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태성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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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중심인물 '''황태성'''
1. 개요
2. 황태성은 누구인가
3. 황태성의 남파와 체포
4. 간첩이 된 밀사?
5. 사건 이후
6. 참고 자료


1. 개요


"황태성은 남북협상 밀사로 자처했지만, 김일성은 황태성에게 박정희와 나를 만나서 북한에 합류하도록 설득 공작을 해보라는 밀명을 내렸던 것이다... 나는 황태성을 큰 간첩으로 취급했고 혁명 과업에 장애가 된다고 판단, 그 문제를 빨리 없애버려야 했다. 박정희 의장의 정체가 의심받을 빌미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 김종필의 증언 #

"황태성의 간첩 혐의는 없었다. 삼국지에서도 적국을 찾은 밀사를 죽이지 않았다." - 황태성의 지인 권능상의 발언 #

"황태성 선생도 세월은 못 이기시는구나. 많이 늙었구나." - 황태성의 사형 당일, 그의 사진을 보고 박정희가 한 말

박정희의 어린 시절과 관련이 있는 인물인 황태성이 북한에서 내려와 박정희를 만나려다가 체포되어 간첩 혐의로 사형당한 사건.

2. 황태성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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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에 찍은 사진
1930년에 찍은 사진[1]
황태성(黃太成)은 1906년 경북 상주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갔으나 교내의 일본인 교장에 반대하는 동맹휴학에 참여하는 바람에 퇴학당했고,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에 들어갔지만 그곳에서도 퇴학을 당했다. 그는 어릴 적부터 반일감정을 가지고 있었으며, 좌익 사상에 관심이 많았다. 이 때문에 그는 이후 조선공산당에 들어가 공산주의 운동을 하며 투옥과 석방을 밥 먹듯이 했다. 또한 그는 어릴 적부터 죽마고우였던 박상희#s-1와 항일독립운동을 함께 했다. 그러면서 박상희의 동생인 박정희와도 자연스레 인연을 맺게 되었다. 박정희는 '형님'거리며 유독 그를 잘 따랐고 황태성은 박정희에게 친한 형으로서 조언과 꾸중을 해주었다.
8.15 광복을 앞두고 황태성은 여운형조선건국동맹에 들어가 전라도 지방의 책임자로 활동했다. 광복이 되자 그는 조선공산당 당원으로 활동하였다. 공산주의 활동 중에도 박정희박상희를 계속 만났고, 박상희에게 중매를 서주기도 했다.[2] 황태성은 1946년에는 대구 10.1 사건에 박상희와 함께 뛰어들었으나, 박상희는 경찰에 의해 사살당했다. 결국 황태성은 박정희남로당 입당 때 신원보증을 해준 후 월북했고, 북한에서 차관급인 무역성 부상까지 맡는 등 고위 간부가 되었다. 하지만 1950년대 남로당 출신에 대한 대규모 숙청으로 인해 남한에서 5.16 쿠데타가 터질 당시에는 권력에서는 밀려난 상태였다.

3. 황태성의 남파와 체포


5.16 쿠데타가 터지자 북한은 쿠데타를 일으킨 주체 세력이 누구인지를 급히 파악했다. 박정희의 좌익 전력을 알게 된 북한은 내심 박정희를 호의적으로 여겼다. 마침 육군 첩보부대(HID)의 제의로 남한에서 비밀리로 '정치회담'[3]을 제안하자, 북한은 이를 수용하고 양측에서 촬영한 영화 필름을 교환하였다. 그러면서 '''북한은 박정희를 "대화를 해 볼 수 있는 존재"로 여겼다.'''[4] 박정희와 대화를 나눌 사람으로는 황태성이 자원하여 결정되었다. 황태성은 박정희를 옹호해왔고, 스스로도 박정희가 어릴 적부터 나를 따랐으니 내가 가면 말이 잘 통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하여 황태성은 1961년 8월 말에 남파되었다. 그는 임진강을 넘어 서울로 잠입했다.
남한에 온 황태성은 먼저 지인들을 통해 '''박정희김종필을 만나려고 했다.''' 먼저 예전에 자신과 함께 대구 10.1 사건에 참여한 전력이 있고 남로당 재정부장을 지낸 바 있는 김성곤#s-1 동양통신 사장을 찾아갔지만, 마침 출장중이라서 만나지 못했다.[5] 이러자 황태성은 지인의 아들이자 같은 동향 출신에 박정희의 대구고등사범 후배인 김민하[6][7]를 만나서 박정희, 김종필과 만나도록 줄을 대달라고 부탁을 했다. 김민하는 박정희의 대구사범 동창인 고려대 왕학수 교수를 찾아가서 그를 통해 김종필과 접촉했으나 그로부터 딱히 연락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 이전부터 왕학수 교수가 대구사범 후배인 김민하한테 일자리를 알선해 주는 등 여러모로 도와주웠다고 한다. 반면 김종필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김민하와 왕학수와의 접촉을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또한 황태성은 김민하의 집에 은거하며 서울에 살고 있던 조카딸인 황유경과 조카사위인 권상능[8]과도 만났다. 권상능은 황태성의 부탁으로 그의 친필 편지를 박상희의 아내이자 김종필의 장모인 조귀분에게 전달했다. 편지를 받아 본 조귀분은 화들짝 놀라 급히 사위 김종필에게 황태성의 남파 사실을 알렸다.[9] 조귀분으로부터 연락이 없자, 권상능은 황태성에게 북으로 돌아갈 것을 종용했지만 황태성은 말을 듣지 않았다. 1961년 10월 22일 황태성은 중앙정보부에 의해 체포되어 반도호텔 735호실로 이송되었다. 황태성과 접촉한 김민하와 권능상도 연행되었다. 이후 모든 조사과정은 비밀에 부쳐졌다.[10]

