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성사건
1. 개요
'''宮城事件'''. 1945년 8월 14일에서 15일에 일어난 일본 제국 최후의 쿠데타이자, 도저히 거스를 수 없는 대세를 억지로 막고자 하던 군국주의 군인들의 최후의 발악이다.
2. 배경
제2차 세계 대전 막바지 1945년 8월에 이르러 일본은 그야말로 세기말이 55년 일찍 찾아온 분위기였다. 동맹국 진영은 몇 달 전에 무조건 항복한 독일, 애시당초 제대로 힘도 못 쓰고 항복한 이탈리아가 나가 떨어지고, 일본과 함께 전쟁을 수행하는 나라는 아무런 도움도 안되는 이름 뿐인 괴뢰국들과 멀리 떨어진 동남아시아의 태국이 전부였다. 그 태국조차 일본이 불리해지자 친 연합국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세계 3위의 해상전력을 자랑하던 제국해군 연합함대는 42년 미드웨이 해전에서 네임드 항모 네 척을 잃은 것을 시작으로 44년의 필리핀 해 해전, 레이테 해전으로 박살나고 그 잔존세력조차 구레 군항 공습으로 소멸했다. 모든 해외점령지와의 통상(通商)은 단절되어 일본 본토는 식량을 포함한 모든 자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태였다.
이런 상황 속에 오키나와 전투마저 패배, 미국의 본토 침공이 현실화되고 있었으나 아직도 정신 못 차린 일본 군부는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연합국의 포츠담 선언을 거부하고 조건부 항복의 의사를 타진하고 있었다.[1] 태평양 전쟁 후반에는 이미 일본은 미국에게 저항 할 수단조차 없었고 미국의 기세를 꺾을만한 압도적 승전조차 없었으며 압도적인 화력과 물량으로 승리가 바로 눈 앞에있는 미국은 일본의 터무니 없는 조건을 받아들일 리 만무했다.
'''본토결전, 1억 총 옥쇄[2] , 황국불멸''' 등을 외치던 일본군 수뇌부는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3] 와 소련의 참전으로 사면초가의 상황 속에서 히로히토 덴노의 결단 하에 '천황제 유지'를 목표로 포츠담 선언을 수락, 항복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세상에는 구제불능의 바보들이 어디에나 있는 법. 바로 이 순간에도 최후의 1인까지 항전하여 천황을 결사옹위하고 귀축영미를 몰아내자는 극우 군인들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항복 결정에 반발하고 있었다.
3. 항복 직전의 급박한 움직임
8월 12일에서 13일에 걸친 어전회의 및 군 수뇌부 회의에서는 수많은 갑론을박이 이어졌으나 일단 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이고 항복 후 천황제 유지 조건을 협상하자는 외무성쪽으로 대세가 기울고 있었고, 여기에 해군도 찬성하고 있었다. 육군은 육군대신 아나미 고레치카(阿南惟幾)를 중심으로 사전에 준비한 결호작전을 토대로 결사항전할 것을 주장하고 있었으나 결사항전을 주장하는 세력은 이미 정부 및 군 내에서도 소수에 불과했다. 결국 13일 오후 각료회의에서 항복이 결정되었다.
이와 같은 분위기를 감지한 육군성 내 항전파 소장장교들은 회의를 끝내고 온 아나미 대신을 면담했다. 이들 소장파 장교들은 아나미 장관과 의형제라 불릴 정도로 친했던 하타나카 켄지(畑中健二) 소좌[4] 를 비롯하여 군사과장 아라오 오키카즈 대좌, 군사국원 이나바 마사오 중좌, 이다 마사다카 중좌, 군무국원 다케시다 마사히코 중좌, 군무국원 시이자키 지로 중좌로 이들은 아나미 장관에게 항복의 결사 반대할 것과, 비상시를 대비한 병력동원계획의 발동을 요청했다.
이들이 말한 병력동원계획은 수도 도쿄의 방어와 천황의 보위를 목적으로 하는 근위 제1사단을 동원하여 주요 정부기관 및 군 중추를 모조리 장악하고, 항복파인 스즈키 간타로 내각총리대신, 키도 고이치 궁내대신, 전임 수상이기도 했던 요나이 미쓰마사 해군대신, 도고 시게노리 외무대신을 모조리 체포, 처형한다는 '''사실상의 쿠데타'''였다. 이 쿠데타를 성공시키고 끝까지 미국에 맞서 싸우자는 것이 소장파 장교들의 주장이었다.
