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스 켈리

 

''' 그레이스 켈리의 주요 수상 및 헌액 이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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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대 아카데미 시상식 '''
[image]
'''여우주연상'''
<rowcolor=#191919> ''' 제26회
(1953년) '''

'''제27회
(1954년) '''

'''제28회
(1955년) '''
오드리 헵번
(로마의 휴일)

'''그레이스 켈리
(회상 속의 연인) '''

안나 마냐니
(장미 문신)

-
''' 역대 골든 글로브 시상식'''
[image]
'''여우주연상 - 드라마'''
<rowcolor=#191919> ''' 제11회
(1954년) '''

''' 제12회
(1955년) '''

''' 제13회
(1956년) '''
오드리 헵번
(로마의 휴일)

'''그레이스 켈리
(회상 속의 연인)'''

안나 마냐니
(장미 문신)

--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입성자'''
<-2><bgcolor=#ffffff,#19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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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그레이스 켈리
GRACE KELLY
'''
'''분야'''
'''영화'''
'''입성날짜'''
'''1960년 2월 8일'''
<-2><bgcolor=#dda0dd> '''{{{#ffd700 위치
''' ||<bgcolor=#dda0dd> '''{{{#ffd700 6329 Hollywood Blvd.
'''
}}}
}}}
''' 그레이스 켈리 '''
''' Grace Kelly '''
<colbgcolor=#871b4d> '''이름'''
그레이스 켈리 (Grace Kelly)
'''본명'''
그레이스 패트리샤 켈리
(Grace Patricia Kelly)
'''출생'''
1929년 11월 12일
[image]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필라델피아
'''사망'''
1982년 9월 14일 (향년 52세)
[image] 모나코 모나코빌 쁘헝쎄쓰
'''국적'''
[image] 미국
'''공가'''
그리말디
'''가족'''
존 켈리 시니어[1] (아버지)
존 켈리 주니어[2] (오빠)
레니에 3세 (남편)
알베르 2세 (아들)
카롤린 공녀 (장녀)
스테파니 공녀 (차녀)
'''종교'''
가톨릭
'''신체'''
169cm
'''활동'''
1951년 – 1982년
'''직업'''
배우
'''서명'''
[image]
1. 소개
2. 패션 스타일
3. 생애
3.1. 배우 생활
3.2. 배우에서 모나코의 공비로
3.3. 여러 유산 끝에 출산하다
3.4. 불행한 결혼생활
3.5. 교통사고와 죽음
4. 기타
5. 자녀
6. 출연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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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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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에 할리우드에서 왕성히 활동하여 오스카 트로피를 거머쥐는 영광을 누리다가 모나코의 공비(公妃)가 된 미국배우. 특유의 우아하고 기품 있는 외모와 세련된 패션 스타일로 유명했으며, 할리우드 전성기인 1950년대에 활동하던 세기의 스타(오드리 헵번, 마릴린 먼로, 엘리자베스 테일러) 중 한 명이다. 제임스 스튜어트, 캐리 그랜트와 함께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페르소나로도 알려져 있다.1929년 11월 12일에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났으며, 1982년 9월 14일 모나코에서 교통사고로 비교적 젊은 나이인 만 5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2. 패션 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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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패션의 아이콘 중 하나이다.
