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고등학교

 



'''한성고등학교
漢城高等學校
Hanseong High School
'''
[image]

<colbgcolor=#019257> '''개교'''
1928년 9월 25일
'''유형'''
일반계 고등학교
'''성별'''
남자고등학교
'''운영형태'''
사립
'''학교법인'''
한성학원
'''교장'''
이운용
'''교훈'''
습관은 의지보다 강하다.
좋은 습관을 들이자.[1]
'''교화'''
개나리
'''교목'''
주목
'''관할 교육청'''
서울특별시교육청
'''주소'''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북아현로3길 24
'''홈페이지'''
'''홈페이지'''
1. 개요
2. 역사
3. 시설
3.1. 본관
3.2. 신관
3.3. 문무관
3.4. 다목적실
4. 교통 및 주변시설
5. 출신 인물
6. 설립자 김주익
7.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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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북아현동에 위치한 일반계 고등학교.
서울의 옛 지명인 한성이라는 이름을 학교 이름에 넣은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굉장히 역사가 오래된 학교'''이다. 말인즉슨 서울에 한성이라는 이름을 쓴 학교가 없을 정도로 예전에 세워진 학교라는 뜻. 다만 현재의 경기고등학교가 1900년 처음 세워질 당시에는 한성고등학교라는 이름으로 세워지긴 했다. 이후 일제강점기 때 경성제1고등보통학교라는 이름으로 바뀌는 바람에 한성이라는 이름을 이 학교가 가져갔고 경기고의 이름이 바뀔 때 한성이라는 이름을 쓰지 못하게 된 것.
이름이 비슷한 한성과학고등학교와 착각되는 굴욕을 다소 겪기도 한다. 설립은 한참 후배이지만 인지도면에서는 아무래도 한성과고가 더 유명하기 때문.
같은 한성재단의 한성중학교와 함께 태권도부가 굉장히 유명하다. 1975년에 정식창단해 수많은 전국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고, 국가대표 선수들도 배출해낸 명문으로 평가받는다. 전국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태권도 유학생들이 오기도 한다. 학교에서 배출한 태권도 관련 유명 인사로는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 금메달리스트 이대훈이 있다.

2. 역사


1928년 일제강점기 당시 김주익이 독립관 터에 개교한 경성실업전수학교를 그 전신으로 하며, 광복 이후 6년제 한성중학교를 거쳐 6.25 전쟁 중 한성고등학교가 분리되어 지금에 이른다.
1928년 9월 25일
경성실업전수학교(3년제) 개교
1933년 3월 24일
설립자 김주익 교장 취임
1935년 4월 3일
송현동 교사로 이전
1936년 3월 20일
한성상업학교(3년제)설립 인가, 경성실업전수학교 폐교
1941년 7월 29일
북아현동 현 교사 준공 이전 및 3.1계단 설치
1945년 11월 30일
인문계 한성중학교(6년제)로 전환
1948년 6월 11일
재단법인 한성학원 설립 인가
1951년 9월 1일
한성중학교(3년제), 한성고등학교(3년제)로 분리
1951년 9월 6일
부산 광복동 3가 용두산에 전시 가교사 개교
1956년 11월 1일
별관 준공
1958년 10월 31일
개교 30주년 기념, 기념관 준공
1968년 9월 25일
개교 40주년 기념 3.1기념탑 건립
1974년 7월 15일
재단 단일화
1975년 9월 1일
태권도부 창설
1976년 6월 28일
문무관 준공. 체육관 개관
1982년 2월 28일
신관 준공
1998년 9월 25일
개교 70주년
2001년 12월 14일
2000~2001 학교평가 우수학교 선정
2008년 3월 1일
개교 80주년 기념 교훈 변경
2009년 7월 24일
다목적실 준공
2011년 12월 1일
교과부 발표 '잘 가르치는 학교' 전국 100대 고교에 선정
2013년 12월 27일
2013학년도 학교체육활동 우수학교 교육감 표창
2014년 2월 28일
2013학년도 학교평가 우수학교 교육감 표창
2016년 3월 15일
2015년 실시 대학수학능력시험 운영 우수학교 교육부장관 표창
2018년 9월 25일
개교 90주년. 제28회 용인대 총장기 단체전, 제20회 광주 5.18 전국 태권도 대회 고등부 종합 우승
2019년 9월 25일
개교 91주년. 제29회 용인대 총장기 단체전, 제17회 우석대총장기 전국 태권도 대회 고등부 종합 우승

