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통일

 

1. 개요
2. 전개
2.1. 분열의 역사
3. 제1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
4. 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
4.1. 프랑스와 제휴
4.2.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전쟁
4.3. 통일의 진전
5. 미수복 영토
6. 부작용
7. 기타


1. 개요


1859년에서 1870년 사이 분열되었던 이탈리아사르데냐 왕국을 중심으로 통일된 사건. 리소르지멘토(Risorgimento)[1]라고도 한다. 이 문서는 그 과정을 다루고 있다.

2.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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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의 나폴리 왕국은 속칭으로, 공식 이름은 양시칠리아 왕국이었다. 이탈리아 반도 남쪽의 옛 나폴리 왕국령과 시칠리아 왕국시칠리아 섬을 모두 포함했다.

2.1. 분열의 역사


서기 530년대부터 시작된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이탈리아 수복전쟁[2]은 이후 550년대까지 지속되면서 로마시를 비롯한 이탈리아 반도를 황폐화했다. 동로마의 승리 후에도 나락으로 떨어진 상황은 좀처럼 회복되지 못했고, 568년, 게르만족의 일파인 랑고바르드족의 왕 알보인이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랑고바르드 왕국이 세워져 이탈리아 반도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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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고바르드의 세력권.
주황색이 랑고바르드족, 분홍색은 동로마 제국이다.
랑고바르드 왕국의 위협과 간섭을 받던 교황은 가톨릭 국가인 프랑크 왕국과 제휴하게 되고 피핀의 정벌에 이어 774년 카롤루스 대제가 랑고바르드 왕국을 점령하여 프랑크 왕국에 합병했다. 이후 840년 프랑크 왕국이 분열되었고, 이탈리아는 중프랑크 왕국에 속한다. 다시 중프랑크 왕국이 분열되고 여기서 중세 이탈리아 왕국이 탄생한다.
중세 이탈리아 왕국을 독일 왕국오토 1세가 합병하고 962년 신성 로마 제국을 세운다. 중세 이탈리아 왕국은 독일 왕국과 더불어 신성 로마 제국 산하 제후 왕국으로 들어가게 된다.[3] 그러나 중세 이탈리아 왕국은 신성 로마 제국이나 독일 왕국과 마찬가지로 거의 명목상의 왕국에 불과했고, 실제로는 독립적인 여러 제후국들로 분열되어 있었다. 중세 이탈리아 왕국의 영토에는 제노바 공화국, 밀라노 공국을 비롯한 여러 도시국가들이 분립하였다. (그러나 베네치아 공화국, 교황령, 시칠리아 왕국, 나폴리 왕국은 처음부터 신성 로마 제국-중세 이탈리아 왕국에 속하지 않는 독립된 국가들이었다.) 초기 신성 로마 제국 황제들은 로마 제국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이탈리아 경영에 주력했으나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고, 이후 교황권의 강화와 대공위 시대를 거친 후 14세기에 이르러 신성 로마 제국 황제들은 마침내 이탈리아 경영을 포기하고 독일 내부 정치에 주력하게 된다. 그러나 16세기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가 이탈리아 일부 지역을 상속받게 되면서 이탈리아는 다시 신성 로마 제국 및 오스트리아의 영향권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신성 로마 제국이 쇠락해감에 따라 이탈리아 반도 내에서는 주변국의 알력 다툼이 심해진다. 이러는 와중에 나폴레옹 전쟁이 일어나고 1814년 이루어진 빈 회의의 결과 빈 체제가 성립하면서 여러 군소국가로 분열되었으나, 실상은 오스트리아에 예속된 거나 마찬가지인 상태였다.

3. 제1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


이러한 상황 속에서 프랑스 혁명을 통해 전파된 자유주의 사상에 힘입어 빈 체제에 항거하는 운동(마치니카르보나리당)이 일어났다. 1848년 1월 시칠리아 섬이 양시칠리아 왕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이런 반란은 밀라노베네치아, 토스카나로 확대되면서 이탈리아 전역에서 빈 체제에 항거하게 된다. 그러던 중 1848년 11월 교황령에서 장관이었던 펠레그리노 로시가 암살당하자, 교황 비오 9세는 로마를 탈출해 양시칠리아 왕국으로 도피하게 된다.

