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비 신씨

 



'''폐비 신씨 (廢妃 愼氏)
거창군부인 신씨 (居昌郡夫人 愼氏)'''
'''호칭'''
제인원덕왕비 (齊仁元德王妃, 1505년 ~ 1506년)
거창군부인 신씨 (居昌郡夫人 愼氏, 1506년 ~ 사후)
'''본관'''
거창(居昌)
'''능묘'''
연산군묘(燕山君墓)
'''배우자'''
연산군(燕山君)
'''아버지'''
거창부원군 신승선
'''어머니'''
중모현주 흥안부부인 이씨
'''생몰'''
'''기간'''
음력 1476년 11월 29일 ~ 1537년 4월 8일(항년 61세)
양력 1476년 12월 15일 ~ 1537년 5월 16일(항년 61세)
'''재위'''
'''기간'''
1494년 12월 ~ 1506년 9월
1. 소개
2. 생애
3. 자녀
4. 인물평
5. 가족 관계
5.1. 친정 (거창 신씨)
5.2. 왕가와 외가[1] (전주 이씨)
6. 기타
7. 폐비 신씨를 연기한 배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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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조선 10대 왕 연산군의 정비. 연산군의 정실로 영의정 신승선의 딸 (4녀)이며 좌의정 신수근의 누이이다. 단경왕후에게는 고모이자 손위 동서가 된다.[2] 세종의 아들 임영대군의 외손녀이기도 하다. #[3]

2. 생애


13세가 되는 1488년 2월 신씨를 세자빈으로 삼으라는 성종의 교지가 내려진 뒤 동갑내기인 연산군과 가례를 올려 세자빈이 된다.
갑자사화가 있던 날, 연산군이 성종의 후궁귀인 정씨귀인 엄씨를 때려 죽이고 장검을 뽑아든 채 대비전으로 쳐들어가자 울면서 그의 팔을 잡고 간하였는데, 그녀가 그날 연산군을 저지한 유일한 인물이었다. 연산군의 성격상 그 즉시 베어버려도 이상할 것이 없었으나, 연산군은 말 없이 칼을 꽂고 인수대비전으로 자리를 옮겼다. 사실상 갑자사화에서 유일하게 무탈했다.
1502년 아버지 신승선이 사망할 당시의 연산군일기 기록을 보면, "신씨는 만삭이라 친상 중이지만 고기를 못 먹게 할 수 없다"는 보고를 받은 연산군은 아예 거애(곡하는 것)도 못하게 막아버린다.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어 강화도로 유배를 떠나가는 처지의 연산군을 모시기 위해 자신도 그와 같은 유배지로 보내달라며 울부짖었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사저로 보내졌다.[4] 연산군이 죽고 난 후 그의 신주를 직접 모신 것으로 추정되며, 중종에게 자기가 죽으면 자신을 연산군 옆에다 묻어달라는 요청을 한다. 다만 연산군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녀들은 매우 비참한 말로를 겪었다.
1521년 (중종 16) 11월, 빈(嬪)의 예우와 함께 속공[5]한 죄인 안처겸(安處謙)의 집을 받는다.

3. 자녀


요절한 자식까지 합쳐 7남 2녀가 있었다.
총명했던 폐세자 황과 창녕대군 이성은 왕자라는 이유로 반정 세력에게 피살[6]되었기에 결국 출가외인이었던 휘신공주만 남았다.
휘신공주는 능성 구씨 능양위 구문경(具文璟)[7]에게 하가하여 1남을 두었는데, 혼인 후에 연산군이 폐위됨에 따라 그녀도 수난을 겪어야 했다. 폐서인되어 공주 직첩을 회수당하고, 재산을 몰수당하고 시아버지 구수영의 청으로 이혼까지 당하는 등 왕실 여인이 당할 수 있는 온갖 비참한 꼴을 다 당하게 된다. 다행히 중종 3년에 중종의 배려로 구문경과 재결합하고 집도 하사받았으나, 공주 신분은 되찾지 못했는지 계속 "구문경의 처"로 불렸다. 그 아들인 구엄이 연산군, 폐비 신씨, 의정궁주 조씨[8]가 나란히 묻혀 있는 도봉구의 묘를 지켰다.