아나미 육군상은 일단 이들의 제안에 대해 다른 인사, 특히 참모총장 우메즈 요시지로(梅津美治郞)에 먼저 설명하고 동의를 구해야한다며 돌려보냈다. 항복 당일 아나미가 자결했기에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으나 이 시점부터 아나미는 항복에는 반대했지만 쿠데타 계획 역시 찬동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8월 14일, 아나미는 우메즈와 만나 소장파들이 제안한 쿠데타 계획을 설명했고 우메즈는 즉시 반대의사를 내비쳤으며 아나미 역시 이에 동의했다. 뒤이은 어전회의에서의 갑론을박 끝에 히로히토의 결정으로 무조건 항복이 선택되었으며 아나미는 천황의 선택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고 항복명령에 따랐다.
같은 시각, 하타나카 소좌는 동부군관구 사령관 다나카 시즈이치(田中静壱) 대장에게 쿠데타 가담을 요청하나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그러나 하타나카 등 쿠데타 주동자들은 동지들을 규합하며 쿠데타에 호응할 인물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같은 날 23시 30분, 천황의 옥음방송 녹음이 끝났다. 그리고 방송녹음을 위해 고쿄를 방문했다 막 퇴거하던 정보국 총재 및 방송사 관계자들이 하타나카의 동조자가 지휘하던 부대에게 걸려 체포되면서 쿠데타 세력도 항복결정 사실을 알게 된다.
8월 15일 새벽, 하타나카 소좌를 중심으로 한 쿠데타 세력의 계산에 없던 일이 일어났다. 갑자기 도쿄 일대에 정전이 발생한 것이다. 당시 괌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의 제315 폭격비행대 소속 B-29 폭격기 140여대가 도쿄 상공에 나타나 등화관제를 위해 전기를 끊어버린 것이다. 이들의 목표는 도쿄가 아닌 아키타현의 정유공장이었지만 일본군은 이를 알 리 없었다. 갑작스런 정전에 쿠데타 세력은 우왕좌왕했고, 하타나카 소좌 등은 일단 근위 1사단 사령부를 방문하여 사단장 모리 다케시(森赳)에게 쿠데타 가담을 요청했다.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모리 사단장은 목욕재계 후 신궁에 가서 기도드리고 결정하겠다는 등의 답변으로 시간을 끌다가 하타나카의 분노를 사 동석해 있던 사단참모 시라이시 미치노리(白石通教) 중좌와 함께 참살당했다. 쿠데타의 시작이었다.
4. 급조한 어설픈 쿠데타, 그리고 실패
모리 사단장을 죽인 하타나카 소좌는 1사단 참모로 자신의 동조자이기도 했던 도조 히데키의 사위 고가 히데마사(高賀秀正) 소좌의 도움을 받아 근작명 갑 제584호라는 위조명령을 내려 1사단 병력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모리 사단장의 직인을 도용하여 명령을 발동, 고쿄의 모든 출입을 통제하고 NHK를 손아귀에 넣었다. 쿠데타군은 최우선적으로 항복방송을 저지한 후 다른 상급 지휘관들을 설득시켜 대세를 거스를 계획이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항복방송을 녹음한 레코드를 확보하는 데 실패했고[5] 이들의 목표였던 항복파 대신들은 이미 잽싸게 피신한 뒤였으며[6] 이들의 쿠데타를 지원할 다른 상급 지휘관들의 지지를 받는데도 실패하고 있었다.
당장 도쿄 일대를 관할하는 동부군관구 사령관 다나카 대장은 노발대발하며 병력을 철수시키라고 아우성이었다. 거기에 하타나카 소좌가 자신의 의형으로서 쿠데타 계획을 지지해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던 육군대신 아나미는 자신을 설득하러 온 이다 마사다카 중좌를 역으로 설득한 뒤 한창 쿠데타가 진행중이던 새벽 4시에 패전의 책임을 통감한다는 유서를 남기고 할복 자살해 버렸다.
거기다 마침내 동부군관구가 병력을 동원하여 쿠데타를 진압할 준비를 시작했다. 또 비슷한 시각에 동부군관구와 1사단 예하 부대간에 통신이 연결되면서 1사단 각 부대들은 자신들의 사단장이 죽었고 자기들은 쿠데타군에게 놀아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쿠데타군 유일의 가용병력은 허망하게 날아가고 말았다.
