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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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업의 영정. 그런데 이 영정도 그림 주인공의 일생처럼 명나라조선의 교집합을 보여준다.[1]
'''이름'''
<colbgcolor=white,#2d2f34>'''임경업(林慶業)'''
'''출생'''
1594년 12월 13일 조선 충청도 충주 남변면 달천촌
'''사망'''
1646년 8월 1일 조선 한성부
'''본관'''
평택 임씨
'''자'''
영백(英伯)
'''호'''
고송(孤松)
'''시호'''
충민공(忠愍公)
1. 개요
2. 초년
4. 명을 도와서
5. 최후
6. 그의 사후
7. 비운의 명장? 과대 평가된 인물?
8. 대중 매체에서 등장


1. 개요


조선명나라장군.

2. 초년


젊어서 무과에 응시했는데 실기 시험을 보는 당일에는 등에다가 대장부라고 써 붙이고 나갔다는 일화가 있다.
1620년 소농보권관, 1622년 중추부첨지사를 거쳐 1624년 정충신 휘하에서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진무원종공신 1등이 되었다. 이후 우림위장, 방답진 첨절제사 등을 지냈으며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좌영장으로 병력을 이끌고 강화도로 나갔으나 이미 화의가 성립된 후였다. 1628년 김류에게 선물을 보낸 것 때문에 탄핵을 받는다. 간원의 언급에 의하면 천얼(얼자) 출신이라고 한다.
1630년 평양 중군으로 검산성과 용골성을 수축하는 한편 평안도 철산군 가도에 주둔한 명나라 도독 유흥치의 군사를 감시해 준동을 막았다. 당시 상황을 설명하면 청나라군의 요동 공격을 막지 못하고 조선으로 탈출한 모문룡 이래로 가도 주둔 명나라군은 섬에 틀어박혀 싸우라는 청나라군과는 교전도 안하고 인근 조선 백성들을 약탈하기 바빴다. 인조반정으로 정통성이 취약했던 조선 조정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의 도움을 받은 점 때문에 강경한 대응을 할 수 없었다. 반면 청나라 입장에서는 배후의 위험을 제거하기 위해서 모문룡의 제거가 필요했다. 이는 2번에 걸친 호란의 배경이 되었고 조선 입장에서도 자국 영토에 주둔하여 패악질만 쳤지 정작 호란이 터졌을 때는 청나라군과는 전투 1번 벌이지 않고 틀어박혀 영향력 확장만 노려 득될 것이 없었다. 모문룡의 뒤를 봐주던 환관 위충현이 제거되면서 모문룡도 원숭환에 의해 제거되지만 모문룡이 이끌던 '모군(毛軍)'은 그대로 남아 진계성이 이어받았다가 진계성을 유흥치가 제거하고 수장이 되어있던 상황이었다. 이 병력은 모문룡을 제거한 명나라, 뒤통수가 가렵던 청나라, 주변 고을이 약탈당하고 있던 조선 등 3국 모두에게 껄끄럽던 상황이었다.[2]
1631년 산성을 수축하던 중 정묘호란으로 허약해진 군사력 등의 이유로 청천강 이북의 방어를 포기하려던 조정의 정책에 반감을 품고 청북인(청천강 이북 주민)들의 반발을 사주하였다는 이유로 탄핵받고 구금되었으나 곧 석방되었다.
1633년 청북 방어사 겸 영변부사로 백마산성과 의주성을 수축했다. 이 시기에 경중명과 공유덕 등 명나라의 장수들이 후금에 투항하려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임경업이 의주부윤 윤진경과 함께 명나라 대도독에게 연락하여 합동 공격을 벌였으며 이 공로로 명나라로부터 총병 벼슬을 받았다. 이 사건은 임경업에게 큰 영향을 주게 된다.
1634년 의주부윤으로 청북 방어사를 겸임할 때 백마산성 수비에 자원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조정에서 은 1000냥과 비단 100필을 지원받았다. 이를 자본으로 삼아 중국 상인과 밀무역을 하여 자본을 축적하고 둔전을 유지하였으므로 공로를 인정받아 가선대부에 올랐다. 하지만 지나치게 이재를 축적하고 상층부에 뇌물을 제공하였다는 이유로 탄핵되어 파직당한다. 하지만 도원수 김자점의 적극적 요청으로 다시 가선대부가 되어 성곽 보수에 나선다.
임기응변에 능한 병사들을 뽑아 청나라인으로 변장시켜 청나라의 수도 심양에 잠입시켜서 첩보 활동도 벌였다는 일화도 있다.

