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쿠스토

 



'''역대 칸 영화제 수상작 '''
[image]
'''황금종려상'''
'''제8회
(1955년)'''

'''제9회
(1956년)'''

'''제10회
(1957년)'''
마티
(델버트 맨)

'''침묵의 세계'''
('''자크 이브 쿠스토''', 루이 말)

우정어린 설득
(윌리엄 와일러)

'''자크 쿠스토
Jacques-Yve Cousteau
'''
[image]
'''본명'''
자크이브 쿠스토(Jacques-Yve Cousteau)
'''출생'''
1910년 6월 11일, 프랑스 제3공화국 누벨아키텐 레지옹 지롱드 주
'''사망'''
1997년 6월 25일 (향년 87세), 프랑스 파리
'''국적'''
[image] 프랑스[1]
'''직업'''
해군장교, 탐험가, 생태학자, 영화제작자, 혁신가, 과학자, 사진가, 작가
'''배우자'''
시몬 멜시오르(Simone Melchior)[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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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알려진 그의 모습. 빨간색 털모자와 파란색 셔츠를 입고 있다.
1972년의 모습.
1. 개요
2. 생애
2.1. 어린 시절
2.2. 청년 시절
2.3. 바다를 탐험하다
2.4. 미국에서
2.5. 말년
2.6. 사망
3. 기타
4. 대중매체에서


1. 개요


프랑스의 해군 장교 출신의 해양 탐험가, 다큐멘터리 감독, 환경보호 운동가. 스쿠버 다이빙 장비의 창시자로 유명하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1910년 프랑스 누벨아키텐 레지옹의 지롱드 주에 있는 생탕드레드퀴작(Saint-André-de-Cubzac)[3]에서 태어났다. 미국 유학파여서 미국인 사업가들의 비서로 일하던 아버지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미국 뉴욕에서 생활하였다. 야외 활동과 물놀이를 좋아하여 자유로운 미국의 학교생활을 좋아했지만, 10살 때 프랑스로 돌아와서는 프랑스 학교의 갑갑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한다. 또 어렸을 때 미국에서 살아서 영어를 유창하게 잘 했지만, 정작 프랑스어를 어려워해서 철자법이 서툴렀고 난독증까지 있었다고 한다.

2.2. 청년 시절


20세인 1930년에 의학, 영화, 군대라는 세 개의 갈림길을 두고 고민하다가 군인이 되기로 결심. 프랑스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한다. 1932년에 소위가 되어 이 시기에 세계일주 항해를 다녀오기도 했고 중화민국, 일본 제국, 소련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나중에 해군 항공대에 지원하여 조종사가 되려 했으나 1936년 과속운전으로 인한 교통사고로 병원신세를 지는 바람에 조종사의 꿈은 접어야 했다.
이듬해인 1937년에 18세의 시몬 멜시오르와 결혼하여 38년에는 장 미셸을, 40년에는 필리프를 낳게 되는데, 두 아들은 훗날 아버지의 탐험과 영화 제작에 큰 도움을 주었다.

