잇코잇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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잇코잇키가 사용한 깃발[1]
1. 개요
一向一揆(いっこういっき)
일본 전국시대에 정토진종 혼간지 교단을 중심으로 발생한 잇키. 정토진종이 일향종(一向宗)[3][4] 으로도 불렸고, 신자들은 잇코슈(一向衆)라고 불렸기 때문에 잇코잇키라고 부른다. 다케다 신겐 같은 쟁쟁한 다이묘들을 제치고 '''오다 노부나가 최대의 적'''으로 꼽히기도 한다.
2. 역사
2.1. 일향종(정토진종)의 등장과 잇코슈의 성장
헤이안 시대와 무가정권 시대를 지나면서 기존에 설립된 불교 종파(구불교(旧仏教))들은 장원을 지배하며 피지배층을 착취하거나, 난해한 교리 때문에 일반 백성들과의 거리가 멀어지고 말았다. 때문에 가마쿠라 시대에는 이를 대체하려는 새로운 불교 종파들이 등장했는데 이를 가마쿠라 신불교라고 한다.
가마쿠라 신불교 가운데 하나인 정토진종을 세운 이는 정토종의 개조 호넨(法然)의 제자 신란(親鸞1173~1263)이었다. 신란은 누구든지 나무아미타불을 통해 구제받을 수 있다는 호넨의 가르침 위에, 번뇌가 많은 중생(악인)이야말로 아미타불이 구제하려는 대상이라는 가르침[5][6] 을 더해 정토진종을 세웠다.[7]
신란의 사후 정토진종의 총본산으로 세워진 절이 바로 혼간지이다. 가마쿠라 막부, 무로마치 막부의 전란기를 거치며 교세를 확장한 정토진종은 자체적으로 교단 조직을 구성하였다. 여기에는 승려들뿐만 아니라 무사들이나 상공업자, 농민들도 대거 가담하였다. 특히 지방에서는 소손(惣村, 촌락 공동체)들이 견고한 종교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특히 중흥의 조(中興の祖)라고 불리는 혼간지 제8대 법주 렌뇨(蓮如)는 적극적인 포교를 통해 교세를 크게 확장했다. 특히 그는 오후미(御文)라는 편지를 써서 지방의 신도들에게 가르침을 전달했는데, 불교의 어려운 이론을 쉬운 말로 풀이했기 때문에 정토진종의 가르침이 평민들 사이에 쉽게 흡수될 수 있었다.
2.2. 오미[8] 잇코잇키(近江一向一揆)
정토진종의 교세가 위협적일 정도로 확산되자, 다른 교단들과 마찰을 빚게 된다. 그러던 와중에 1466년, 히에이잔의 천태종의 승려들이 교토의 오오타니 혼간지를 습격하여 파괴하는 일이 벌어진다. 이에 맞서서 정토진종은 자기 방어를 하기 위해 잇키를 일으켰고, 천태종 세력과 오우미 일대에서 충돌하였다. 이것이 최초의 잇코잇키인 오우미 잇코잇키이다. 다음해가 되어서야 정토진종과 천태종은 화의를 맺는다.