50년대 패션을 참고하고 싶다면 그레이스 켈리의 패션들을 참고하는 것이 좋다. 당대 활동하던 스타들인 오드리 햅번, 마릴린 먼로 역시 나쁘지 않지만 오드리 햅번은 50년대보단 60년대 패션이 더 유명한 편이고, 마릴린 먼로의 패션은 현대에 소화할 만한 의상은 많이 보급된 편이라 나머지는 일상룩으로는 소화하기 어려운 몸매가 드러나는 드레스다. 켈리는 클래식한 느낌의 슬랙스부터 우아한 레이디 라이크 룩까지 적절히 소화했으므로 쉽게 참고하기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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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에 등장한 의상들. 그레이스 켈리하면 떠오를 정도로 그녀의 이미지에 맞게 고급스러우면서도 단정하게 디자인 되었다. 헤어스타일은 물론 악세사리와 장갑까지 세련된 미가 돋보인다. 디자이너는 오드리 햅번부터 엘리자베스 테일러까지 다양한 의상을 디자인했던 이디스 헤드(에디스 헤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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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프 또한 빼먹을 수 없다. 스카프를 흩날리며 운전하는 모습은 우아한 모습이 아름다워 브리짓 존스의 일기에서 패러디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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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류사회에 등장한 켈리. 영화의 제목답게 상류층 아가씨 같이 고귀한, 백조 같이 기품 있는 디자인을 보여준다. 이창과 함께 상류사회 역시 아름다운 의상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폭 넓게 부풀린 소매나 드레스 같이 넓게 퍼진 풀 스커트는 로맨틱 스타일 시대인 19세기 초중반을 떠올릴 법한 실루엣이다. 이 의상들은 헬렌 로즈가 디자인했는데, 켈리의 웨딩드레스 역시 헬렌 로즈가 디자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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켈리 하면 역시 빼놓을 수 없는게 그녀의 웨딩드레스일 것이다. 아직도 많은 여성들의 로망임과 동시에 일반인뿐에게만 아니라 연예인, 왕족 등 셀럽들까지 따라할 정도로 유명하다. 케이트 미들턴, 미란다 커 등 유명 셀럽들까지도 따라할 정도니 말은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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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테일만 봐도 정교한 레이스가 돋보이는 상의는 자칫 너무 화려해보일 수 있으나, 차이나 카라 같이 덮여있는 하이넥 형태 때문에 품위 있고 고결해보이기까지 하다. 또한 독특한 스커트의 디자인이 눈에 띈다. 하이웨스트 스커트처럼 밴드로 허리를 감싸놓은 스커트는 흔히 볼 수 있는 허리부터 아래까지 쭉 퍼지는 A라인, 몸매가 드러나는 H라인의 드레스가 아니라 튤립 꽃봉오리처럼 봉긋한 형태인데, 상의의 정숙함을 하의의 사랑스러움으로 매치시켜 켈리만의 우아함을 한껏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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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켈리를 따라하거나 오마주한 사례들 중 켈리를 뛰어넘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사진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단순히 예쁘고 날씬하다고 해서 어울리는 드레스가 아니다. 몸매 뿐 아니라 곧은 자세 역시 많이 요구되는 드레스라 어깨는 곧아야 하고 몸통은 물론 허리도 아주 가늘어야 가능하다. 켈리를 본딴 바비 인형조차 겨우 소화해냈다.
세기의 미녀로 명성이 높았던 만큼, 외모는 물론이고 특유의 분위기까지 있다보니 그런 느낌이 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드레스만 보았을 때는 켈리가 입었을 때보다는 예쁘다는 생각이 덜 들 정도.