2.3. 바다를 탐험하다


1930년대 말 쿠스토는 해군 장교 필리프 타이에프와 잠수부 프레데릭 뒤마를 만나 바다에서 잠수를 즐겼다. 쿠스토와 둘은 주변에서 '바다의 삼총사'라고 불리게 되었고, 이들은 오래 잠수할 수 있는 잠수 장비를 연구했는데, 프랑스 가스공사에서 간부로 일하는 쿠스토의 장인어른이 가스 기술자 에밀 가냥을 소개한 덕분에 최초의 스쿠버 장비인 아쿠아렁(Aqua lung)을 개발한다.
쿠스토가 아쿠아렁을 연구하던 시대의 프랑스는 나치 독일이 점령한 상태였는데, 프랑스가 독일 국방군에게 점령당하자 해군 장교인 쿠스토와 타이에프는 군인 신분을 잃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백수가 된 쿠스토는 기회는 이때다 하고(...) 마침내 1943년에 아쿠아렁을 완성하였다. 이 시기의 쿠스토는 나치 부역자라는 혐의를 받았지만, 쿠스토는 연구를 위해 프랑스에 남았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참고로 쿠스토의 형인 피에르 앙투안 쿠스토는 진짜로 나치 부역 혐의가 밝혀져(...) 종전 후 사형당했다.
전쟁이 끝나고 쿠스토는 해군 장교에 복귀했으며 프랑스 해군 소속 해저탐사부대인 GRS를 창설하고 수중폭파, 기뢰 제거 등 전쟁 잔해물을 제거하며 보물선을 탐사하고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하다가 1949년 소령으로 진급한 그 해에 군대에서 은퇴하고 탐험가의 길을 걷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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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립소 호와 칼립소 호가 탐험한 지역. 출처는 재미있는 탐험 이야기.#
1950년 칼립소 호를 구입하여 해양 탐사에 나선 쿠스토는 잠수 장비를 시험하고,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하고, 보물선의 보물을 인양하고, 정부와 석유회사의 의뢰를 받아 송유관이나 해저 유전을 탐사하며 활동비를 벌었다. 1953년에는 동명의 수필을 원작으로 한(수필에 대해서는 후술) 해저촬영 다큐멘터리 영화 '침묵의 세계(The Silent World)'가 개봉되었고 제 9회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다. 1957년에는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모나코의 대공 레니에 3세[4]의 제안으로 모나코 해양박물관 관장을 맡기도 했다. 물론 해양 탐험 때문에 박물관에 있는 날은 꽤 적었고, 박물관에 없는 날이 더 많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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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3월 23일 타임지 표지를 장식한 쿠스토.
1960년에는 타임지 표지에 등장하기도 했으며, 세상에서 가장 깊은 해구인 마리아나 해구를 탐사할 잠수정도 제작했다. 또한 핵폐기물을 지중해에 버리려는 프랑스 정부에 반발하여 환경보호 시위를 주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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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홍해에서 실시한 3차 프레콩티낭 실험에서 쿠스토와 대원들. 창밖을 보는 사람은 쿠스토의 아내 시몬이다.
1962년에는 해저 주택인 프레콩티낭(옛 대륙) 실험에 도전. 미래에는 인구 증가와 환경 파괴로 바다속에서 살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수심 120m에서 2명의 탐험가가 일주일동안 생활하였고 2차, 3차 실험에도 성공하였다. 1964년에는 이 해저 주택을 소재로 한 영화 '태양이 비치지 않는 세계'가 아카데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프레콩티낭 실험에 몰두할 무렵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이나 피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을 만나보기도 했다고 한다.
쿠스토의 해양 연구소는 미국 정부의 의뢰를 받아 '딥스타 4000'이라는 해저 탐사정을 개발하기도 했다. '물거미'라는 해저 주택을 계획하기도 했지만 60년대 말 샤를 드골 정권이 붕괴하며 실용성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고, 결국 1971년에 중단하게 된다.

2.4. 미국에서


1960년대에는 미국에서 활동하게 되는데[5] 1966년부터 1968년까지 12부작 다큐멘터리 '쿠스토의 모험 세계'가 ABC에서 방영되었고, 1969년 캘리포니아 롱비치에 쿠스토 해양 박물관이 건립되고, 1974년에는 미국 쿠스토 협회가 세워지기도 한다. 그러나 박물관은 적자를 보아 문을 닫았고, 버지니아 노퍽 시와 제휴한 관광 단지도 취소되었다. 게다가 1979년에는 둘째 아들 필리프 쿠스토가 사고로 사망한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쿠스토는 큰 인기에 힘입어 프랑스 대통령 출마 권유를 들었고, 쿠스토 본인도 진지하게 고민했지만 포기했다고 한다.

