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 크레치머
'''오토 크레치머(Otto Kretschmer : 1912년 5월 1일~1998년 8월 5일)'''
2차 대전당시의 나치 독일의 유보트 함장으로 1년 반 정도의 기간동안 16번을 출항해서 47척(27만 3천톤)[1] 을 격침시켜서 유보트 함장중에서 전과로 따지면 1위의 기록을 가진 유보트 에이스이다.
독일 제국 시대인 1912년 5월 1일 지금은 폴란드의 영토가 된 리그니츠(Liegnitz)[2] 부근의 하이다우(Heidau)라는 교외 마을에서 초등학교 교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근무하는 학교를 다닌 오토 소년은 중등학교로 진학했지만, 제국의 변경 지역이어서 1차 대전의 패배로 인한 바이마르 공화국 초기의 혼란상을 비교적 덜 겪으며 자랐다고 한다. 성장한 후 과학자를 꿈꾼 오토 소년은 또래의 소년들과 다르지 않았고, 아비투어 시험에서는 화학 과목에 두각을 나타냈다고 한다. 그를 가르친 교사가 남긴 학생평가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남아 전해진다.
한편 그는 방학 기간을 이용해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견문을 넓히기도 했다. 하지만 1929년에 그의 어머니가 수술을 받다가 의료 사고로 인해 파상풍 감염으로 세상을 떠나자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오토 크레치머는 28살이 되던 1930년에 소원대로 바이마르 공화국 해군(Reichsmarine)에 사관생도로 입대했다. 독일 북부 해안의 슈트랄준트(Stralsund)에서 1930년 6월 30일에 기초 군사교육을 받은 그는 3개월 동안 연습함 니오베(SS Niobe)에 타고 밧줄과 돛, 육분의, 그리고 교재와 씨름하면서 기초 항해 훈련을 받았다. 모든 유보트 함장이 그랬던 것처럼, 오토 크레치머 생도도 첫 임지는 수상함이었다. 그는 1934년 12월에 경순양함 엠덴(Emden)에 승함하여 극동까지 원양 항해 경험을 쌓게 된다. 이 시기 독일 해군 생도들에게 제일 흔하게 지정되는 항로는 남미였고, 더러 극동이나 북미를 지정받기도 했는데 오토 크레치머는 지중해를 빠져나가 수에즈 운하를 통과해 실론, 필리핀, 중국을 거쳐 일본의 요코스카 항에 기항했다. 엠덴이 일본을 떠나 괌, 남아프리카, 앙골라와 스페인을 거쳐 빌헬름스하펜(Wilhelmshaven)으로 돌아온 것은 1931년 12월 2일이었다. 크레치머와 함께 순양함에서 고락을 함게 한 생도들은 그제서야 한 명의 장교 후보생이 된 것이다. 그렇지만 잠수함에 타려면 수상함 보다 훨씬 다양한 교육을 받아야만 했다.
킬 항구에 있는 뮈르빅 해군사관학교(Marineschule Mürwik)에 입교한 그는 측량선 미테올(KM Meteor)에 타고 4월 22일까지 항법 훈련을 받은 후, 6월 29일까지는 킬-빅(Kiel-Wik)에서 함포 사격 훈련을 받았다. 교육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빌헬름스하펜에서 어뢰에 관한 교육을 8월 18일까지 받느라 정신없었다. 또 뇌격 훈련을 마친 다음 날부터는 대공 사격 훈련을 8월 31일까지 받게 된다. 또 9월 1일부터는 사관학교로 돌아가 통신 훈련 3일을 추가하고 나서야 유보트에 견습장교로 탈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다. 이때 보통 연안 초계함인 2형 유보트를 타게 되는데 크레치머 생도는 1933년 9월 25일부터 10월까지 처음으로 잠수함에 타고 잠항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물론 이런 교육 과정은 매우 타이트해서, 여기까지 훈련을 받는 동안에도 탈락자는 줄줄이 속출하게 된다. 전간기의 독일 해군은 잠수함장으로 하여금 고속정부터 전함까지 모든 종류의 군함을 지휘할 능력을 요구했던 탓에 그 훈련 과정은 엄청나게 복잡다단하고 고되었다. 이제 사관생도 오토 크레치머는 마지막 훈련 코스인 전함 실습 훈련을 남겨두고 있었다. 1933년 10월 2일, 크레치머는 휴가를 받아 덴마크를 여행하고 돌아오자마자 포켓전함 도이칠란트(KMS Deutschland)의 함포 견습장교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전함에 탄지 5일 만에 함대는 바르네뮌데(Warnemünde)에서 대공방어 훈련을 받느라 보직을 다시 지정받을 때까지 잠시 배에서 내렸다.
얼마간 대기 발령을 하던 그는 1934년 3월 19일에 경순양함 쾰른(Köln)에 타라는 명령을 받았다. 9월 26일까지 크레치머 생도는 북해와 발트해에서 열린 사격 훈련에 참가했다. 그해 7월 25일에 쾰른이 에커른포르드(Eckernförde)에 기항했을 때 총통 히틀러가 해군 연습을 시찰하기 위해 승함했다. 좌승함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크레치머는 준위에 해당하는 1등 사관후보생으로 임명된다. 크레치머는 비로소 한명의 어엿한 해군 장교가 된 것인데, 교육 훈련은 쉼없이 계속되었다. 9월 27일부터 12월 21일까지 석 달 동안 플렌스부르크(Flensburg)에서 다양한 조건과 상황에서 어뢰를 목표에 명중시키는 뇌격 훈련을 받는 것이다. 오토 크레치머는 1934년 10월 1일에 소위로 진급했고, 12월 22일부터는 순양함 쾰른으로 돌아가 차석 어뢰 장교로 복무했다. 이 시기에 크레치머 소위는 트라베뮌데(Travemünde)에서 캐터펄트 관제 교육 또한 받았다. [3]
오토 크레치머는 이처럼 다양한 교육 훈련을 모두 수료하고 여러 수상함을 전전한 후, 1936년 1월에 잠수함 부대로 발령을 받는다. 바이마르 해군은 그가 잠수함장으로 보직을 받기 전인 1935년에 크릭스마리네로 재편되었고, 베르사이유 조약의 사슬을 끊고 확장일로를 걷고 있었다. U-35, U-22, U-99을 타면서 선임장교와 함장으로써 혁혁한 무공을 쌓아 올린 오토 크레치머는 2차 대전 동안 전세계의 모든 해군을 통틀어 가장 많은 격침 전과를 올린 잠수함장이 된다. 그는 1939년 9월 1일에 나치 독일이 2차 대전을 일으켰을 때부터 1941년 3월까지 불과 1년 반 동안에 합계 47척 / 273,043톤이나 격침시켰다.
