. 마침 과격한 각본을 이어가던 WWF는 이 사고를 이용, 'Owen 3:16 I Just Broke Your Neck'이라 쓰여진 티셔츠를 만들며 오웬-오스틴 대립을 키우는데 써먹기도 했다.

3. 사망


그러나 얼마 후인 1997년 서바이버 시리즈에서 '''예기치 못한 사고가 벌어졌다'''.
불독과 앤빌은 브렛 하트를 따라 WCW로 이적하지만 계약조건이 꼬이면서 오웬 하트는 WWF에 혼자 남겨지게 된다. 이후 오웬 하트는 '블랙하트'라는 조금 더 강렬한 기믹을 시도하며 DX의 헌터 허스트 헴즐리와 대립하지만,[5] DX의 타 멤버(주로 차이나)의 방해로 매번 복수에 실패한다. 이에 리더로서 팀에 변화가 필요했던 더 락이 오웬 하트를 자신의 흑인레슬러집단 네이션 오브 도미네이션에 가입시킨다.[6] 이후 디 제네레이션 X vs 네이션의 대립이 시작되며 DX가 턴페이스, 오웬은 악역이 된다. 이후 DX vs 네이션이 리더간의 대결인 트리플 H더 락의 형태로 바뀌고 오웬은 켄 샴락과 대립.[7] 네이션 해체 후[8]에는 제프 제럿과 태그팀을 결성하는 등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인다. 결국 데뷔초 사용하던 마스크히어로 기믹인 '블루 블레이저'를 다시 꺼내들어 변화를 시도했는데......[9]
1999년 5월 23일 캔자스시티 켐퍼 아레나에서 열리는 WWF 오버 디 엣지에서 블루 블레이저와 갓파더의 인터콘티넨탈 챔피언 시합이 치뤄질 예정이었다. WWF는 '우스꽝스러운 수퍼히어로' 기믹을 위해 블루 블레이저가 공중에서 줄을 타고 내려오다가 링 위에 매달려 버둥대는 것으로 등장신을 만들었다. 예전에 하던 스턴트에서 중간에 제동장치를 걸어 멈추게 하면 되는 상황이었는데, 안전장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바람에 오웬 하트는 줄에 매달린 채 공중에서 로프 위로 곧장 떨어졌으며 즉시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결국 34세의 나이에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났다. 사인은 동맥파열로 인한 내출혈로 밝혀졌다.[10]
해설자 짐 로스가 방송으로 사고발생과 오웬의 죽음을 알렸지만, 현장의 관중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고 PPV는 십여분간 중단되었다가 그대로 속행되었다. 다음날 치뤄진 RAW는 'RAW is Owen'이란 이름아래 선수들의 기믹이 아닌 실제 인터뷰와 각본과 무관하게 자원한 선수들간의 경기가 치뤄졌다. 언더테이커는 참석하지 않고 친구 브렛 하트를 직접 찾아가 위로했다. 인터뷰중 '네이션' 시절 동료였던 마크 헨리는 오웬에게 바치는 시를 써와서 낭독했고, 친하게 지냈던 동료 제프 제럿은 10번의 벨이 울리는 동안 눈물을 펑펑 쏟았다. 쇼의 마지막은 한때의 맞수 스톤 콜드 스티브 오스틴이 링에 올라 아무 말없이 오웬을 위해 건배를 하고 맥주 한캔을 링위에 올려 놓은 채 내려갔다. 그리고 그 다음주 RAW에서 오웬을 대신해 인터콘티넨탈시합을 치른 제프 제럿은 승리 후 벨트를 들고 오웬의 이름을 소리쳐 불렀다.