3. 병자호란


병자년 정월, 임경업은 의주부윤으로 다시 임명되었다. 의주로 돌아온 임경업은 청나라의 침공이 임박한 것을 감지하고 2만 병력을 내려줄 것을 비변사에 건의했지만, 비변사는 오히려 의주에 배치되어 있던 1600명의 부방(赴防)[3] 병력을 안주로 이동시켜 청천강에서 저지선을 구축하려는 작전계획을 세웠다. 그나마 도원수 김자점이 의주를 지키려는 임경업의 의지를 높이 평가했고, 그의 지원에 힘입어 기존의 부방군이 안주로 이동하는 대신 황해도의 부방군 2400명이 의주에 추가로 투입되었다. 이로써 당시 임경업이 거느린 병력은 의주의 장정 2300명과 황해도 부방군 2400명, 기타 의주부 직속 아병(牙兵)과 인근 진보의 병력을 합쳐 5000명에 달했다. 이제 임경업은 백마산성을 지키는 데 충분한 병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4]

의주부윤 임경업이 치계하였다.

"겨울 방비가 임박하여 산성의 수비가 매우 긴급합니다. 백마산성은 성첩이 847개이니, 성첩당 다섯 명으로 계산하면 4235명이 되는데, 4영(營)의 유격부대 각 100명과 중영(中營)의 유격부대 200명을 합치면 총 4835명이 됩니다. (후략)"

인조실록 - 무인년(1634) 9월 25일

김자점이 아뢰었다.

"임경업의 뜻은 올해 안에 백성들을 의주의 옛 성으로 들여보냈으면 하는데, 신의 뜻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선 백마성으로 들어갔다가 완실(完實)해지기를 기다린 연후에 들어가서 지키고자 합니다. 지금 백마성으로 들어간 자가 1700호(戶)이고 옛 성에 들어간 자는 220호이니 경내의 장정을 총계하면 2300명입니다. 이것이 또한 우연한 것이겠습니까. 다만 부족한 것은 군기입니다.”

승정원일기 - 갑술년(1635) 9월 18일

도원수(김자점)가 아뢰었다.

“백마산성에 입방할 군사로 현재 의주에 있는 자가 1600명인데, 이들 군사로 하여금 돌아와 안주를 지키게 하자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만약 이 군사들을 모은다면 의주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중략) 정식으로 부방하는 남군(南軍) 2400명을 백마산성에 보태어 방어하게 하고 큰일을 감당할 수 있는 임경업으로 하여금 실패 없이 굳게 지켜 보전하도록 한다면 국사에 있어서도 다행일 것입니다.”

승정원일기 - 병자년(1636) 3월 4일

병자년 정월, 이에 장군(임경업)이 의주부윤으로 다시 임명되었다. 장군은 또 비국에 말하길 "오랑캐의 남목(南牧)할 기미가 이미 드러났으니, 바라건대 2만 병력을 얻어 막고자 합니다"라 하였다. 비국이 처음에 따르지 않다가, 장군이 이를 쟁론하자 억지로 이에 해서(海西)의 2천 병력을 허급(許給)하였다.

지호집 임장군전

임경업은 또한 사람을 모집해 압록강 이북에 있는 송골산(松鶻山)과 봉황산(鳳凰山)에 정찰조를 투입해 연락망을 설치했다. 이들은 밤이면 횃불을 들고 낮이면 총포를 쏘는 것으로 의주에 연락을 보냈으며, 일반적인 봉수신호 체계에 따라 아무런 일도 없으면 1거, 적의 움직임이 있으면 2거, 적이 국경을 넘으면 3거, 적과 접전이 벌어지면 4거, 적의 대군이 들을 뒤덮으면 5거를 보내도록 했다. 이 연락망은 의주에서 평안도를 종단하여 도원수 김자점이 있는 황해도 황주까지 곧장 연결되어 있었고, 병자호란 초기에도 정상적으로 작동했다.

또한 살림과 장비를 넉넉히 지급하고, 그 부모처자를 매어두되 양곡을 지급하며 여러 주둔지의 짚과 꼴을 산성으로 모두 수송했다. 이때 우역(牛疫)이 크게 번져서 각 주둔지의 가축이 수백 두가 폐사하기에 이르니, 모두 포(脯)로 만들어 저장하였다. 쌓아둔 섶이 산과 같아, 대개 초둔(草芚)으로 군량인 것처럼 하였다. 산성에 우물이 부족해 큰 못을 파서 물을 담아두고 물고기를 길렀다.