이러한 믿기 힘든 전과의 배경에는 그만의 과감한 전술 구사가 있었다. 전쟁 초기 유보트 함장들이 즐겨쓴 전술은 잠수함을 호송선단이 항해하는 전진 방향 앞에 매복시켜 미리 위치를 잡고 잠망경으로 관측하다가 목표가 뇌격 사정거리에 들어오면 부상하여 3~4발의 어뢰를 부채꼴로 발사하는 방식이었다. 그 무렵은 유도어뢰가 없었던 탓에 이처럼 공격전술이 정형화되었는데, 이것은 적 함대의 동향을 감시하기 쉽고 직진 항주하는 어뢰의 명중률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오토 크레치머는 이와는 사뭇 달랐다. 목표로 노리던 호송선단의 외곽을 경계하는 호위함들이 접근하면 곧바로 해면에 흰 포말을 만들지 않도록 슬며시 잠수한 다음 선단의 중앙에 위치한 목표 선박 근처까지 침투했다가, 갑자기 부상하여 어뢰를 딱 1발만 쏘고 재빨리 잠항하여 회피하는 대담하고 기발한 전술을 구사하였다. 또한 그는 상선 1척을 격침시키기 위해 3발의 어뢰를 동시에 사용하던 기존의 사고 방식에서 벗어나 "Ein Torpedo-ein Schiff!(어뢰 1발에 배 1척!)"을 표어로 걸고 지휘하였다.
크레치머가 처음 잠수함으로 임무에 나간 것은 한스-루돌프 뢰싱(Hans-Rudolf Rösing : 1905~2004) 대위가 지휘하고 있던 7형 유보트 U-35에서 선임장교로 근무하면서 스페인 내전에 파견되었을 때로, 스페인 연안에서 정찰 임무를 수행했지만 기밀 임무였던 탓에 격침 전과는 없었다. 유능한 클레치머는 공격적이고 배짱 좋은 뢰싱 대위와 매사에 소심하고 우유부단했던 전임 함장 클라우스 에베르트(Klaus Ewerth : 1907~1943) 대위를 보좌하면서 자연스럽게 비교를 하게 되었고, 함장직에 필요한 정확한 판단력과 과감한 결단력을 몸에 익히게 된다. 스페인 파견이 끝나고 U-35에서 내린 그는 폴란드 침공 작전 1개월 후인 1939년 10월 1일에 2형 유보트 U-23의 함장으로 임명되어 영국과 스코틀랜드 동부 연안, 그리고 북해에서 영국 해군의 활동을 감시하라는 지령을 받고 초계 임무에 나갔다.
크레치머는 자신이 처음으로 뇌격을 가해 적함을 가라앉혔을 때를 똑똑히 기억했다. 1939년 10월 4일에 노르웨이에서 영국으로 향하던 876톤 수송선 글렌 파(Glen Farg)는 U-23이 발사한 어뢰에 정통으로 얻어맞고 순식간에 수심 1,000패덤의 노르웨이해로 빨려들어갔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글렌 파는 비록 소형 수송선이었으나 노르웨이에서 캐낸 크롬 광석을 가득 싣고 영국으로 향했으나 크레치머 중위 때문에 목적지에 닿지 못했고, 그정도의 페로크롬 원석이라면 전차 수 만대나 전함 몇 척을 만들 수 있는 양의 귀중한 전략자원이었다. 크레치머는 가라앉기 전에 탈출한 영국 선원들이 U-23을 향해 헤엄쳐오자 구명정을 띄워주었는데, 이런 신사적인 행동은 유보트 함장으로서는 매우 드문 일이다. 10월 16일에 귀항한 그는 2급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11월 1일부터 9일까지 수행한 4차 초계에서는 별 수확을 거둘 수 없었다. 12월 5일부터 15일까지 나간 5차 초계에서 그는 오크니 제도 주변의 수로를 탐사하고 귄터 프린 대위가 지휘하는 U-47의 공격으로 스캐퍼 플로우를 떠나고 남은 영국 함대를 견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2월 7일에는 덴마크 상선 스코샤(Scotia : 2,400GRT)를 목표로 삼았는데, 그 배는 다른 3척의 상선과 함께 무리지어 항진하고 있었다. 호위함이 근처에 있을 것으로 의심한 크레치머는 스코샤만 격침시키고 재빨리 그 자리를 벗어났다. 12월 17일에 모항으로 돌아온 그에게는 1급 철십자 훈장이 주어졌다.
해가 바뀐 1940년 1월 8일, U-23은 킬 항구에서 벗어나 6차 항해에 나섰으나 이때는 크레치머가 지휘하지 않고 한스-디트리히 폰 티센하우젠(Hans-Dietrich von Tiesenhausen : 1913~2000) 중위가 이끌었다.[4] 한스-디트리히 함장은 1월 11일에 노르웨이 수송선 프레드빌(Fredville : 1,150GRT)을 침몰시켰고, 이 공격으로 11명의 선원이 죽고 5명만이 살아남았다.
크레치머 대위는 다음날 곧바로 다시 초계에 나갔다. 1월 12일 밤에 인거네스 만(Inganess Bay)에서 덴마크 선적 유조선 단마크(Danmanrk : 10,517GRT)를 공격해 침몰시켰지만, 다행히도 모든 선원이 대피해 사망자가 없었다. 보통 다른 함장이었다면 유조선이 화광충전하게 밤하늘을 밝히며 불타고 있으면 주의를 끌기 쉬운 탓에 곧바로 다시 어뢰를 쏴 침몰시키기 마련이지만, 크레치머는 전망탑에서 쌍안경으로 선원들이 탈출하는 것을 지켜 본 후에야 가라앉혔다. 1월 15일에 빌헬름스하펜으로 돌아오고 3일 후에 7차 전투 초계에 나가서 곧바로 노르웨이 화물선 바릴드(Varild : 1,085GRT)를 셰틀랜드 동부 연안에서 격침시켰다. 이때는 연안 초소에서 관측될 것을 우려해 사전 경고없이 어뢰를 발사해 15명의 선원이 모두 사망했다. U-23은 1월 29일에 항구로 돌아왔다.