3. 생애


아일랜드계 미국인인 아버지와 독일계 미국인인 어머니 사이의 1남 3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자수성가한 사업가인 아버지 존 켈리[3] 덕분에 부유한 환경에서 자랄 수 있었다. 고등학교에서 춤과 연기를 배웠으며, 졸업책에 존경하는 배우로 잉그리드 버그먼조셉 코튼을 꼽았다.

3.1. 배우 생활


모델로 경력을 시작했고, 브로드웨이와 텔레비전에서 연기를 하다가 마침내 헐리우드의 스릴러 영화 《14시간》에서 단역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관객과 평론가들의 눈에 띄지 않아서 연극 무대와 텔레비전에서 활동을 지속하다 1952년 서부극 영화 《하이 눈》에서 게리 쿠퍼의 상대역으로 출연하며 인지도를 높였다.
그리고 1953년 《모감보》에서 클라크 게이블, 에바 가드너와 함께 주연을 맡았다. 본래 켈리가 맡은 배역은 진 티어니로 예정되어 있었지만, 티어니가 우울증을 겪자 켈리로 교체되었다. 켈리는 이 영화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고 골든 글로브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모감보》의 성공은 켈리에게 골든 글로브 상의 영광을 안겨 주었을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거장 앨프리드 히치콕의 눈에 드는 행운까지 안겨주었다. 히치콕은 켈리를 데리고 《다이얼 M을 돌려라》와 《이창》을 제작했고, 그 전까지만 해도 순진하고 청순한 이미지였던 켈리는 히치콕의 영화로 인해 우아하고도 차가운 이미지를 얻게 되었다. 이제는 우아함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아닐까...[4] 이후에도 다작하며 연기력을 쌓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마침내 1954년에 영화 《갈채》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누렸다.
이렇게 스타덤에 올라 전성기를 구가하면서도 화려한 스캔들을 몰고 다녔으며 이런 면에 히치콕이 붙여준 별명으로는 "눈 덮인 화산".[5]스캔들의 상대로는 이란의 왕 팔레비 2세, 게리 쿠퍼, 클라크 게이블, 레이 밀랜드, 빙 크로스비, 윌리엄 홀든 등이 있는데 이 외에도 염문을 뿌린 상대는 더 많다고 추정되고 있다. 이 가운데서 가장 치명적이었던 것은 《다이얼 M을 돌려라》에서의 상대 역이었던 레이 밀랜드와의 스캔들인데, 당시 밀런드는 켈리보다 22살이나 더 많은 유부남이어서 이 스캔들은 하마터면 켈리의 배우 경력에 치명타를 가할 뻔했다.[6] 그리고 러시아 출신의 패션 디자이너 올레크 카시니의 아이를 임신결혼을 약속하기에 이르지만, 스캔들과 배우 경력이 끝날 것을 두려워한 켈리는 결국 일방적으로 파혼을 선언했다.

3.2. 배우에서 모나코의 공비로


이후 몇 편의 영화를 찍고 또다시 히치콕의 영화 《나는 결백하다》에 케리 그랜트의 상대 역으로 출연했는데, 화보 촬영차 모나코에 들렀다가 일생일대의 전환이 찾아오게 된다. 모나코 공(公)[7] 레니에 3세가 켈리를 초대한 것. 이후 레니에 3세는 12캐럿 다이아몬드를 선물하는 등 지속적인 구애를 펼쳤다. 때마침 켈리의 다음 영화 《백조》는 유럽 왕실을 다룬 코미디 영화였으며, 영화 속에서 켈리의 배역은 공주였다. 그리고 그 다음 영화 《상류사회》는 켈리의 마지막 영화가 되었다. 켈리가 레니에 3세의 청혼을 받아들여 결혼하게 되면서, 불과 5년여 만에 영화계에서 은퇴하게 된 것.
1956년 4월 18일에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레니에 3세와 켈리는 무려 1주일 일정으로 '''세기의 결혼식'''을 올렸다. 이후로 켈리는 주로 그레이스 공비(Princess Grace)[8]라고 주로 불리게 된다. 그녀가 2달러를 선물받은 뒤 레니에 3세와 결혼하게 되었다고 하여, 2달러가 행운의 상징으로 등극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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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의상 담당인 헬렌 로즈가 디자인한 웨딩드레스. 지금 봐도 전혀 촌스럽지 않고 우아하고 아름다운 디자인이라, 요새도 비슷한 디자인의 웨딩드레스가 나오고 있으며 많은 신부들에게 선택받고 있다. 하지만 몸매가 어지간히 되지 않는 이상 어울리기 힘든 타입의 웨딩드레스이기도 하다. 여담으로 영국윌리엄 왕세손과 결혼식 때 입은 케이트 미들턴의 웨딩드레스가 켈리의 웨딩 드레스와 디자인이 좀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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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 사진.
참고로 이 드라마틱한 결혼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 및 추측과 카더라 통신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오나시스와 관련된 이야기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3.3. 여러 유산 끝에 출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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켈리는 레니에 3세와의 사이에서 1957년에 장녀 카롤린 공녀(公女), 1958년에 외아들 알베르 2세, 1965년에 차녀 스테파니 공녀를 낳아 총 1남 2녀를 두었다. 세 자녀를 두었으나 임신은 세 번 이상 했다. 켈리는 알베르 2세를 낳고 스테파니 공녀를 갖기 전에 몇 번 임신했으나 건강이 좋지 못해 유산을 거듭했다고 한다. 스테파니 공녀가 늦둥이기도 했지만 여러 차례 유산한 뒤에 본 자식이라 더 애지중지했다는 비화가 있다.
카롤린 공녀의 탄생으로 레니에 3세에게 적법한 후계자가 생기자 프랑스에 합병당할 위기를 넘기게 됐는데, 이 때 모나코 전역이 축제 분위기였다고 한다. 이후 켈리 덕분에 모나코에 미국인 관광객이 폭증했다.

