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정(1661)

 

'''도정궁의 역대 주인'''
6대 이홍일

'''7대 이세정'''


8대 이명회[1]

'''도정궁 6대 사손'''
'''이세정
李世禎'''

'''본관'''
전주(全州)
'''이름'''
세정(世禎)
''''''
국경(國卿)
'''생부'''
이홍일
'''생모'''
정부인 기계 유씨(杞溪 兪氏)
'''부인'''
정부인[A] 청송 심씨(靑松 沈氏)
'''자녀'''
5남 3녀
'''생몰
기간
'''
'''음력'''
1661년 10월 18일 ~ 1721년 6월 30일
'''양력'''
1661년 12월 9일 ~ 1721년 8월 22일
1. 개요
2. 생애
3. 사망
4. 가족과 자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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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왕족 출신 문신. 도정궁 제6대 사손이자 제7대 주인이다.

2. 생애


1661년(현종 2년)[2] 10월 18일에 응천부정 이돈차남인 이석한의 장남 이홍일과 부인 기계 유씨의 첫아들로 태어났다. 11살에 아버지 이홍일이 아들없이 죽은 큰할아버지 이정한양자로 입적하여 도정궁 사손이 되었다.
이른 나이에 사마 양시[3]에 급제한 이후 1699년(숙종 25년) 수백 년간 왕으로서의 대우를 못받던 단종의 사후 복위를 경축하기 위한 증광전시[4]에서 병과(丙科)에 급제하였다.
그런데 안좋은 사건이 터진다. 시험 당시 시험지를 바꿔치고 용병을 바꿔 세우는 등의 부정행위가 드러났으며, 소나기 온 김에 대청소한다고 이참에 예전 과거 시험에서의 부정까지 모조리 적발하여 많은 사람들이 처벌 받은 일이 생긴 것이다. 이를 '기묘과옥(己卯科獄)'이라 한다. 이세정도 여기에 엮여서(...) 1700년(숙종 26년) 평안도 의주부로 쫓겨 가 군역을 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와서 다시 참봉으로 관직 생활을 재개하였고, 직장(直長)을 거쳐 대원군 적장손 자격으로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을 지냈다.

3. 사망


1721년(경종 1년) 6월 30일에 별세하였다. 향년 60세.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별내면 덕송리, 지금의 현 남양주시 별내동 덕릉마을 수락산 뒤편에 있다. 사망 2년 후 조정에서 청나라 사신에게 조선의 시부·책문 문체를 보여 주었는데 이 중에 이세정의 답조낙모(答嘲落帽)가 있었다. 후일 이조참판(吏曺參判)으로 증직받았다.

4. 가족과 자손


정부인 청송 심씨 사이에서 5남 2녀를, 이름 미상인 후실에게서 1녀를 보았다. 장남이 이명좌, 차남이 이명회이다. 원래 이세정 사후 이명좌가 도정궁 사손 직을 이어받았으나 불과 1년 뒤인 1722년(경종 2년) '''임인사화에 연루되어 참수당했다.'''(...) 그의 바로 아랫동생 이명회 역시 연좌제를 적용받아 벌을 받긴 했으나 목숨은 부지했고, 후에 영조가 복권시키면서 이명회를 도정궁 사손으로 지정하였다. 이후 도정궁 가계는 이명회(1685) 참조.

[1] 아랫 단락 참조.[A] 사후 추증.[2] 현종은 이세정의 아버지 뻘이다. 즉, 이세정은 숙종과 같은 항렬이며 나이도 같다.[3] 司馬兩試. 생원시와 진사시를 합쳐 이르는 말.[4] 增廣殿試. 대과(大科)의 마지막 시험인데 나라에 큰 경사가 있을 때 실시하던 임시 과거 시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