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대 대통령 선거

 


'''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 선거'''
[image][image]
선거 홍보 포스터

1960년 8월 12일[1]
4대 대선

1963년 10월 15일
'''5대 대선'''

1967년 5월 3일
6대 대선
}}}
'''투표율'''
85.0%▼ 13.5%p
'''선거 결과'''
'''후보'''
'''민주공화당''']]
'''박정희'''
'''민정당''']]
'''윤보선'''
'''득표율'''

'''46.6%'''
45.1%
'''득표수'''
'''4,702,640'''
4,546,614
'''당선인'''
'''민주공화당'''
'''박정희'''
1. 개요
2. 배경
3. 과정
4. 박정희 사상논쟁
5. 결과
5.1. 지역별 결과
6.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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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취임 선서를 하는 박정희 대통령'''
'''당선 확정을 알리는 기사'''

'''대통령 취임 영상'''
1963년 10월 15일에 있었던, 제5대 대통령을 선출하는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였다. 이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가 2위 윤보선 후보를 득표율 '''1.5%''', 표 차 '''15만6,026표'''라는 초박빙 접전 끝에 꺾고 당선되었다. 이는 현재까지 1, 2위 후보 간 표 차가 가장 적게 난 대선으로 남아 있다.

2. 배경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국가재건최고회의가 민정이양을 위해 실시한 선거다.

3. 과정


5.16 정변 직후 정당을 해산했으나, 1962년 12월 17일 대통령 중심제를 골자로 한 '''새로운 헌법 개정안이 통과'''되고 1963년 1월 1일 정당활동이 다시 허용되면서 새로운 정당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한편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인 동시에 대통령권대행과 육군 대장을 겸임한 박정희대한민국 국군을 예편하면서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했다.
후보등록 결과, 총 7명의 후보가 출마했다.
'''기호'''
'''정당'''
'''후보'''
'''1'''
신흥당
장이석
'''2'''
자유민주당
송요찬
'''3'''
민주공화당
박정희
'''4'''
추풍회
오재영
'''5'''
민정당
윤보선
'''6'''
국민의당
허정
'''7'''
정민회
변영태
선거 판도는 주로 박정희의 군정과 정치적 노선에 대해 야권 후보들이 비판하고, 박정희는 이를 방어하는 상황으로 흘러갔다. 정치적 노선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자면 지금에야 박정희하면 보수의 아이콘이지만, 오히려 당시에는 윤보선이 보수를 대변했고, 박정희는 진보를 대변했다.[2] 후술하겠지만, 박정희의 가계는 공산주의 활동에 전력한 사람이 있었으며, 박정희 자신도 남조선로동당에서 활동을 한 바 있었다. 여기다가 윤보선은 부유한 가정에서 성장한 반면, 박정희는 빈농 출신으로서 윤보선과 달리 서민의 입장을 대변할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다.
한편 야권 후보들 안에서도 5.16 군사정변 당시 대통령이었던 윤보선에 대해 '''"장면 등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쿠데타를 방조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었고, 이에 대해 윤보선은 "장면 정권 하에서 데모와 부정부패가 너무 심했으며, 자신은 결국 군사정부를 추인하지 않았다"고 방어하였다.
결국 야권 주요 후보였던 허정, 송요찬이 윤보선을 지지하며 후보를 사퇴하였고, 선거는 '''군사정변 세력의 박정희 vs 구정치인 세력의 단일후보 윤보선''' 두 보수 후보의 양자 대결 구도로 흘러갔다.

4. 박정희 사상논쟁


투표까지 3주 정도 남았던 9월 23일, 박정희 측에서 라디오 방송에서 윤보선을 '가장된 민족주의'라고 공격한다. 이에 대응하듯 다음날 윤보선 후보가 유세 중 전주에서 '''"여순사건의 관련자가 정부 안에 있다. 박정희 의장의 민족주의 사상을 의심한다."'''는 발언을 하면서 선거구도는 순식간에 사상논쟁으로 발전하였다. 박정희 후보의 1940년대 말 '''남조선로동당''' 활동 경력[3]이 문제였는데, 군정시절에 2공화국에 몸담았던 구정치세력을 사대주의적인 민주주의자로 공격하며 자신은 민족적 민주주의자라는 요지의 발언을 자주 하였는데, 윤보선 후보의 공세로 인해 '''그렇다면 그 민족적 민주주의라는 게 설마 공산주의였던 것이냐'''는 역공을 하였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박정희 후보 측에서는 '''매카시즘''' 공세라고 비판하면서 지금은 확실하게 전향하였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선거 5일 전날 10월 10일에 민정당 측의 김사만은 영주에서의 연설에서 ''''대구, 부산에는 빨갱이가 많아요. 김일성이가 오면 만세를 부를 거에요.''''라는 발언을 하며 이런 매카시즘 공세에 불을 질렀다. 당황한 민정당 측은 사과했지만 한 기사가 언급한 대로 민권투쟁의 진원지라는 진보적인 성향의 경상도 유권자들을 분노하게 했다.