4. 그 외


흔히 한미 프로레슬링 팬들이 WWE에서 파일 드라이버가 금지된 이유로 오웬 하트가 스톤콜드 스티브 오스틴에게 기술을 잘못 시전해 부상을 입힌 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어느 정도는 영향이 있었을 수 있지만 인디단체나 일본의 프로레슬링 단체에서도 간혹 파일 드라이버를 잘못 꽂아서 크고 작은 부상을 당한 경우는 왕왕 있었고 결정적인 원인은 몇 년 후 미국의 고등학교에서 급우들끼리 프로레슬링 놀이를 하다 한 친구가 다른 친구에게 파일 드라이버 기술을 교실바닥에서(!) 쓰다가 그 친구의 목을 부러뜨려서 즉사한 사건이 결정타였다. 이게 당시에 현지에서 뉴스로도 보도된 바 있기도 했고 이런 사건이 계기가 되어 파일 드라이버를 WWE에서 보기 힘들게 된거지 오웬이 원인이 된 건 아니다.
WWF는 '오버 디 에지'를 홈비디오로 발매하지 않았으며, 해당 이름 자체를 폐기하고 사고 당시의 어떠한 영상도 공개되지 않고 있다. 또한 사고후 PPV를 강행한 것에 대해 수많은 비판을 받았다. 하트 가문은 WWF와 안전장비 회사를 고소하였으며, 1천8백만달러의 배상금으로 합의를 보았다. 한동안 브렛 하트는 동생의 죽음의 책임이 빈스 맥마흔에게 있다고 직접적으로 비난하는 등 불편한 관계였으나 이후 화해하였고 브렛 자신과 아버지 스튜 하트가 WWE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그러나 부인 마사는 2010년 WWE가 오웬의 사진과 영상을 사용하는 것을 어떤 경우에도 허용할 수 없다며 소송을 걸었다. 현재 마사는 '오웬 하트 재단'을 설립하여 저소득층을 위한 장학기금, 주거지원, 자선사업에 힘쓰고 있다.
브렛과 원수지간이던 숀 마이클스와도 원만하게 지낼 정도로 선수들 사이에서의 신망이 좋았으며,[11][12] 늦게 프로레슬링에 뛰어들었음에도 빠른 성장을 보였고, 그라운드 레슬링과 하이플라잉 기술을 겸비하여 레슬링센스로는 최정상급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뛰어난 인재였지만, 단 하나 관중을 사로잡는 카리스마가 약간 부족했을 뿐.(게다가 바로 그 카리스마를 가진 사람은 친형이다.) 운도 따라주지 않아 번번히 메인 이벤터의 문턱에 머물러야만 했고 다시 도약을 노리던 시점에 뜻하지 않은 사고로 세상을 일찍 떠나게 되었다. 바로 이것이 오웬 하트를 브렛의 그림자 아래 머무르게 만든 이유라 하겠다.
믹 폴리는 자서전에서 오웬에 대해 레슬링 업계에서 약물과 술을 지독하게 멀리하는 드문 사람이었으나, 사람들에게 친절해서 누구와도 원만하게 지내던 사람이라 표현했다.
브렛은 훗날 인터뷰에서 자신이 WWE에 남아있었다면 오웬의 죽음을 막을수 있었을 것이라고 얘기했다. 오웬은 자주 브렛에게 의견을 물었기 때문에 브렛이 WWE에 있었다면 오웬에게 위험한 행동을 하지 말라고 조언했을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여담이지만 브렛과 사이가 안좋았던[13] 숀과 릭 플레어 둘과 사이가 괜찮은 편이었다. 숀은 위에서 언급했듯이 원만하게 지냈으며, 릭 플레어의 경우는 헐크 호건의 15분 정도밖에 경기를 못하는 실력을 디스하며 "오웬 하트같은 선수들은 30분 넘게 경기를 할수 있고 팬들의 환호를 이끌어낸다"고 하며 호건과는 다른, 훌륭한 레슬러의 예로 오웬을 들었다.
2015년 WWE의 스타로 떠오르고 있는 캐나다 출신 레슬러 케빈 오웬스가 오웬 하트의 열렬한 팬이었다고 한다. 인디 시절에는 그를 따라 샤프슈터를 사용했었다고 하며, WWE로 이적하면서부터는 링네임에도 오웬 하트의 이름을 딴 케빈 오웬스를 사용하고 있다. 심지어 아들의 이름마저 '''오웬 스틴'''이다.
2015년 5월 7일, 브렛이 인스타그램에 형제가 포옹하는 사진과 함께 50세 생일 축하 한다는 글을 적었다. #

5. 둘러보기


[image] '''PWI 선정 올해의 대립'''
브렛 하트 vs 제리 롤러
(1993)


'''브렛 하트 vs 오웬 하트
(1994)
'''

액슬 로튼 vs 이안 로튼
(1995)

[image] '''PWI 선정 올해의 신인'''
렉스 루거
(1986)


'''오웬 하트
(1987)
'''

마두사 미첼리
(1988)

[image] '''레슬링 옵저버 선정 최고의 하이 플라이어'''
타이거 마스크 II
(1986)


'''오웬 하트
(1987, 1988)
'''

수신 선더 라이거
(1989)