당시 샤르데나 왕국의 국왕인 카를로 알베르토는 봉기가 일어난 밀라노를 샤르데나 왕국에 병합하기 위해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재개하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1849년 3월 23일의 노바라 전투에서 요제프 라데츠키가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에게 패배하게 되자, 카를로 알베르토 국왕은 실각하게 되고 아들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에게 왕위를 넘기게 된다.
결국 제1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1848년 3월 23일 ~ 1849년 8월 22일)은 오스트리아의 군사 개입과 나폴레옹 3세의 무력 간섭으로 실패하게 된다. 그 결과 오스트리아는 중부 이탈리아 지방의 통제력을 다시 회복하게 된다.
제1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의 실패와 혁명의 실패로 제시될 세 가지 통일 방안 중 다음 두 가지가 현실성이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1. '''교황을 의장으로 하는 연방체 구성'''
조베르티(V. Gioverti)가 주장하였는데, 그는 자유주의 교황으로 알려진 비오 9세(Pius IX)에게 희망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1848년 11월 로마에서 일어난 폭동으로 교황은 양시칠리아 왕국으로 도피하였고, 1849년 6월 프랑스 군대가 로마에 입성하고서야 교황은 로마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후 교황은 20년간 프랑스 주둔군에 의해 그 지위가 유지되었는데, 이 상태에서 교황 중심의 연방 국가가 수립되면 프랑스의 영향 하에 놓일 것은 명약관화했다. 따라서 이 방안은 무산되었다. 교황이 조베르티의 연방안을 받아들여 의장이 되었다 해도 오스트리아 등 주변 열강을 잘 설득해야 된다는 쉽지 않은 현안이 놓여 있다.
2. '''공화국 건설 방안'''
주세페 마치니(Giuseppe Mazzini)가 주장했으며, 1의 정반대 방안이었다. 그는 이탈리아 전역에서 일시에 폭동을 일으켜 이를 통해 이탈리아 공화국을 창설해야 한다는 구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이탈리아를 둘러싼 국제 정치의 현실과 이탈리아 국민의 의식 수준으로 보아 실현 가능성은 전무하였다. 위의 두가지 방안이 무산되자 가장 현실성 있는 이탈리아 통일 방안은 북이탈리아의 사르데냐 왕국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당시 이탈리아의 여러 국가들 중 통일을 주도할 수 있는 국가는 사르데냐 뿐이었다.