그는 2월 9일에 제8차 초계를 위해 빌헬름스하펜을 출발했다. 2월 18일, 크레치머는 펜틀랜드 협만(Pentland Firth) 어귀에서 노르웨이에서 출발한 HN 12 호송선단을 에스코트하고 있던 영국의 1,300톤급 C, D급 구축함 데어링(HMS Daring)을 포착했다. 당시 데어링은 그 무렵 해군 내규에 따라 등화관제 상태로 항해하고 있었으나 승무원이 창문 하나의 커튼을 여는 통에 눈에 불을 켜고 쌍안경으로 주위를 살피던 U-23 함교의 견시에게 발각된 것이었다. 크레치머 함장은 딱 1발의 어뢰를 발사한 다음, 결과를 보지도 않은 채 함수를 180도 돌려 전속력으로 달아났다. 데어링의 승조원들은 독일 잠수함을 목격하지 못해서 ASDIC을 켜지도 않은 상태였고 어뢰는 그대로 함미에 명중해 기관실을 날려버렸다. 함장 시드니 쿠퍼(Sydney Cooper) 소령을 포함하여 영국 수병 157명이 사망하고 5명만이 살아남았다. 타오르는 구축함의 불빛을 뒤로 하고 사방을 경계하며 전속 항진하던 크레치머의 쌍안경에 곧 영국의 T급 잠수함 티슬(HMS Thistle)이 들어왔다. 거의 정면이어서 항로를 크게 수정할 필요도 없이 곧바로 두 번째 어뢰를 발사했지만, 이것은 빗나가 버렸다. 티슬은 마침 선회중이서 운좋게 어뢰에 맞지 않았으나, 몇 주 후 하인츠-오토 슐체(Heinz-Otto Schultze : 1915~1943) 중위가 지휘하는 2형 유보트 U-4와 치열한 어뢰전을 펼친 끝에 침몰했다.
다음 날, U-23은 모레이 협만(Moray Firth)에서 상선 티버톤(Tiberton : 5,225GRT)을 가라앉혔다. 2월 22일에는 전날 기관실에 피격되어 선단 뒤에 처져 힘겹게 따라가던 영국 상선 로크 매디(Loch Maddy : 4,996GRT)를 바다 밑에 장사지냈다. 오토 크레치머와 부하들은 해상에서 17일간 임무를 수행하고 2월 25일에 군악대와 환영 인파의 성대한 환대를 받으며 빌헬름스하펜으로 돌아왔는데, 이것이 그가 2형 유보트로 수행한 마지막 초계 임무였다.
1940년 4월 2일, 나막신만한 U-23으로 8회 초계 임무른 수행하며 숱한 공적을 쌓은 오토 크레치머는 대위로 승진함과 동시에 신형 잠수함인 VIIB형 유보트 U-99의 인수 및 적응 훈련을 위해 킬 군항의 게르마니아베르프트(Germaniawerft) 조선소로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4월 18일부터 U-99는 제7잠수함대에 배속받았고, 크레치머 대위는 2개월간 독일 근해에서 기동 훈련과 평가를 수행한 후 6월 18일부터 전투 배치가 시작되었다. 6월 21일 9차 항해에 나간 크레치머 대위와 U-99는 하필 전함 샤른호르스트(DKM Scharnhorst)에서 발진한 아라도 Ar 196 수상초계기가 영국 잠수함으로 착각하고 떨군 50 kg 폭탄을 얻어맞고 꽤 크게 부서졌다. U-99는 사망자는 없었지만 잠수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6월 25일에 모항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U-99는 4차 항해부터 성과를 거두기 시작했다. 크레치머는 야간의 어둠을 이용해 호송선단에 가깝게 접근해 공격하기 시작했으며 목표 선박 당 1발의 어뢰만 사용하는 매우 정확한 조준으로 상선을 침몰시켰는데, 어뢰 1발에 1척이라는 그가 남긴 격언은 바로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특히 크레치머의 뻔뻔스러울 정도로 배장 좋은 전술은 앞서 기술한 야간에 선단 내부에 파고 들어 무차별 공격을 가하는 것이었는데, 영국 해군의 죠지 크리시(George Elvey Creasy : 1895~1972) 제독은 이와 같은 전술 기동은 호송선단에게 너무나 치명적이지만, 유보트에게도 위험해 자주 쓰이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크레치머에게는 예외였다.
크레치머 대위는 6월 27일부터 7월 21일까지 수행한 10차 항해에서도 20,000톤의 무공을 추가시켰다. 첫 번째 제물이 된 HX 53 선단의 마곡(Magog)를 침몰시키자 크레치머 함장은 부하들에게 브랜디를 한 병씩 돌리고 아일랜드로 향하라고 명령했다. 크레치머는 그처럼 많은 배를 가라앉히면서도 가급적 희생자를 줄이려고 애를 썼고, 많은 경우 선원의 희생을 줄일 수 있다면 다소의 위험을 무릅쓰는 일도 종종 있었다. 물론, 자함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는 한도내에서 베푼 온정이지만, 크레치머는 종종 바다에 뛰어내린 선원들을 건지고 난 후 구명정을 내주기도 했고, 보트에 탄 채 표류하는 선원들에게는 체온 유지에 요긴한 담요나 술을 내주기도 했다.
오토 크레치머가 거둔 최대의 전과는 1940년 11월로, 여객선을 개조한 병력 수송선 로렌틱(SS Laurentic : 18,724GRT), 무장 상선 패트로클러스(SS Patroclus : 11,314GRT), 여객선을 무장 상선으로 개장한 포퍼(HMS Forfar : 16,402GRT) 등 세 척의 대형 선박을 차례로 침몰시켰을 때였다. 이 격침을 계기로 오토 크레치머 대위는 유보트 함장 중에서 격침톤수 1위를 부동의 자리로 굳히게 된다. 오토 크레치머 대위의 목에는 독일 전군을 틍틀어 6번째로 백엽 기사철십자 훈장이 걸렸다.
베를린으로 소환된 전쟁 영웅 오토 크레치머 대위는 총통 히틀러에게 초대를 받고 관저에서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그 자리에는 소련 대사 몰로토프(Вячеслав Михайлович Молотов : 1890~1986)도 동석하고 있었다. 몇 시간 동안 식사를 하면서 총통은 젊은 잠수함장으로부터 대서양 전투의 상황과 유보트 승조원들의 활약상에 관해 듣고 싶어했다. 마지막으로 헤어지기 전에 총통은 유보트 부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고, 오토 크레치머는 적절한 항공 세력의 지원이 가장 절실하다고 대답했는데, 이것은 훗날 전쟁 중반부터 유보트에게 가장 큰 위협이 대잠 초계기가 된 사실을 떠올려 보면 깊은 통찰력이 바탕이 되어 나온 하나의 예언과도 같은 것이었다.