3.4. 불행한 결혼생활


그러나 세기의 결혼 이후, 안타깝게도 결혼 생활은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다. 켈리는 '배우 생활을 하며 매너를 지키는 법을 배웠기 때문에 결혼 이후에 따로 배울 것이 없다.'고 했지만, 공가에 적응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단 모나코에서는 프랑스어를 썼는데 켈리는 프랑스어를 잘하지 못해서 언어 장벽이 있었기 때문에 적응에 애로사항이 있었다.[9] 뿐만 아니라 공비로서 공가의 엄격한 규칙이나 전통을 제대로 지켜야 하고, 언제나 긴장하며 위엄을 갖춘 모습을 보여야만 했다. 또 크게 웃을 수도, 누구와 잡담을 할 수도 없는 생활이었다. 살아온 방식과 가치관이 다른 레니에 3세와의 갈등도 많아서 얼마 지나지 않아 켈리는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고 급기야 우울증 증세까지 보였다.[10] 게다가 시어머니, 시누이와도 사이가 좋지 못해 시집살이를 꽤나 했으며, 남편인 레니에 3세는 모나코 내에서 켈리의 영화를 상영하는 것을 금지했다. 헐리우드의 자유로운 생활을 그리워하던 차에 1962년에 히치콕이 영화 《마니》에 켈리의 출연을 제안해 왔고 배우로 복귀하려 했으나, 영화 속에서 켈리의 배역이 도벽이 있는 캐릭터였던 것이 알려지자 품위 문제로 모나코 언론이 반대하고 나섰고 모나코 국민들도 반대해서 결국 무산됐다. 이로 인해 켈리가 출연한 영화는 1956년의 《상류사회》가 마지막이 되었다.

3.5. 교통사고와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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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9월 13일에 차녀 스테파니 공녀를 조수석에 태우고 자신이 직접 차를 운전하여 프랑스로 가던 중에 갑작스런 뇌졸중을 일으키는 바람에 차가 그만 산비탈로 굴러떨어지는 교통사고가 났다. 같이 타고 있던 스테파니 공녀는 가벼운 부상만 입고 살아남았지만, 켈리는 치명상을 입고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다음날인 9월 14일, 향년 52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스테파니 공녀는 이 사고로 큰 트라우마가 생겨 한동안 엄청 고생했다. 본인의 잘못이 아닌데도 그녀가 운전을 잘못하여 그녀의 어머니를 죽게 만들었으므로 살인자라고 세계적으로 비난받았으며 별 이상한 루머까지 돌았었다. 스테파니 공녀는 "사고 당시에 어머니가 운전했다."고 계속 얘기해 왔지만 애석하게도 믿는 사람은 별로 없다(...) 켈리가 음주한 상태라 운전이 미숙한 스테파니 공녀가 운전하는 바람에 사고가 났다는 루머가 지금도 정설인 것처럼 돌고 있으며, 심지어 사고 당시에 모녀가 다투는 바람에 사고가 났다는 루머도 있다. 게다가 어머니를 잃고 나서 언니인 카롤린 공녀와 사이가 험악해졌고[11] 죄책감 때문인지 온갖 기행을 일삼으며 막장#s-1.1으로 살아서 구설수에 올랐다. 명색이 공녀임에도 모델과 가수로 활동하겠다고 나서기도 했고[12], 심지어 서커스 단원으로 활동하겠다며 서커스단과 유랑 생활을 하기도 했다. 또한 몇 차례나 유부남들과 바람이 나서 가정을 깨기도 했으며, 그것도 모자라 사생아를 낳기도 했다. 애들이 커가면서 지금은 정신 차리고 살고 있지만, 파란만장한 인생 탓인지 나이에 비해 할머니와 다름없을 정도로 폭삭 늙은 데다 인상이 좋지 않으며, 지금도 언니와는 사이가 여전히 좋지 않다. 실제로 카롤린 공녀는 스테파니 공녀가 사생아를 낳았을 때 신랄하게 비난하고 다녔다.