4. 간첩이 된 밀사?


"원심 판결은 (저에게) 사형을 선고하였으나… '''소위 적국간에도 (밀사를) 사형치 않는 것이 국제법상의 관례'''인지라 하물며 비록 괴집(괴뢰집단)에 가담하였다 하더라도 어떤 사항을 논의하는 정도라면 그것만으로서 극형을 선고할 필요성의 여부를 고려하여야 할 것인바… (저는) 1955년 9월부터는 괴집(북한)에서 일체의 관직을 탈취당하였으며 특히 원심 판결 후 전향하는 간곡한 탄원서를 1962년 5월10일자로 제출하였으므로 자유정부인 대한민국의 품 안에 돌아오려는 피고인에 대하여 극형을 처함은 양형이 심히 부당하다.”

1963년 초 군법재판에서 황태성의 진술 中

황태성은 줄곧 자신이 '''북한에서 온 밀사'''라고 주장했다.[11] 그는 줄곧 박정희와 김종필을 만나게 해달라고 했다. 하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김종필은 그를 '''밀사가 아닌 간첩'''으로 여겼고, 박정희도 황태성을 껄끄러워하는 듯한 눈치였다.[12] 반도호텔에서 조사를 받던 황태성은 이후 서대문형무소의 조그마한 독방에 갇혀 일반 간첩 혐의자로 취급받았다. 한편 미국도 황태성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미국은 군사정부에게 황태성을 인도할 것을 요구했다.[13] 1961년 11월 경 황태성은 미군으로부터 2주에 걸쳐 조사를 받았다. 박정희의 좌익 경력과 박정희-황태성 간의 관계 때문에 속앓이를 하고 있던 박정희 군사정부로서는 속이 탈 일이었다.[14] 실제로 쿠데타 초기 미국은 박정희와 김종필 등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았고, 박정희는 '레드 콤플렉스'에 시달려야 했었다.
이런 상황에서 황태성의 재판이 진행되었다. 황태성은 '''비공개''' 군법재판에 회부되었고, 1961년 12월 27일 국가보안법에 의거하여 육군보통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와 접촉한 김민하와 권능상은 각각 징역 10년과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황태성은 이 판결에 항의해 자신은 밀사로 왔다는 기존의 주장을 굽히지 않으며 항소했다. 하지만 1962년 9월 11일 육군고등군법회의는 김민하와 권능상의 형량만 대폭 낮추어주었을 뿐, 황태성의 항소는 기각해버렸다. 황태성은 다시 항고했는데, 두번째 항고 당시에 김종필이 중앙정보부에서 물러나고 그의 반대파였던 김용순김재춘중앙정보부를 쥐고 있었다. 그래서 대법원에서 판결이 이루어졌고 황태성의 사형 선고는 파기환송되었다. 파기환송심은 육군고등군법회의에서 다시 이루어졌고, 이번에 황태성의 혐의에는 사형 판결이 가능한 간첩죄가 덧씌워졌다. 결국 1963년 7월 2일 끝내 '''황태성에게 사형 판결이 내려졌다.''' 이후 그 해 10월에 열린 파기환송심 상고심도 사형 판결을 확정지었다.
한편 비밀로만 부쳐졌던 황태성 사건이 1963년 9월 들어 점점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마침 대선을 앞두고 있을 때라 야당 후보 윤보선은 대선 직전 여순 사건과 황태성을 들먹이며 박정희를 압박했다. 야당은 황태성의 존재를 박정희민주공화당을 공격하는데 요긴하게 써먹었다. 예를 들어 1963년 9월 25일에는 유인물을 뿌려 황태성과 박정희 간의 커넥션이 존재한다는 음모론을 주장했다. 이런 주장들은 야당 지지 성향의 신문들을 통해 호외로 뿌려지며 퍼져나갔다. 이는 박정희의 '레드 콤플렉스'를 다시금 자극시켰다.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형욱은 황태성 사건이 더 이상 파장을 일으키지 않게 하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다행히도 야당의 과도한 매카시즘적 공세가 오히려 역효과가 나서 박정희는 아슬아슬한 표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황태성은 사형이 확정된 후에도 서울고등법원에 재심을 청구하며 살고자 애썼고, 처형 직전에도 미국과도 몇 번 접촉하기도 했다.[15] 하지만 끝내 1963년 12월 14일 오전 9시 20분 경, 재심 중에 있던 황태성은 인천 근교의 군부대에서 총살당했다. 그는 죽기 전에 '''"민족의 완전자주독립과 남북통일 만세!"'''라 외쳤다고 한다. 그의 시신은 복역을 마치고 나온 권능상이 확인을 하였다. 그리고 1964년 9월 서울고등법원은 그의 재심을 기각했다. 그의 죽음과 동시에 북한은 박정희에 대한 일말의 기대조차 거두고 박정희 정권을 향해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며 남북관계는 급속도로 냉랭해졌다.[16] 그리고 박정희는 황태성이 사형당한지 3일 후인 1963년 12월 17일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5. 사건 이후


