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항쟁

 



1. 개요
2. 국민들과 재야인사들의 반응
3. 시위상황
4. 계엄령 선포
5. 이후
6. 평가
7. 관련 문헌



1. 개요


1964년 한국에서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에 강력히 반대하여 대학생 및 일반시민 그리고 재야인사들이 주도하여 일으켰던 반일 성향의 항쟁.[1] 당시는 광복 20주년을 맞이하게 되는 시점이었고 35년간의 일제강점기로 인해 한국 국민들의 반일 정서가 높았던 시절이라 어느 때보다 반일에 동참하는 이들이 대거 참가하였던 항쟁이기도 하였다.[2] 대표적으로 이 항쟁에 참여했던 사람은 후일 대한민국의 '''제17대 대통령이 되는 이명박[3]과 그의 최측근 이재오, 손학규''' 등이 있다. 고려대에 재학하던 이명박은 이 일로 소요죄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의 형을 선고받았다.
1964년 대통령 박정희한국 경제의 활성화와 부흥을 목적으로 1945년 해방 이후 사실상 국교가 단절된 상태나 다름이 없었던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를 위해 '''한일수교'''를 비밀리에 추진하게 되었다. 박정희가 해방 20년과 일제 패망 20년 만에 이렇게 한일 관계 정상화를 추진하게 된 것은 당시 매우 가난하였던 한국경제를 부흥이 절실하였기에[4] 기업인들은 한국의 풍부하고 저렴한 노동력과 일본의 우수한 기술력을 결합하면 해외시장에 경쟁력 있는 공산품을 수출할 수 있다고 조언하였고, 해외의 많은 경제기관들과 전문가들도 조속한 한일수교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더욱 중요한 요인은 당시 냉전시대라 1961년에 소련, 북한, 중국은 전쟁 재발시 군대의 자동개입이 담긴 "동맹조약"이 체결되었고 이러한 구도하에서 한일 양국이 안보적으로 협력하라는 미국의 양국간 물밑 접촉,압박이 있었으며, 수교과정에서 박정희의 흑역사 중 하나인 충성혈서를 써 가입한 만주군 시절 일본 인맥도 작용하였다.
어쨌든 정부는 일본 도쿄에서 한일 외무장관 등을 통해서 한일관계 정상화를 추진하기로 일본측과 합의하기로 하고 당시 여당인 민주공화당도 이에 동참하기로 하였다. 참고로 당시 한국은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이후 일본과 외교 관계를 맺지 않고 있었는데, 일제강점기를 35년이나 겪어온 국민들의 과거사적인 정서 때문에 일본에 대한 반감이 매우 깊던 시절이라 해방 이후 20년 동안 일본과 정치외교적인 교류를 가지지 않았던 것이다.[5]