5. 결과


'''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 선거'''
'''기호'''
'''후보명'''
'''정당'''
'''득표수'''
'''득표율'''
'''순위'''
'''당선여부'''
1
장이석

198,837
1.97%
5
낙선
2
송요찬

-
-
-
유세기간 중 자격 반납
'''3'''
'''박정희'''

'''4,702,640'''
'''46.64%'''
'''1'''
'''당선'''
4
오재영

408,664
4.05%
3
낙선
5
'''윤보선'''

4,546,614
45.09%
2
6
허정

-
-
-
유세기간 중 자격 반납
7
변영태

224,443
2.22%
4
낙선
선거인수
12,985,015
투표수
11,036,175
무효표수
954,977
투표율
84.99%

1963년, 5대 대선의 결과를 보도하는 영국 방송 British Pathé.
박정희윤보선을 '''득표율 1.5%P, 단 15만 표 차이로 ''' 따돌리면서 승리를 거둔다. 득표율이나 득표수 차이로 역대 최저수준. '''대한민국 역대 대선 중 가장 치열한 승부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강원도 평창군에서는 1위 박정희 후보와 2위 윤보선 후보 간 표차가 불과 '''12표'''에 불과했다. 이것은 역대 대선 시, 군, 구 단위 최소 표차로 현재까지 깨지지 않고 있는 기록이다.
이 때부터 30여년간 군 부재자투표가 사실상 여당을 찍을 수밖에 없는 공개 투표로 진행되었는데 이 당시에는 그런 제도와는 상관없이 군인들도 비밀 투표가 가능했다. 하지만 이 당시 군인들은 다름아닌 현역 육군대장이었던 박정희를 뽑지않고 윤보선을 압도적으로 지지했는데 이는 박정희의 남로당 전적 때문에 그를 불신하는 정서가 군 내부에 만연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점이 당시 대선의 공정성을 입증하는 증거라 할 수 있다. 만약 손을 쓸거라면 가장 먼저, 가장 쉽게 손 쓸 수 있었던 군 내부에서 윤보선의 표가 더 많이 나왔기 때문. 경기도, 강원도에서 윤보선이 승리를 거둔 이유도 이 지역에는 북과 인접해 군인이 많았던 것이 크게 작용했다.
참고로 방송자료가 잘 남아있지는 않지만 개표과정 또한 15대 대선16대 대선 이상으로 드라마틱했다고 한다. 더군다나 당시에는 개표기기가 도입되기 이전이라 위의 British Pathé의 영상에서도 볼 수 있듯 모든 것을 수개표로 진행하던 시절이고, 출구조사 또한 없던 시절이다 보니[4] 더욱 긴장감이 넘쳤을것이다. 처음에는 중부지역과 도시지역에서 몰표를 얻은 윤보선이 박정희를 앞섰는데 막판 영호남에서 몰표가 나오면서 박정희가 앞서게 되었고, 이 장면은 제3공화국(드라마)영웅시대에서도 그대로 재현된다.

5.1. 지역별 결과



[image]

'''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 선거 지역별 개표 결과'''
정당
신흥당
'''민주공화당'''
추풍회
<color=#373a3c> 민정당
정민회
후보
장이석
'''박정희'''
오재영
<color=#373a3c> 윤보선
변영태
'''전국
(득표율)'''
'''198,837
(1.97%)'''
'''4,702,640
(46.64%)'''

'''408,664
(4.05%)'''
'''4,546,614
(45.09%)'''
'''224,443
(2.22%)'''
'''서울'''
10,537
(0.85%)
371,627
(30.17%)
20,634
(1.67%)
<color=#373a3c> '''802,052
(65.12%)'''

26,728
(2.17%)
'''부산'''
3,419
(0.67%)
'''242,779
(48.20%)'''

11,214
(2.22%)
239,083
(47.47%)
7,106
(1.41%)
'''경기'''
27,554
(2.36%)
384,764
(33.05%)
54,770
(4.70%)
<color=#373a3c> '''661,984
(56.87%)'''