4. 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



4.1. 프랑스와 제휴


  • 영국
카밀로 카보우르가 북부 이탈리아를 통일하기 위해선 롬바르디아베네치아를 점령하고 있던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은 필수적이었다. 카보우르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동맹국이 필수적이었는데, 그러한 동맹국으로는 영국과 프랑스 뿐이었다. 당시 러시아나 프로이센은 이탈리아 통일을 위해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감수할 만한 명분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 영국의 수상이던 파머스턴은 개인적으로 이탈리아 통일에 대해 호의적인 태도를 갖고 있었다.
다만 영국이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하면서까지 사르데냐를 지원할 이유는 없었으며, 더군다나 1856년 체결한 파리 조약에 의한 유럽의 외교질서에 만족하고 있었기에 그에 따라 프랑스의 강대화를 견제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탈리아가 통일되어 프랑스의 영향력 안에 들어가는 건 영국에 있어서는 꽤나 큰 리스크였다. 따라서 영국은 이탈리아 통일 전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가 없었고, 이러한 태도는 파머스턴 내각을 이은 더비(E. S. Derby) 내각에서 두드러진다.
  • 프랑스 제2제국
영국이 이탈리아 통일 전쟁에 소극적이자 카보우르는 프랑스를 선택할 수 밖에 없게된다. 그는 이탈리아 통일 전쟁에 관심을 갖고 있던 나폴레옹 3세에게 접근한다. 그러나 프랑스 국내에서는 이탈리아 통일에 대해 미온적인 반응이 지배적이었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나폴레옹 3세가 이탈리아 통일에 관심을 가졌던들 공적으로 지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는 와중에 1858년 1월 14일 오르시니 사건이 일어난다. 이 사건은 이탈리아인 오르시니(F. Orsini)가 나폴레옹 3세와 황후에게 폭탄을 투척하여 암살하려다 실패한 사건으로, 오르시니는 황제가 젊던 시절 이탈리아 통일에 적극적이었던 데에 비해 황제로 즉위한 이후 태도일변한 것에 대해 분노한 것이다. 그러나 나폴레옹 3세는 도리어 오르시니를 영웅시하였고 이 사건을 계기로 이탈리아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나폴레옹 3세는 코노(H. Conneau)를 보내 사르데냐 국왕과 카보우르를 만나도록 하였고, 이 자리에서 비밀회동을 가질 것을 합의하였다. 1858년 7월 20일 카보우르와 코노는 플롱비에르(Plombières)의 한 호텔에서 극비리에 회담을 가졌다. 이 때 맺어진 합의를 플롱비에르 협약이라고 하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은 사르데냐가 도발하고 이 전쟁으로 인한 국제 관계와 전쟁의 국지화 노력은 주로 프랑스가 담당한다.
>2. 전후 이탈리아를 다음과 같은 4개의 정치단위로 구성한다.
> i. 사르데냐, 롬바르디아, 베네치아, 파르마, 모데나 등으로 구성되는 북부 이탈리아 왕국
> ii. 토스카나를 중심으로 하는 중부 이탈리아 왕국
> iii. 로마와 그 주변지역인 라치오 지방으로 축소된 교황령.
> iv.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양 시칠리아 왕국.
>3. 이들 4개의 정치단위는 연방으로 구성되며 교황이 그 의장이 되나 실제로는 사르데냐가 지배한다.
>4. 프랑스는 사르데냐 영토인 사부아를 합병한다.[4]
>5. 엠마누엘 국왕의 장녀인 15세의 클로틸드(Clotide) 공주는 나폴레옹 3세의 조카인 36세의 제롬(Jerome) 공과 결혼한다.
나폴레옹 3세가 두려워한 것은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양국과 동시에 전쟁을 치르는 것이었다. 따라서 프랑스로서는 양국의 동맹 체결을 저지하거나 적어도 프로이센의 중립을 이끌어내야 했다. 당시 프로이센 국왕이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건강이 1857년 들어 극도로 악화되었고 11월에는 그의 동생 빌헬름 1세가 섭정하기 시작했다. 빌헬름은 영국과의 연대를 구상하고 있었고 오스트리아와는 친선을 도모하였다.
따라서 나폴레옹 3세는 러시아에 손을 내밀었다. 그는 러시아의 병력을 오스트리아 동부 국경에 집결시켜 프로이센의 발을 잡는 한편 오스트리아의 모든 병력이 이탈리아로 들어오는 것을 막고자 했다. 이리하여 1858년 9월, 제롬 공이 나폴레옹 3세의 특사 자격으로 당시 바르샤바에 와 있던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를 알현하게 되었다. 여기서 제롬 공은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를 지원할 경우 러시아가 프랑스 편에 서서 참전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러시아는 오스트리아 국경에 7만의 군사만 주둔시키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제롬 공은 귀국 후에도 몇 차례 러시아에게 교섭을 제의하였으나 지지부진했다. 이후 제롬 공의 러시아 접촉을 알아챈 발레브스키 프랑스 외상은 제롬 공을 정치 일선에서 몰아내고 다시 러시아와 교섭을 재개하였고, 이듬해 3월 비밀조약이 체결되었다. 조약에서는 프랑스는 장차 흑해 비무장 조항의 철폐를 위해 노력하고, 러시아는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전쟁에서 프랑스에 우호적인 중립을 지키기로 합의하였다.

4.2.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전쟁


프랑스는 러시아와 조약을 체결하는 데는 실패하였지만 적어도 러시아의 우호적 중립은 얻어내었다. 그리고 1859년 1월 1일 나폴레옹 3세는 프랑스 주재 오스트리아 대사에게 "짐은 우리 프랑스와 귀국 오스트리아의 관계가 과거처럼 우호적이지 않은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이다."라고 하였다. 이 발언으로 인해 양국간에 전운이 감돌고 영국을 비롯한 열강들은 국제회의를 소집해 이탈리아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것을 제의하였다. 전술한 것처럼 영국은 현상 유지를 원했기에, 1859년 2월 코울리(H. W. Cowley)를 빈에 파견하여 '오스트리아는 중부 이탈리아 국가들에 대해 간섭하지 않고 사르데냐를 중립화한다.' 중재안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프랑스나 사르데냐는 평화를 원하지 않았고 오스트리아 또한 이탈리아에 대한 권익을 포기할 리가 없었기 때문에 이 중재안은 애초부터 성공할 수 없었다.
이 와중에 오스트리아의 지배 하에 있던 롬바르디아[5]의 청년들이 사르데냐로 밀입국해 사르데냐 군인이 되었다. 오스트리아는 이들을 롬바르디아로 귀환시킨다는 명분을 내걸고, 4월 초에 군대 동원령을 내리고 4월 23일 사르데냐에 무장 해제를 요구하는 최후 통첩을 보냈다. 물론 카보우르는 오스트리아의 요구를 거절하였다.