2. 국민들과 재야인사들의 반응


박정희 정권과 공화당의 한일 국교정상화 방침에 대해서 국민들은 강력히 반발하고 나섰으며 ''''해방된 지 20년이나 되었는데 이제 와서 왜놈들의 칼부림 속에 살으란 말인가'''', ''''왜놈과 국교정상화는 제2의 경술국치이자 을사조약이다'''', ''''피 흘려 나라를 지켜낸 호국영령과 애국자들이 크게 통곡한다''''는 등의 반대 입장을 밝혔다.
특히 그 당시 해방 20년인 점을 고려해보면 일제강점기 치하에 살아온 세대들이 주를 이루고 해방 이후 태어난 세대들도 부모님의 영향 등으로 인해 반일혐일 인식이 깊었던 시기인 데다가 일제강점기의 모진 시절과 과거사 반성을 외면하는 왜놈들과 무슨 국교정상화냐며 반대인식이 높았던 시절이었다.
'''게다가 그 당시 일본 측은 일제강점기 때 한국에 끼친 피해에 대해 어떻게 사과와 보상을 할 것인지 한국 언론에 명확하게 공개하지 않았다.''' 박정희는 국교정상화를 가로막는 난제를 타개하기 위해 밀사를 파견하여 비밀교섭을 벌이면서 일본 정계의 실력자들과 교섭하는 과정을 진행하면서 국교 정상화 논의를 하면서 의제로 다루어 양국 간의 협의를 이루겠다고만 밝혔을 뿐이다. 이 같은 반대여론을 경청하고 설득하는 민주적 절차가 없어 안 그래도 반일감정이 폭발하는 마당에 일본이 보인 이러한 태도는 항쟁을 격화시키게 되었다.[6]
전직 대통령인 윤보선은 대일외교굴욕투쟁위원회 위원장 명의로 박정희 정권의 이같은 만행은 한국 역사에 커다란 치욕을 남길 오명의 사건이 될 것이며 역사는 박 정권의 친일 매국에 준하는 이 같은 행위를 호국영령들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비난하였고 장택상 역시 '''현대판 한일병합'''에 비유하며 반대하였다.
여기에 공화당을 제외한 모든 야당과 재야인사들이 의기투합하여 윤보선을 위원장으로 '''대일외교굴욕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한일 국교정상화 반대 및 철회운동과 투쟁을 벌여나가기로 하였다. 3월 9일 서울 종로예식장에서는 각계 정치인, 재야 인사 등이 모여 구국선언을 채택하고 반대투쟁에 전력으로 총궐기할 것을 다짐했다. 투쟁위원회 의장의 책임을 맡은 윤보선은 구국선언문을 낭독하였다.[7] 그리고 반일 및 혐일 인식이 짙은 일반 시민과 대학생들도 이에 동참하여 투쟁에 돌입하였다. 종교단체와 호국보훈단체들도 이에 동참하여 대일외교굴욕 철회운동을 하게 되는 등 해방 20년 만에 최대의 반일 시위가 시작되려는 순간이었다.

3. 시위상황


영상. 1964년 3월 24일, 서울에서 5000여 명의 대학생들이 한일수교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는 한편,이날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 8만여 명이 시위에 참가하였다. 이때 서울대학교 문리대생들은 교정에서 일장기를 불태우고 박정희와 한일 정상화에 동참한 김종필 인형의 화형 의식, 성토 의식 등을 열고 박정희 정권의 친일 매국 행위를 규탄한다는 시위를 벌이며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이는 간단히 진압당했고, 3월 30일 11개 대학의 학생대표들이 박정희 대통령을 면담하고 요구사항을 전달함으로써 일단 진정되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부가 한일회담을 계속 추진하자 4월 19일을 전후하여 학생시위는 다시 일어났고, 6월 3일에는 1만여 명의 학생과 시민이 시위에 참가하였다. 5월 20일 '민족적 민주주의' 의 장례식을 거행한다. 이는 박정희 집권 당시 내세운 명분이 민족적 민주주의였기 때문이다. 이 장례식의 조사를 맡은 사람이 바로 김지하다.[8] 당시 서울대 학생회장이었던 전 새누리당 국회의원 출신 김덕룡은 선언문을 낭독하며 단식농성에 들어갔고 이에 윤보선은 서울대를 찾아 그를 격려해 주기도 하였다.
그 외 각 대학에서도 반일의식을 가진 대학생들이 일장기와 일본수상 허수아비를 불태우고 박정희, 김종필 등 한일 국교정상화에 동참한 매국노 화형식을 거행하며 투쟁에 나섰다. 일부는 박정희, 김종필 등 이른바 친일 매국노 및 민족반역자 장례식을 거행하는 등 각지에서 반일시위가 격화되었다. 당시 서울대의 민족주의 비교 연구회가 주동적인 역할을 하였고, 전국적으로 운동권 학생들의 연락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당시 민비연의 김중태, 박재일, 현승일 등이 주도적 역할을 했고, 고려대의 최장집, 연세대의 정준성 등 각 학교의 운동권 학생들이 1963년 겨울부터 모여서 치밀하게 준비해왔기 때문에 전국적인 시위를 일으킬 수 있었다.
시위는 단식농성을 넘어 거리시위로 확산되었고 대학생과 시민 그리고 재야인사들이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나와서 '친일 매국 박정희 정권은 왜놈과의 국교정상화를 철회하라', '해방 20년 만에 제2의 경술국치의 치욕을 안겨줄 텐가', '국민을 무시하고 일제의 칼부림을 방조하는 사대매국정권은 물러가라' 고 외치며 반일 및 국교정상화 반대시위를 벌였다.
일부는 거리에서 박정희, 김종필 그리고 당시 일본 총리였던 이케다 하야토히로히토천황 인형을 불태우고 일장기를 불태우거나 찢어버리며, 박정희는 역사의 죄인이자 사대매국을 저지른 민족반역자이자 호국영령들의 충정을 무시한 사악한 인간이라며 비판하였다.