4. 인물평


폐비 신씨는 어진 덕이 있어 화평하고 후중하고 온순하고 근신하여, 아랫 사람들을 은혜로써 어루만졌으며, 왕이 총애하는 사람이 있으면 비가 또한 더 후하게 대하므로, 왕은 비록 미치고 포학하였지만, 매우 소중히 여김을 받았다.
매양 왕이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음난, 방종함이 한없음을 볼 적마다 밤낮으로 근심하였으며, 때로는 울며 간하되 말 뜻이 지극히 간곡하고 절실했는데, 왕이 비록 들어주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성내지는 않았다.
또 번번이 대군·공주·모보(姆保)·노복들을 계칙(戒勅)하여 함부로 방자한 짓을 못하게 하였는데, 이때(폐비가 된 때)에 이르러서는 울부짖으며 기필코 왕을 따라 가려고 했지만 되지 않았다.

- 《조선왕조실록

사씨남정기의 여주인공 사정옥의 진정한 모델로 추정된다. 폐비 신씨는 내명부를 이끄는 왕비였으면서도 궁녀후궁에게 '''존댓말을 사용'''했었을 정도로 인품이 훌륭했는데, 오죽했으면 사관들마저 "중전이 너무 답답하다."라고 한숨을 내지을 정도였다.[9]
연산군과 달리 거의 성인에 가까운 성숙함과 덕을 지녔다. 연산군도 그녀가 '궐내 야당'으로 직언을 해도 듣기만 할 뿐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칭찬했고, 사망하기 직전 "중전이 보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다.
그 착하고 어진 인품 덕인지, '''연산군과 달리 어그로를 끌 만한 짓을 자의로 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고''', 폐비가 되고 나서도 여론에게 욕도 거의 먹지 않았다.[10] 왕비 시절 온화한 성품으로 윗전에는 공손하고 궁인들에게 자애로운 덕이 있는 왕비로서 존경을 받았고, 착한 성격대로 행동했기 때문에[11] 폐비가 된 것을 제외하면 어딘가에서 빌미를 잡히지 않고, 큰 모욕을 당하지도 않고 편안한 삶을 살며 여생을 마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12] 물론 반정공신들 때문에 자식들은 다 죽거나 삶이 험해졌으니 편하게 살았다고만 할 수도 없겠지만.

5. 가족 관계



5.1. 친정 (거창 신씨)


  • 할아버지 : 신전 - 황해도감사
  • 할머니 : 순흥 안씨
  • 아버지 : 거창부원군 신승선[13] - 영의정
  • 외할아버지 : 정간공 임영대군 이구 - 세종의 4남.
  • 외할머니 : 제안부부인 전주 최씨.
  • 어머니 : 중모현주 흥안부부인 이씨.
  • 오빠 : 익창부원군 신수근 - 영의정.
  • 오빠 : 신수겸 - 형조판서.
  • 오빠 : 신수영 - 형조판서.
  • 언니 : 거창 신씨, 남경에게 출가.
조선 역대 왕후들 중에서도 인현왕후와 더불어 보기 힘든 명문가 출신이다. 이는 자신의 조카딸이자 중종의 첫 번째 부인이었던 단경왕후도 마찬가지였다.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세종의 아들인 임영대군의 외손녀이자 연산군이 그녀의 칠촌 조카이기도 하다. 그녀의 어머니 중모현주 이씨는 임영대군의 딸로 세종의 손녀였으며, 오빠 3명 역시 고위직을 역임했다.
언니가 남경[14]라는 인물과 결혼하여 낳은 아들인 남치원이 성종의 서4녀인 경순옹주(숙용 심씨 소생)와 결혼한다. 거창군부인에게는 손아래 시누임과 동시에 이질부가 된다.

5.2. 왕가와 외가[15] (전주 이씨)


  • 배우자 : 연산군 (1476년 11월 6일 ~ 1506년 11월 6일)
  • 장녀 : 폐 휘신공주 이수억 (1491년 9월 22일[16]~ ?)
  • 차녀 : 공주 (1492년 또는 1493년[17] ~ ?)
  • 장남 : 원자 (1494년 2월 23일 ~ 1494년 3월 29일)
  • 차남 : 폐세자 이황 (1497년 12월 18일 ~ 1506년 9월 24일)
  • 삼남 : 폐 창녕대군 이성 (1500년 5월 22일 ~ 1506년 9월 24일)
  • 사남 : 대군 이인수 (李仁壽, 1501년 5월 14일 ~ 1503년 9월 12일)
  • 오남 : 대군 이총수 (李聰壽, 1502년 ~ 1503년)
  • 육남 : 대군 이영수 (李榮壽, 1503년 ~ 1503년)
16살이었던 1491년부터 최소 26살 때까지 자식들을 연년생으로 낳았다