김형욱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황태성의 처형에 관해 박정희와 얘기를 나누었다고 썼다. 대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두 번이나 같은 질문을 한 것으로 볼 때 박정희도 황태성의 사형에 대해서는 고심했던 듯하다. 어쨌든 박정희는 사형을 집행하기로 결정했다.

박정희 : "아까운 사람인데 꼭 사형시켜야 하나?"[17]

김형욱 : "'''미국과 야당에 몰리지 않으려면''' 사형을 집행해야 합니다."

황태성의 손녀가 박정희와 만난 적이 있다고 한다. 황태성의 손녀였던 황유경 씨는 자신이 고등학교에 재학 중일 때 청년봉사단체에서 일했는데, 언젠가 청와대에 가서 박정희에게 인사를 하는 일이 있었다. 여기서 그녀는 박정희 앞에 나가 봉사 뱃지를 달아주면서 '''"제가 황태성씨 손녀입니다."'''라고 말해버렸다. 그러자 박정희의 얼굴이 순간 굳으며 행사는 허둥지둥 끝나버렸다. #
2006년, 황태성의 유가족은 진실화해위원회에 황태성이 억울하게 사형을 당했다면서 진실규명을 요청했으나 이후 거부당했다.
드라마 제3공화국에서도 박정희의 어린 시절과 5.16 쿠데타 이후의 에피소드들에서 황태성이 나왔다. 배우 김갑수가 황태성 역할을 맡았다. 1회에서 황태성은 박상희#s-1와 함께 항일운동을 했고, 박정희가 만주로 간다고 했을 때 그를 심하게 꾸짖는다. 내레이션은 시청자들을 향해 그에 대해 잘 기억해두라고 말할 정도로 그를 강조했었다. 그리고 5.16 쿠데타 이후 북한에서 남파되어 박정희를 만나려다가 체포된다.
MBC에서 방영한 이제는 말할 수 있다가 이 사건을 다룬 바 있다. #
2015년 황태성의 이야기를 다룬 <박정희 장군, 나를 꼭 죽여야겠소>가 출판되었다.
현재 황태성의 묘지는 경북 상주 청리면에 있다. 비록 간첩으로 죽어 초라한 무덤이지만 그의 친인척이나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가끔 그의 기일인 12월 14일에 조촐한 제삿상을 차려준다고 한다. #