2.3. 엣추 잇코잇키(越中一向一揆)와 카가 잇코잇키(加賀一向一揆)
카가 슈고[9] 토가시 마사치카(富樫政親, 1455?~1488)는 동생 토가시 코우치요(富樫幸千代)와의 가독 승계 싸움에서 승리하였다. 하지만 이는 당시 호쿠리쿠 지역에서 크게 성장한 정토진종 문도들의 도움을 받은 것이었다. 특히 법주 렌뇨가 1474년부터 이시자키 고보(石崎御坊)[10] 에 머무르며 포교에 힘쓰고 있었다. 정토진종 혼간지의 위세에 위협을 느낀 토가시 마사치카는 1475년 정토진종 탄압을 개시 , 렌뇨와 그를 따르던 혼간지 문도들은 박해를 피해 엣추(越中)[11] 로 자리를 옮겼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엣추 토나미군(礪波郡)을 지배하던 이시구로 미츠요시(石黒光義)도 정토진종 탄압에 가담하였다. 1481년, 이시구로 미츠요시는 정토진종 사원인 즈이센지(瑞泉寺)를 습격하였다. 그런데 정토진종 문도들에게 역관광 을 당하고, 미츠요시 본인도 자결했다. 결과적으로 토나미군은 정토진종이 다스리는 지역이 되었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동안, 오닌의 난으로 촉발된 다이묘들 간의 싸움이 진행되고 있었고, 혼간지 문도들을 카가에서 쫓아낸 토가시 마사치카는 쇼군 아시카가 요시히사의 롯카쿠 타카요리 정벌에 참여하였다. 이때 토가시 마사치카의 전비(戰費) 마련으로 인하여 카가의 백성들은 분노하였고, 여기에 엣추에서 돌아온 정토진종 문도들이 결합하여 잇키를 일으켰다. 심지어 토가시 마사치카에게 견제를 받은 호족들도 가세하였다. 1488년, 급하게 돌아온 토가시 마사치카는 타코 성(高尾城)에서 싸움을 벌이다 자결하고 말았다. 잇코잇키 새력은 마사치카를 대신하여 토가시 야스타가(富樫泰高)를 슈고로 세웠지만, 허수아비나 다름없었다.
카가 잇코잇키는 피지배층이 다이묘를 쫓아내는 데에 성공한 극히 보기 드문 사례이다. '''이로써 카가 국은 백성이 다스리는 나라(百姓の持ちたる国)가 되었다'''[12][13]
이 소식을 들은 쇼군 아시카가 요시히사는 카가 정벌을 논의했지만, 정토진종과 관계가 깊었던 간레이 호소카와 마사모토(細川政元)가 정벌에 반대하였고, 오닌의 난으로 일본 전체가 헬게이트급 난장판이 되다시피 했기 때문에 손을 쓸 수 없었다. 결국 쇼군 본인이 1489년 사망하면서 정벌은 흐지부지되었다.
카가의 잇코잇키 세력은 노토와 엣추 등으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주변 다이묘들과 충돌하게 된다. 에치젠[14] 은 아사쿠라(朝倉)씨가 슈고 다이묘로서 지배하고 있었는데, 1494년부터 잇코잇키 세력은 아사쿠라씨와 경쟁관계에 있던 슈고다이(守護代)[15] 카이(甲斐)씨[16] 와 손을 잡고 공략을 시도했다. 하지만 아사쿠라의 명장 아사쿠라 소데키가 1506년 쿠즈류가와 전투(九頭竜川の戦い)에서 1만여 명의 병력만으로 30만[17] 잇코슈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고, 한동안 정토진종의 거점이었던 이시자키 고보(石崎御坊)마저 파괴하였다.
노토는 카와치, 키이, 엣추 슈고를 겸하는 관령 하타케야마(畠山)씨의 지파인 노토 하타케야마씨가 슈고다이묘로 있었지만, 요시모토(義元), 요시무네(慶致) 두 형제 간의 자리싸움으로 내분이 일어났다. 엣추는 슈고 하타케야마씨가 수도에서 호소카와씨와 그칠 날 없는 싸움 중에라 노토 하타케야마씨에게 통치를 맡겼으나 자기 코가 석자인 노토 하타케야마씨가 엣추까지 맡기는 역부족이었다. 이 틈을 타 잇코잇키 세력이 엣추와 노토로 진격해 들어갔다. 1506년, 엣추 슈고 하타케야마 보쿠잔은 에치고[18] 와 노토 양쪽에 구원 요청을 보냈고, 슈고다이 나가오 요시카게(長尾能景)[19] 가 군대를 이끌고 진격하였다. 그러나 한냐노 전투(般若野の戦い)에서 엣추 슈고다이 진보 요시무네(神保慶宗)가 전선을 이탈하여 나가오 요시카게가 전사, 대패하였다. 1520년이 되어서야 나가오-하타케야마 연합군의 공격으로 진보 요시무네가 자결하였지만 이번에는 에치고 이곳저곳에서 잇코잇키가 발생하여 고생하게 된다.
