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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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스트 도서관 입구의 흉상.
이태규(李泰圭:1902~1992). 20세기 중후반 한국의 이론화학자.
“나라도 없지요, 희망도 없지요, 피는 끓지요, 자포자기하기에 십상인 어두운 시대였지요.
곰곰이 생각하니까, 역시 그 길밖에 없었어요. 힘을 길러놓고 나라 찾는 날을 기다리자. 그래서 화학도가 된 겁니다.”
『동아일보』, 1964.9.26.
1. 개요
한국 이론화학계의 거장. 이회창의 큰아버지. 일제 치하 어려운 환경에서도 식민지 출신이라는 한계를 이겨내고 1931년 교토제국대학에서 이학박사를 수여받았다. 액체 이론, 양자화학과 반응속도론에서 연구 업적을 남겼다.
2. 생애
2.1. 성장 및 교육
1902년 예산군에서 출생했으며 본관은 전주다. 경성고등보통학교[1] 를 졸업하고 추가로 동 학교의 1년의 사범과 과정을 수료한 후 관비유학생 신분으로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로 유학[2] 하여 1924년 차석으로 졸업하였다. 그러나 졸업 후에도 기대하던 교사 발령이 나지 않자 진로를 바꿔 교토제국대학에 입학, 1927년 졸업한다. 이후 물리화학자인 호리바 신키치(堀場信吉) 교수 밑에서 1931년 박사학위를 받았다.[3][4][5]
2.2. 경력
박사학위를 취득했음에도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하다가 1937년에 가서 교토제국대학 조교수로 임명되었다. 그 후 정용순, 김연수 등 같은 조선인 자산가들의 도움으로 재외연구생 제도를 통해 1939년부터 프린스턴 대학에서 연구하였다. 처음 반 년은 촉매 분야의 권위자인 테일러(H. S. Taylor)와 연구하다가 프린스턴에서 열린 액체이론 심포지움을 듣고 이론화학으로 연구 분야를 바꾸기로 마음먹는다. 아이링(H. Eyring) 교수 연구실로 옮겨 이론화학, 특히 계산양자화학을 연구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41년에 미일관계가 악화되면서 당해 7월 일본으로 돌아간다.[6] 예정보다 일찍 돌아온 상황에서 교토제국대학에 형식적으로만 재직 상태일 뿐, 채용해주는 곳이 없어 애매한 상황[7] 이었던 이 박사는 다시금 김연수에게서 연구비를 지원받아 연구를 지속하였고, 1943년에는 교토제국대학에서 정식으로 교수로 임용되었다.
그러나 머지 않아 일본이 패망하자 당해 11월 스스로 귀국해 경성대학 이공학부장으로 취임하였으며, 이듬해 서울대학교 설치와 함께 문리과대학장에 임명되었다. 한편, 1946년에는 현재는 대한화학회로 개칭한 조선화학회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으로 선출된다. 그러나 광복 직후 이념 대결로 인해서 수업이나 업무가 거의 불가능한 지경이었고, 교토제국대학에서 학위를 수여받고 조교수로 재직한 경력을 빌미삼은 좌익계열 학생들에게 친일파로 낙인찍혀 숱한 테러를 감내해야 했다.[8]
이에 결국 1948년 아이링 박사가 대학원장으로 재직하던 유타 대학에서 액체의 구조와 동역학에 관한 연구를 수행하였다.[9] 특히 1955년에는 리-아이링 이론은 비-뉴턴 유체[10] 의 전단률에 관한 리-아이링 이론을 발표하였다. 이후에도 유변학, 액체이론 및 화학동역학 분야의 연구를 계속하였다. 한국에서 교수 정년이 60세로 규정되어 고국으로 돌아갈 교수직이 없어지자 그는 유타 대학에 정착하기로 생각하고 1962년부터 유타대학에 정식으로 교수로 재직하였다.[11]
유타대학 교수직에서 은퇴한 이후 1973년 귀국해 1992년에 9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한국과학기술원 교수로 재직하며 응집물질물리학 및 통계역학을 연구하였다.