3. 시설


고등학생이 쓰는 건물은 크게 네 개로 나뉜다. 운동장은 소운동장과 대운동장으로 나뉘어 있으며 대운동장에는 축구장, 농구장 등이 자리잡고 있다. 다만, 소운동장은 말이 소운동장이지 교직원 및 교사들의 주차장처럼 쓰인다. 이는 역사가 상당히 오래된 학교다보니 제대로 된 주차시설이 있을리가 만무하며, 일반계 고등학교 특유의 예체능 경시풍조로 운동장을 쓸일이 거의 없기 때문. 물론 옛 학교다보니 설립 당시에 땅 걱정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크고 우람한 대운동장만으로도 어지간한 체육 활동과 행사를 다 진행할 수 있으므로 남는 소운동장을 주차장 용도로 쓰는 것이기도 하다.
2000년까지 신관만 빼고 전 건물에 화장실이 없었고 전부 실외화장실이었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 화장실 전용 건물이 존재하고 있는 것은 그때의 흔적.
대운동장은 한성중학교와 공유해서 사용한다.

3.1. 본관


[image]
'''본관'''
구교문 기준 왼쪽, 신교문 기준으로는 오른쪽에 위치한 3층 건물이다. 고3 이과가 2층, 문과가 3층을 사용한다.
한성고등학교의 본진이라 할 수 있으며 실제로 중학교+고등학교를 포함한 한성학원 부지 정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그에 걸맞게 중학교 및 고등학교 교장실, 행정실이 들어서 있다. 당연하겠지만 건물 자체는 일제강점기인 1941년에 지어졌기 때문에 상당히 노후화되어 있으며 목재 건물이기 때문에 방재에 취약하다는 단점을 안고 있는 건물이다. 목재 바닥이 상당히 삐걱거리기 때문에 이로 인해 소음이 자주 발생한다.
이 건물 지하에 지하실이 있는데 여기서 쓰레기를 소각하기 때문에 수업하는 3학년생들이 탄내를 맡게 되는 경우가 자주 있다.

3.2. 신관


[image]
'''신관'''
이름은 신관이나 1982년에 지어졌기 때문에 준공 후 30년이 넘어가는 옛 건물이다. 하지만 본관보다 규모가 크기 때문에 학교의 여러 시설이 들어와 있다. 1, 2학년생들이 이 건물을 공용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교무실, 생활지도부, 보건실 등이 이 곳에 자리잡고 있다. 신관 5층에는 강당이 자리하고 있으며 여기서 입학식이나 졸업식 같은 굵직한 행사들을 진행한다. 건물 자체가 언덕과 접해있기 때문에 1층과 2층에도 외부와 연결되는 출구가 있으며 대운동장과 신관을 편리하게 왕래할 수 있다.
명목상 맨 아래층은 지하지만 이는 학교 부지 자체가 경사진 언덕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으로 실질적으로 1층이나 다름없다. 실제로 위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지하층에 뚫린 출구는 소운동장과 맞닿아있다. 맨 아래층 가장 좌측에 폐지를 버리는 공간이 있다.
예전에는 테니스장이 있었던 곳이었다. 허나 이를 철거 후에 신관을 준공했다.

3.3. 문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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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관'''
1층에는 매점과 급식실이 있다. 또한 매점 반대편에는 음악실이 있다.
2층부터는 구조가 조금 복잡해지는데, 일명 야자실이라고 불리는 자율학습실과 도서관, 미술실이 있다. 도서관과 야자실은 연결되어 있긴 하나 문을 열어 놓지 않아 사실상 분리되어 있다. 2층에는 운동장과 연결되는 입구가 2개 있는데, 운동장과 가까운 쪽 입구는 야자실과 연결되어 있고 먼 쪽 입구는 미술실, 도서관과 연결되어 있다. 이때 건물 내부로는 입구와 입구를 연결해주는 통로가 따로 없기 때문에 잘못 들어갔다면 반드시 운동장으로 다시 나와서 가거나 1층으로 내려가 급식실을 가로질러 가야한다.
3층은 실내체육관인데 체육관 바로 아래가 야자실이기 때문에 오후 4시 이후에는 이용이 제한된다. 체육관의 시설은 좋지 않다는 평가를 많이 받는데, 특히 농구를 좋아하는 학생들의 불만이 많다. 바닥이 다 꺼져서 공이 잘 튀지 않고, 굉장히 미끄러워서 자칫하다간 발목이 나가는 수가 있기 때문이다. 2010년 12월 26일 진행된 오늘을 즐겨라 태권도 특집이 여기서 촬영되었다.