34,775
(2.98%)
'''강원'''
24,528
(3.27%)
296,711
(39.57%)
35,568
(4.74%)
<color=#373a3c> '''368,092
(49.09%)'''

24,924
(3.32%)
'''충북'''
14,971
(2.93%)
202,789
(39.78%)
26,911
(5.27%)
<color=#373a3c> '''249,397
(48.92%)'''

15,699
(3.07%)
'''충남'''
23,359
(2.35%)
405,077
(40.78%)
47,364
(4.76%)
<color=#373a3c> '''490,663
(49.40%)'''

26,639
(2.68%)
'''전북'''
18,223
(2.20%)
<colbgcolor=#d2811a> '''408,556
(49.43%)'''

37,906
(4.58%)
343,171
(41.52%)
18,617
(2.25%)
'''전남'''
22,604
(1.68%)
'''765,712
(57.22%)'''

51,714
(3.86%)
480,800
(35.93%)
17,312
(1.29%)
'''경북'''
34,622
(2.30%)
'''837,124
(55.64%)'''

58,079
(3.86%)
543,392
(36.12%)
31,113
(2.06%)
'''경남'''
16,014
(1.39%)
'''706,079
(61.71%)'''

60,645
(5.30%)
341,971
(29.89%)
19,323
(1.68%)
'''제주'''
3,006
(2.58%)
'''81.422
(69.88%)'''

3,859
(3.31%)
26,009
(22.32%)
2,207
(1.89%)
도시권에서 박정희의 성적은 역시 사상 문제로 고생한 3대 대선조봉암과 비교했을 때 나쁜 편이었다. 3대 대선에서 대구광역시, 경주시, 김천, 진주시 등 조봉암을 이승만보다 2배 이상 밀어준 경상도의 도시권에서도 박정희는 겨우 이기고 심지어 경주[5]김천에서는 지는 처참한 성적표를 받았다.[6]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도시가 이정도면 여타 도시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그만큼 도심지에서 박정희의 반대 정서는 영남권에까지 있었다.
그러나 영남, 호남의 농촌에서 이를 상쇄할 만큼 압도적인 지지를 얻어 박정희는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다.[7] 특히 해방 이후 보수 성향을 보여줬으며 한민당계 정당의 당세가 강했던 전라도의 농촌 지역은 박정희의 중농 정책을 지지해 예상 밖으로 박정희를 밀어 주었다. 당시 전라도는 손꼽히는 인구 밀집 지역이라 도시를 제외한 호남권의 대거 지지는 박정희 당선에 큰 도움이 되었다. 특히, 박정희는 제주도에서 가장 높은 득표율을 얻었는 데, 당시 제주도는 당시 4.3 사건을 겪은지 얼마되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윤보선 후보의 매카시즘 공격에 대한 반감이 크게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6. 영향