또다른 한국 출신 화학자인 전무식 박사(1932-2004, 한국에서는 육각수의 개발자로 유명한데 실제 주요 연구분야도 물에 대한 양자화학적 계산이었다)와는 매우 깊은 인연이 있다. 유타대학에서 사제관계를 맺었으며 이후에 카이스트 교수로도 함께하였다. 전무식 외에도 이태규에게 유타에서 지도받은 한국인 화학자들이 다수 있다.
2.3. 개인적 삶
철학과 종교에도 관심이 많았으며, 친구인 정지용[12] 에 의해 1927년 카톨릭 신자가 되었으며, 1931년에는 정지용이 중매를 서준 덕분에 아내인 박인근을 만나 결혼했다. 슬하에 1남 3녀를 두었다.
동생은 일제강점기에 검사서기를 지낸 이홍규 변호사로, 그는 정치인 이회창의 아버지이다. 이 때문에 이회창이 정치권에서 활약할 때 정치권 뉴스에서 가끔 이름이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
프린스턴에서 재학 중일 때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학교에서 세미나가 있어서 참석했는데, 시작하기 직전에 들어가서인지 맨 앞에 한줄을 제외하고는 자리가 없었다. 그래서 제일 좋은 자리가 남았다고 별 생각 없이 앉아서 세미나가 끝날 때까지 앉아 있었는데, 세미나가 끝나고 질문을 받는 시간에 누군가가 자기 바로 뒤에서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그런데 그 질문이 상당히 쌈박했던(...) 모양인지 '누가 이런 질문을 하나' 싶어서 뒤를 돌아봤는데, 그 자리에 앉아 있던 것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알고 보니 그 자리는 감히 아인슈타인의 시야를 가릴 수가 없어서[13] (...) 비워 뒀던 자리였다고.
일본에서 워낙 가난했던 탓에 이후 절약하는 습관이 생겼으며, 자기 자신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노력과 철저함을 강조하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다만 장경학 교수[14] 가 일본 유학 시절을 증언한 바로는 이태규 교수는 그다지 가난하지 않았고 집값이 비싸기로 유명한 교토 독채에 살수 있을 정도는 되었으며, 리승기 박사 문서에도 있듯 당시 교토에 유학하는 조선인 학생들을 주말마다 집으로 초청해 평소 학생들이 먹을수 없었던 고급 다과를 대접했다고 한다.
장경학이 마쓰야마고[15] 를 졸업하고 법학 37학번으로 쿄다이에 입학했고 동년도에 이태규 박사가 쿄다이 조교수로 임용되었으니 가난하게 살았다는 것은 1931~1936년경일 가능성이 크다. 애초에 함남 문천 출신 장경학 박사도 그렇지만 지방 출신 학생이 서울로 유학을 찍고 일본 본토까지 유학을 왔다는 건 어지간한 재력가가 아닌 이상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특히 제국대학이라면 구제 고등학교를 일본에서 나와야 했기 때문에 집안의 지원을 받는 유학생활이 상당히 길었다는 의미가 되며, 친일파 만석꾼이 아니라 적당히 잘 사는 지역유지 정도라면 일본 유학 중에는 쪼들리는 생활을 하기 일쑤였다.
다과회에서는 주로 조선의 새로운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중에 "모든 전쟁을 끝내는 폭탄"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 폭탄이 실제로 만들어지면 조선도 일본이 아니라 다시 조선이 되고 세계 어느 누구도 전쟁을 꿈꾸지 못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했다는데, 법학부생이었던 장경학 교수는 그게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가 나중에 일본에 리틀 보이가 떨어진후에야 아...이게 그거였구나... 했다고.[16]
국대안 파동을 전후하여 매우 심하게 보수화되었다. 카이스트 교수로 귀국한 뒤 민주화운동하는 학생들을 공부하기 싫어서 폭도짓을 하는 놈들 취급 하기도 했고, 일제시대에도 치안유지법으로 구속된 적이 있던 친구 리승기와 달리 :"조선인도 일본군에 징병되어 동등한 참정권을 얻자" 같은 기고문을 실은 적도 있었다.