3.4. 다목적실


2층에는 다목적실이 있다. 이곳에서 각종 입시나 전공설명회, 대의원회의 등 많은 인원을 수용할 필요가 있을때 사용한다. 지하에는 중학생 태권도부 연습실이 있다. 어학실도 여기에 존재한다. 2학년에 제2 외국어로 일본어를 고른 학생들은 이 건물에서 수업듣는다.
다목적실 바로 옆이 분리수거 하는 곳이다.

4. 교통 및 주변시설


교통 면에서는 흠 잡을 것이 없는 위치로 2호선아현역이 학교와 3분 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아현역 버스 정류장에서 강남역, 청량리, 김포시, 일산신도시, 인천광역시 등으로 가는 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
  • 버스
한성고교(13567)
서대문05, 서대문06
북아현동주민센터(13871)
서대문05, 서대문06
아현역(중)(13044, 22062)
171, 172, 270, 271, 273, 472, 602, 603, 700, 707, 721, 751, 7011, 7017, 7611
1100, 1101, 1300, 1301, 1302, 1601, 1004, 6002, N26, N62
아현역(중)(14068, 23078)
171, 172, 270, 271, 273, 472, 602, 603, 721, 751, 7011, 7017
1100, 1101, 1300, 1301, 1302, 1601, 1004, 6002, N26, N62
반면 주변 시설은 열악한 편이었는데 과거에는 학교 근처 시설이 상당히 낙후되어 있어 시장과 골목상권이 형성되어 있었고 그마저도 80년대를 연상시킬 정도로 오래된 건물들이 대다수였다. 따라서 학생들이 즐길거리를 찾기 위해서는 충정로나, 아니면 이대 근처까지 걸어갔어야 했었다. 심지어 학교에서 5분도 걸리지 않는 위치에 유흥업소들이 즐비하였는데, 일명 개미굴이라고 불리는 집창촌까지 형성되어 고가도로 철거 전까지 성업하였다.
현재에는 일대가 뉴타운 개발로 완전히 달라져 전혀 다른 동네가 되어 있다. 예전에 졸업했던 동문이 다시 찾아오면 같은 곳이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교문의 위치도 달라졌으며 사실상 아파트 내부에 학교가 들어서있는 형태로 바뀌었다. 유흥상업지역과 맞닿아 있었던 예전과는 달리 근방이 주거지역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학교 주변 시설은 상당히 개선된 편.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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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2017년
'''두 사진은 같은 곳을 촬영한 사진'''이다. 2010년 사진에서 좁은길로 난 골목이 한성고로 향하는 언덕길이었으며 과거에는 이쪽을 통해 구교문으로 학교에 들어왔지만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이 길이 사라져버렸다. 때문에 현재는 구교문이 폐쇄되고 신관 근처에 신교문이 들어서있다. 얼마나 달라졌는지 알 수 있는 부분.

5. 출신 인물


가나다순으로 정렬해주시기 바랍니다.
나무위키에 등재될 정도의 저명성 있는 인물만 기록 가능합니다.