1941년 3월이 크레치머의 마지막 초계 항해가 되었다. 이 때, 크레치머 함장과 U-99는 무려 10척의 배를 수장시켜 최고조에 달한 기량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HX 112 호송선단을 공격하던 U-99는 도널드 맥킨타이어 중령이 지휘하는 영국 해군의 구축함 워커(HMS Walker)로부터 정확하게 폭뢰 공격을 받고 함체가 찢어지고 밸러스트 탱크가 터져 항해 불능이 되었다. 3월 17일 오후 3시 45분에 오토 크레치머 대위는 워커가 퍼부은 폭뢰 세례를 피하기 위해 압궤 심도를 지난 270미터까지 잠수했다가 차부라지며 계속 가라앉아가는 잠수함을 최후의 힘을 짜내 부상시킨 뒤, 영국 해군의 포로가 되었다. 이 때 부력을 거의 잃어버린 U-99는 금새라도 바닷속으로 잠기려 했지만 크레치머의 신속한 지휘로 43명의 승조원 가운데 40명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퇴함 직전에 그는 다음과 같은 전문을 에니그마를 이용해 함대 사령부로 발신했다.
오토 크레치머와 U-99의 생존 승무원들은 리버풀 항으로 들어왔는데, 당시 이 도시에는 루프트바페의 폭격기들이 연일 공습을 퍼붓고 있어서 자칫 했다간 성난 시민들에게 끌려가 린치당할 수도 있었다. U-99의 생존자는 함장 / 장교 / 수병 3개 그룹으로 따로 분리되어 런던 켄싱턴에 마련된 포로수용소에 감금되었다. 나름 귀빈(?)이었던 오토 크레치머는 영국 선박을 그렇게도 괴롭힌 적이 누군지 궁금해 견딜 수가 없던 윈스턴 처칠 수상이 직접 찾아와 보고 간 일도 있었다. 말끔하게 면도를 시켜놓은 크레치머를 창을 통해 지켜 본 처칠은 저 작자가 정말로 수 만톤의 배를 가라앉힌 유보트 함장이 맞느냐고 반문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사실, 이 젊은 장교가 연합군 선박을 무려 26만톤이 넘게 바닷속에 장사지냈다는 사실을 괄괄한 성격의 처칠 수상이 알았다면, 그의 처우가 어떻게 달라졌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오토 크레치머는 가장 성공적인 경력을 쌓고 있던 최고의 유보트 함장이었던 탓에, 그와 승조원들은 영국 해군 정보 당국에서 파견한 조사관들에 의해 각종 정보를 캐내려는 시도가 계속 되었다. 이 과정에서 얻어낸 첩보들은 '''U-99 생존자 심문'''이라는 보고서로 작성되었고 훗날 대서양 전투에서 귀중한 자료로 쓰였다. 크레치머가 가장 충격받은 것은 독일 공군이 버킹엄 궁전과 시민들이 살고 있는 민가에 직접 폭격을 가했다는 사실이었다. 크레치머 같은 장교도 본국의 선전에 의해 공군은 공업지대와 공장, 그리고 비행장 같은 군사 시설물만 골라서 선별적으로 폭격을 가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현실은 너무나도 참혹하고 달랐다.
이후 크레치머는 캐나다를 거치며 7년 동안 포로수용소에 감금되어 있다가 2차 대전이 끝나고 2년여가 흐른 1947년 12월에 둘로 갈라진 독일로 귀국했다. 이듬해인 1948년에는 병원에서 사소한 진료를 받다가 평생의 배필이 된 의사 루이제-샤를로테 몬젠-하인릭(Luise-Charlotte Mohnsen-Hinrichs) 여사를 만나게 되었고, 곧 사랑에 빠진 두 남녀는 몇 달 만에 결혼에 골인했다.
1953년부터 해군 재창설 준비위원으로 분주하게 활동하던 오토 크레치머는 1955년에 미국의 주도로 서독 해군(Bundesmarine)이 재창설되자 해군 중령(Fregattenkapitän)으로 다시 복무하게 된다. 이때 전쟁 당시 자신을 격침시켰던 도널드 매킨타이어 대령을 만나게 되었고, 그 자리에서 U-99를 지휘할 때 썼던 쌍안경을 되돌려 받았다. 서독 해군이 왕년의 베테랑 잠수함장에게 처음 맡긴 보직은 교관 직무였다. 올덴부르크에서 해군 장교들을 가르치던 그는 1957년부터는 베스페급 고속정으로 이루어진 제1호위전대(1. Geleitgeschwader)의 지휘관이 되었다. 크레치머는 해군의 주요 보직을 거치면서 꾸준히 승진했고, 나토군 해군참모부장이라는 요직을 수행하다가 1970년 9월에 해군 준장 계급으로 전역했다.
공직에서 물러난 뒤, 노인이 된 오토 크레치머는 종종 2차 대전에 관한 다큐멘터리나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인터뷰를 했었다. 특히, 영국 BBC에서 1974년에 제작한 다큐멘터리 시리즈 The World at War의 인터뷰가 내용이 충실하여 잘 알려져 있다.
1998년 여름, 어느덧 86세가 된 오토 크레치머는 50번째 결혼 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해서 아내와 함께 바이에른주로 여행을 떠났다. 그는 다뉴브 강 상류에서 래프팅을 즐기다가 폭포에서 보트가 떨어지는 사고를 당해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사망했다. 시신은 화장되었고, 평소 유언에 남긴 대로 재는 바다에 뿌려졌다.
2급 철십자 훈장 (1939. 10. 17)
U보트 전공장 (U-Boots-Kriegsabzeichen / 1939. 11. 9)
1급 철십자 훈장 (1939. 12. 17)
기사 철십자훈장 (1940. 8. 4)
백엽 기사철십자훈장 (1940. 11. 4)
백엽검 기사철십자훈장 (1941. 12. 26)
2차 대전당시의 나치 독일의 유보트 함장으로 1년 반 정도의 기간동안 16번을 출항해서 47척(27만 3천톤)[1] 을 격침시켜서 유보트 함장중에서 전과로 따지면 1위의 기록을 가진 유보트 에이스이다.
1. 출생과 성장
독일 제국 시대인 1912년 5월 1일 지금은 폴란드의 영토가 된 리그니츠(Liegnitz)[2] 부근의 하이다우(Heidau)라는 교외 마을에서 초등학교 교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근무하는 학교를 다닌 오토 소년은 중등학교로 진학했지만, 제국의 변경 지역이어서 1차 대전의 패배로 인한 바이마르 공화국 초기의 혼란상을 비교적 덜 겪으며 자랐다고 한다. 성장한 후 과학자를 꿈꾼 오토 소년은 또래의 소년들과 다르지 않았고, 아비투어 시험에서는 화학 과목에 두각을 나타냈다고 한다. 그를 가르친 교사가 남긴 학생평가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남아 전해진다.