이런 이태규의 성향은 한국 과학계가 보수화, 사회무관심화되는 데 적지 않은 악영향을 끼쳤다고 과학사학자들에게 평가받고 있다. 서울대 화학과 출신으로 이태규와 안면도 있던 과학사학자 송상용은 그를 "체제에 안주하는 틀림없는 보수주의자"이며, "친일까지는 아니더라도 일본에 적개심을 가진 적이 없으며", "미국에 오래 있었으나 사고방식은 미국스럽기보다 일본스러웠던", 기술적으로 천재적이었지만 철학적으로 빈곤했기에 아인슈타인이나 안동혁 같은 대과학자들과 같은 반열에 넣어 줄 수는 없는 인물이라고 냉정한 평가를 내렸다. 강만길 같은 민중사학자들은 아예 리승기의 민족주의적 행보와 비교하면서 이태규는 이광수 급의 인물이라고 비난할 정도.
[1] 이때 화학 수업 및 여러 화학 관련 도서를 읽으면서 화학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2] 경성고보 때 거의 매 학기 수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입학할 때는 영어 알파벳조차 다 알지 못했다고 하니 식민지 조선의 공교육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3] 당시 신문지상에는 한국인 최초의 이학박사라고 보도되었으나 이는 오보로, 1926년 미시간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원철 박사가 한국인 최초의 이학박사이다. 다만 최초의 화학 분야 박사이기는 하다.[4] 화학 분야 두 번째 한국인 박사가 나오기까지는 10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5] 참고로 의학에서는 1924년 윤치형 박사가, 공학에서는 1934년 최황 박사가, 농학에서는 1936년 우장춘 박사가 최초로 받았다. 분야를 불문하고 최초의 여성 박사는 1929년 공중보건학으로 학위를 받은 송복신 박사이다.[6] 참고로 박사가 돌아간 후 다음 배편으로 일본 대사관 직원과 그 가족들이 철수하였고, 12월에는 잘 알다시피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다.[7] 경성제국대학에서 화학과 교수로 이 박사를 초청하였으나 교토제국대학에 형식상 재직 상태였기 때문에 응할 수 없었다.[8] 동료 교수의 경우 비슷한 혐의로 끝내 좌익계열 학생들의 돌팔매에 맞아죽었다고 한다. 이렇게 교수들의 수난이 연일 이어지자 우익계열 학생들은 사설경호조직을 꾸려 교수진을 호위할 정도였다고.[9] 곧 귀국할 계획이었으나 한국전쟁으로 인해 연기되었다.[10] 점성이 전단율, 그러니까 액체의 두 층이 서로 밀리는 변형이 생기는 속도에 의존하는 액체. 반대로 뉴턴 유체에서는 전단력이 전단율과 선형으로 비례하며 이 비례 상수가 액체의 점성이 된다.[11] 유타대학 교수 정년은 당시 만 68세.[12] <향수>를 쓴 그 시인 맞다[13] 그리고 감히 아인슈타인의 앞자리에 앉자니 부담스러워서[14] 1916~2014. 교토제국대학 법학부 37학번으로 1950년대 민법학자로 명성이 높았다. 곽윤직 이전 세대의 민법학계 스타 교수라고 하면 알아들을 고시생 올드비들이 있을지도...[15] 현 에히메대학. 당시는 구제 고등학교였다.[16] 장경학교수 생각에 성능이 좋은 폭탄을 만들면 일본이 더 많이 잘 만들텐데 어떻게 그런 폭탄으로 조선이 독립한다는건지.. 폭탄 한방으로 도시가 파괴되는건 상상하지 못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