이에 하타나카 소좌는 점령한 NHK 방송국을 통해 자신들의 의지를 표현하는 연설방송이라도 하고자 했으나 NHK 방송담당자인 다테오 아나운서가 '''"아이고 님아, 지금은 전시라서 전국방송하려면 육군하고 주파수 조율해야하고 어쩌고저쩌고 해서 시간이 오래 걸려요"'''라는 뻥을 치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도 다테오 아나운서는 목숨을 걸고[7] 시간을 끌어 끝내 방송은 무산되고 말았다. 뒤이어 녹음방송을 하고 난 뒤 잠에 들었던 천황이 새벽에 깨어나 쿠데타 소식을 듣고는 '''"짐이 직접 병사들을 만나 이야기하겠다."'''며 쿠데타 반대 의사를 명백히 하면서 쿠데타 세력은 걷잡을 수 없는 패배감에 빠져들었다.
이들은 최후의 발악으로 조잡한 삐라를 급히 만들어서 도쿄 시내에서 시민들에게 뿌리며 항전의 정당성을 외쳤으나 아무도 관심을 주는 이 하나 없이 버려질 뿐이었다.[8] 결국 8월 15일 오전 11시, 하타나카 등이 고쿄 앞에서 권총자살하며 쿠데타는 실패로 돌아갔고, 약 1시간 뒤 항복방송이 일본 전역에 울려퍼진다. 이 때 도조 히데키의 사위 고가도 자살했는데 그의 총은 도조 히데키에게 유품으로 전달되어 도조는 그 총으로 9월 12일 자살을 기도하며, 이 사건을 본 사람이 동료에게 소식을 전해 마츠에 소요 사건을 일으켰다.
5. 의의
항복 직전의 이 쿠데타가 일종의 막간극 취급을 받으며 형편없이 실패한 것은, 가장 전쟁에 적극적이던 군부마저도 대세를 거스를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는 의미였다. 아나미 육군대신이나 우메즈 육군참모총장은 물론, 다나카 동부군관구 사령관, 모리 1사단장 등 쿠데타 세력이 포섭하고자 했던 주요 지휘관들은 모조리 쿠데타 제의를 거부하고 항복명령에 따랐다. 쿠데타에 동원된 1사단 병력도 자신들이 속았다는 걸 알자마자 일제히 원대복귀했다. 실제로 쿠데타에 참여한 것은 일부 좌관급/위관급 장교들뿐이었던 것이다.
군만이 아니라 쿠데타군에 협조하기를 거부한 NHK 방송기술자, 그리고 쿠데타군의 삐라를 무시한 도쿄 시민들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패전이 이미 거스를 수 없는 대세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도쿄 내에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다른 도시들은 물론이고 도쿄마저도 대공습을 당해 불타는 판에... 현실을 인정하기를 거부한 소수 극우소장파들의 쿠데타는 결국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
한편, 이 쿠데타는 아이러니하게도 실패했으면서도 주동자들이 처벌받지 않은 매우 기묘한 쿠데타가 되었다. 쿠데타 직후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면서 쿠데타 세력을 처벌할 수 있는 기관이 불분명했고, 쿠데타 세력을 최우선적으로 수사할 헌병대는 군 해체와 함께 사라졌으며, 일본을 점령한 미군들은 이런 바보들을 신경쓸 여유가 없었던 탓이다. 당시 일본 극우 입장에서는 그들의 마음을 모르는건 아닐테니 미담으로 미화시키려 들 망정 질타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게다가 어차피 주동자 중 대부분(특히 하타나카 등)은 이미 죽고 없는 판이었으니 말이다. 할복하려다 살아남은 사람은 이다 중좌 정도. 끝까지 남아서 개긴 쪽은 육군항공대 아쓰기 기지의 장교들 정도이다.
다만 이 이야기가 오늘날까지 남아서 '이 새끼들은 정말로 천황이 뭐라 하건 관심도 없었던 정신병자들'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어 천황에게 기묘한 형태로 쉴드를 쳐 주는 사례로 남게 되었다.