[image] '''레슬링 옵저버 뉴스레터 선정 5성 경기'''
1994년
8월 29일
WWF 섬머슬램
WWF 월드 챔피언십
브렛 하트 vs '''오웬 하트'''

'''1994년 WWF 킹 오브 더 링 우승자'''
브렛 하트

'''오웬 하트'''

메이블
[1] 사실 WCW에서도 활동했지만 단 2달이었고 대부분은 하우스쇼 매치였다.[2] 스튜 하트는 자신이 아마추어 레슬링 국가 대표로 활동하던 젊은 시절에 2번의 올림픽이 연속으로 취소되면서 올림픽 출전이 좌절된 것에 대해, 막내인 오웬이 자신의 꿈을 대신 이루어 올림픽에 출전하는 것을 꿈꾸었으나, 결국 이루어지지는 못하였다.[3] 시기는 '하이 에너지' 시절이 우선으로, 형 브렛이 싱글로 독립한 후 '뉴 파운데이션'을 결성하게 되고, 코코 비 웨어는 WWF를 떠난다.[4] 데이브 멜처는 이 경기에 별점 '''5개'''를 부여했다.[5] HBK는 WWF 챔피언이 된 후 WWF 로얄럼블(1998)의 우승자인 스티브 오스틴과 대립하게 된다.[6] 오웬이 가입하며 흑인레슬러집단의 속성이 깨지게 되고, 나중엔 팀명도 '네이션'으로 바꾸게 된다.[7] 오웬의 DX에 대한 복수는 DX vs 네이션의 제거 경기에서 오웬이 직접 트리플 H를 제거하는 것으로, 매우 어설프게 종료되었다.[8] 더 락과 갓파더#s-2는 인기를 얻고 선역화, 오웬은 켄 샴락과의 대립으로 네이션 활동에 불성실, 결국 남은 멤버인 딜로 브라운과 마크 헨리의 태그팀화 되며, 네이션이란 명칭은 사라졌다. 이는 훗날 넥서스가 흐지부지되며 태그팀화 후 이름이 사라지는 모습과 유사하다.[9] 실질적으로는 '정체는 뻔한데 아닌척 하는 어설픈 가면 레슬러'의 개그 기믹에 가까웠다.(정체가 오웬이 아닌 척 속이기 위해서 제프 제럿이나, 심지어는 예전 파트너인 코코 B. 웨어가 임시로 가면을 쓰기도 했다. 참고로 코코 B. 웨어는 흑인이라, 다른 인물인 게 다 티가 났다.) 게다가 당시의 오웬은 HBK가 붙인 별명인 너겟(수세식 변기의 물을 내렸을 때, 안의 대변(=하트 패밀리) 중에서 물에 넘어가지 않고 남은 덩어리(=오웬)를 의미했다.)이라는 치욕적인 닉네임으로 불리던 시기였다. 당시의 관중들은 몬트리올 스크류잡은 잊고 오웬을 까는 것을 즐기고 있을 정도로, 그에 대한 취급은 최악인 상태였다.[10] 운이 매우 나쁘게 '''탑 로프 바로 위로 떨어져''' 흉부의 동맥이 파열된 것이 치명적이였다. 오언은 이 당시 약 21m 정도의 높이에서 떨어진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는 약 아파트 6-8층 정도의 높이로 만약 로프 위가 아니라 링 정중앙에 떨어졌다면 물론 어떻게 떨어졌나에 따라 다르겠지만 충격을 어느 정도 완화해주는 프로레슬링 링의 특성상 목숨은 구했을 가능성이 그나마 어느정도는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병원의 기록에 의하면 팔 쪽에 개방 골절상을 입긴 했지만 그 외의 생명에 치명적일 정도의 외상은 없었다고 한다.[11] 몬트리올 스크류잡 이후에 한껏 쫄아있는 숀 마이클스에게 먼저 다가가 '나는 형이 아니니 딱히 상관 안해도 된다'라고 말했다. 숀 마이클스도 자신의 자서전에서 '오웬이 사고로 죽었을 때, 우리는 한 레슬러를 잃은 것이 아니라 위대한 인간을 하나 잃은 것이었다.'라고 말한 바 있다.[12] 그러나 몬트리올 스크류 잡 이후에 HBK가 세그먼트에서 지어준 치욕적인 닉네임 '너겟'은 오웬의 사망시까지 그를 따라다녔다.[13] 그러나 지금은 화해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