2.5. 말년


1989년 모나코 해양박물관장직을 은퇴하고 프랑스 학술원 회원으로 선출되었지만, 그 해 파리에 개장한 쿠스토 해양 공원이 적자로 2년만에 문을 닫고, 1990년 말에는 아내 시몬이 세상을 떠나게 되어 이듬해 91년에 36살 연하(!)의 프랑신 프리플레와 재혼한다. 아들보다 나이가 훨신 적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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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에는 남극을 탐험하면서 남극 보호활동을 하기도 했다. 남극을 보존하기 위해 사람들을 모아서 광산 개발에 적극적으로 반대했다고 한다.

2.6. 사망


1996년 1월 8일 싱가포르에 정박한 칼립소 호가 침몰했다. 이에 쿠스토는 칼립소 2호를 만들기 위해 모금운동을 벌였지만 칼립소 호의 침몰은 쿠스토가 갈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리는 징조였는지, 이듬해인 1997년 6월 25일 프랑스 파리에서 향년 87세[6]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관에 누운 쿠스토에 손에는 그가 쓰고 다녔던 빨간색 모자가 손에 쥐어졌다고 한다.

3. 기타


The Silent World(1950)라고, 일종의 스쿠버다이빙 자서전이 있다. 저자 본인이 영어에 익숙해서 불어판과 영어판을 따로 썼다고. 읽어 보면 다이빙할 때 해 볼 수/겪을 수 있는 온갖 뻘짓[7]들이 담담하게(...) 쓰여져 있는 게 백미. 지중해의 그루퍼[8]들이 왜 없어졌는지 알 수 있다.
한국판 번역본도 "침묵의 세계"라는 제목으로 나온 적이 있다. 번역자가 인터넷에 공개해 두었으니 접속해서 읽을 수 있다.링크
장미셸 자르는 1990년에 쿠스토를 위하여 En Attendant Cousteau라는 곡을 만들었다. 바닷속을 떠다니는 듯한 신비로운 분위기가 특징.
멕시코에 자크 쿠스토 섬이 있다. 단 구글맵에는 Isla Cerralto라고 나온다.


4. 대중매체에서


미국 영화 스티브 지소와의 해저 생활에서 빌 머리가 연기한 스티브 지소는 쿠스토를 모델로 했다.
제롬 살레 감독의 프랑스 영화 오디세이에서 랑베르 윌슨이 자크 쿠스토를 연기했다.
Epic Rap Battles of History 시즌 6에서 호주의 사육사이자 환경보호 운동가인 스티브 어윈과 붙게 된다. 여기서는 나이스피터가 연기. 실제로 둘은 접점이 있는데, 스티브 어윈이 해양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다 노랑가오리의 가시에 찔려 사망하자 손자 필리프 쿠스토(79년에 죽은 둘째 아들과 동명이인)가 다큐멘터리 촬영을 이어갔다고 한다.# 위 틀의 이미지도 ERB 위키에서 가져온 것이다.#

[1] 후술하겠지만 어린 시절은 미국에서 보냈고 나중에 미국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복수국적자는 아니었던 모양이다.[2] 나중에 아내가 사망하자 재혼을 하게 되는데... 자세한 건 후술.[3] 와인 생산지로 유명한 보르도와 가까운 거리에 있다.[4] 그레이스 켈리의 남편으로 유명한 사람이기도 하다.[5] 위에서 설명했듯 어릴 때 미국에서 살아서 영어를 프랑스어보다 잘했으므로 제 2의 고향처럼 친숙한 곳이기도 하다.[6] 한국 나이로 88세.[7] 일산화탄소에 오염된 공기로 다이빙하다 수중에서 기절하기, 무감압한계 이딴 거 쌩무시하고 바닥 찍으러 가기, 버디 없이 혼자 다이빙하다 죽기 직전까지 가기, 슈트가 왜 필요함? 하고 맨몸으로 지중해는 물론 다른 데 가서도 다이빙하기 등등등. 그리고 왜 그러면 안되는지도 차분하게 적혀 있다.[8] 다금바리과의 바닷물고기. 1미터는 우습게 자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