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 복음서
1. 개요
The Gospel of Judas
총 26쪽으로 구성된 문서로 AD 130년~170년경의 영지주의의 한 분파인 카인파(Cainites)에 의해 기록된 것으로 추측되며, 원래 본문은 그리스어(헬라어)로 되어 있었으나, 4세기 무렵 이집트에서 사용하던 콥트어로 번역되어 파피루스에 기록된 것이 발견되었다.
예수의 12사도 중 하나인 이스카리옷 유다에 관련된 기록들이다. 유다가 예수를 배신한 것은 메시아로서의 완성을 위한 예수의 안배, 혹은 밀명이란 내용을 영지주의적 시점으로 서술했으며, 서서히 부패하기 시작한 그리스도교의 개혁을 요구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2. 발견과 공개
1976년 이집트의 한 골동품 시장에서 발견되었으며 2006년 4월 6일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의해 복원,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등 세계 주요 언어로 번역되어 동시에 공개되었다.
그리스도교계에서 신학적인 점에서 의문이 제기되곤 했던[1] "예수는 왜 이스카리옷 유다의 배신을 방관했는가?"에 대해, 초대교회 시절 영지주의의 일부 분파가 어떠한 논리로 유다를 긍정했는지 보여주는 자료다. 특히 이 계열은 영지주의파 중에서도 소수였기 때문에 당시의 다양한 해석을 보여주는 역사적 자료다.
실물로 발견되기 전에도 이름은 알려져 있었다. 성 이레네오 주교가 행한 이단논박에서 "유다에 대한 기록(유다복음)은 터무니없는 거짓이다."라는 식으로 언급한 기록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애당초 유다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은 매우 대중적이었다. 예수를 예언자로 생각하든 하느님으로 생각하든, 예수를 높이 받드는 사람이라면 배신자를 좋게 생각하지 않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거꾸로 "유다야말로 진정한 사도임!"이라고 주장한다면 대다수 사람들이 거부할 것은 당연한 일. 실제로 영지주의파에서도 이쪽 계열은 세력이 매우 약한 계파로, 실제 영지주의의 기반인 발렌티누스파가 최대 계파인 시절의 일이므로 사실상 이는 기존 영지주의와도 분할되는 분파운동이다. 다수 영지주의파는 바오로의 후계를 주장했었던 정치적 입지가 있었으니, 당연히 이 주장은 묻힐 수밖에 없다. 즉, 누가 예수의 진정한 제자냐... 라는 주장을 함에 있어서 베드로 vs 바오로가 있는데 여기에 유다가 낀 거다.
그러니 결국 카인파라는 가상의 분파까지 만들어서 까야 했던 것이 사실, 결국.... 후대 사가들은 카인파와 시몬 마구스 역시 모작으로 보는 견해이므로 당연하겠지만, 이것은 카인파가 쓴 것이 아니었다는 것은 거의 기정사실로 보고 있다. 단지, 사료로서의 가치를 보자면 당시 로마 교구의 권한에 대해 신학적인 반론을 제기하는 무리가 있었다는 정도가 이 서적의 가치가 될 것이다.
다만 오해와는 달리, 유다복음을 지지하던 계파가 주류 신자들의 탄압을 받았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당시 이스카리옷 유다를 호의적으로 해석하는 공동체는 영지주의 중에서도 철저한 소수였고, 이 정도의 소수 계파에 대해서 기독교는 탄압을 할 역량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2]
쉽게 말해서 이 계파는 탄압을 받은 게 아니라, '''그냥 묻혔다'''
3. 내용
3.1. 복음서의 형태로 기록된 내용
복음서의 형태로 기록된 내용은 이러하다. 예수의 12사도 중 이스카리옷 유다가 다른 사도들에 비해 훨씬 더 우위에 있다는 내용으로 종말과 천국에 대한 이야기를 거론한 뒤, 유다에게 "너는 나머지 11명을 능가할 것이다. 유다, 너는 인간의 형상을 빌려 이 땅에 온 나를 희생시킬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대화를 기록하여 '''유다의 배신이 예수의 지시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으며 죽음에서 부활로 이어지는 예수의 메시아적 완성이 유다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주장'''이 들어있다.
3.2. 동성애적 내용에 대한 논란
내용 중 세마포를 두른 흰 피부를 가진 소년[3] 에게 예수가 '''천국의 비밀'''에 대해서 알려준다는 부분이 있어 동성애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이러한 주장을 펼치는 이들은 유다복음만이 세마포를 두른 소년과 예수가 1대1 면담을 나누었다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데, 계파가 다른 영지주의 저작에서는 마리아를 상대로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유다복음서를 쓴 계파로서는 성적인 의미 없이 그저 '''이해할 수 없는 깊은 신비'''를 논하는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3.3. 카인파 = 동성애?
유다복음을 작성한 영지주의자가, 육체적인 탐닉과 쾌락에 대한 추구는 살아가는 요소이므로 부정할 수 없다는 의견을 표한 카인파의 인물이라면 '유다복음=등짝'이 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유다복음을 작성한 계파가 육체적 쾌락을 긍정한 분파였다고 해도, 성적인 교합은 단지 쾌락을 맛보는 것으로 끝나지 않기 때문에, 단순한 동성애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이 문서에서 등짝이라고 표현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으로, 정확하게는 '유다복음서에 동성애를 긍정하는 시선이 있느냐 여부'라고 해야 정확하다.
4. 영향
엄청난 금서로 알려진 이름값에 비해 알려진 영향을 끼친 부분은 '''없다'''. 학술적인 의미에서 영지주의 사상들의 양태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야 중요하지만 단지 그뿐이다.
