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회(1685)

 

'''도정궁의 역대 주인'''
7대 이세정
[1]

'''8대 이명회'''

9대 이형종

'''도정궁 7대 사손'''
'''이명회
李明會'''

'''본관'''
전주(全州)
'''이름'''
명회(明會)
''''''
제숙(際叔)
'''생부'''
이세정
'''생모'''
정부인[A] 청송 심씨(靑松 沈氏)
'''부인'''
정부인 평산 신씨(平山申氏)
'''자녀'''
3남 2녀
'''생몰
기간
'''
'''음력'''
을축년 1월 15일 ~ 정미년 12월 13일
'''양력'''
1685년 2월 17일 ~ 1728년 1월 12일
1. 개요
2. 생애
3. 사망
4. 가족과 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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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왕족 출신 문신. 도정궁 제7대 사손이자 제8대 주인이다.

2. 생애


양력 1685년(숙종 11년)[2] 2월 17일[3]한성부 서부 인달방 이홍일 자택에서 덕흥대원군 7대 사손 이세정과 정부인 청송 심씨 사이에서 적2남로 태어났다. 1718년(숙종 44년)에 식년시[4] 생원에 급제하여 진사를 지내고[5] 정릉의 참봉일을 맡던 중 아버지 이세정의 과옥(科獄)[6]에 엮여서 사헌부의 지탄을 받았다.
1722년(경종 2년)에 일어난 임인사화 때 작은할아버지 이홍술과 형 이명좌가 처형당했다. 남은 일가마저 뿔뿔히 흩어졌으며 그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전라도 부안현 위도로 귀양갔다. 사실 임인사화는 경종 시기 소론 측에서 노론을 찍어내리려는 무고에 가까웠다. 그래서 영조가 즉위하고 1년 뒤인 1725년(영조 1년) 3월에 연좌받았던 친족들이 전부 신원받았고 그도 한성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형 이명좌 대신 덕흥대원군제사를 받드는 도정궁 사손이 되어 돈녕도정(敦寧都正)에 제수받았다. 이후 잠깐 형 이명좌의 후사로 도정궁의 대를 잇게 했으나 최종적으로는 이명회와 그의 후손들로 잇게 했다.

3. 사망


양력 1728년 1월 12일[7] 향년 42세로 별세했다. 이조참판(吏曹參判)으로 추증받았고 훗날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재추증받았다.

4. 가족과 후손


정부인 평산 신씨 사이에서 1남 1녀를, 이름 모를 후실에게서 2남 1녀를 낳았다. 이후의 가계는 이형종(1706) 참조.

[1] 단락 참조.[A] 사후 추증.[2] 숙종은 이명회의 아저씨 뻘이다. 즉, 이명회는 경종, 영조와 같은 항렬이다.[3] 음력 1월 15일.[4] 式年試. 조선시대에 3년마다 정기적으로 시행된 과거 시험.[5] 형 이명좌는 3년 뒤에 급제.[6] 항목 참조.[7] 음력 정미년(영조 3년) 12월 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