6. 참고 자료


[1] 이 사진에는 그의 이름이 황대용(黃大用)으로 되어 있는데, 그것은 그의 이명(異明이었다.[2] 나중에 박상희 밑에서 태어난 딸 박영옥이 김종필과 결혼을 하게 된다.[3] 이 비밀스러운 접촉은 61년 9월 말부터 62년 8월 말까지 8차에 걸쳐 이어지다가 남측의 일방적인 파행으로 중단됐다.[4] 물론 북한은 "쿠데타 세력은 진보세력이 아닌 반동세력이며, 독자적이 아닌 미군이 사주한 것"이라며 쿠데타 이틀 뒤에 내놓은 논평에서 5.16 쿠데타를 비난했다. 하지만 북한은 대화의 끈을 계속 잇고 싶었던 모양이다. 1961년 7월, 조선로동당 정치위원회는 "박정희가 반공을 표방하고 있고 혁신계를 탄압하고 있지만 우리와 통일문제를 협의할 수도 있을 것이다. 평화통일을 제안할 비밀 협상대표를 파견하기로 하자"며 박정희에 대한 기대를 내보였다.[5] 김성곤, 박상희, 황태성 이 세명은 어린 시절부터 동네에서 알고 지내던 친구 사이들로 일제강점기에 모두 좌익활동에 투신했다. 김성곤은 남로당 재정부장으로 활동하다가 좌익활동을 정리하고 금성방직, 동양통신을 창업해서 기업경영에 전념하고 있었다. 박정희를 어린 시절부터 지켜봤던 김성곤은 사석에선 박정희와 자녀의 결혼 문제를 상의할 정도로 친분이 두터운 사이였다. 이후 공화당 재정위원장으로 박정희의 정치자금 관리를 도맡아 하게 된다.[6] 당시 28세로 중앙대 정치외교학과 시간강사였다. 황태성을 도와준 혐의로 처음에는 10년 형을 선고받았다가 1년 6개월으로 감형되어 복역했다. 사실 김민하는 아버지와 동네 어르신들한테 황태성이라고 옛날에 독립운동하던 사람이 있었다는 말만 들었지, 실제로 만나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실제 나이를 따져보면 황태성이 남쪽에서 한참 활동하던 시기에 김민하는 어린아이. 하지만 황태성은 일제강점기때 김민하의 아버지 김원출과는 친분이 두터웠고, 재일교포를 통해서 그 김원출의 아들이 지금 서울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미리 파악하고 내려온 것이다. 황태성과 김원출이 먼 친척 사이라는 말도 있다.[7] 김민하는 출소 이후에 중대 정외과 교수를 거쳐서 중앙대학교 총장을 역임하고 교총민주평통에서 고위직을 지냈다. 2015년 1월부터는 세계일보에서 회장직을 맡고 있다.[8] 그도 황태성을 도운 혐의로 처음에는 15년 형을 선고받았다가 2년으로 감형되어 복역했다. 현재는 개인사업을 하고 있다고 한다.[9] 김종필의 회고록에서는 그가 황태성이라는 사람을 전혀 알지 못하고 조귀분을 통해 황태성에 대해 처음 알게 되는 것으로 나온다.[10] 황태성의 조사과정에 있어서 두 가지 주장이 있다. 김종필은 황태성을 직접 만나지 않고 대역을 세워 황태성을 만나게 했다. 황태성은 대역이 김종필인 줄 알고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는 것이 항간에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김종필은 황태성이 대역을 눈치채고 진술을 거부했다고 주장했다.[11] 권상능이 황태성으로부터 들은 바에 따르면 그의 임무는 5.16 직후 군사정권이 북으로 공작원을 보낸 진의 파악, 남쪽의 남북협상회의 제안, 남북 간 비밀무역 대표부 설치, 박정희에게 중대 정보 제공 등이었다고 한다.[12] 일각에는 황태성이 박정희하고 3번이나 개인적으로 만났다고 주장하지만 정확한 사실관계는 확인되지 못했다. 1992년에는 김종필이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황태성을 만난 적이 있다고 말했다가 나중에는 '만난 적이 없다'고 번복하기도 했다.[13] 언론인 문명자는 황태성 사건을 조사하다가 추방당한 미국 정보기관원 래리 베이커와 1963년에 연락을 주고받았다. 래리 베이커는 문명자에게 "황태성과 김종필이 반도호텔에서 나눈 이야기를 모두 조사해 상부에 보고했다. 황태성이 내려온 목적은 박정희와의 연대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한 것이었다. 미국 측은 황태성을 미 정보기관에 인도하라고 했지만 박정희는 시간을 끌었고 나를 추방했다."라는 내용의 회답을 보냈다. 문명자는 그의 회답을 토대로 조선일보에 기사를 송고했지만 신문에는 실리지 못했다.[14] 또 그 달에는 박정희와 미국 대통령인 존 F. 케네디를 만나기로 되어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다행히도 박정희는 '베트남 파병' 이야기를 꺼내면서 그를 만족시켜 주었다.[15] 황태성과의 계속된 접촉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이 공론화되지 않고 묻혀버린 것은 아마 미국도 황태성으로부터 얻어낸 것이 거의 없어서였을 것이다. 김종필의 증언에 따르면 자신이 만난 미국 정보요원에게 "우리가 알아낸 것 외에 더 알아낸 것이 있느냐"고 묻자 "아무것도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고 한다.[16] 후에 7.4 남북 공동 성명을 위해 이후락이 북한으로 갔을 때, 그는 자신도 황태성처럼 될 것을 우려(...)해 청산가리를 품고 갔다고 한다.[17] 황태성이 처형되자, 박정희는 그를 가리켜 "아까운 형님이었는데..."라고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다는 증언도 있다. 출처: 사랑하지 말자/ 도올 김용옥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