최초 공개 당시 자극적인 형태의 보도를 등에 업고 공개되어 보도가 끊기자 관심이 식었다. 초대교회에 있었던 여러 분파들이 남긴 문서들 중 하나일 뿐이며,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전하는 것도 아니다.
5. 분류
기독교에서는 그냥 위경으로 분류한다. 위경 중에서도 영지주의 계열 문서로 구분한다.
한국인 기독교도가 운영을 담당하는 시설의 경우, 대표적으로 방학중에 운영되는 여름성경학교 등에선 위경 즉, 가짜라고 일축하거나, 언급하여도 '사탄의 성서'라며 내용 자체를 알 필요도 없으며 읽기도 하지 말라 권고하기도 한다.
내용 자체가 다른 정경과 많이 다른 이야기를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과 신성(神性)의 결합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느님이자 동시에 참 인간'이라는 그리스도교의 주장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어 제대로 된 복음서로 분류될 일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사실 '어느 문서가 정경이냐'는 명확한 기준은 사실 오늘날에도 그리스도교의 각 종파마다 입장차이가 존재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70인역 성경, 397년의 카르타고 공의회[4] 등에서 채택된 정경목록을 베이스로 각 교파의 해석에 따라 몇몇 경전을 빼서 채택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기존의 정경(특히 복음서)과 상당한 내용적 모순을 보이고 있는 유다복음이 정경으로 채택될 이유는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물론 현재의 4대 복음서도 내부적으로는 서로간에 모순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 내용들은 전체적인 맥락에서는 일치하는 형태를 보이며,[5] 초기에는 필사와 구전에 상당수 의존했음을 감안한다면 어느정도 용인될 수 있는 부분이다. 이러한 면모에서 본다면, '어느정도의 모순은 있으나 맥락적으로는 일치하는 4개의 문서'와 '앞의 4개 문서와는 맥락적으로 완전히 따로놀다가 소리소문 없이 묻혀버린 별개의 문서'를[6] 같은 카테고리에 묶기에는 상당히 무리가 있으며, 그렇기에 유다복음은 정경으로 채택되지 않고 있다. 차라리 4대 복음서를 모조리 위경으로 떨어트리고, 유다복음만을 참된 정경으로 인정한다면 모를까(...)
6. 유다복음의 가치
유다복음의 가치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영지주의 계열 소수분파의 주장을 담은 원사료라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영지주의는 분파가 많았고, 그중 세력있는 분파의 주장 정도나 문서로 많이 남았다. 당연히 연구도 이런 큰 종파에 맞추어질 수밖에 없다. 소수파가 직접 남긴 문서가 영지주의 내부 연구에 큰 도움이 되리라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참고로, 영지주의 연구의 핵심은 '''무수히 분파가 많은 영지주의 분파별 주장을 꿰뚫는 공통점을 짚어 체계화하는 것'''이다. 즉 영지주의라는 말로 묶여있기는 하지만, 사실은 별개의 주장을 하는 전혀 다른 계파들을 영지주의라는 말로 묶어둔 것. 따라서 이 항목에서 서술되고 있는 계파와 대표적인 영지주의 계파인 발렌티누스 주의를 '영지주의'라는 공통점으로 묶기에는 차이점이 매우 많으며, 완전히 별개의 계파라고 알고 접근하는게 훨씬 안전하다. 그렇기에 유다복음을 가지고 '당시 영지주의자들은 이러이러 했겠군'이라고 보는 것에는 상당히 무리가 있으며, 냉정하게 말하면 이들의 주장은 초대 교회 내부에서는 엄연히 '듣보잡'에 속하던 논리이다. 단지 '유다를 으뜸으로 치는 계파도 있다' 혹은 '로마 총대주교(교황)의 수위권에 불만을 제기하던 신자들도 있다'는 정도의 의미가 이 문서에 내포되어 있을 뿐이다.
[1] 이 문제 자체가 뜨거운 감자 수준의 논쟁은 되지 않았다.[2] 기독교에 대한 로마 제국의 공식적 박해가 중지된 건 313년으로, 유다복음이 집필된 것으로 추정되는 시기보다 약 200년은 후의 일이다. 물론 313년에 밀라노 칙령이 발표되기 전에도, 기독교는 이미 로마 내부에서 어느 정도 신자를 확보한 상태였고 마냥 소수 종교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유다복음의 지지층을 탄압할 정도의 역량 같은 건 있지도 않았다. 애초에 기독교가 그럴만한 역량을 기대하려면 적어도 4세기 후반은 돼야 하는데, 유다복음의 추정 저술시기보다 300년 정도를 더 기다려야 한다.[3] 공관복음서에는 "세마포를 두른 청년이 잡혀가던 예수 가까이 왔으나 붙잡히자 세마포를 버리고 도망쳤다"는 대수롭지 않은 에피소드 정도로 기록됐다. 유다복음의 저자가 공관복음서에 나온 이 청년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4] 카르타고 공의회를 기점으로 정경이 만들어졌다는 이상한 주장도 있지만, 카르타고 공의회는 어디까지나 정경목록을 채택한 공의회일 뿐이다. 신약성경의 핵심이 되는 4대 복음서는 모두 AD 1세기에 쓰여졌고, 가장 늦게 집필된 것으로 추정되는 요한 복음서도 AD 1세기 후반에 집필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5] 물론 예수라는 인물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유다복음과 4대복음을 모두 같은 카테고리로 묶는 선택지도 있으나, 예수/역사 항목에서 보듯이 예수(혹은 모델이 된 인물)라는 인물의 존재 자체는 (신성은 별개로 치더라도) 학계에서 부정되지 않고 있다.[6]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유다복음을 사용하던 계파는 탄압받은게 아니라 말 그대로 조용히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