4. 계엄령 선포



대한뉴스 <수도 서울에 계엄령 선포> 보도.
반대 시위가 점차 전국적인 반정부 시위로 확산되자, 6월 3일 오후 8시 비상계엄령을 전국에 선포하고 경찰들외에 4개 사단병력을 서울에 투입하여 진압조치에 나섰다. 이와 동시에 일체의 옥내외 집회, 시위의 금지, 대학의 휴교, 언론·출판·보도의 사전검열, 영장 없는 압수·수색.체포·구금이 가능하며 통행금지시간 연장 등의 조치가 취해졌다. 이때 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하겠다는 박정희의 양해 요구에 미국은 협력하였다. 이로 인해 당시 시위를 주도한 학생운동권 학생과 정치인, 언론인 등 1,120명이 대거 체포되었고, 이 중 주도자 348명은 내란 및 소요죄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6개월 간 복역하게 된다. 나머지 재야 인사들도 반정부 혐의로 체포되는 등 진압이 강경해졌다.
이때 중앙정보부장이였던 김형욱이 박정희에게 강경한 대처와 함께 "각하 트럭 1000대를 징발해 주십시요. 학생주동자놈들을 무인도로 격리해 쥐도새도 모르게 해치우겠습니다" 라고 요청했는데 옆에 있던 법무장관 민복기가 "그건 초월적인 위법행위이고, 그랬다간 시위만 더 확산된다" 라고 반대하자 박정희는 "그래 그건 할 수 없다. 그 짓을 해서 전 국민을 적으로 만들겠다는 건가"? 라고 그만두었다.
참고로 이 시위의 주동자격 인물들은 훗날 제17대 대통령을 역임하게 되는 당시 고려대학교 상과대학 학생회장 이명박을 비롯해 중앙대학교 학생 이재오, 서울대학교 학생회장 김덕룡, 한광옥, 경기고등학교 학생 손학규 등 하나같이 이후 정계의 거물급 인사들로 성장하는 이들이었다. 특히 김덕룡과 이재오는 구속되는 선에서 끝난 게 아니라 학교에서도 제적당했다.
한편, 박정희는 항쟁이 격화되자 일본과의 국교정상화 필요성을 호소하며 일종의 극일을 하자는 요체의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하는데, 이는 원론적으론 타당한 말이었지만, 당시 분노한 대학생과 재야인사들의 반발을 누그러뜨리기에는 아무래도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이 문제는 국민들 사이에서도 주요 이슈가 되며 해방 이후 한동안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있던 반일 의식이 확 솟구치는 계기가 되었다.[9]
허나 이런 반발 속에서도 한일간 협의는 계속되었고, 결국 계엄령이 해제된 1년 후인 1965년 12월 한일 양국은 마침내 국교정상화에 합의하여 해방 20년 만에 외교 관계를 복원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승만정부 이래 15여년동안 끝없는 줄다리기로 이어지던 한일수교가 성립됐다.

5. 이후


한일수교 5년이 지난 1970년 6월 18일, 박정희 대통령은 '기시 노부스케'[10] 등 70여 명에게 '수교훈장 광화장'을 수여하였다.[11]
이 사건이 있은 후 대한민국 국회는 의정활동 본연의 업무와 관련하여 급기야 처음으로 피소당하기에 이른다(한일기본조약 비준 동의의 무효를 구하는 행정소송). 두 번째로 피소된 사건은 대중에게도 잘 알려진 선거구 상실 사태.