이때 조정에서 척화가 득세하여 신사(信使)를 보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장군에게 심중(瀋中)으로 상관(象官)을 보내어 사신단이 장차 다다를 것임을 고하게 하니, 대개 오랑캐의 정세를 살피고자 하는 것이었다. 장군이 상관에게 경계하길 "사신단이 늦어졌으니 적병이 분명히 움직일 것이다. 만약 백마(白馬)의 일을 협박하여 묻는다면 너는 모름지기 대답하길 '여덟 장수가 각기 3영의 군사를 인솔하고 들어갔으며, 무기는 예리하고 군량은 풍족하여 수년을 버틸 수 있다. 성 안에 다시 한 커다란 못이 있어 어룡(魚龍)이 둥지 삼는 곳이라 한다'고 하라"고 하였다. 상관이 과연 통원보에서 오랑캐와 만났는데, 백마의 허실을 물으니 장군의 말과 같이 대답하였다.

12월에 봉황(鳳凰)ㆍ송골(松鶻) 봉수가 적병을 보고 2거(炬)를 올려 경보를 보고하니 이에 치계하여 아뢰었다. 원수 김자점(金自點)이 즉각 변란을 보고하지 않아서 대가가 창황하여 겨우 남한(南漢)에 들어갔다.

장군은 곧장 부민(府民)들이 백마성 안으로 이주하도록 명령하고, 몸소 전후(殿後)가 되어서 들어갔다. 또한 흰 천의 장막을 지어서 성 안을 잇대 가려 멀리서 바라보면 성첩이 흰 것처럼 하였으며, 매 성첩마다 돌덩이를 많이 쌓고, 모든 성중 남녀에게 함께 성첩을 지키게 하였다. 3첩마다 한 토우(土宇)를 지어 토우 안에는 술 몇 말을 담가두고, 군사들이 번갈아 쉴 때 마셔서 추위를 막게 하였다. 또한 우포(牛脯)를 나누어 보내니, 군중의 환성이 우레와 같았다.

오랑캐 군 선봉이 경내에 들어와 백마산성을 돌아보지 않고 곧장 경성으로 향했다. 장군이 사람을 시켜 묻길 "어찌 허다한 군병이 갑작스럽게 이웃나라에 들어와서는 변신(邊臣)에게 말하지도 않는가?"하니, 오랑캐는 답하길 "국왕과 정약(定約)해야 하니 변신이 간여할 바가 아니다"라 하고 말미암아 멀리 달려 나아갔다. 이윽고 대군이 들을 덮으며 뒤를 이었지만 끝내 백마산성을 범하는 자는 없었으니 그 준비가 있음을 알았음이다.

(오랑캐가) 남한산성에 나아가 포위하고 오랑캐 백여 기가 심중(瀋中)으로 돌아가 보고하니 장군이 병사를 거느리고 성을 내려와 압록강에서 추격하여 그 장수를 죽이고 사로잡힌 남녀 120여 인과 말 60여 필을 빼앗아 돌아왔다.

오랑캐 임금이 돌아가니, 조정의 명을 받들어 성을 나와서 서윤 홍익한(洪翼漢)이 압송되어 심(瀋)으로 들어가는 것을 전송하는데 차원(差員) 변대중(邊大中)이 결박한 것이 몹시 심했다. 장군이 나와 보고는 그 결박을 풀고, 손을 잡고 위로하길 "명공(明公)의 이 길은 참된 남자의 일입니다. 살아서는 천하에 칭송이 있고 죽어서는 죽백(竹帛)에 이름을 남기니, 다시 무엇을 한탄하겠습니까"라 하였다. 이에 여비를 넉넉히 부조하니 홍익한이 감탄하였다.