2.3.1. 카와치노쿠니의 착난(河内国錯乱)
렌뇨는 평생 5명의 아내를 맞이하여 13명의 아들들을 낳았는데, 이 아들들은 각각 정토진종에 속하는 사원들의 수장이 되었다. 렌뇨 본인은 호쿠리쿠를 중심으로 형제들이 단합하여 교단을 지켜 나가기를 바랐다. 그러나 1499년 렌뇨가 입적하고 나서, 혼간지 교단에는 콩가루가 날리게 된다.
일단 렌뇨의 뒤는 5남인 지츠뇨(実如)가 이었다. 그리고 쇼코지(松岡寺)는 3남 렌코(蓮綱), 코쿄지(光教寺)는 4남 렌세이(蓮誓), 혼센지(本泉寺)는 7남 렌고(蓮悟)가 맡게 되었다. 카가에 위치한 이 세 절들은 카슈 삼사(賀州三ヶ寺) 혹은 카가 삼산(加賀三山)으로 불린다.
호쿠리쿠의 잇코잇키가 하타케야마 씨와 전쟁을 벌이던 무렵, 이시야마 고보(石山御坊, 훗날 오사카 성으로 개축)에 렌뇨의 아내였던 렌노(蓮能) 및 그녀의 아들 짓켄(実賢, 렌뇨의 9남)이 머물고 있었다. 렌노는 하타케야마 가문 출신이었기 때문에 호쿠리쿠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두고 볼 수가 없었고, 짓켄을 법주로 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자 호쿠리쿠에 있던 지츠뇨는 렌노 및 그녀의 자식들을 모두 체포, 추방했다. 이를 카와치노쿠니의 착난[20] 이라고 한다. 오사카 일란(大坂一乱)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그 와중에 앞서 말한 쿠즈류가와 전투(1506)가 벌어졌고 크게 패한 카가 잇코잇키 세력은 정토진종 내에서의 위세가 꽤 꺾이고 말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507년에 정토진종을 돕고 있던 호소카와 마사모토가 암살당하고(에이쇼의 변) 그 양자들 사이에 내전이 발발한다. 그러면서 지츠뇨는 머물고 있던 교토 야마시나 혼간지(山科本願寺)에서 쫓겨나 오우미 카타타 혼푸쿠지(近江堅田本福寺)로 몸을 피해야 했다. 지츠뇨가 야마시나 혼간지로 돌아온 것은 2년 후인 1509년이 되어서였다. 호소카와 가문의 내분은 혼간지에 적대적이었던 호소카와 타카쿠니(細川高国)의 승리로 끝났다.
이러한 위기들을 겪으면서 지츠뇨는 정토진종 교단을 유지하고 지켜 나가기 위해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우선 자신의 차남이자 후계자인 엔뇨(円如)와 동복 동생이자 오우미 겐쇼지(近江顕証寺)와 이세 간쇼지(伊勢願証寺)의 주지였던 렌쥰(蓮淳, 렌뇨의 6남)에게 교단의 운영을 맡겼으며, 이들은 착실하게 정토진종 교단을 개혁해 나간다.
우선 렌뇨의 가르침이 들어있는 오후미(御文)의 내용을 간추려 종문의 신조를 세웠다. 그리고 1518년에는 무장이나 전투, 파벌을 세우는 것 등을 금지하는 법을 세웠다. 그리고 전국의 문도들에게 이를 지킨다는 서약을 하게 하였다. 다음해에는 일족에 의한 정토진통의 다스림을 규정하는 일문일가제(一門一家制)를 세웠다. 이러면서 정토진종은 여러 다이묘들이나 타 종파들과 함께 공존하는 것을 노렸다. 물론 반발도 심했는데, 에치젠에서 아사쿠라씨에 의해 쫓겨난 혼가쿠지(本覚寺)의 렌에(蓮恵)는 아사쿠라씨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무장이 불가피하다고 강경하게 주장했다. 지츠뇨는 렌에를 파문했다. 또 카타타 혼푸쿠지에서 부정사건이 일어나자 이들을 파문했다. 지츠뇨 자신이 교토에서 쫓겨났을 때 혼푸쿠지의 도움을 많이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엄정하게 파문으로 다스리자 신도들은 지츠뇨를 존경하게 되었다.