6. 창작물에서
- 일본의 가장 긴 하루(영화) - 원작은 문예춘추에서 발간한 동명의 논픽션이다. 특이한 것은 천황이 얼굴이 안 나오는 캐릭터라는 것이다. 개봉 당시 쇼와 덴노가 멀쩡히 군림 중이었기 때문에 다루기가 굉장히 민감했다는 이유도 있을 듯하다. 다만 배역은 있었다. 가부키 배우 마츠모토 코시로 8세(1910-1982).
- 일본 패망 하루전(영화) - 위 영화의 리메이크 판이다. 전작과는 다르게 천황이 직접 등장한다.
- 창공의 포효 - 초록배매직스 에서 펴낸 전쟁 만화로, 한 에피소드에서 패전 직전의 해군항공대 기지에 이 쿠테타 세력이 만든 삐라가 뿌려진다. 이를 본 해군 장병들은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지지 않았다)고 하지만, 주인공은 이런 작은 기지에 까지 삐라를 뿌려댈 정도로 동조해주는 세력이 없다며, 전쟁은 이미 끝났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주인공과 친했던 조종사 하나가 전투기를 몰고 발진해 B-29를 요격 하러간다.[9] 하지만 이는 패전을 부정하는 세력을 찾아내기 위한 함정이었다.
[1] 이미 1944년 말부터 소련을 통해 물밑 교섭을 시도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 조건이라는 게 천황제 유지, 일본 정부가 일본군의 무장 해제와 전범 재판을 직접 할 것, '''개전 이전 식민지 유지'''. 패전이 바로 앞인 전범국 일본에게만 엄청 유리한 조건들만 협상안으로 내놓은지라 무조건 항복을 받아도 시원찮을 입장인 연합군이 들어줄 리가 없다. 유일하게 받아들여진 게 천황제 유지. 원래 연합군의 실세 미국은 천황은 적국의 수괴이니 천황이 존재하면 일본을 점령해 봤자 파르티잔 같은 일본 게릴라가 생길 것을 염려하여 황가 자체를 없애려고 했다. 그러나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이 점령 후 일본을 통치하려면 정신적 상징인 일본 천황을 살려서 실권도 없는 군주로 대우시키는 일명 바지사장으로 앉힌 뒤 GHQ가 통치하는 방식으로 하는 게 낫다는 의견을 내준 덕분에 겨우 천황제를 유지하게 된 거다.[2] 식민지였던 조선과 대만 등의 인구 포함.[3] 일본군도 핵분열에 대해 알고 있었고, 무기화를 위한 연구도 진행 중이었다. 그러나 연구과정에서 무수한 난관에 부딪히면서 핵무기 개발이 얼마나 어려운지, 얼마나 많은 개발비가 들어가야 하는지 체감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핵폭격을 하는 것을 보고 완벽하게 좌절했을 수도... 설상가상으로 그 핵무기 개발조차도 육군과 해군이 어떠한 자료 공유도 없이 완벽하게 따로 하고 있었다.[4] 구 일본군은 소령, 중령, 대령이 아닌 소좌, 중좌, 대좌라는 계급을 썼다. 그래서 좌관급.[5] 쿠데타군에 잡힌 방송기술자가 역정보를 흘려 쿠데타군이 엉뚱한 곳만 수색하게 했고, 이에 쿠데타군이 낚여 헛다리를 짚는 바람에 옥음방송 녹음 레코드를 확보하지 못했다. 레코드는 히로히토의 시종장인 도쿠가와 요시히로(徳川義寛)가 자신의 집에 있는 금고에 숨겼다.[6] 특히 당시 총리이자 패전 준비를 하면서 매국노로 찍혀있던 스즈키 간타로를 죽이려고 총리관저 및 도내에 있던 그의 사저까지 쳐들어갔지만 스즈키 총리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고 한다. 참고로 이에 열 받은 군인들은 스즈키 사저를 불지르고는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고 한다.[7] 하타나카는 이 시점까지 모리 사단장을 시작으로 쿠데타에 동조하지 않은 여러 명을 살해했다.[8] 이미 도쿄는 도쿄대공습과 배급이 극도로 줄어서 아사직전에 이르러 지금 자기들 하루 먹기 살기도 바쁜데 이런거에 관심 줄 여유자체가 없었다.[9] 삐라에는 항복을 받기위해 연합군측 사절단을 태운 B-29가 날아오면 요격하라는 내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