4. 기타


AFI에서 선정한 "전설적인 여배우 50명" 중 13위에 랭크되어 있다.
2014년에 그녀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그레이스 오브 모나코>가 나왔다. 일생 전체를 다룬 전기 영화는 아니고, 결혼 직후인 1960년대 초에 모나코가 프랑스에 병합될 위기를 배경으로 했다. 니콜 키드먼이 그레이스 역으로 출연했다.
마릴린 먼로가 섹시한 미인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것처럼 현재 그녀는 우아한 미인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그래서인지 색기가 넘치는 미녀를 보고 마릴린 먼로에 비교하는 것처럼 기품이 넘치는 미녀를 보고 켈리에 비하는 걸 자주 볼 수 있다.
뷰티풀피플닷컴(BeautifulPeople.com)에서 회원 12만 7천 명을 상대로 조사한 세계 왕족 외모 순위에서 압도적인 지지율로 1위에 랭크되었다.
포르투갈축구 선수 주앙 칸셀루의 어머니가 그녀처럼 세상을 떠났다. 칸셀루가 19세가 되던 해 어머니와 차를 타고 가다가 교통사고가 났는데, 마찬가지로 아들은 별로 안 다쳤는데 어머니는 세상을 떠난 것. 그의 소속팀 벤피카에서도 그녀를 위한 추모 의사를 발표했고, 칸셀루는 이 때문에 SNS에 꼭 '#mommyblessme(#엄마_절_축복해주세요)'라는 태그를 꼭꼭 붙여놓는다. 그러나 칸셀루는 스테파니와는 달리 아픔을 잘 이겨내고 별다른 잡음 없이 축구 선수로 잘 활동하고 있다.
레인보우 식스 시즈의 오퍼레이터 도깨비의 본명[13]은 그녀의 이름에서 따왔다.
프랑스의 축구 구단 AS 모나코 FC의 현 유니폼인 하양-빨강 대각선 디자인은 1961년에 그레이스 켈리가 제작했다. 공교롭게도 그녀가 디자인을 선보인 해에 모나코는 처음으로 리그 우승을 달성하였다.

5. 자녀



5.1. 장녀 카롤린 공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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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딸 카롤린을 찍는 그레이스 켈리.
레니에 3세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세 자녀들은 모두 화려한 스캔들을 자랑했다. 그런데 세 사람 다 어머니의 미모에는 한참 못 미친다는 평이 많다. 장녀 카롤린 공녀(Caroline, Princess of Hanover)는 여기저기 염문을 뿌리고 나이트클럽에서 춤추거나 미니스커트를 입은 사진이 언론에 공개되는 등[14] 막장으로 살며 어머니인 켈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살 때 17살 연상인 필립 주노와 기어이 결혼했지만, 켈리의 염려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주노가 바람을 피우자 카롤린 공녀 역시 맞바람을 피우다 결국 이혼에 이르렀다. 그 후에 이탈리아 석유 재벌가의 막내아들인 3살 연하남 스테파노 카시라기과 속도위반으로 두 번째 결혼을 하여 2남 1녀를 낳았다.[15] 애들도 낳으며 카시라기와 행복하게 잘 살았으나[16] 불행히도 카시라기가 요트 사고로 사망해 사별했다. 그 이후에 아이들을 데리고 조용히 사는 듯했으나 3살 연상의 '''친구 남편''' 하노버의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공작[17]빼앗아 세 번째로 또 '''속도위반'''으로 결혼했다. 1999년에 불혹을 넘겨 넷째 자녀인 알렉산드라 공주를 낳고 겉으로나마 평화로운 결혼 생활을 하는 듯 했으나, 아우구스트 공작은 폭행 관련으로 구설수에 자주 올랐으며 ## 2009년 6월부터 지금까지 별거중이다. 사실상 이혼 상태라 봐도 무방할 정도. 게다가 아우구스트 공작은 폭행도 모자라 태국 푸껫 해변에서 젊은 여성과 함께 있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사진, 기사 스크랩.[18]

