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아힘 셰프케

 

'''요아힘 셰프케(Joachim Schepke : 1912년 3월 8일~1941년 3월 17일)'''
1. 전쟁 이전
2. 제2차 세계 대전
3. 최후의 전투


1. 전쟁 이전


요하임 셰프케는 독일 제국 시대인 1912년 3월 8일에 제국 북부의 항구도시인 플렌스부르크(Flensburg)에서 해군 장교의 아들로 태어났다. 항구 근처에서 군함을 자주 보며 자라고 부친의 영향을 받아 자연스럽게 장래의 희망이 함장이 되었다. 1930년에 징병 연령인 18세가 된 요아힘 청년은 4월에 독일 해군에 입대했다. 처음에는 훈련함인 범선 SS 니오베(SS Niobe)로 항해 경험을 쌓은 요아힘 셰프케 생도는 얼마 후 경순양함 엠덴(SMS Emden)을 타게 된다. 그 후 도이칠란트급 장갑함(Panzerschiff der Deutschland-Klasse)의 1번함인 도이칠란트 호[1]에서 근무하게 된 셰프케는 1935년 10월에 잠수함 전대로 재배치되었고, 18개월간 플렌스부르크의 잠수함 학교에서 지휘관 교육을 받은 후 1938년에는 2형 유보트 U-3의 함장이 되었다. 독일 해군에 잠수함 부대가 다시 창설되었을 때 배치된 유보트 2형은 작고 성능도 떨어져 승무원들에게 카누, 나막신 따위 자조섞인 별명으로 불린 연안초계 잠수함이었으며, 거의 훈련용으로나 사용되었다. 그렇지만 U-3은 귄터 프린 같은 잠수함 천재들이 훈련을 받던 나름 정예함이기도 했다.

2. 제2차 세계 대전


1939년 9월 1일 새벽 4시 45분, 친선우호를 목적으로 단치히 자유시그단스크 항구에 입항해있던 독일 해군의 전노급 전함인 슐레스비히홀슈타인(SMS Schleswig-Holstein)이 폴란드 요새와 해안진지를 향해 11인치 주포를 발사하면서 마침내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 이와 동시에 요아힘 셰프케 중위는 U-3과 부하 승무원들을 이끌고 영국군의 수송선단을 격파하기 위해 출격했으며, 9월 30일까지 덴마크 상선 벤디아(Vendia)와 스웨덴 수송선 군(Gun)을 격침시켜 2,348톤의 첫 전과를 거두었다. 자신이 최신형 잠수함을 지휘할 능력이 충분하다는 사실을 입증한 요아힘 셰프케였으나, 7형 유보트가 부족해 U-19로 갈아타게 된다. 그는 이 소형 잠수함을 지휘하는 동안 9척 15,715톤의 격침 전과를 추가시켰다. 1940년 2월 27일에 셰프케 중위에게 1급 철십자 훈장이 주어졌다.
그후 7형 유보트 U-100의 부장으로 전출하여 근무하다가 1940년 5월에 지휘권을 인수하게 되었다. 대위가 된 세프케는 첫 번째 항해에서는 에서 프랑스로리앙까지 항해하면서 6척 25,812톤을 바닷속에 수장시켰다. 2번째 전투 출항에서는 겨우 이틀 동안 7척 50,340톤을 떼로 격침시켰고, 이 극적인 전투로부터 이틀 후인 9월 24일에 기사철십자훈장을 수여받았다. 셰프케는 동물적인 전투감각 같은 것이 있었는지, 먹잇감이 시원치 않다 싶으면 매복한 상태에서 통과시키고 다른 대규모 선단을 노려 한번의 공격에 큰 피해를 입히는 영리한 전술을 구사했다. 이와 같은 전술을 고집한 그는 11월 23일에도 하루에 7척 24,601톤의 격침 전과를 올려 다른 유보트 함장들의 기가 질리게 만들었다. 이 전투로부터 1주일 후, 요아힘 셰프케의 목에는 기사십자장을 받은지 고작 3개월 만에 백엽 기사철십자훈장이 걸리게 된다.
1940년 가을에 독일 해군의 잠수함대 사령관 카를 되니츠 제독은 잠수함이 거둔 혁혁한 무공을 다시 일깨우고 여론의 관심을 끌기 위한 목적으로 유보트 지휘관 중에서 귄터 프린이나 요아힘 셰프케처럼 전과가 뛰어난 함장들로 하여금 책을 쓰게 했다. 귄터 프린은 스캐퍼 플로우 기습에서 자신과 U-47의 행적을 묘사한 회고록을 펴낸 반면, 셰프케는 자신이 직접 그린 그림으로 책을 장식했다. '''오늘날의 잠수함 승조원(U-Boot Fahrer von heute)'''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 136페이지짜리 그림책은 셰프케 대위가 손수 그린 12개의 삽화가 포함되어 독일 어린이들에게 인기가 엄청나게 좋았다.
1941년 2월에는 14,000명의 학생들이 운집한 베를린 스포츠궁전(Berlin Sportpalast)에서 유보트 전투에 관해 연설하기도 했는데, 이것은 그가 전사하기 6주일 전이었다.