6. 기타


  • 중종의 첫 정실인 단경왕후 신씨신수근의 딸이며 이 폐비 신씨의 조카다. 단경왕후 신씨도 중종반정 직후 신수근의 딸이라는 이유로 폐위되어 폐비가 되었기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고모와 조카가 나란히 폐비가 된 셈이다(...) 폐비 신씨와 달리 단경왕후 신씨는 후에 복권이 되었지만 복권이 된 시기가 한참 뒤인 영조 대였기 때문에, 당대 기록에는 둘 다 '폐비 신씨'로 되어 있다.[18] 이 때문에 실록을 읽다 보면 연산군의 부인에 대한 건지, 중종의 부인에 대한 건지 헷갈릴 때가 있다. 문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 왕실 역사상 처음으로 간택 없이 세자빈으로 책봉된 사례이다.
  • 연산군과 금슬이 좋았던 것 같다. 중종반정으로 유배된 연산군이 "아내 신씨가 보고 싶다"는 한 마디만 남기고 사망했다는 점도 그렇고, 또 실록을 보면 연산군이 신씨를 아꼈다는 말이 나오거나, 그녀와 그녀의 친척들에게 이것저것 챙겨준다는 기록이 몇몇 보인다. 아래 서술된 대로 둘 사이에는 자녀도 많았고, 갑자사화 당일 폭주하는 연산군을 유일하게 막아선 인물이 신씨이며, 그 와중에 또 연산군은 그녀는 해하지 않고 돌아섰다. 엽색 행각을 벌였다고 기록돼 있는 남편을 둔 신씨가 이렇게까지 그 남편의 옆을 지키고 싶어했던 이유는 추측밖에 할 수가 없다. 신씨가 사관들의 평가대로 너무 착해서 그랬던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남편을 진심으로 사랑했기에 그랬을 수도 있다.
  • 슬하의 자녀만 무려 8명~9명으로 추정된다. 흔히들 '연산군의 여자'라고 하면 장녹수를 쉽게 떠올릴 텐데, 정작 그 장녹수연산군과의 사이에서 얻은 자식이 딸 하나밖에 없었다. 그리고 기록을 보아도 연산군의 그 많은 후궁들이 낳은 자식들을 다 합쳐봐야 신씨 한 명한테서 얻은 자식보다 1~2명 많은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쉽게 말해, 연산군의 후궁들 중 연산군의 아이를 가진 후궁은 그리 많지 않다는 뜻이다. 신씨의 시아버지 되는 성종이 무려 28명의 자식을 보았지만, 3명의 정실 부인(공혜왕후, 폐비 윤씨, 정현왕후) 사이에서 얻은 자식은 겨우 3명 뿐이었고, 나머지 25명의 자식들은 모두 후궁들한테서 보았다는 점과 대조적이다.
  • 연산군은 그녀를 볼 때마다 하던 만행을 멈췄으므로, 어떻게 보면 연산군의 아주 작은 양심을 상징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실록을 읽다 보면 그야말로 신씨는 연산군의 거의 유일한 브레이크라고 할 만한 존재였다.

7. 폐비 신씨를 연기한 배우들


연산군을 무대로 한 사극에 등장한다.[19] 보통은 막장 남편인 연산군을 어떻게든 달래보려고 하는 어질고 선량한 캐릭터로 나온다. 실제 인물도 그러했고.
당차고 탐욕스러운 모습도 어느 정도 있는 모습으로 나왔다. 그 탐욕스러운 모습에 연산군이 경계를 할 정도. 사실 연산군은 폐비 신씨에게 개인적인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눈치 없이 연산군의 열등감을 부채질하는 발언과 행동을 자주 해서 눈 밖에 난다. 그리고 연산군을 은근히 무시하고 깔보는데, 심지어 자기 어머니와 단 둘이 있을 때는 연산군을 "큰어머니를 범한 패륜아" 라고까지 말했다. 물론 이는 당대에도 소문으로 취급받던 이야기에 불과하며, 이 드라마의 폐비 신씨의 캐릭터에 대한 설정들도 정하연의 사극들이 다 그렇듯이 역사적인 사실과는 다 무관한 이야기들이다.
장녹수의 작가 정하연이 집필한 사극이지만, 장녹수에서와 달리 여기서는 실록에서의 묘사와 비슷하게 묘사되는 편. 오빠 신수근과 함께 연산군의 폭정에 대해 전전긍긍하는 모습과, 시어머니인 정현왕후와 시동생 진성대군을 보호하는 모습을 많이 보인다. 다만 실제 역사에서와는 달리 남편인 연산군과 그닥 금슬이 좋지 않은 모습을 보이는데, 세자 시절부터 싹수가 심상치 않아보이는 남편을 내심 두려워하는 면모를 보이며[20], 이를 간파한 연산군은 자신의 부인에게 "부인도 날 멸시하고 깔보고 있지 않습니까!"라고 갈구기도 한다. 게다가 아버지 신승선이 죽었을 때 남편 연산군은 대놓고 장녹수, 제안대군과 함께 술 마시면서 장인에 대해 고인드립을 날리는가 하면, 할머니 인수대비의 처소에서 미쳐 날뛸 때 정현왕후와 함께 말리려다 오히려 연산군에게 자기의 뜻을 거역하면 자신의 아버지자신의 어머니에게 그랬듯이 똑같이 사약을 내려버릴 것이라고 무시무시한 협박까지 받기도 한다. 흠좀무.
실제 역사에서처럼 어진 왕비로 그려지며, 자신의 남편에게 적대적이기까지 한 엄귀인과 정귀인에게도 극진히 대접해주는 대인배. 심지어 출신이 천하다며 엄청 깔보는 인수대비와 달리 자신의 남편의 총애를 독차지하고 있는 장녹수마저도 후궁으로 잘 대접해주기까지 한다. 이렇게 어진 데다가 대인배이기 때문에 평소에 미쳐 날뛰는 연산군도 적어도 신씨만큼은 조강지처로 잘 우대해주며, 심지어 장녹수에게 "중궁은 자신의 조강지처이니 만약 중전 자리를 노리고 있다면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를 날리기도 한다.
이 작품에선 연산군보다 오빠 신수근과 자주 나온다. 연산군에게 아내이기보다 가족으로서의 언급이 종종 등장한다. 이 점은 왕과 비와 어느 정도 비슷하다.