6. 평가


6.3 항쟁은 해방 20년만에 일본과의 국교정상화에 반대하는 반일 감정이 강한 국민들의 반발에서 나오게 된 항쟁으로 끝내 한국이 일본과의 수교하면서 성공적인 성과는 거두지 못하였지만, 해방이 된지 20년 만에 민중 사이에서 일어나게 된 반일 항쟁이었다는 평가가 있었다. 또한 이를 계기로 한국 국민들간의 일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과 혐오적인 인식이 전면으로 드러나게 된 계기가 되었으며 이전부터 일본의 문화잔재를 청산하자는 움직임이 주류였지만 이후로도 1998년 일본 문화 전면개방까지 한국 내에서 일본 문화 등에 대한 배척, 그리고 일상생활에서의 일본 잔재 청산 등으로 이어졌다.
예를 들어 1970년대엔 재일교포 출신의 사실상 일본인이었던 문세광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을 일으켜 영부인 육영수가 사망해 더욱 반일 감정에 불을 지폈고, 1980년대 주로 활동했던 운동권들 역시 일본 특히 우익에 매우 적대적이었다.
당시 시위에 참가한 이들 대부분이 '''2010년대 기준 60~70대'''로 이들은 지금도 일본 문화를 저질 문화, 하급 문화이자 어린애들에게 악영향을 주는 불온한 문화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 세대가 주로 보수 지지 성향이 강하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아이러니. 지금도 이 항쟁을 겪은 세대들은, 1998년부터 단계적으로 시행된 일본 대중문화 개방[12]으로 인해 많은 일본 문화가 합법적으로 한국에 유입된 후에도[13] 일본 문화에 대해서 부정적인 인식이 짙은 편이다.
1998년 일본 대중문화 개방 이후로는 오늘날의 대학생 및 젊은이들이 일본 문화에 대해서 이전 세대보다는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 경향이 짙고 일부에선 긍정적으로 보는 것과 비교하면 확실히 차이가 난다. 이러한 차이를 보이니 일본 현지 일부가 "'''오늘날 한국의 젊은이들은 친일(1번 항목)이 많고 (즉 비교적 일본에 우호적이고) 기성세대들은 반일혐일이 많다'''"라는 분석을 하기도 했다.
오늘날 10대, 20대들이 1998년 일본 문화 전면개방과 2000년대 들어서 인터넷의 급속한 발달로 일본 애니메이션을 쉽게 접할 수 있었거나 일본 만화 코스프레 등을 하는 것에서 본딴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것은 당연히 '''"일반화하기 애매한 문제로 젊은이들도 일본 싫어하는 사람들은 많이 싫어한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한 재일교포 평론가는 한국 정부는 좌든 우든 일본과 관계개선을 위해 많이들 노력해왔으나, 국민 정서가 아직은 여전히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평하기도 했다. 고로 개인간 우정이나 사회문화적 친근감을 가질 순 있지만, 정치역사적으론 아직 한일간 앙금이 많다고 보는 것이 좀 더 정확한 분석일 것이다. 다만 2010년대 들어서는 되려 한국에서 일본에 신경썼던 이전의 선례와는 다르게 일본쪽에서 한국의 유행이 어쩌니 한국의 XX가 문제니 하면서 한국에 대해 신경쓰는 경향이 강해졌는데 이는 일본의 위상 쇠락과 한국의 상대적인 위상 상승에 힘입은 것이 아닌가하는 분석이 많다. 사실 일본에서는 2002 한일월드컵 이전에는 한국에 대해서 몇수 아래로 생각하면서 깔보던 경향이 있었는데. 그러다 보니 한국내 반일감정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덜 신경썼던 것이지만 삼성전자, LG전자, 현대자동차 등 한국의 대기업들이 일본 대기업들을 앞지르고 한류가 퍼지면서 더 이상 무시못할 상대가 되자 부쩍 반일감정이 어쩌구 저쩌구하는 방송을 내보내는 것.
근데 애초에 한일 양국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볼때 이웃국가간 알콩달콩 지내는 경우가 드문 게 일반적이긴 하다. 한일 관계와 한중 관계가 특히 다투는 편이긴 하지만, 그 외 다른 나라들도 정치/경제적으로는 친하게 지내더라도 국민정서에서만큼은 으르렁거리는 경우도 많고, 심지어 진짜 별 시덥잖은 걸로 싸우는 경우도 많다. [14] 결국 이상을 방향성으로 추구하되 별개로 물리적 충돌이 발발하지 않을 정도의 국가간 관계를 유지하고 점진적으로 상호이해를 넓혀가는 게 외교의 현실적 목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일본 우익들의 역사수정주의에 대처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지만 말이다.