6. 설립자 김주익


설립자 김주익과 관련해 친일 의혹이 있었다. 일본식 이름인 금본헌명이라 창시개명했고, 조선교육회 기관지 <文交의 朝鮮>의 특집기획인 ‘징병제도 실시의 감격’이라는 특집기획에 글을 쓴 교장 4명 중 한 사람이다. 다만 친일인명사전에는 등재되지 않았고, 창씨개명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당시에는 좋든 싫든 학교 운영과 같은 사회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개명이 필수였기 때문에 이것만으로 친일이라고 보기에는 근거가 부족하다.
김주익의 생애에 대해서는 상세히 알려지지 않았다. 북청면[2]에서 태어나서 1928년에 개교한 경성실업전수학교를 1933년에 완전히 인수하고 이는 한성중고등학교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교장직을 맡기도 했다. 마침내 1941년 현 북아현동의 부지에 학교를 세우게 되는데 이 때 현 본관을, 2층까지만 짓게 된다.[3] 본관 3층이 생긴 것은 6.25 전쟁 후의 일이다. 아무튼 이후 전쟁이 발발하고, 한성학교는 부산에 임시 학교를 개교했지만, 김주익은 '''북한으로 간다'''. 이에 대해 학교측은 납북이라 주장하지만 납북의 근거가 희박하며, 사실상 자의적으로 월북을 했다고 봐야한다.
월북했기 때문에 국내에는 휴전 이후 활동 기록이 없으며, 따라서 김주익과 관련해 많은 자료가 남아있지 않은 상황이다. 그의 사망시기에 대해서는 설이 갈리는데 학교측은 사망시기 미상이라 주장하고 있는 상황이다. 북한에 관련 자료가 남아있을 수 있긴 하지만 역사에 기록될 정도로 위대한 사람까지는 아니었으므로 관련 연구는 없고, 관련인인 김성숙 이사나 김병호 이사장이 회고록이라도 쓰지 않는 이상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아래는 해방 이전 국내에 존재했던 '동양극장'의 역사에 김주익이 언급된 부분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시 한성고등학교 재단 이사장이었던 김주익이 고세형이라는 인물을 내세워 저당권자와 직접 동양극장의 매매를 결정해 버림으로써, 최독견은 벌여놓았던 사업들을 채 수습할 시간 여유도 없이 19만원이라는 거액의 돈을 부도내면서 어처구니없이 동양극장을 내놓을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던 것이다.

최독견이 19만원이라는 거액을 부도내게 된 것은, 호탕하고 대범한 성격의 소유자인 그가 극장을 경영하는 과정에서 배우와 극작가들의 생활을 보장해 주기 위해 무리를 해가면서도 철저하게 월급제를 실시했고 중요한 인물들에게는 요리집에 외상까지 터주는 등 낭비와 사업의 규모가 확대되어 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최독견 자신은 극장 앞길 건너에 이왕직 소유의 조그만 건물을 월세로 빌려 사무실 겸 숙소로 쓰면서 배우 차홍녀와 동거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채권자들은 곧 청산위원회를 조직하여 소송을 제기했으나 최독견 개인에게 그런 엄청난 부채를 갚을 만한 재산이 있을 턱이 없었고, 그가 곧 차홍녀에게만 알린 채 만주 안동의 중국촌에 은둔해 버림으로써 채권단은 흐지부지 해산하고 말았다.