그러나 1521년 엔뇨가 죽고, 1525년 지츠뇨도 사망하였으며, 후계자인 엔뇨의 아들 쇼뇨(証如)는 당시 10살밖에 되지 않았다. 지츠뇨는 죽기 전에 쇼뇨 시대에 닥칠 어려움을 걱정하며 쇼뇨에의 충성, 정치 및 타 종교세력과의 공존을 당부하였다. 지츠뇨 사후 교단을 맡게 된 사람들 가운데 유일하게 기나이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렌쥰이 쇼뇨의 후견인이 된다.
2.4. 쿄로쿠의 착난(享禄の錯乱)
카와치노쿠니의 착란 당시 쫓겨났던 렌뇨의 9남 짓켄은 혼간지로부터 용서를 받고 복귀를 허락받는다. 그는 오우미에 쇼토쿠지(称徳寺)를 세웠는데, 혼푸쿠지와 영역이 겹치면서 갈등이 일어나게 된다. 혼푸쿠지가 일문에 의한 정토진종의 통치 확립을 방해한다고 본 렌쥰은 쇼토쿠지를 밀어 주고 혼푸쿠지를 파문한다.
이렇게 내부 통치를 확고히 한 정토진종은 정계로 눈을 돌린다. 1527년, 호소카와 가문에서 새로운 내분이 시작되었는데, 미요시 모토나가(三好元長)가 옹립한 호소카와 하루모토(細川晴元)가 타카쿠니에 맞서 거병하였다. 렌쥰은 휘하의 시모츠마 라이슈(下間頼秀), 라이세이(頼盛) 형제로 하여금 하루모토를 돕게 하였고, 하루모토는 호쿠리쿠에 위치한 타카쿠니 측의 장원들을 정토진종 쪽에서 가져가 줄 것을 요청했다.
렌쥰은 자신의 사위인 초쇼지 짓켄(超勝寺実顕)과 시모츠마 라이슈에게 일을 맡겼다. 초쇼지와 혼가쿠지는 혼가쿠지 렌에의 파문 이후 계속해서 카가 삼산(쇼코지, 코쿄지, 혼센지)의 압박을 받아오고 있었으나 원레 렌뇨 시절 전부터 유래가 깊은 말사(末寺)들이었고 자체적으로 상당한 세력을 갖추고 있었다. 짓켄과 라이슈는 새로 얻은 장원들의 관리자를 자신들의 휘하에 있던 신도로 교체하였고, 이를 빌미로 하여 카가 삼산과의 갈등이 폭발하였다. 1531년(쿄로쿠 4년), 카가 삼산은 일문일가제 위반 등을 이유로 초쇼지 토벌을 명했다. 그러나 초쇼지는 혼가쿠지와 힘을 합쳤고, 라이슈로부터 보고를 받은 렌쥰은 짓켄을 변호하며 카가 삼산의 토벌을 명했다.
6월 교토 야마시나에서 모인 정토진종 신도들은 지츠엔과 시모츠마 라이세이의 통솔하에 출진, 카가로 진입하여 카가 삼산 세력을 쓸어 내기 시작했다. 여기에 외부 세력들이 개입하기 시작하는데, 혼간지와 관계가 무척 나빴던 아사쿠라씨에서는 카가 삼산을 지원하며 아사쿠라 소데키가 이끄는 병력을 보냈다. 카가 삼산의 하나인 혼센지에 있던 지츠고(実悟)를 돕기 위해 삼촌 하타케야마 이에토시(畠山家俊)가 노토(能登)에서 출병하였다. 또 명목상으로만 카가의 슈고였던 토가시씨도 실권을 얻기 위해 카가 삼산 측에 가담하였다.
전투 끝에 11월 츠바타(津幡)에서 하타케야마 이에토시가 전사하는 등 카가 삼산 측이 패배하였다. 결과적으로 카가 삼산의 세력은 완전히 숙청당했으며, 용서를 받은 것은 19년 뒤였다. 혼간지는 카가의 통치를 혼간지에서 파견하는 관리자를 통한 직접 지배로 바꾸었다. 그 상징으로 오야마 고보(尾山御坊)[21] 를 세웠다.