해군에 들어가 함장이 되고 싶었던 오토 소년은 어느덧 17세가 되었으나 입대하기에는 너무 어렸고, 외아들이 군인이 되는 것이 내키지 않았던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시야를 넓혀주기 위해 영국으로 유학을 보냈다. 오토는 영국 남서부에 있는 엑시터 대학교에 입학했으며, 독일 출신의 제이콥 빌헬름 스콥(Jacob Wilhelm Schopp : 1845~1933) 교수 밑에서 공부했다. 이 시기, 그는 영어를 완전히 마스터하고 영국인들의 실용적인 면에 촛점이 맞춰진 교육 체계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밝힌 바 있다. 영국 유학 동안 그는 훗날 전쟁 중에 적들에 대한 그만의 독특한 견해를 형성시켰고, 군인이 될지언정 나치즘에 무조건 동조하는 인물이 되는 것은 피할수 있었다.'''"씩씩한 크레치머는 많은 경우에 특별한 용기를 보여주었습니다. 이 소년은 해군 장교가 되고 싶어합니다."'''
한편 그는 방학 기간을 이용해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견문을 넓히기도 했다. 하지만 1929년에 그의 어머니가 수술을 받다가 의료 사고로 인해 파상풍 감염으로 세상을 떠나자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2. 엄격한 잠수함장 훈련 과정
오토 크레치머는 28살이 되던 1930년에 소원대로 바이마르 공화국 해군(Reichsmarine)에 사관생도로 입대했다. 독일 북부 해안의 슈트랄준트(Stralsund)에서 1930년 6월 30일에 기초 군사교육을 받은 그는 3개월 동안 연습함 니오베(SS Niobe)에 타고 밧줄과 돛, 육분의, 그리고 교재와 씨름하면서 기초 항해 훈련을 받았다. 모든 유보트 함장이 그랬던 것처럼, 오토 크레치머 생도도 첫 임지는 수상함이었다. 그는 1934년 12월에 경순양함 엠덴(Emden)에 승함하여 극동까지 원양 항해 경험을 쌓게 된다. 이 시기 독일 해군 생도들에게 제일 흔하게 지정되는 항로는 남미였고, 더러 극동이나 북미를 지정받기도 했는데 오토 크레치머는 지중해를 빠져나가 수에즈 운하를 통과해 실론, 필리핀, 중국을 거쳐 일본의 요코스카 항에 기항했다. 엠덴이 일본을 떠나 괌, 남아프리카, 앙골라와 스페인을 거쳐 빌헬름스하펜(Wilhelmshaven)으로 돌아온 것은 1931년 12월 2일이었다. 크레치머와 함께 순양함에서 고락을 함게 한 생도들은 그제서야 한 명의 장교 후보생이 된 것이다. 그렇지만 잠수함에 타려면 수상함 보다 훨씬 다양한 교육을 받아야만 했다.
킬 항구에 있는 뮈르빅 해군사관학교(Marineschule Mürwik)에 입교한 그는 측량선 미테올(KM Meteor)에 타고 4월 22일까지 항법 훈련을 받은 후, 6월 29일까지는 킬-빅(Kiel-Wik)에서 함포 사격 훈련을 받았다. 교육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빌헬름스하펜에서 어뢰에 관한 교육을 8월 18일까지 받느라 정신없었다. 또 뇌격 훈련을 마친 다음 날부터는 대공 사격 훈련을 8월 31일까지 받게 된다. 또 9월 1일부터는 사관학교로 돌아가 통신 훈련 3일을 추가하고 나서야 유보트에 견습장교로 탈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다. 이때 보통 연안 초계함인 2형 유보트를 타게 되는데 크레치머 생도는 1933년 9월 25일부터 10월까지 처음으로 잠수함에 타고 잠항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물론 이런 교육 과정은 매우 타이트해서, 여기까지 훈련을 받는 동안에도 탈락자는 줄줄이 속출하게 된다. 전간기의 독일 해군은 잠수함장으로 하여금 고속정부터 전함까지 모든 종류의 군함을 지휘할 능력을 요구했던 탓에 그 훈련 과정은 엄청나게 복잡다단하고 고되었다. 이제 사관생도 오토 크레치머는 마지막 훈련 코스인 전함 실습 훈련을 남겨두고 있었다. 1933년 10월 2일, 크레치머는 휴가를 받아 덴마크를 여행하고 돌아오자마자 포켓전함 도이칠란트(KMS Deutschland)의 함포 견습장교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전함에 탄지 5일 만에 함대는 바르네뮌데(Warnemünde)에서 대공방어 훈련을 받느라 보직을 다시 지정받을 때까지 잠시 배에서 내렸다.
얼마간 대기 발령을 하던 그는 1934년 3월 19일에 경순양함 쾰른(Köln)에 타라는 명령을 받았다. 9월 26일까지 크레치머 생도는 북해와 발트해에서 열린 사격 훈련에 참가했다. 그해 7월 25일에 쾰른이 에커른포르드(Eckernförde)에 기항했을 때 총통 히틀러가 해군 연습을 시찰하기 위해 승함했다. 좌승함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크레치머는 준위에 해당하는 1등 사관후보생으로 임명된다. 크레치머는 비로소 한명의 어엿한 해군 장교가 된 것인데, 교육 훈련은 쉼없이 계속되었다. 9월 27일부터 12월 21일까지 석 달 동안 플렌스부르크(Flensburg)에서 다양한 조건과 상황에서 어뢰를 목표에 명중시키는 뇌격 훈련을 받는 것이다. 오토 크레치머는 1934년 10월 1일에 소위로 진급했고, 12월 22일부터는 순양함 쾰른으로 돌아가 차석 어뢰 장교로 복무했다. 이 시기에 크레치머 소위는 트라베뮌데(Travemünde)에서 캐터펄트 관제 교육 또한 받았다. [3]
3. 잠수함 생활
오토 크레치머는 이처럼 다양한 교육 훈련을 모두 수료하고 여러 수상함을 전전한 후, 1936년 1월에 잠수함 부대로 발령을 받는다. 바이마르 해군은 그가 잠수함장으로 보직을 받기 전인 1935년에 크릭스마리네로 재편되었고, 베르사이유 조약의 사슬을 끊고 확장일로를 걷고 있었다. U-35, U-22, U-99을 타면서 선임장교와 함장으로써 혁혁한 무공을 쌓아 올린 오토 크레치머는 2차 대전 동안 전세계의 모든 해군을 통틀어 가장 많은 격침 전과를 올린 잠수함장이 된다. 그는 1939년 9월 1일에 나치 독일이 2차 대전을 일으켰을 때부터 1941년 3월까지 불과 1년 반 동안에 합계 47척 / 273,043톤이나 격침시켰다.