5.2. 차녀 스테파니 공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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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켈리와 차녀 스테파니 공녀.
차녀 스테파니 공녀(Princess Stéphanie)는 젊은 시절에 뒷날의 패리스 힐튼처럼 온갖 막장짓으로 부모 속을 썩인 데다 수많은 남자들과 염문을 뿌렸고 결혼과 이혼을 2번 했으며, 위에 나온 것처럼 사생아도 한 명 있다.

5.3. 장남 알베르 2세


외아들인 알베르 2세(Albert II, Prince of Monaco)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의 전직 수영 선수로 자신보다 20살이나 연하인 금발 미녀 샤를린 위트스톡과 2008년부터 결혼을 전제로 교제했다. 그러나 결혼을 앞두고 결국 자신의 난잡한 사생활과 이미 태어나 있는 사생아들을 못 감당하겠다며 '''도망가려던 여자를 붙잡아 강제로 결혼하는 사실상 범죄'''를 저질렀다.[19] 이러니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콩가루 집안 중 하나일 수밖에 없게 됐다.

5.4. 논란


과연 콩가루 집안답게(?), '''집안 구성원 간의 사이도 당연히 대대로 좋지 않다'''. 카롤린 공주와 스테파니 공주의 사이가 그레이스 공비 사후부터 심각하게 안 좋은 건 워낙 유명하고, 알베르 2세가 원래 결혼에 관심이 없었던 것도 있었지만 카롤린 공주가 알베르 2세의 결혼을 방해했다는 말이 있었다. 이유인즉 알베르 2세가 정식 결혼으로 아이를 얻지 못하면, 공위를 자기 아들인 안드레아 카시라기가 잇게 되므로. 그런데 어릴 적 그렇게 예쁘고 멀쩡하던 안드레아도 술, 담배, 마약으로 맛이 갔고 2013년에 한 살 연상의 콜롬비아 재벌 상속녀 타티아나 산토도밍고와의 사이에서 아들부터 낳고 2014년 3월에 결혼식을 올렸다. 안드레아의 여동생 샬롯 카시라기는 15살 연상인 약혼남 모로코프랑스인 코미디언 겸 배우인 가드 엘마레와 약혼하고 2013년 12월에 아들을 낳았는데 아직까지 결혼 소식이 없다.[20] 그래서 ''''명색이 가톨릭을 신봉하는 나라인데 정작 공족들은 꼭 애부터 낳고 결혼한다''''고 말이 많다(...) 샬롯은 2015년을 기점으로 가드 엘마레와 관계가 끝났으며, 프랑스인 영화 프로듀서, 드미트리 라샴과 2019년 결혼했다.

6. 출연작


'''연도'''
'''작품'''
1951
14시간(Fourteen Hours)
1952
하이 눈(High Noon)
1953
모감보(Mogambo)
1954
다이얼 M을 돌려라(Dial M for Murder)
이창(Rear Window)
갈채(The Country Girl)
에메랄드(Green Fire)
원한의 도곡리 다리(The Bridges at Toko-Ri)[21]
1955
나는 결백하다(To Catch a Thief)
1956
백조(The Swan)
상류 사회(High Society)