7. 관련 문헌


  • 역사다시읽기 5권: 한일회담 반대운동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5.
  • 한일협정반대운동(6.3운동) 사료총집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13.
  • 한일협정 50년사의 재조명 1~4권 - 동북아역사재단. 2012~2015.
[1] 6월 항쟁과는 다르다.[2] 뉴라이트 인사들이 공동 집필한 책인 반일종족주의에서는 한국의 반일민족주의가 1980년에 막 시작되었다고 적었으나, 이 6.3 항쟁만 봐도 얼마든지 반박이 가능하다. 이는 뉴라이트 인사들이 존경하는 정치인인 박정희한테 반일민족주의의 책임을 지우지 않으려는 얄팍한 거짓말이라고 봐야 한다.[3] 다만 정책 자체는 임기 내내 친일 정책 노선을 펼치며 일본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계속된 일본의 역사도발에 더 이상 참지 못했던지 독도 방문, 천황 사과 요구, 위안부 사과 요구를 무려 2012년 8월 12일, 14일, 15일에 연속으로 쏟아내는 등 임기 후반에는 대일 강경 노선으로 전환했다.[4] 당시 사정이 나았던 도시의 공식실업률만 30%였다. 이렇다보니 원조 농산물을 시장에 판 돈이 국가예산의 절반을 차지하던 시절이다.[5] 당시 한국은 다른 국가와는 대사급 및 영사급 외교관계를 활발히 맺으며 수교국을 증편하고 있던 때였다.[6] 이렇게 진행한 이유는 일본 정계의 의사결정 방식과 관련이 있었다. 의원내각제의 일본에서는 정계 실력자들의 합의에 따라 중요한 의사결정이 내려지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한일수교는 하루빨리 양국이 수교를 하여 공산주의 동맹에 대항하는 구도를 확립하고자 하는 미국의 의도가 강력하게 작용하여 거액의 자금을 지급하도록 만들었다.[7] 《외로운 선택의 나날들:윤보선회고록》 (동아일보사, 1991) 280p.[8] 후일담에 의하면 당시 김형욱 중정부장은 이 조사를 읽다가 "숨이 막혀서 더이상 읽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만큼 통렬한 글이었다.# [9] 다만 1965년 말 서울대에서 강연을 한 '14대 심수관(임진왜란 때 끌려간 도공의 후손)'의 인터뷰에 따르면, 당시 한일 국교정상화 반대로 대학가가 시끄럽던 때였지만 자신은 계란을 맞을 각오로 "당신들이 36년의 한을 말한다면 나는 360년의 한을 말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미래로 나아갈 수는 없는 것 아닌가”라고 강연장에서 말했다고 한다. 그러자 강연장은 일순 고요해졌지만 좀 지나자 누군가가 일어서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를 부르기 시작했고, 이후 모두가 일어서서 노래를 부르며 무대를 향해 걸어와 서로 껴안고 눈물을 훔쳤다고 한다.# 이런 일화를 보면 여론이 반일로 뭉쳤던건 맞지만 혐일이라고까지 표현할 정도였는지는 의문.[10] A급 전범이자 前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외할아버지. 1987년 작고.[11] 전범 행위자들에게 훈장을 주어서 안좋게 보이지만, 해당 일본인들에게 수여한 훈장은 '수교훈장' 으로, 이는 우방과의 친선에 공헌이 뚜렷한 자에게 수여하는 것이며. 이들에게 수여된 시점은 한일국교정상화 이후이며 전쟁 당시의 행적과는 별개로 보아야 하며 한-일 안보구도를 확립해 국익에 유리하게 작용한 공로가 있다.[12] 재일동포가 운영하던 위성 채널인 OSB 동양위성TV가 개국한 것도 이 때의 일이다.[13] 물론 1998년 전에도 음성적으론 일본 문화나 노래들이 제법 유입되긴 했다.[14] 일례로 중앙아메리카의 인접 국가들인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가 벌인 축구전쟁만 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