오스트리아군은 이탈리아 북부의 피에드몬트 지역을 침공하기 시작했지만 프랑스군이 도착하기 전에 완벽한 승리를 잡을 수 없었다. 프랑스와 사르데냐 연합군은 마젠타(Magenta) 전투[6]와 솔페리노(Solferino) 전투[7]에서 승리하며 오스트리아군을 4각 지대의 요새지까지 물리친다.[8] 당시 오스트리아가 이탈리아에 파견한 군대는 대부분 헝가리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군기가 문란하고 전의(戰意)가 없어 탈영과 항복이 비일비재했기에 전투에서 승리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솔페리노 전투를 계기로 나폴레옹 3세의 태도가 급변하였다. 그는 카보우르와의 협의 없이 7월 11일 오스트리아 황제와 직접 만나 휴전에 합의하였다. 나폴레옹 3세의 의중이 이렇게 갑자기 변한데는 다음과 같은 원인이 제기되었다.
  1. 1859년 5월 투스카니, 모데나, 파르마 등지에서 혁명이 일어나 기존의 지배자들이 축출되는 사태가 발생했는데 그 배후에 카보우르가 연결되어 있었다. 나폴레옹 3세는 이탈리아 반도가 그의 영향권 밖으로 벗어나 프랑스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까지 갈 수 있다고 우려하였다.
  2. 오스트리아가 전투에서 패퇴하자 프랑스 내에서는 프로이센 문제가 제기되었다. 4월 오스트리아의 대공(大公) 알베르트(Albert)가 베를린을 방문해 프로이센에 연합전선을 제의했다. 프로이센은 이를 거절하였으나 6월에 군대를 동원하여 프랑스를 자극하였다. 프랑스가 남북으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을 상대해야 할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3. 오스트리아가 4각 지대의 요새지로 후퇴하며 전쟁이 장기화되었다.
이런 이유로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사이에는 1859년 7월 11일 '''빌라프랑카(Villafranca) 조약'''이 체결되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오스트리아는 만투아와 페스키에라 요새를 제외한 롬바르디아 지방을 프랑스에 할양하고 프랑스는 이 지역을 다시 사르데냐에게 할양할 수 있다.
>1. 오스트리아는 베네치아를 계속 보유한다.
>1. 이탈리아의 구지배자들을 다시 복귀시킨다. 그러나 혁명지도자들은 사면한다.
휴전협정은 1859년 11월 10일 '''취리히 조약'''으로 확정되었다. 빌라프랑카 조약이 체결되자 카보우르는 격분하며 재상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얼마 후 복귀한다. 조약 체결 이후 프랑스가 롬바르디아를 사르데냐에 양도하면서 프랑스의 지원은 끝났다.

