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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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必鏞
1927년 3월 10일~2010년 7월 24일
1. 개요
2. 생애
3. 대중매체에서
4. 기타


1. 개요


대한민국의 정치 군인. 종교불교. 본관파평(坡平).
박정희의 진정한 오른팔이었으며 박정희의 친위대하나회를 관리하였고 박정희가 군 인사 문제를 언제나 상의한 사람이 바로 윤필용이다. 이후락, 김종필, 김형욱, 박종규도 엄청나지만 윤필용만큼은 안 된다.[1]

2. 생애


1927년 3월 10일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공암리[2]#에서 출생해 대구고등보통학교 졸업 후 1949년 육군사관학교를 8기로 졸업하였고 5사단장 박정희 준장 아래에서 군수 참모를 지냈다. 1961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 비서실장 대리를 지냈으며 1965년 육군 방첩대장(현재의 국군기무사령관)에 보임되자마자 원충연 반혁명 사건을 파악하고 사전에 모조리 제압하여 박정희의 신임을 샀다. 1968년 1.21사태 때 방첩대에서 김신조를 수사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김신조의 "내레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디요"라는 발언을 여과없이 방송에 내보냈다가 경질되었다.[3] 그 후 20사단장, 베트남 파병 맹호부대장을 지내고 1970년 수도경비사령관으로 보임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손영길,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김복동 등이 비밀리에 결성한 조직인 하나회의 후원자 역할을 하며 군부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1971년 8월 육군보안사령관 김재규 중장의 지시로 수도경비사령부 보안반 요원들이 자신의 전화를 도청한 사실을 적발하고 보안반 요원들을 내쫓았다. 이때 모 4성 장군이 그의 집에 세배를 할 정도의 위세를 누렸으나 1973년 4월 술자리에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에게 "각하께서 연로하시니 이후를 생각해야 한다. 형님이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라고 말한 것이 빌미가 되어 쿠데타 모의 혐의로 체포되었고 육군사관학교 동기생인 육군보안사령관 강창성 소장에 의해 조사를 받았다. 그 다음으로 육군본부 보통군법회의에 회부되었는데 재판에서 쿠데타 모의 혐의는 입증되지 못했지만 업무상 횡령,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 군무이탈 등 8개 죄목이 적용되어 징역 15년형과 벌금·추징금 약 2,600만원을 선고받았다. 수도경비사령부 참모장 손영길 준장을 포함한 장군 3명과 장교 10명에게도 징역형이 내려졌으며 이로 인해 그와 가까운 장교 30여 명이 무더기로 군복을 벗었다. 한국 현대사의 권력 스캔들 중 하나로 꼽히는 이 사건은 윤필용 사건이라고 불리는데 박종규가 이후락을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사건이라고도 한다. 이후 윤필용은 수감된지 2년 뒤인 1975년 석방되었다.
1980년 하나회가 주축이 된 신군부가 집권하자 전두환의 도움으로 한국도로공사 사장, 한국담배인삼공사 이사장 등을 지냈다. 2010년 7월 24일 사망한 직후에 아들인 미주제강 회장 윤해관이 재심 청구를 하여서 보안사의 고문으로 사건이 조작되었다는 취지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

3. 대중매체에서



4. 기타


  • 독재 정권 치하에서 2인자가 어떻게 몰락하게 되는지 보여주는 교과서적인 인물이다. 특히 각하께서 물러나시고 형님이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는 발언은 술자리에서의 발언이라고 하더라도 당시 대한민국이 독재 국가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저 발언의 의도가 어쨌건 쿠데타 모의 혐의로 조사받기에는 더할 나위없이 좋다. 더군다나 윤필용은 당시 세간으로부터 '필동 육군본부', '청와대 밖의 대통령'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숙청 안당하는게 이상하다. 무엇보다 박정희 입장에서 보자면 그야말로 믿던 도끼에 발등이 찍힌 꼴이 되니 대노한 것은 물론이고[4] 결국 윤필용은 군인으로서의 생명은 물론이요, 제3공화국제4공화국의 권력자 및 정치인[5]으로서의 생명까지 끝장이 나버리게 되었다. 이후락도 윤필용 사건 이후로 윤필용과 공모하여 박정희에 대한 반역을 꾀한 역적이라는 낙인이 찍혀버리기에 이르렀고 이 때문에 이후락은 언제 중앙정보부장에서 쫒겨날지 모르는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 이는 훗날 박정희에 대한 충성심을 입증하기 위해서 김대중 납치 사건을 계획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된다. 결국 자중해도 모자란 판에 이후락과 가까워진 다음에는 '영감혁명할 때 나이가 몇이었지' 같은 소리나 하고 앉아 있으니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박정희하고 친인척인 김종필이 정적들의 '0순위 타겟'[6]으로 박정희 정권 내내 견제당하면서도 살아남은 것과 비교된다.

[1] 물론 나머지 4명은 5.16 군사정변 이후 정계 진출 등으로 인해 전역을 해서 1960년대 중반부터 현역 군인이 아니였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당연히 군 인사 문제는 윤필용의 손을 거칠 수 밖에 없는 구조. 윤필용 사건도 이후락 후계자 운운했다가 터진거지 본인 신상의 이야기가 아니였다. 육군참모총장이 아닌 일개 수도방위사령관이 군 인사를 좌지우지하는 거야말로 군부의 실세라 할 수 있다. 나중에 하나회 등 불법 사조직 발생을 막기 위해 장성급 인사 추천권은 민간인 출신인 안보수석이나 국가안보실장에게 위임하였다. 사실 이런 이상한 군 인사 처리는 근본적으로 5.16 쿠데타 자체가 육군사관학교 8기생 주축으로 이루어졌고 1961년 당시에 8기생들 대부분이 중령이었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 박정희도 육군사관학교 2기 출신이라 육군참모총장들이 대한민국 대통령하고 동기나 기수 차이가 별로 안나는 군대 선후배들이었다. 더욱이 10기까지는 군 경력자가 많이 필요했던 건군기의 특성 상 수료 기간이 4년이 아닌 몇 개월에 불과해 기수 간 차가 더욱 적었다. 특히 박정희 말년의 육군참모총장인 이세호 대장 같은 경우는 아예 대통령 친구라서 인사안이 거의 승인되었다. 그러니 군 인사 문제는 박정희 본인이 통수권을 활용해서 직접 처리해서 장악해야 했고 년언은 8기생 현역 군인들 중에서 받아야 했다.[2] 파평 윤씨 집성촌.[3] 후임 방첩부대장이 바로 제6군관구사령관이었던 김재규 소장이다.[4] 박정희의 부인인 육영수도 "아니 윤 장군이 어째 우리에게 이럴 수가 있냐"면서 윤필용을 힐난할 정도였으니 당시 청와대의 분노는 얼만큼인지 알 만하다. 윤필용의 경우에는 박정희가 군인인 시절부터 발탁되어 수십 년간 박정희를 보좌한 최측근 중의 최측근이다. 김종필, 박종규 등이 아무리 권력이 강하다 하더라도 박정희의 최측근은 어디까지나 윤필용이다. 이는 박정희가 군 인사 문제를 다른 사람과 아닌 윤필용과 상의해서 결정한 것만 봐도 당시 박정희가 윤필용을 얼마나 신임했는지 잘 보여준다. 물론 당시 박정희의 최측근 중에서 현역 군인은 윤필용밖에 없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5] 엄밀히 말하면 만기 전역 후에 보장된 정치 활동이 날아갔다고 봐야 한다.[6] 조카사위+5.16 군사정변 주체의 조합이니 당연히 가장 먼저 타겟으로 지목되는 구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