지호집 임장군전

이 시기를 배경으로 임경업이 홍타이지의 조카 요퇴(요토)를 참살했다는 기록이 발생하지만, 요토는 이후로도 활동하므로 임경업의 행적이 신화화되면서 나타난 전설로 이해된다. 박씨전에서 병자호란 이후 철군하는 용골대를 임경업이 대패시켰다는 창작이 가미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4. 명을 도와서


1637년 청은 '''이 때까지 가도에 머무르고 있던 모문룡의 잔당'''들을 제거하기 위한 병력 요청을 하였고, 임경업은 여기서 수군장으로 파견되어서 적극적으로 회전을 피하는 한편으로 당시 명나라 도독 심세괴[5]와 내통하여 그들의 피해를 최소로 줄이게 하였다[6]. 이런 전황을 몰랐던 청은 임경업을 심양으로 불러서 포상까지 내린다.
다시 의주로 돌아온 임경업은 의주의 물자가 불안해져서 방어가 어렵자 이번에도 심양에 상인들을 파견하여 밀무역을 시도하였다가 청에 발각되었고, 이를 전해들은 인조의 분노를 사서 평안도 철산으로 유배된다.
1638년 청군이 명의 금주를 공격하기 위하여 조선에 군대 파견을 요청하자, 조선은 이를 거절하였으나 병자호란 시기 항복 조건에 병력 파견이 있었으므로 다시 병력 파견이 결정되었다. 이 때 비변사에서는 유배를 가있던 임경업을 용서하여 조방장으로 임명하여 파견하였다. 이에 3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심양으로 가서 병력 동원의 어려움을 호소하면서 전투를 피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공로로 인조에게 말 1필을 받고 의주 부윤을 거쳐서 평안 병사가 된다.
1640년 청은 명의 금주위를 공격하려는 의도에서 다시 조선에 병력 파견을 요청하였고, 임경업을 주사상장의 직위로 임명하여 파견하였다. 이에 임경업은 최명길 [7]과 함께 명의 수군 대도독 홍승주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이후 청군과 함께 싸우면서도 싸움도 벌이지 않고 가지고간 군량미도 제대로 전달하지 않았다. 이 문제로 청은 조선 정부와 명이 서로 짜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었고, 소현세자는 이를 적극적으로 부인하였다. 이후 청은 임경업을 달랬으나 임경업은 대부분의 병력은 조선으로 돌려보내고, 군량미는 모조리 파기, 여전히 명나라와 전투는 없었다. 결국 임경업은 마지막으로 배까지 버리고 청을 정탐하여 조선으로 돌아왔다. 이에 청은 임경업이 명과 내통하였다는 심증을 가지고 조선을 닥달하였으나 물증이 없었다. 조선은 청의 압박으로 임경업을 삭탈 관직하였다가 바로 그 해에 동지중추원부사에 임명하였다.
1642년 이런 전말이 결국 드러나게 된다. 결국 청의 금주위 공격이 성공하였고, 임경업과 내통하였던 홍승주가 청에 투항하면서 그간의 서찰들이 모두 청에게 전해진 것이다. 이런 확증을 잡고 청은 조선에 임경업과 최명길 등을 압송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조정은 형조 판서 원두표에게 임경업을 청으로 압송할 것을 명령했다. 이미 잡히기 전에 '''심기원'''에게 은과 승복, 칼을 받았던[8] 임경업은 압송 도중 금교역에서 탈출하여 미리 맡겨둔 승복을 걸치고 승려로 변장하여서 숨어지내게 된다. 이후 몇차례의 명나라 망명 시도가 있었으나 실패하였고, 이 과정을 의심한 청의 요청으로 조선 조정은 임경업의 가족들을 청나라로 압송한다.
이후 해를 넘겨서 1643년, 임경업은 결국 '''김자점의 종'''이었던 상인의 도움[9]으로 배를 구하여 명나라로 건너간다. 임경업은 명에서 등주 도독 황종예 휘하의 총병 마등고 휘하의 평로 장군으로 4만의 병사를 이끌게 된다. 하지만 이자성의 난으로 북경이 함락되고, 청군이 오삼계의 요청을 받고 뒤이어 입성하면서 도독 황종예도 남경으로 이동하였고, 임경업은 마등고와 함께 석성에 재기를 노리게 된다. 하지만 남경으로 도주했던 명은 결국 남경마저 함락되면서 멸망했고, 이번에는 마등고마저 청에 투항했다. 그리고 1644년 조선 조정에서도 후원자 심기원의 옥사가 벌어지면서 임경업은 국제적 미아가 된다.
이후 임경업은 탈출 시도를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부하였던 한사립의 밀고를 들은 명나라 출신 항장 마홍주에게 1645년 포로로 잡혀서 청군에게 넘겨졌다. 이 시기 청은 예친왕이 섭정왕으로 즉위하면서 대사면을 내렸기 때문에 임경업 역시 죽음을 모면하고 결국 북경의 사옥에 18개월 동안 투옥된다.[10]