4.3. 통일의 진전


프랑스로부터 롬바르디아를 받은 후 통일 운동은 열강의 개입없이 이탈리아인의 힘만으로 진행되었다. 제2차 이탈리아 통일전쟁이 프랑스-사르데냐의 승리로 끝난 1859년 여름 중부 이탈리아의 파르마 피아첸차 공국, 모데나 공국, 토스카나 대공국에서 이탈리아 통일주의자들이 혁명을 일으켜 합스부르크 가문부르봉 가문의 군주들을 축출하고 역시 통일주의자들이 봉기를 일으킨 교황령의 로마냐 지방과 함께 1859년 12월 중부 이탈리아 연합주(Province Unite del Centro Italia)를 결성하였다. 신설된 중부 이탈리아 연합주가 사르데냐와의 통합의 결의하자 사르데냐는 열강의 개입을 두려워해 주춤하다가 1860년 1월 카부르가 복귀하여 1860년 3월 주민투표를 통해 통합을 결정하기로 하였다. 투표 결과 압도적으로 통합 찬성으로 결론이 났으며 이를 수락한 사르데냐는 3월 22일 중부 이탈리아 연합주를 합병하였다. 곧이어 3월 24일 사르데냐는 프랑스와 '''토리노 조약'''을 체결하여 프랑스로부터 프랑스와 맞닿은 사보이니스를 할양하고 중부 이탈리아 연합주의 합병을 인정받았다.[9]
북부 이탈리아를 통일한 이탈리아 통일주의자들의 다음 목표는 남부의 양시칠리아 왕국이었다. 1860년 5월 부르봉 왕조의 전복과 남부의 해방을 목표로 주세페 가리발디가 이끄는 붉은 셔츠단 원정대 1,000여 명이 시칠리아 섬에 상륙하였다. 훨씬 많은 수의 양시칠리아 왕국군에 맞서 원정이 실패할 거라는 세간의 예상을 뒤엎고 가리발디와 원정대는 시칠리아군을 연달아 격파하고 시칠리아의 중심도시인 팔레르모(Palermo)를 점령하고 시칠리아 섬 전역을 점령하였다. 8월 가리발디는 이탈리아 반도 장화 끝에 위치한 칼라브리아에 상륙하여 양시칠리아 왕국의 수도 나폴리로 진격했고 그를 막기 위해 파견된 군대는 제대로 싸우기도 전에 도망치거나 가리발디 편에 가담하는 등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덕문에 가리발디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북쪽으로 진격하여 9월 나폴리에 입성하였다. 하지만 양시칠리아 국왕 프란체스코 2세는 북쪽의 가에타(Gaeta) 요새로 도망쳐 가리발디에게 저항을 이어나갔다.
가리발디가 나폴리로 진격할 무렵 때마침 교황령의 마르케와 움브리아에서 교황에 반대하는 소요가 발생했고 이를 빌미로 사르데냐는 남쪽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나폴레옹 3세는 프란체스코 2세와 교황의 지원 요청에도 로마만 건드리지 않는 조건으로 가리발디군과 사르데냐군의 행동을 묵인했고 덕분에 사르데냐군은 수월하게 마르케와 움브리아를 점령하고 나폴리로 남하했다. 10월 21일 양시칠리아 왕국에서 실시된 주민투표에서 압도적인 찬성으로 사르데냐와의 통합을 결정했으며 교황령을 넘어 양시칠리아 왕국에 진입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와 사르데냐군은 10월 26일 테아노(Teano)에서 가리발디와 조우했고 가리발디는 자신이 점령한 모든 영토를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에게 헌납했다. 한편 사르데냐군이 점령한 교황령의 마르케와 움브리아 역시 11월에 주민투표를 통해 사르데냐 왕국에 합병되었다.
가에타에서 농성중이던 프란체스코 2세는 이듬해 2월까지 저항을 이어갔으나 결국 대세를 버티지 못하고 가에타를 포기한 후 로마로 망명하면서 양시칠리아 왕국은 완전히 멸망했다.[10] 이로써 이탈리아는 교황 보호를 이유로 프랑스군이 진주한 로마와 아직 오스트리아가 보유 중인 베네치아를 제외하고 거의 통일되었고, 1861년 3월 17일 토리노에서 이탈리아 왕국의 탄생이 선포되었다. 초대 국왕으로는 사르데냐 왕국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추대되었다. 이탈리아 왕국은 헌법을 채택하고 의회를 구성하여 국민 주권적 원칙과 군주적인 전통을 융합시켰다.
이후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이 벌어지자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에게 중립을 대가로 베네토 지방 매입을 제안했으나 이탈리아는 호기롭게 거절하고(...) 오히려 프로이센에게 베네토 지방을 합병하는 것을 인정받는 대가로 전쟁에서 프로이센 측으로 참전하여 오스트리아가 지배하고 있던 베네토를 침공했다. 이렇게 이탈리아는 기세 등등하게 오스트리아의 제안도 거절하고 베네토로 진격했지만 정작 전쟁이 시작되자 이탈리아군은 오스트리아가 공들여 건설한 사각요새에 막히면서 졸전을 면하지 못했는데 다행히도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를 박살내면서 전쟁은 프로이센의 승리로 끝났고 이탈리아는 약속받은 베네토 지방을 넘겨받아 주민투표를 치루고 1866년 10월 합병했다. 그리고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 인해 교황령을 지키던 마지막 방패이던 프랑스군이 로마에서 철수하면서 이탈리아군은 마지막 남은 교황령을 침공하여 1870년 9월 20일 로마에 입성하였고 10월 2일 주민투표를 통해 로마와 라치오 지방을 공식적으로 병합하였다. 이로써 이탈리아 통일은 완수되었으나, 교황령에 대한 강제병합은 세계 가톨릭 교회에 큰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그리고 교황1929년 라테라노 조약으로 바티칸 시국이 독립할 때까지 바티칸의 포로로 지내게 된다.