초쇼지와 혼가쿠지의 봉기를 다이잇키(大一揆), 카가 삼산의 봉기를 쇼잇키(小一揆)로 불렀기 때문에 이 사건을 다이쇼 잇키(大小一揆)라고도 한다.
2.5. 텐분의 착난(天文の錯乱)
2.6. 미카와 잇코잇키(三河一向一揆)
2.7. 이시야마 전투 (石山合戦)
항목 참조. 잇코잇키 중 가장 규모가 컸으며, 사실상 마지막의 잇코잇키에 해당한다.
2.8. 나가시마 잇코잇키(長島一向一揆)
2.9. 에치젠 잇코잇키(越前一向一揆)
3. 관련 인물
[1] 進者往生極楽 退者無間地獄, 나아가는 자는 극락왕생, 물러나는 자는 무간지옥 [2] 지금의 시가현[3] 정토진종 쪽이 정식명칭이지만, 정토종이 에도막부를 압박하여 정토진종이란 명칭의 사용을 금지했기 때문에 일향종으로 불렸다. 정토진종이라는 이름을 되찾은 것은 메이지 5년(1872년)이다.[4] 다른 일본 불교 종파인 시종일향파(時宗一向派)를 의미하기도 한다.[5] 이 교리를 악인정기(悪人正機)라고 한다.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하자면, 선인(善人)은 스스로 공덕을 쌓아 극락왕생할 수 있지만, 악인(悪人)은 그러지 못 하기 때문에 아미타불이 나서서 구제한다는 내용이다. 물론 악인이 구제받는다고 해서 악행을 해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악행을 계속하는 것은 아미타불의 구제를 거부하는 것이다. 신란은 "해독제가 있다고 해서 독을 마셔도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훈계했다.[6] 원래는 스승 호넨이 원효대사의 저작 유심안락도(遊心安楽道)를 바탕으로 가르친 내용인데, 신란이 발전시킨 것이다.[7] 물론 이게 정토진종 교리의 전부는 아니지만 나머지 내용도 구불교에 비해서 훨씬 간단하다.[8] 지금의 시가현[9] 守護, 쿠니의 행정권과 군사권을 가진 자리로, 상당수가 전국시대에 다이묘(슈고 다이묘로 성장했다.[10] 지금의 후쿠이현 아와라시에 위치.[11] 지금의 도야마현[12] 그렇다고 민주공화정 국가를 세우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잇키에 참여한 농민들과 상공업자들의 영향력이 강해진 걸 보아 민주주의의 일환으로 당시 일본에 역동성을 불어넣었다.[13] 유사한 사례로 1485년 야마시로국의 잇키가 있다. 코쿠진(国人)과 농민들이 일어나 슈고인 하타케야마 가문을 쫓아내고 8년 간 자치를 시행했다.[14] 지금의 후쿠이현 북부.[15] 슈고의 대리인. 무로마치 막부는 슈고들이 상경해 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실제로 지역을 다스리던 슈고다이들이 센고쿠다이묘로 성장한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예가 우에스기 겐신으로 유명한 에치고 나가오 가문. 본래 나가오 가문은 슈고인 우에스기 가문을 대신해 에치고를 다스리던 슈고다이였다.[16] 당시 슈고인 아사쿠라씨의 슈고다이가 아니라, 아사쿠라씨 전의 슈고인 시바씨의 슈고다이다. 아사쿠라씨도 원래는 시바씨의 슈고다이였으나 오닌의 난 당시 주군 시바씨를 배신하는 대가로 슈고가 된 것이다. 시바씨의 가신으로 유력한 가문이 바로 이 카이, 아사쿠라씨와 오다 노부나가로 유명한 오다씨다.[17] 과장된 수치라는 이야기도 있다.[18] 지금의 니가타현.[19] 우에스기 겐신의 할아버지.[20] 이시야마 고보는 셋쓰노쿠니(摂津国, 오사카 북부)에 있었으나 렌노와 짓켄의 지지자들은 대부분 카와치노쿠니(河内国, 오사카 동부)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21] 지금의 카나자와 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