5. 최후


앞서 언급한 것처럼 조선에서는 좌의정 심기원과 김자점의 정쟁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결국 김자점이 심기원이 난을 일으키려 했다는 명목으로 심기원 일파를 모두 제거하게 된다. 이에 임경업도 심기원의 일파로 결론이 내려져서 북경에 투옥 중이던 임경업에 대한 송환 요청을 하게 된다. 이 시기 임경업의 죄목은 심기원의 반란에 연루된 것과 국가에 대한 배신죄[11]로 조사를 받았다.
인조는 임경업을 살릴 의사가 있었지만, 원두표[12]와 '''김자점'''[13]은 강력하게 임경업의 사형을 주장한다. 그리고 결국 이로 인하여 문초가 길어지는 와중에 임경업은 형국으로 장을 맞던 중 사망했다. 이에 대해서 '''장살(杖殺)''' 당했다고 하지만 사실과는 좀 다르다. 심문 당시 인조는 임경업을 죽일 의도가 없었다. 임경업이 자신은 심기원과 관련이 없다며 자기 변호를 하자, 인조는 임경업이 심기원과 연관이 있다고 해도 심기원이 먼저 일을 일으킨 뒤에 따로 포섭하려 한 정도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래서 인조와 대신들이 임경업의 혐의에 대해 토론하는데 그 와중에 임경업이 사망했다는 보고가 올라온 것이다. 의도적인 장살보다는 단순한 옥사라고 할 수 있다.
이 때 임경업은 “조정에서는 이미 천하의 일이 안정되었다고 생각하는가. 오늘 나를 죽인다면 반드시 후회가 있을 것”이라고 외쳤다고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남명정성공만 남은 시점의 현실에서 임경업의 이 발상은 정세 판단 미스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었다. 삼번의 난을 가정한다 한들 임경업이 살아있었다면 난 당시 나이는 아흔살(...). 실제로 최명길 등 대부분의 인물들은 명나라가 완전히 멸망하기 전까지는 명나라의 멸망보다는 남북조시대의 재현을 현실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는 명나라에 최명길 등이 협조를 했던 장면이나, 김자점이나 심기원 등이 임경업을 통해서 명에 줄을 대려고 했던 것에서 드러난다. 하지만, 남경이 함락당한 시점까지 가면 이야기가 전혀 달라진다. 정성공이나 남명 게릴라 만으로 남북조 시대는 불가능하다. 이걸 알았기 때문에 김자점이 친청파로 돌아서고, 소중화사상이 등장하는 것이다.

6. 그의 사후


임경업이 죽었다는 보고를 듣고 인조는 이런 반응을 보였다.

그가 역적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 내가 그에게 알려주려 하였는데 틀렸구나. 그가 제법 장대하고 실하게 보이더니, 어찌 이렇게도 빨리 죽었단 말인가. 그리고 그는 담력이 커 국가가 믿고 의지할 만하였다. 그런데 도리어 흉악한 무리의 꾀임에 빠져 헛되이 죽고 말았으니, 애석할 뿐이다.

임경업이 갑작스럽게 죽은 이유에 관하여 김자점이 임경업과 엮이게 되자 책임 회피를 위해 임경업의 고문을 가혹하게 해서 죽였다는 설이 퍼졌다. 그리 틀린 소문도 아닌 듯 한게, 이후 그와 관련된 자들은 유배하거나 석방되었다. 그 때 김자점이 한 말을 보면 조정의 분위기가 얼마나 바뀌었는지 알 수 있다