5. 미수복 영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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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간기 시대의 이탈리아 왕국.
제1차 세계 대전 승전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로부터 트렌티노알토아디제, 줄리아, 이스트리아 등을 편입하였으며 초록색, 보라색, 빨간색으로 표시된 지역들이 바로 아직 이탈리아가 편입하지 못한 '이탈리아 이레덴타'이다.
1870년 로마 입성을 끝으로 이탈리아 왕국은 이탈리아인이 사는 지역의 대부분을 통일했으나 아직 이탈리아 왕국이 통일하지 못한 이탈리아인들의 땅이 남아있었다. 이탈리아 왕국에 통합되지 않고 따로 남아있는 바티칸, 산마리노, 모나코와 프랑스령인 니스코르시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인 트렌티노알토아디제, 줄리아, 이스트리아, 달마티아, 영국의 식민지인 몰타, 스위스의 이탈리아어권 지역인 티치노[11] 등이 바로 그 지역들인데 이 지역들을 '''이탈리아 이레덴타(Italia irredenta: 미수복 이탈리아)'''라고 하며, 이탈리아 이레덴타를 수복하자는 주장을 '이레덴티스모 이탈리아노(Irredentismo italiano: 이탈리아 수복주의)'라고 한다. 이탈리아 이레덴타의 수복을 위해 1877년 '미수복 이탈리아 협회'가 설립되었으며 이레덴티스모 이탈리아노 운동은 국가통일 운동의 흐름을 이어 받은 민족주의 운동이었으나, 20세기 들어서는 제국주의적 팽창정책과 결합하여 제1차 세계 대전에 이탈리아가 참전하는 원인이 되었다.

6. 부작용


이탈리아 북부는 서양의 전형적인 근대화 경로인 시민사회의 발전, 민족주의 및 자유주의의 대두를 겪었다. 이탈리아 민족주의도 북부를 중심으로 형성된 것이었다. 그러나 근대화에서 소외되었던 남부는 북부만큼의 민족의식이 없었고, 따라서 많은 남부 사람들에게 이탈리아의 통일은 단지 샤르데냐 왕국을 주축으로 한 북부에 의해 남부가 강제 병합된 것에 불과했다.[12] 그 결과, 통일 이탈리아 왕국은 민족의식이 약했던 남부 이탈리아인에게 이탈리아인이라는 의식을 심어주느라 애를 먹었는데, 통일 이후로도 남부에서 양시칠리아 왕국 왕당파와 지역 주민들의 반란이 끊이지 않았던 것이 그 예이다. 또한, 이탈리아 통일 이후 북부와 남부 사람들은 서로를 멸시했는데, 북부에서는 남부 사람들을 농사나 짓는 촌놈으로 멸시했으며, 남부에서는 북부 사람들을 옥수수죽이나 쳐먹는 무리들이라고 멸시했다. 2차 세계대전 때까지 이탈리아군이 오합지졸 군대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 것도 근본적으로 군대 내에서 북부 출신과 남부 출신 사람들이 서로를 같은 이탈리아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고, 상호간에 경멸과 조롱을 일삼은 것이 그 원인이었다. 그리고 이 문제는 현재까지도 해결되지 않아 이탈리아 사회의 커다란 골칫거리가 되고 있다.[13]
다만 한국에 많이 알려진 것과는 달리 이탈리아 반도에는 동질 의식도 분리 의식 못지않게 커 남북문제는 민족 갈등과는 거리가 있는 편이고 (교육 수준이 낮고 민족 의식이 미약했기 때문이었지만) 남부 농민들 상당수는 통일과 분리주의 모두에 관심이 없었다. 통일운동과 시칠리아 독립을 위시한 분리주의 모두 귀족과 부르주아를 위시한 지주층의 관심 분야로 농민들은 봉건제 폐지 당시 사라진 공유지 용익권 부활 혹은 토지 재분배를 주장하였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농민층의 반혁명 운동으로 실패한 남부 혁명 세력은 이후 카르보나리 반란이나 주세페 가리발디의 붉은셔츠단 정복 시 토지 문제의 원흉이 양시칠리아 왕실인 것처럼 선동하여 농민층의 지지를 얻어내나 토지 재분배를 요구하는 농민들을 무력으로 진압하여 통일에 대한 반감을 부추겼다. 이후 지주층을 대변하는 통일 정부에 대한 반감, 토지 중과세와 징병제를 위시한 근대 제도의 이질감, 반동 세력의 충동질 등이 엮여 브리간타조(Brigantagio) 반란이 남부 전역에서 일어났고 신생 이탈리아 왕국 정부는 이를 억압적으로 진압한 뒤 사르데냐 왕국의 시스템을 강요해 반도 전역에 중앙집권 시스템을 확립한다. 지금의 남북간 지역감정은 이러한 갈등을 겪고 이후 경제격차가 벌어지며 격화된 것에 가깝고 역사적 발전 경로 차이와 사회 구조 차이로 인한 이질감 외에 (독립운동 세력이 나름 있는 시칠리아를 제외하면) 민족 독립 의식이 딱히 크게 존재하지는 않는다.