이러한 믿기 힘든 전과의 배경에는 그만의 과감한 전술 구사가 있었다. 전쟁 초기 유보트 함장들이 즐겨쓴 전술은 잠수함을 호송선단이 항해하는 전진 방향 앞에 매복시켜 미리 위치를 잡고 잠망경으로 관측하다가 목표가 뇌격 사정거리에 들어오면 부상하여 3~4발의 어뢰를 부채꼴로 발사하는 방식이었다. 그 무렵은 유도어뢰가 없었던 탓에 이처럼 공격전술이 정형화되었는데, 이것은 적 함대의 동향을 감시하기 쉽고 직진 항주하는 어뢰의 명중률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오토 크레치머는 이와는 사뭇 달랐다. 목표로 노리던 호송선단의 외곽을 경계하는 호위함들이 접근하면 곧바로 해면에 흰 포말을 만들지 않도록 슬며시 잠수한 다음 선단의 중앙에 위치한 목표 선박 근처까지 침투했다가, 갑자기 부상하여 어뢰를 딱 1발만 쏘고 재빨리 잠항하여 회피하는 대담하고 기발한 전술을 구사하였다. 또한 그는 상선 1척을 격침시키기 위해 3발의 어뢰를 동시에 사용하던 기존의 사고 방식에서 벗어나 "Ein Torpedo-ein Schiff!(어뢰 1발에 배 1척!)"을 표어로 걸고 지휘하였다.
4. 스페인 파견
크레치머가 처음 잠수함으로 임무에 나간 것은 한스-루돌프 뢰싱(Hans-Rudolf Rösing : 1905~2004) 대위가 지휘하고 있던 7형 유보트 U-35에서 선임장교로 근무하면서 스페인 내전에 파견되었을 때로, 스페인 연안에서 정찰 임무를 수행했지만 기밀 임무였던 탓에 격침 전과는 없었다. 유능한 클레치머는 공격적이고 배짱 좋은 뢰싱 대위와 매사에 소심하고 우유부단했던 전임 함장 클라우스 에베르트(Klaus Ewerth : 1907~1943) 대위를 보좌하면서 자연스럽게 비교를 하게 되었고, 함장직에 필요한 정확한 판단력과 과감한 결단력을 몸에 익히게 된다. 스페인 파견이 끝나고 U-35에서 내린 그는 폴란드 침공 작전 1개월 후인 1939년 10월 1일에 2형 유보트 U-23의 함장으로 임명되어 영국과 스코틀랜드 동부 연안, 그리고 북해에서 영국 해군의 활동을 감시하라는 지령을 받고 초계 임무에 나갔다.
5. 첫 전과
크레치머는 자신이 처음으로 뇌격을 가해 적함을 가라앉혔을 때를 똑똑히 기억했다. 1939년 10월 4일에 노르웨이에서 영국으로 향하던 876톤 수송선 글렌 파(Glen Farg)는 U-23이 발사한 어뢰에 정통으로 얻어맞고 순식간에 수심 1,000패덤의 노르웨이해로 빨려들어갔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글렌 파는 비록 소형 수송선이었으나 노르웨이에서 캐낸 크롬 광석을 가득 싣고 영국으로 향했으나 크레치머 중위 때문에 목적지에 닿지 못했고, 그정도의 페로크롬 원석이라면 전차 수 만대나 전함 몇 척을 만들 수 있는 양의 귀중한 전략자원이었다. 크레치머는 가라앉기 전에 탈출한 영국 선원들이 U-23을 향해 헤엄쳐오자 구명정을 띄워주었는데, 이런 신사적인 행동은 유보트 함장으로서는 매우 드문 일이다. 10월 16일에 귀항한 그는 2급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6. 전쟁 초기
11월 1일부터 9일까지 수행한 4차 초계에서는 별 수확을 거둘 수 없었다. 12월 5일부터 15일까지 나간 5차 초계에서 그는 오크니 제도 주변의 수로를 탐사하고 귄터 프린 대위가 지휘하는 U-47의 공격으로 스캐퍼 플로우를 떠나고 남은 영국 함대를 견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2월 7일에는 덴마크 상선 스코샤(Scotia : 2,400GRT)를 목표로 삼았는데, 그 배는 다른 3척의 상선과 함께 무리지어 항진하고 있었다. 호위함이 근처에 있을 것으로 의심한 크레치머는 스코샤만 격침시키고 재빨리 그 자리를 벗어났다. 12월 17일에 모항으로 돌아온 그에게는 1급 철십자 훈장이 주어졌다.
해가 바뀐 1940년 1월 8일, U-23은 킬 항구에서 벗어나 6차 항해에 나섰으나 이때는 크레치머가 지휘하지 않고 한스-디트리히 폰 티센하우젠(Hans-Dietrich von Tiesenhausen : 1913~2000) 중위가 이끌었다.[4] 한스-디트리히 함장은 1월 11일에 노르웨이 수송선 프레드빌(Fredville : 1,150GRT)을 침몰시켰고, 이 공격으로 11명의 선원이 죽고 5명만이 살아남았다.
크레치머 대위는 다음날 곧바로 다시 초계에 나갔다. 1월 12일 밤에 인거네스 만(Inganess Bay)에서 덴마크 선적 유조선 단마크(Danmanrk : 10,517GRT)를 공격해 침몰시켰지만, 다행히도 모든 선원이 대피해 사망자가 없었다. 보통 다른 함장이었다면 유조선이 화광충전하게 밤하늘을 밝히며 불타고 있으면 주의를 끌기 쉬운 탓에 곧바로 다시 어뢰를 쏴 침몰시키기 마련이지만, 크레치머는 전망탑에서 쌍안경으로 선원들이 탈출하는 것을 지켜 본 후에야 가라앉혔다. 1월 15일에 빌헬름스하펜으로 돌아오고 3일 후에 7차 전투 초계에 나가서 곧바로 노르웨이 화물선 바릴드(Varild : 1,085GRT)를 셰틀랜드 동부 연안에서 격침시켰다. 이때는 연안 초소에서 관측될 것을 우려해 사전 경고없이 어뢰를 발사해 15명의 선원이 모두 사망했다. U-23은 1월 29일에 항구로 돌아왔다.