사대(事大)는 반드시 성의껏 해야 합니다. 이번에 청나라가 경업을 보내주고 또 선량(船糧)을 감해 주었습니다. 따라서 신의 생각으로는, 국가에 일이 많지만 만일 절사(節使)를 통해 그 은혜에 사례한다면 소홀하게 될 듯하니 별도로 사신을 보내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사망 이후에도 심기원의 반란과 연결되어 있으므로 여죄를 추궁하려는 시도도 있었으나, 이미 사망하였으므로 인조의 뜻에 따라서 심기원과의 연루는 불문으로 돌리고 망명한 죄만을 적용하여 처리하였다.
민담이지만, 청성잡기에 보면 임경업이 명나라로 망명하면서 기생 출신 애첩을 지인에게 맡겨두고 갔다고 한다. 나중에 효종이 북벌을 하려는데 입경업 같은 인물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겨 입경업의 애첩을 불러올려 어찌하면 임경업 같은 이를 얻겠냐고 물었는데, 이 첩은 "설사 임경업 같은 이가 있어도 전하께서는 북벌을 하지 못할 것"이라 한다. 효종이 웃으며 어찌 그리 생각하느냐 묻자, 임경업의 첩은 과거 병자호란 때 봉림대군이었던 효종이 능히 김경징을 베어 죽일 수 있었으나 그 간단한 일도 하지 않았거늘 하물며 북벌을 할 수 있겠냐며 이는 계집인 자신도 안다고 대답했다. 효종은 무안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물론 당시 봉림대군이던 효종이 김경징을 자의로 참했으면, 효종은 인조의 분노를 샀을 것이다.[14] 인조는 김경징의 삽질이 드러난 상황에서도 반정 공신 김류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살리려고 했기 때문에. 결국 김류가 김경징이 죽어 마땅하다고 해서야 김경징이 사약먹고 죽었다. 봉림대군은 세자도 아니고 차자에 불과했기 때문에, 저 때 인조의 마음에서 엇나갔다면 조선 국왕 효종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외에도 인조에게는 인평대군과 용성대군이라는 대체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죽은 이후 북벌과 관련하여서 재평가 시도가 끊이지 않았고, 결국 사후 50년만에 숙종은 그를 옛 관직에 추서하고 충민공이란 시호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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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업의 아내 완산 이씨[15]의 경우 청나라의 옥중에서 자살했다. 청나라에서는 아내의 '''명나라를 향한 충성심'''에 감동하여, 시신을 정중히 조선으로 돌려보내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현재 충렬사에 정렬비가 세워져있으며 그 충렬비의 이름은 '''대명충신''' 조선 임 장군 경업 처 정부인 완산 이씨 정렬비(大明忠臣 朝鮮林將軍 慶業 妻貞夫人完山李氏貞烈碑).[16] '''명나라를 향한 임경업과 그 아내 완산 이씨의 충성심'''을 기리기 위함이라고.
다만 명나라에서 세운 것도 아니고, 숙종 때 조선에서 세운 비석에 마치 명나라의 속국을 자칭하는 것처럼 썼으니 이후 후손들이 보기에 영 기분이 좋진 않았을듯. 그래서인지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훗날 박정희 전 대통령도 '대명 충신' 부분을 언짢게 여겨 정렬비는 보관하고, 정렬비의 내용만 '''한글'''로 새긴 비석을 따로 세울 것을 검토케 했다고 한다.#

7. 비운의 명장? 과대 평가된 인물?


이후 설화를 바탕으로 임경업전이 저술되기에 이르렀고 이후 많은 야화가 추가되면서 비운의 명장이란 평이 많아졌지만, 동시에 모화 사상에 벗어나지 못한 한계를 보이며[17] 자국을 위험에 빠트렸다는[18] 전쟁에서 제대로 공을 세운 기록도 단 한번도 없는 인물[19]이란 상반된 평가가 따라 다닌다.
사실 임경업은 군사적인 무공보다는 외교에서 더 많은 족적을 남긴 인물이라 할 수 있다. 횡의와 통교 사건이 있기 전까진 대청 외교에서 군사 파견 문제를 놓고 계속 청을 오가면서 조선의 입장을 대변했고 이후 명나라와의 밀외교도 최명길과 함께 담당했다. "맹장"이라기보다는 "수완 좋은 정략형 무인"이었던 것. 어쨌든 능력 자체는 이미 당대에 인정받았던 것은 사실인데, 청나라조차도 조선에 뭔가를 요구하거나 파병을 요청할 때 처음부터 콕 찍어서 '임경업에게 시켜라', '임경업을 보내라'고 하기도 했다.
연평도에서는 임경업 장군각이라는 사당이 있고 임경업을 풍어의 신으로 모셨다. 연평도 지역의 설화에 따르면 병자호란 때 임경업이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세자를 구하기 위해 중국으로 가던 중 선원들의 부식이 떨어지자, 연평도에 배를 대고 안목과 당섬 사이의 얕은 바다에 가시나무를 촘촘히 박아서 썰물로 물이 빠져나갈 때 나무 빗살에 걸려서 못 빠져나간 조기를 잡는 어살법을 주민들에게 가르쳤다고 한다. 임경업 장군이 어살법으로 조기를 잡았다는 안목 어장은 오늘날 연평 면사무소가 자리한 마을의 앞 바다로, 당섬, 책섬, 작은 지리 등의 작은 섬들에 둘러싸여 호수처럼 얕고도 잔잔하다. 이곳에서는 썰물 때 조개, , 낙지 등을 아이들과 함께 직접 잡아보는 갯벌 체험이 가능하다. 또 마실 물이 떨어져서 병사들이 목말라 죽겠다며 고통스러워하자 바닷가 한가운데에 배를 멈추게 하고는 그 자리에서 바닷물을 떠서 마시게 했는데, 신기하게도 그 물이 조금도 소금기가 없는 민물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지금도 섬에는 임경업 장군각에서 주민들이 출어에 앞서 풍어제를 지내는 관습이 있다고 한다.
전라남도 순천시의 낙안읍성에서는 임경업이 읍성을 하룻밤 만에 쌓았다는 전설도 있다. 물론 전설은 전설일 뿐이고, 낙안읍성이 현대의 석성으로 만들어진 것은 세종대왕 시기이다. 단, 임경업이 낙안군수에 재직하던 시절 읍성을 중수(고쳐서 개량)한 적은 있다. 이것이 전설로 이어진 것.