[1] 1889년 ~ 1960년 (향년 70세). 사실 딸의 전세계적 유명세에 가려져서 그렇지, 이 분은 하술할 아들과 함께 미국 올림픽 명예의 전당에 유일하게 등재되어 있는 대선수다. 과거 벽돌공 생활을 하다가 우연하게 입문하게 된 조정에서 발군의 활약을 보인 결과, 1920 안트베르펀 올림픽 금메달을 따내기도 했다. 특히 이 올림픽은 영국의 헨리 로열 레카타 조정에 참여하려다가 당시의 엄격했던 출전 조항(조정은 원래 영국에서도 귀족들의 스포츠라 불렸던 만큼, 그가 과거 벽돌공으로 일했던 천한 신분(!)을 문제 삼았다.)에 출전이 좌절되어 그의 경쟁자였던 영국 귀족 출신의 잭 베어스포드에게 우승컵을 넘겨줬던 아픔이 있었기에, 상기한 올림픽에서 그를 물리치고 금메달을 차지했던 터라 뜻깊은 메달이었다. 은퇴 이후에는 사업가 겸 정치인, 조정 이사회 회장 등으로서 성공가도를 걸었다고 알려졌으며, 필라델피아 주의 가장 큰 공원인 페어마운틴 공원에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한 마디로 자수성가계의 전설로 불리는 인물이었던 셈이다.[2] 1927년 ~ 1985년 (향년 57세). 아버지와 같이 조정 선수가 되어 상술했던 대로 아버지가 집안 배경 문제로 불행하게 참전하지 못한 세계 최고의 조정 대회인 영국의 헨리 로열 레가타에 출전하여 우승을 차지해서 아버지의 숙원을 풀어드렸고, 이 일화는 서프라이즈에서 방영되었다. 은퇴 후에도 아버지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고향인 필라델피아의 지역 발전을 위해 힘써 왔고, 공교롭게도 그레이스가 사망하기 반 년 전이었던 1985년 3월에 아침 조깅 중 심장마비로 급사하고 말았다.[3] 1920 안트베르펀 올림픽에서 조정 선수로 활동하여 금메달을 딴적이 있다. 오빠인 존 켈리 주니어 또한 조정 선수로 활약하였다. 이들 부자의 조정과 관련된 사연이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방영되기도 했다.[4] '얼음 여왕(ice queen)'이라는 별칭을 얻는다. 뒤에 진짜 모나코 공비가 된 걸 생각하면 의미심장한 일.[5] 대중들에게 드러나는 이미지는 조신하고 기품 있는 요조숙녀지만,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는 매우 화끈한 여자였다는 의미. 유독 우리나라에서는 스캔들 없이 사생활 깨끗한 배우로 알려졌으나,후술할 스캔들로 배우 생활이 끝날 뻔한 적도 있다.[6]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켈리가 주로 한참 연상의 유부남 배우들과 스캔들이 잦았던 이유가 엘렉트라 콤플렉스 때문이라는 얘기가 있다. 아버지에게 사랑받지 못했기 때문에 아버지 뻘인 남자들에게서 사랑받고 싶었다는 것. 실제로 켈리는 그녀의 부모가 낳은 다섯 자녀들 중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던 아이였다고. 훗날 배우 활동을 접으면서까지 레니에 3세와의 결혼을 결심한 것도 자신의 결혼으로 친정 가문이 상류층에 편입하게 되면 아버지에게 인정받을 거란 생각에서였다는 비화가 있다.[7] 모나코의 국가 원수는 왕(王, King)이 아닌 공(公, Prince)이다.[8] 켈리를 모나코 왕비라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레니에 3세가 공이므로 켈리는 '공비(公妃, Princess)'라고 해야 옳다. 그런데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는 계속 왕비라고 한다.[9] 실제로 프랑스어가 미숙했던 켈리는 자녀들과 영어로 의사소통을 했으며, 대신 가정교사가 그녀의 자녀들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쳤다고 한다.