그는 2월 9일에 제8차 초계를 위해 빌헬름스하펜을 출발했다. 2월 18일, 크레치머는 펜틀랜드 협만(Pentland Firth) 어귀에서 노르웨이에서 출발한 HN 12 호송선단을 에스코트하고 있던 영국의 1,300톤급 C, D급 구축함 데어링(HMS Daring)을 포착했다. 당시 데어링은 그 무렵 해군 내규에 따라 등화관제 상태로 항해하고 있었으나 승무원이 창문 하나의 커튼을 여는 통에 눈에 불을 켜고 쌍안경으로 주위를 살피던 U-23 함교의 견시에게 발각된 것이었다. 크레치머 함장은 딱 1발의 어뢰를 발사한 다음, 결과를 보지도 않은 채 함수를 180도 돌려 전속력으로 달아났다. 데어링의 승조원들은 독일 잠수함을 목격하지 못해서 ASDIC을 켜지도 않은 상태였고 어뢰는 그대로 함미에 명중해 기관실을 날려버렸다. 함장 시드니 쿠퍼(Sydney Cooper) 소령을 포함하여 영국 수병 157명이 사망하고 5명만이 살아남았다. 타오르는 구축함의 불빛을 뒤로 하고 사방을 경계하며 전속 항진하던 크레치머의 쌍안경에 곧 영국의 T급 잠수함 티슬(HMS Thistle)이 들어왔다. 거의 정면이어서 항로를 크게 수정할 필요도 없이 곧바로 두 번째 어뢰를 발사했지만, 이것은 빗나가 버렸다. 티슬은 마침 선회중이서 운좋게 어뢰에 맞지 않았으나, 몇 주 후 하인츠-오토 슐체(Heinz-Otto Schultze : 1915~1943) 중위가 지휘하는 2형 유보트 U-4와 치열한 어뢰전을 펼친 끝에 침몰했다.
다음 날, U-23은 모레이 협만(Moray Firth)에서 상선 티버톤(Tiberton : 5,225GRT)을 가라앉혔다. 2월 22일에는 전날 기관실에 피격되어 선단 뒤에 처져 힘겹게 따라가던 영국 상선 로크 매디(Loch Maddy : 4,996GRT)를 바다 밑에 장사지냈다. 오토 크레치머와 부하들은 해상에서 17일간 임무를 수행하고 2월 25일에 군악대와 환영 인파의 성대한 환대를 받으며 빌헬름스하펜으로 돌아왔는데, 이것이 그가 2형 유보트로 수행한 마지막 초계 임무였다.
7. 7형 유보트 함장이 되다
1940년 4월 2일, 나막신만한 U-23으로 8회 초계 임무른 수행하며 숱한 공적을 쌓은 오토 크레치머는 대위로 승진함과 동시에 신형 잠수함인 VIIB형 유보트 U-99의 인수 및 적응 훈련을 위해 킬 군항의 게르마니아베르프트(Germaniawerft) 조선소로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4월 18일부터 U-99는 제7잠수함대에 배속받았고, 크레치머 대위는 2개월간 독일 근해에서 기동 훈련과 평가를 수행한 후 6월 18일부터 전투 배치가 시작되었다. 6월 21일 9차 항해에 나간 크레치머 대위와 U-99는 하필 전함 샤른호르스트(DKM Scharnhorst)에서 발진한 아라도 Ar 196 수상초계기가 영국 잠수함으로 착각하고 떨군 50 kg 폭탄을 얻어맞고 꽤 크게 부서졌다. U-99는 사망자는 없었지만 잠수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6월 25일에 모항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U-99는 4차 항해부터 성과를 거두기 시작했다. 크레치머는 야간의 어둠을 이용해 호송선단에 가깝게 접근해 공격하기 시작했으며 목표 선박 당 1발의 어뢰만 사용하는 매우 정확한 조준으로 상선을 침몰시켰는데, 어뢰 1발에 1척이라는 그가 남긴 격언은 바로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특히 크레치머의 뻔뻔스러울 정도로 배장 좋은 전술은 앞서 기술한 야간에 선단 내부에 파고 들어 무차별 공격을 가하는 것이었는데, 영국 해군의 죠지 크리시(George Elvey Creasy : 1895~1972) 제독은 이와 같은 전술 기동은 호송선단에게 너무나 치명적이지만, 유보트에게도 위험해 자주 쓰이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크레치머에게는 예외였다.
크레치머 대위는 6월 27일부터 7월 21일까지 수행한 10차 항해에서도 20,000톤의 무공을 추가시켰다. 첫 번째 제물이 된 HX 53 선단의 마곡(Magog)를 침몰시키자 크레치머 함장은 부하들에게 브랜디를 한 병씩 돌리고 아일랜드로 향하라고 명령했다. 크레치머는 그처럼 많은 배를 가라앉히면서도 가급적 희생자를 줄이려고 애를 썼고, 많은 경우 선원의 희생을 줄일 수 있다면 다소의 위험을 무릅쓰는 일도 종종 있었다. 물론, 자함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는 한도내에서 베푼 온정이지만, 크레치머는 종종 바다에 뛰어내린 선원들을 건지고 난 후 구명정을 내주기도 했고, 보트에 탄 채 표류하는 선원들에게는 체온 유지에 요긴한 담요나 술을 내주기도 했다.
오토 크레치머가 거둔 최대의 전과는 1940년 11월로, 여객선을 개조한 병력 수송선 로렌틱(SS Laurentic : 18,724GRT), 무장 상선 패트로클러스(SS Patroclus : 11,314GRT), 여객선을 무장 상선으로 개장한 포퍼(HMS Forfar : 16,402GRT) 등 세 척의 대형 선박을 차례로 침몰시켰을 때였다. 이 격침을 계기로 오토 크레치머 대위는 유보트 함장 중에서 격침톤수 1위를 부동의 자리로 굳히게 된다. 오토 크레치머 대위의 목에는 독일 전군을 틍틀어 6번째로 백엽 기사철십자 훈장이 걸렸다.