《우리극연극 6, 김미도, 동양극장의 재조명 중 동양극장과 임선규》 출처


7. 여담


8학군이 아닌 이상에야 여느 일반계 고교들이 다 그렇지만 학교 아이들은 공부하는 사람 30%에 노는 놈들 70%다. 특히 문과가 심각한데 수능 한 달 전부터는 한 반에 다섯 명 이하가 남는다(...). 그럼에도 인근 학교와 비교했을 때 준수한 진학률을 자랑하며 서울대 등 명문대를 계속 보내왔다.[4] 적어도 공부를 하고자 하는 의욕이 있다면 어느 정도 공부할 만한 환경은 갖춰져 있다. 1981학년도에 서울대학교에 42명을 진학시켰다. 1981학년도 주요 고교 서울대 합격자수.JPG
2010년 즈음부터 인근 인창고등학교, 중앙여자고등학교와 연계하여 상위권 학생들 간의 별도 수업을 진행한 적이 있다. 일명 '한중인 연합수업'.
학교에 교복이 없다. 일반고 중 몇 안되는 '''교복이 없는 학교'''로 인근 학교 학생들의 은근한 부러움을 사기도 한다. 중학교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한성중-한성고 테크트리를 밟는 학생들은 교복을 입어볼 기회가 일절 없다. 그래서 한성고에 두발규제 역시 없다고 생각하는 타 학교 재학생들이 있는데, 두발규제는 일단 학칙상에는 존재한다. 그러나 거의 사문화되어 있다 봐도 무방하다(...). 학기 초에나 반짝 검사하고(그러나 이 때도 학칙 이행을 강제하지는 않는다)이후에는 흐지부지되는 게 일반적.
교복이 없다는 말은 결국 어떤 옷을 입고 오든 간에 상관 없다는 의미인지라 신입생들은 대개 옷을 잘 꾸며 입는 편이다. 그러나 어차피 남고라 패션에 신경쓸 이유가 없다는 것을 대부분 2학년이 되기 전 깨닫게 된다.
따로 학교 축제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유에는 '남고 축제 특성상 반응이 별로일 듯하여', '학교의 면학 분위기를 위하여' 등등 몇 가지 설이 존재한다. 심지어는 '원래 한성고에는 축제가 있었고, 축제 구경온 동네 아저씨들이 교내에서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는데 재학생들이 옆에서 같이 낮술을 먹다가 아저씨들과 시비가 붙어서 패싸움을 하는 바람에 폐지됐더라' 하는 쌈빡한 설도 있다. 예전에 럭비부가 존재하던 시절 축제 때 럭비부 학생들이 술을 먹고 인근에 있는 인창고등학교 배구부에 쳐들어가서 배구공을 모두 훼손한 이후 없어졌다는 설도 있다. 당시 인창고를 습격한 이유가 같이 배구부가 있는 중앙여고 애들이랑 친해서 질투심이었다는 설도 있다. 다만, '''실제로는 학교 내에서 여는 축제 자체가 처음부터 없었다'''. 위 설들은 다 설들일 뿐이다. 정확히는 옛날에 축제를 수련회와 병행하여 소소하게나마 학생들이 직접 준비하여 열었었으나, 이마저도 사라지게 되면서 축제 비스무리한 것도 열지 않게 되었다.
축제가 없는 것과 별개로 체육대회는 존재한다. 이른바 이사장배 체육대회로, 매년 4월 중순부터 각 학년 별 예선, 5월 중간고사가 끝나고 스승의 날에 각 학년별 결승 및 사제 축구 경기로 마무리된다. 종목은 1학년은 축구, 2학년은 족구, 3학년은 농구이며, 이외에도 학급별 릴레이 계주와 단거리 경기도 펼치곤 한다. 과거에는 씨름도 종목에 있었으나 현재 씨름은 사라졌고 축구와 족구만 진행한다. 하이라이트는 교사와 학생 간 벌어지는 사제 축구 경기로, 매년 볼거리가 나오기도 한다.
현 학교 이사장은 김병호이다. 설립자 김주익의 친아들. 1928년부터 1950년 까지는 김주익이 이사장직을 맡았고, 사임 사유는 '사망'이라고 적혀있다. 1950년부터 1973년까지는 김주익의 처인 김성숙이 이사장직을 맡았고, 사임 사유는 임기 완료. 그리고 1973년부터 현재까지 김병호가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하지만 김성숙은 이사장직 임기를 끝마친 뒤에도 이사로 남아있었다. 그러니 이사장 일가가 설립 이례로 학교 이사직을 독점해온 것인데, 교육청 감사 결과 우려하는 문제는 없다고 한다. 그리고 재학생들은 알겠지만 이사장에게 영향을 받을 기회가 전혀 없기 때문에 어느정도 신빙성 있는 감사 결과라 할 수 있다.
김병호 이사장은 우파 성향을 보인다. 2016년에 '정의구현사제단 비판', '사드 배치 찬성' 등 우익 성향의 글을 잡지에 기고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일반 학생이 접하기에는 해당 글이 기재된 잡지가 너무 마이너하고, 이사장이 참석하는 학교 행사에서도 별다른 발언을 하지 않으며 이사장이 학업이외에 학생들에게 관여할 일이 없기 때문에 학생들이 이사장에게 영향받을 일은 거의 없다. 기껏해야 학년말 배포되는 교지 「한성」의 마지막 몇 쪽에 이사장이 쓴 글이라고 소개되는 것으로 끝. 즉 이사장의 존재 자체가 학교 생활 중 체감하기 힘든 부분이니 학생이 이에 영향받을 걱정은 전혀 하지 않아도 된다.

[1] 옛 교훈은 한문식 교훈인 '義基, 勤檢(의기 근검)'이었지만 너무 딱딱하고 구시대적이라는 말이 나와 문장 형태의 교훈으로 바꾸었다.[2] 1931년에 북청읍으로 승격[3] 이 때 돈을 들여 백두산에서 목재를 사왔다는 말이 있지만, 학교 전설로 으레 전해지는 일화 같은 것으로 파악되며 신빙성은 낮다.[4] 서울대의 경우 대부분 이과에서 가지만 2012년에 근 10년만에 문과에서 서울대 합격생이 배출되는 등 최근에는 격년에 1~2명씩은 배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