8. 대중 매체에서 등장


그를 주인공으로 한 <임경업전> 또는 <임장군전>이라는 제목의 고전소설이 있다. 주인공 최치원이 사실상 비범한 도사로 신격화된 최고운전과는 달리, 해당 소설의 임경업은 전형적인 조선 영웅상으로 묘사된다. 최후에 김자점의 모함으로 죽는 건 역사와 동일하나, 판본에 따라 김자점이 보낸 자객에게 죽었다고 묘사되기도 하며, 김자점은 청나라로 도피하지 못하고 조선 정부에 붙잡혀 임경업을 죽게 한 대가로 참수형을 받는다. 이때 집행인이 임경업의 세 아들들인데 각기 명 황제에게 받은 상방검, 뱀이 토해낸 단검, 무과 급제할 때 상으로 받은 창 등 임경업이 생전 애용하던 무기로 처형을 집행한다. 김자점이 임경업을 모함하는 대목을 실감나게 읊어주던 이야기꾼이 뿔난 행인에게 목이 잘려 죽었다는 일화도 있다.
네이버 웹툰 칼부림에서 등장하는데 영정과는 다소 차이가 있는 선 굵은 무인형 용모이다.
[1] 전언에 따르면, 1640년 명나라 황제가 임경업의 얼굴이 보고 싶다고 해서 명나라 화공이 조선에 와서 그려갔다고 한다. 당시는 '''임경업이 명나라와 짜고 가짜 전투를 했던 그 시기'''이다. 이 때 화공이 2장을 그려서 한 장은 명나라로 가져가고, 한 장은 조선에 남기고 갔다고 전한다, 현재의 그림은 임경업 사후 다시 그려진 것이다. 우측에 기재된 <충민공 임장군 유상>이라는 표제도 그렇고, 그림체에 조선 후기의 특징과 명나라 화풍의 특징이 많이 묻어난다고 한다. 여담으로 흉배가 아주 특이하다. 이것은 인조 때에 공이 있다고 판단한 무신들에게 특별히 하사한 것으로, 본래 호랑이와 곰 등 동물을 주로 한 것과는 달리 구름과 방사형등 도상적 이미지가 강하다.[2] 유흥치는 모문룡과 똑같은 인물로 1만의 조선 양민들을 죽여서 청나라군의 목이라 위장하여 명나라 본국에 보내던 자들이었으며 잔악한 양민 학살을 보다 못한 청나라 군사들이 나서서 이들을 물리쳐 구해주기까지 했다고 한다.[3] 조선시대 다른 지방의 병사가 서북 변경의 국경지대에 파견되어 방위임무를 맡은 일 ─ 두산백과[4] 병자호란 당시 임경업 휘하에 고작 300~400명밖에 없었다는 설이 널리 퍼져 있지만, 이는 사료에서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주장이다.[5] 앞서 언급된 유흥치를 제거하고 명나라 도독이 된 인물이다.[6] 하지만 이들은 결국 청에 투항하여 청의 요동 정벌에서 앞잡이 노릇을 하였다.[7] 병자호란 시기 주화파로 이름 높은 그 최명길이 맞다.[8] 이 때 심기원에게 지원을 받은 것이 임경업의 사망 플래그가 된다.[9] 이 시기 명이 아직 잔존해 있었으므로 임경업을 명에 보내서 끈을 대려는 의도를 가진 세력은 많았고, 심기원과 마찬가지로 역시 임경업을 한 번 도와준 적이 있어서 끈이 있던 김자점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건 결국 임경업의 2번째 사망 플래그가 된다.[10] 사족으로 예친왕이 임경업을 자신의 수하로 두려 했으나 임경업은 신하가 어찌 두 임금을 섬기겠느냐며 거절했고 그 충정을 보고 감명받아 사형을 면했다는 야사가 존재한다.