7. 기타


폴란드볼로 보는 이탈리아 통일 과정 만화 #

[1] 이탈리아어로 '부활'이라는 뜻이다. 19세기 초부터 이탈리아 통일 운동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1847년 사르데냐 왕국의 총리 카보우르가 창간한 신문의 이름도 이 점에서 유래하였다.[2] 대 동고트 전쟁[3] 신성 로마 제국 황제는 자동으로 독일 국왕과 이탈리아 국왕 자리를 계승하였다.[4] 사부아는 사르데냐 국왕의 가문인 사보이아 왕조의 본관인 곳이다. 사르데냐는 왕가의 본관까지 포기하면서까지 통일운동에 적극적이었던 것.[5] 밀라노 공국, 만토바 공국[6] 색깔 푸치샤(Fuchsia)가 이 전투의 승리를 기념해 이름이 마젠타로 바뀐다.[7] 6월 24일.[8] 롬바르디아와 베네치아 사이에 있는 페스키에라(Peschiera), 베로나(Verona), 만투아(Mantua), 레냐고(Legnago) 지방의 4개의 요새를 말한다.[9] 본인들의 출신지까지 넘길 만큼 사보이 왕가의 이탈리아 통일 염원은 컸던 듯하다.[10] 프란체스코 2세는 로마에서 망명정부를 이끌다 1866년 이탈리아가 베네토 지방까지 합병하면서 교황령의 멸망이 눈앞으로 다가오자 오스트리아로 재망명해 1894년 그곳에서 사망했다.[11] 원래 알프스 이남에 있어 밀라노 공국의 일부였으나 스위스에 정복당하면서 편입된 지역으로 스위스내 이탈리아어권의 대다수를 차지한다.[12] 참고로 독일 통일에 대한 남부 독일사람들의 인식도 이와 비슷했다. 바이에른 왕국을 주축으로 한 남부 독일사람들에게 독일의 통일은 단지 프로이센에 의해 남부 독일에 있는 여러 국가들의 주권을 박탈당하고, 강제 병합된것에 불과했다. 따라서 통일 이후에도 프로이센과 바이마르 공화국의 통치에 지속적으로 저항했다. 이러한 인식은 지금도 이어져 바이에른을 비롯한 남부 독일사람들은 자신을 독일 사람이라고 하지 않고 그 지방 사람이라고 하는 경우가 흔하며, 공적인 업무나 관공서, 학교에서만 표준 독일어를 쓰고 일상생활에서는 토착방언을 쓰는 경우가 많다.[13] 이탈리아 북부는 독일, 프랑스 급으로 잘 사는 것에 비해, 남부의 경제력은 공산권 국가였던 헝가리, 폴란드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또한, 북부와 남부는 상호간에 언어, 혈통, 음식문화도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