3. 최후의 전투


U-100으로 제5차 초계 임무에 출격한 그는 1941년 3월 17일 03시 18분, HX-112 호송선단를 공격하던 중에 호위함이었던 영국 해군구축함 HMS 워커(HMS Walker)와 HMS 베녹(HMS Vanoc)으로부터 집중 공격을 받고 격침되었다. 셰프케와 37명의 승조원들은 바다에 수장되었고, 불과 6명의 수병만이 구출되었다. U-100의 침몰 위치는 아이슬란드 남서쪽 북위 61도, 서경 12도로 추정되지만 아직까지 선체나 유물은 발견된 바 없다.
1차 대전에 건조된 V, W급 구축함 워커와 배녹은 구식에다 낡아빠진 함선이었으나, 영국 기술진들이 개발한 당대 최신의 센티미터파 레이다가 추가되었는데 그것으로 함장 제임스 G. 우드(James Godfrey Wood) 소령은 수십 미터 앞도 보이지 않는 짙은 해무 속에서 U-100을 먼저 탐지해내고 선제 공격을 할 수 있었다. 반면, U-100의 견시들은 미속으로 항해등까지 끄고 조용히 접근하는 구축함을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먼저 접근한 배녹 역시 너무 가까와 포격을 할 수 없게 되자 함수로 들이받으려 했으나 U-100은 긴급 잠항하며 도주를 시도했다. 그렇지만 곧바로 폭뢰가 우박처럼 쏟아졌고, 함체가 깨진 유보트는 다시 떠오르지 못하고 그대로 해저로 가라앉았다.
같은 날, 같은 구축함에 요아힘 셰프케와 동갑내기 절친한 전우이자 2차 대전 최고의 격침 전과를 거둔 유보트 에이스 오토 크레치머 소령의 U-99도 공격받아 침몰했고, 그는 셰프케와 달리 영국군의 포로가 되었다. 요아힘 셰프케 대위는 개전부터 전사할 때까지 1년 6개월이라는 짧은 기간만 임무에 나섰지만 그동안 37척 155,882톤의 배를 격침시켰고, 4척에 중파 이상에 이르는 피해를 입혔다. 이 같은 전과는 2차 대전을 통틀어 11위에 해당하는 것으로 계속 살아남아 더 활약을 펼쳤다면 그 몇 배나 되는 심각한 피해를 연합군에 입혔을 것이다.
귄터 프린과 오토 크레치머, 요아힘 셰프케 세 함장은 서로 친하게 지내면서도 경쟁심에 불타는 라이벌이었고, 전쟁 초기에 가장 유명한 유보트 함장들이었다. 격침 전과는 오토 크레치머가 톱이지만 나치 정부는 은근히 쉐프케를 더 선전에 활용한 탓에 독일 국민들에게는 더욱 유명하고 인기가 많았는데, 이것은 그의 외모가 출중한 것과 나치 신념이 투철한 군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전사한 후, 제국 선전장관 요제프 괴벨스는 독일의 젊은이들이 본받아야 할 인간상으로 널리 선전했다.

[1] 나중에 "뤼초우"로 함명을 바꾸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