[10] 그러나 어쨌든 레니에 3세는 켈리와 약 23년 간 결혼 생활을 하며 자녀를 셋이나 낳았고 함께 정성껏 길렀다. 또한 켈리가 사고로 숨지자 생중계되는 그녀의 장례식에서 공의 체통을 다 내려놓고 대놓고 흐느끼며 사별로 인한 슬픔을 못 견디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켈리 사후 20여 년 뒤에야 죽었지만 그때까지 재혼하지 않고 쭉 혼자 살았다. 이런저런 점을 보면 잡음은 있었어도 켈리를 아내로서 나름 사랑했던 것으로 보인다.[11] 이 역시 스테파니 공녀가 운전하다 사고를 냈다는 루머를 정설처럼 받아들여지게 만드는 데 크게 일조했다. 카롤린 공주와는 한 남자를 두고 신경전까지 벌인 적도 있었다.[12] 정작 본인 명의로 발매한 앨범은 혹평받고 망했다(...) 그나마 잘 알려진 건 마이클 잭슨의 노래인 'In the Closet'에서 Mystery Girl 명의로 내레이션을 한 것인데, 음색은 꽤 괜찮다는 평을 받았다.[13] 남은혜(그레이스 남).[14] 일반인들 입장에선 나이트클럽에서 춤추거나 미니스커트를 입는 게 뭐가 나쁜가 싶겠지만, 카롤린 공녀의 신분도 신분이거니와 왕가나 공가 사람들은 일반 국민들에게 모범이 되어야 해서 충분히 문제가 된다. 비슷하게 스웨덴의 마들렌 공주도 워낙 쇼핑과 파티를 즐겨 'Princess Party'로서 스웨덴 언론의 가십란을 화려하게 장식했었던 적이 있었다. 물론 진짜 막장이었던 카롤린 공녀에 비하면 마들렌 공주는 그냥 평범하게 노는 걸 좋아하는 정도뿐이었지만.[15] 안드레아(1984년생), 샤를로트(1985년생), 피에르(1987년생)이다. 알베르 2세가 미혼일 땐 안드레아가 공위 계승권에 가까웠고 한때 외모도 출중해서 많은 인기를 누렸다. 샬롯 역시 아름다운 외모에 뛰어난 패션 감각을 지녀서 예전부터 인기 많은 셀렙이었다.[16] 실제로 카시라기는 카롤린 공녀가 진정으로 사랑했던 남자였으며, 이 당시 카롤린 공녀의 모습을 보면 정말 행복하고 안정된 모습이었다.[17] 명목상의 하노버 국왕이자 6대 컴벌랜드와 테비오트데일의 공작(1799)이다. 참고로 후자는 1918년의 작위몰수법으로 몰수되었다.[18] 아이러니하게도 엄연한 군주국인 모나코 공국보다 없어진 왕실인 하노버 집안 몸값이 더 높아서(...) 하노버의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공작과의 결혼으로 유럽 대륙 정식 왕족 반열로 대우받고 있다. 그래서 카롤린 공녀로선 굳이 이혼을 서두를 필요가 없다.[19] 카더라일 가능성도 있으나 그렇다고 하기에는 2012년에 거행된 결혼식 당시에 샤를린 공비가 너무나 서럽게 울었다. 게다가 신랑인 알베르 2세는 그런 신부를 보고도 달래주기는커녕 못마땅한 표정으로 쏘아보고 있어서 구설수가 심화됐다. 뿐만 아니라 결혼 후 얼마간 공식 석상에서 샤를린 공비는 억지로 미소 짓는 듯한 서글픈 표정을 보였다. 또 2014년 초까진 결혼한 지 3년이나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임신 소식이 없었다. 비슷한 시기에 결혼한 윌리엄 왕세손케이트 왕세손빈은 그보다 한 해 전인 2013년 7월에 이미 아들을 낳았다. [20] 엘마레가 유대인이라 공실에서 결혼을 반대하는 거 아니냐는 추측이 있다. 그러나 굳이 결혼하지 않아도 사실혼 관계로 얼마든지 아이를 함께 기를 수 있으니 결혼을 서두를 필요는 없다.[21] 놀랍게도 '''6.25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이다. 이외에도 미키 루니등이 출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