군부 세력은 이정재 등의 정치깡패를 소탕하였다. 특히 이승만 정권 부역자를 미적지근하게 처리한 민주당과 달리 박정희는 이들을 신속하게 처벌함으로써 이승만을 싫어했던 사람들의 호응을 얻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공업화를 실시하였고, 호남 지역에서의 구휼 정책을 비교적 성공적으로 진행하여 농촌과 빈민층을 중심으로 큰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이런 개혁 과정에서 생긴 4대 의혹으로 군부 세력에 대한 반대 정서도 강했으며 무엇보다 6.25 전쟁이 끝난지 10년도 안된 시기에 박정희남로당 관련 의혹은 박정희에게 악재로 작용하였다. 이를 잘 공략하면 윤보선이 충분히 승리할 수 있었으나, 색깔론에 집중하면서 제1공화국 시기 이념갈등에 인한 피해를 입은 계층에서 오히려 반발이 일어나고 말았다. 야권 지식인 계층과 혁신계(진보진영)에서도 윤보선을 극우정치인으로 인식하고 지지가 약해졌으며, 무엇보다도 '''이념 갈등에 의한 학살사건을 직접 겪었던''' 경상도[8], 전라남도, 제주도 투표자들의 마음을 박정희 쪽으로 완전히 돌려놓았다. 전통적으로 한민당계 정당의 세가 강한 호남에서 박정희가 승리한 것은 당시 언론 및 정계에서도 크게 놀란 사건이었다. 그러나 의외로 여순사건을 겪었던 여수순천에서는 이런 이념 논쟁으로 인한 득표 효과가 이 지역들만큼 높지 않아 여수에서는 윤보선이 이기고, 순천에서도 박정희는 고전했다.
기밀 해제된 미국 자료에 따르면 3.15 부정선거, 정확히는 4.19 혁명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난다면 대한민국이 공산화가 될 것이라 두려워 했는데 다행히도 선거는 상대적으로 공정하게 치뤄졌고, 미국은 안심할 수 있었다. 당시 정부에서 여론 조사를 한 결과 무슨 이변이 있어도 박정희가 과반수 득표를 한다는 결과가 나왔고, 그래서 미국도 보고 있는데 무리수를 두지 말자는 오판을 했다고 한다. 개표과정은 위와 같이 선거초반에 윤보선이 근소하게 앞서는것으로 나왔기 때문에 최종 개표결과가 확인될 때까지 청와대는 초상집 분위기였다고 한다.
아무튼 쿠데타라는 형식으로 민주적정통성에 흠집이 있었던 상황에서 선거에 승리한 정통성까지 얻게되어 날개를 단 호랑이가 된 셈이었다. 대한민국 최초로 '''색깔 논쟁'''이 끼어든 선거로, '''네거티브 전략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그러한 색깔 논쟁을 시작한 사람은 '''윤보선'''이었다. 오히려 이 때의 색깔 논쟁 때문에 박정희반공 노선이 더욱 짙어지게 되었다는 의견도 있다.
참고로 대통령 선거 한 달 뒤에 제6대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졌다. 이 선거에서 당시 민주공화당은 총 득표수의 1/3을 간신히 넘는 33.5%의 낮은 득표율을 기록했음에도 당시 야권에서 '''단일후보를 내지 못하는 등의 삽질'''을 하는 바람에(이는 역으로 뒤집으면 '''선거전략만 잘 짰어도 대선에서의 패배를 만회함과 동시에 정국 주도권을 쥘 수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9]) 민주공화당이 '''압도적으로 과반수를 확보'''했다.(110석/175석)

[1] 1960년 3월 15일3.15 부정선거 결과 당선된 제4대 대통령 당선자 이승만이 당선을 사퇴하여 새로 치러진 제4대 대통령 선거이다.[2] 물론 민주공화당과 박정희 측은 보수를 자처했지만, 윤보선 측의 색깔론 공세 속에 진보 유권자들은 박정희에 지지를 보내게 된 것이다.[3] 박정희의 가족사와 관련이 있는데, 형 박상희가 좌익 인사였다. 이로 인해 대구 10.1 사건때 경찰에 의해 살해 당했고, 본인 말로는 복수심 때문에 남로당에 잠시 가담했다고 하지만 남조선로동당김일성과 밀접한 연관이 없을 수가 없다. 이로 인해, 여순사건에서 사형 판결까지 받았었다.[4] 선거 예측조사를 방송을 통해 사전에 발표한것은 1995년 1회 지방선거때가 최초이고, 최초로 출구조사가 시행된것은 1996년 15대 총선이 최초이다. 물론 출구조사가 도입되기 이전이라고 해도 미국이나 일본에서는 전화여론조사를 통해 사전 예측조사를 발표하기는 했지만 당시 한국에서 전화기란 상류층들이 가지던 사치품이었다보니 전화 여론조사를 통해 예측조사를 발표할수있어도 한계가 뚜렷했을것이다.[5] 월성군까지 합쳐도 가까스로 이겼다.[6] 다만 부산에서는 이승만을 지지했던 3대 대선과 달리 가까스로 박정희가 이겼다.[7] 충청권 농촌은 대체적으로 윤보선을 지지했는데, 이는 그가 아산시 출신이라느 점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예측된다.[8] 지금은 보수적이라 평해지는 경상도지만 일제강점기만 해도 대구가 '조선의 모스크바'라고 불릴 정도로 경상도는 진보적 성향이 짙었다. 그렇기 때문에 대구 폭동, 여순 사건 등 광복 직후의 혼란 속에서 엄청난 피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부산도 마찬가지라 이러한 이념 논쟁으로 인해 소폭이나마 박정희가 승리할 수 있었다.[9] 실제 1988년 총선에서 각 정당이 지역기반을 그대로 유지해서 민정당이 과반확보에 실패하자 총선을 통해 대선에서의 패배 분위기를 만회한 평민, 민주, 공화 3당이 정국주도권을 줘서 노태우 정부를 효과적으로 견제했었다. 물론 89년도의 공안정국과 1990년 3당 합당으로 그 균형이 깨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