베를린으로 소환된 전쟁 영웅 오토 크레치머 대위는 총통 히틀러에게 초대를 받고 관저에서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그 자리에는 소련 대사 몰로토프(Вячеслав Михайлович Молотов : 1890~1986)도 동석하고 있었다. 몇 시간 동안 식사를 하면서 총통은 젊은 잠수함장으로부터 대서양 전투의 상황과 유보트 승조원들의 활약상에 관해 듣고 싶어했다. 마지막으로 헤어지기 전에 총통은 유보트 부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고, 오토 크레치머는 적절한 항공 세력의 지원이 가장 절실하다고 대답했는데, 이것은 훗날 전쟁 중반부터 유보트에게 가장 큰 위협이 대잠 초계기가 된 사실을 떠올려 보면 깊은 통찰력이 바탕이 되어 나온 하나의 예언과도 같은 것이었다.
8. 마지막 전투
1941년 3월이 크레치머의 마지막 초계 항해가 되었다. 이 때, 크레치머 함장과 U-99는 무려 10척의 배를 수장시켜 최고조에 달한 기량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HX 112 호송선단을 공격하던 U-99는 도널드 맥킨타이어 중령이 지휘하는 영국 해군의 구축함 워커(HMS Walker)로부터 정확하게 폭뢰 공격을 받고 함체가 찢어지고 밸러스트 탱크가 터져 항해 불능이 되었다. 3월 17일 오후 3시 45분에 오토 크레치머 대위는 워커가 퍼부은 폭뢰 세례를 피하기 위해 압궤 심도를 지난 270미터까지 잠수했다가 차부라지며 계속 가라앉아가는 잠수함을 최후의 힘을 짜내 부상시킨 뒤, 영국 해군의 포로가 되었다. 이 때 부력을 거의 잃어버린 U-99는 금새라도 바닷속으로 잠기려 했지만 크레치머의 신속한 지휘로 43명의 승조원 가운데 40명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퇴함 직전에 그는 다음과 같은 전문을 에니그마를 이용해 함대 사령부로 발신했다.
'''"구축함 2척 - 폭뢰 공격 - 5만톤 - 크레치머"'''
9. 포로 생활
오토 크레치머와 U-99의 생존 승무원들은 리버풀 항으로 들어왔는데, 당시 이 도시에는 루프트바페의 폭격기들이 연일 공습을 퍼붓고 있어서 자칫 했다간 성난 시민들에게 끌려가 린치당할 수도 있었다. U-99의 생존자는 함장 / 장교 / 수병 3개 그룹으로 따로 분리되어 런던 켄싱턴에 마련된 포로수용소에 감금되었다. 나름 귀빈(?)이었던 오토 크레치머는 영국 선박을 그렇게도 괴롭힌 적이 누군지 궁금해 견딜 수가 없던 윈스턴 처칠 수상이 직접 찾아와 보고 간 일도 있었다. 말끔하게 면도를 시켜놓은 크레치머를 창을 통해 지켜 본 처칠은 저 작자가 정말로 수 만톤의 배를 가라앉힌 유보트 함장이 맞느냐고 반문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사실, 이 젊은 장교가 연합군 선박을 무려 26만톤이 넘게 바닷속에 장사지냈다는 사실을 괄괄한 성격의 처칠 수상이 알았다면, 그의 처우가 어떻게 달라졌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오토 크레치머는 가장 성공적인 경력을 쌓고 있던 최고의 유보트 함장이었던 탓에, 그와 승조원들은 영국 해군 정보 당국에서 파견한 조사관들에 의해 각종 정보를 캐내려는 시도가 계속 되었다. 이 과정에서 얻어낸 첩보들은 '''U-99 생존자 심문'''이라는 보고서로 작성되었고 훗날 대서양 전투에서 귀중한 자료로 쓰였다. 크레치머가 가장 충격받은 것은 독일 공군이 버킹엄 궁전과 시민들이 살고 있는 민가에 직접 폭격을 가했다는 사실이었다. 크레치머 같은 장교도 본국의 선전에 의해 공군은 공업지대와 공장, 그리고 비행장 같은 군사 시설물만 골라서 선별적으로 폭격을 가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현실은 너무나도 참혹하고 달랐다.
이후 크레치머는 캐나다를 거치며 7년 동안 포로수용소에 감금되어 있다가 2차 대전이 끝나고 2년여가 흐른 1947년 12월에 둘로 갈라진 독일로 귀국했다. 이듬해인 1948년에는 병원에서 사소한 진료를 받다가 평생의 배필이 된 의사 루이제-샤를로테 몬젠-하인릭(Luise-Charlotte Mohnsen-Hinrichs) 여사를 만나게 되었고, 곧 사랑에 빠진 두 남녀는 몇 달 만에 결혼에 골인했다.
10. 종전 후
1953년부터 해군 재창설 준비위원으로 분주하게 활동하던 오토 크레치머는 1955년에 미국의 주도로 서독 해군(Bundesmarine)이 재창설되자 해군 중령(Fregattenkapitän)으로 다시 복무하게 된다. 이때 전쟁 당시 자신을 격침시켰던 도널드 매킨타이어 대령을 만나게 되었고, 그 자리에서 U-99를 지휘할 때 썼던 쌍안경을 되돌려 받았다. 서독 해군이 왕년의 베테랑 잠수함장에게 처음 맡긴 보직은 교관 직무였다. 올덴부르크에서 해군 장교들을 가르치던 그는 1957년부터는 베스페급 고속정으로 이루어진 제1호위전대(1. Geleitgeschwader)의 지휘관이 되었다. 크레치머는 해군의 주요 보직을 거치면서 꾸준히 승진했고, 나토군 해군참모부장이라는 요직을 수행하다가 1970년 9월에 해군 준장 계급으로 전역했다.
공직에서 물러난 뒤, 노인이 된 오토 크레치머는 종종 2차 대전에 관한 다큐멘터리나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인터뷰를 했었다. 특히, 영국 BBC에서 1974년에 제작한 다큐멘터리 시리즈 The World at War의 인터뷰가 내용이 충실하여 잘 알려져 있다.
1998년 여름, 어느덧 86세가 된 오토 크레치머는 50번째 결혼 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해서 아내와 함께 바이에른주로 여행을 떠났다. 그는 다뉴브 강 상류에서 래프팅을 즐기다가 폭포에서 보트가 떨어지는 사고를 당해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사망했다. 시신은 화장되었고, 평소 유언에 남긴 대로 재는 바다에 뿌려졌다.
11. 서훈
2급 철십자 훈장 (1939. 10. 17)
U보트 전공장 (U-Boots-Kriegsabzeichen / 1939. 11. 9)
1급 철십자 훈장 (1939. 12. 17)
기사 철십자훈장 (1940. 8. 4)
백엽 기사철십자훈장 (1940. 11. 4)
백엽검 기사철십자훈장 (1941. 12.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