[11] 명군과의 위전은 임경업의 독자적인 의도로 광해군 시기 강홍립과는 상황이 달랐고, 명나라 장수로 들어간 시기에는 철저하게 명나라 장수로 활동했다는 것 등이 주요 이유였다.[12] 형조 판서로 임경업을 압송하다가 탈출 사건을 만나서 파직되었던 인물로 이 시기에는 원당의 영수가 되어 있었다.[13] 앞서 언급한 것처럼 임경업이 심기원의 일파로 몰린 것은 임경업이 심기원의 도움을 받아서 압송 중 탈출하였다는 것이 주요 원인이었다. 하지만 이는 결국 자신의 종 출신들로 임경업의 도해를 도왔던 김자점 역시 문제가 될 소지가 있었다. 이에 이미 친청파로 선회한 김자점은 이미 명의 멸망으로 효용 가치가 떨어졌으며 오히려 문제의 소지만 있었던 임경업을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14] 분노는 둘째 치고 사람을 죽이고 살릴 권한은 군주에게만 있다고 했으니... 물론 김경징의 병크를 보면 봉건대군이 이적행위를 해서 참했다고 최대한 변명하면 될 가능성나마 없는건 아니지만[15] 진안 대군의 7세손.[16] 꽤 오랫동안 조선이란 단어가 빠져있었다. 뭐 충렬사를 관리하는 충주시의 디지털충주문화센터 페이지에서도 잘못 적혀 있었으니. 참고로 저 조선이란 것은 단순 출신지 이야기이기 때문에 대명 충신 부분에는 한점의 흐트러짐도 없다. 애초에 저 비석 자체가 임경업을 복권한 숙종 때에 세워졌다.[17] 실제로 임경업의 아내까지도 청나라의 옥중에서 자진했을 때 "내 남편은 대명의 충신이요, 나는 그 충신의 아내다. 오랑캐의 옥중에서 욕을 보며 남편의 충절을 욕보일 수 있겠는가?" 라고 까지 언급했다. 청나라에 끌려갔던 삼학사 중 한 명인 홍익한도 스스로를 대명 조선국의 신하라고 자처했다. 명나라 중심의 성리학적 세계관에서 이론적으로 조선의 관료들은 궁극적으로 명나라의 신하였던 것이다. 이를 극단주의라고 부르며 고려의 부마국 시절을 드는 경우가 있지만, 이는 전혀 논리적이지 않은 지적이다. 조선과 고려와 원명관계는 상당히 다르다. 당장 광해군 대에도 신하들이 '중국 조정에 죄를 짓느니 차라리 성상께 죄를 짓는게 낫다'라고 발언했던 것을 생각해보자. 당시에는 이것이 보편적 세계질서였다. 홍익한은 그나마 대명 조선국이었다면, 임경업은 그냥 대명이라는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하다. 이 차이는 성리학 기준에서는 엄청난 차이다.[18] 임경업이 한 행동은 최대한 미뤄봐도 병자호란 이후에는 명이라면 몰라도 조선에 1도 도움되지 않았다. 임경업이 한 무수한 행동들(예를 들면 회군하는 청군을 무단 공격한 것)은 이를 빌미로 청의 재침을 부를 수도 있는 것이었다. 이런 문제 때문에 청에 볼모로 잡혀가있었던 소현세자는 청의 재침을 막기 위해서 엄청나게 고생했다.[19] 임경업의 전공은 2가지인데, 이괄의 난 당시 정충신의 부하로 참전하여 이름만 올린 것과 앞서 기록된 '''화의를 맺고 본국으로 철수하던''' 청군 기병 300을 급습한 것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