[1] 외할아버지가 세종의 4남인 임영대군이므로 외가와 시가가 같다.[2] 조선에서는 근친혼이 터부시되었지만 겹사돈에는 관대했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다.[3] 계산해보면 연산군 쪽이 칠촌 조카가 되는 관계. 세종대왕연산군에게 고조부가 되고, 처 신씨 입장에서는 외증조부. 그리고 시할아버지인 의경세자가 외당숙이기도 했다. 다만 나이는 거꾸로 되어서 연산군이 생일이 20일 정도 빠른 동갑이다. 칠촌 관계이면 현재 민법으로는 혼인할 수 없는 관계지만, 조선시대에는 동성동본 혼인만 기피했을 뿐이지 근친혼에 대해서는 지금보다 더 관대했기에 성씨와 본관만 다르면 육촌, 칠촌 사이의 혼인은 매우 흔하게 이루어졌다. 사실 당대에도 "연산군하고 신씨가 칠촌인데 괜찮냐"는 의견은 있었으나 문제 없다고 해서 넘어갔다.[4] 여담으로 나중에 폐위된 광해군의 경우 중전 문성군부인 유씨와 함께 유배되었다. 유씨가 아들과 며느리의 참혹한 죽음 소식을 듣고 상심하여 죽는 바람에 얼마 되지 않아 홀아비가 되었지만.[5] 屬公. 임자가 없는 물건이나 금제품, 장물 등 관부로 넘기던 일을 말한다.[6] '사사'라고 표기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건 절차상 성인에게 합법적으로 사형을 선고, 집행했을 때다. 이 건은 조선시대의 법으로도 세조의 사례처럼 하도 무시하는 일이 많아서 그렇지 엄연한 불법이었다. 역적의 자손이라 해도 그 나이가 16세가 되지 않았거나, 16세 이상이라도 여성이라면 법적으로 사형은 불가했기 때문이다. 노비로 전락시키는 것이 최고형이었다. 당장 매국노 황사영의 일가는 몰살했지만 자손은 사형을 면했으며, 김자점의 자손도 마찬가지. 윤임이 역적이 되어 일가가 몰살했지만 윤임의 아들 중에서 윤흥신부터는 사형을 면했는데, 선조 임금이 복권시켜줘서 윤흥신이 무과에 급제했다. 이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다대포에서 왜군을 막다가 전사했다.[7] 세종의 아들 영응대군의 외손자이다.[8] 태종이 늙어서 세종에 의해 들여진 후궁이지만, 태종의 이른 죽음으로 청상과부가 되었다. 원래 이 땅은 임영대군의 땅이자 조씨가 묻힌 무덤이었다.[9] 이 또한 사정옥도 유사하다. 사정옥 또한 현모양처의 이미지에 완벽하게 부합하지만, 당대 소설을 읽은 양반들이 평가한 사정옥의 모습은 "이런 답답한 여자가 있나?" 라는 반응이었다. 시대를 감안해보면 그 시대 사람들에게서조차 "너무 착해서 탈" 이라고 말할 정도. 뭐 하나 흠 잡을 데가 없으면서도 안타까움을 불러 일으키는 호구로 보였다고 봐야 할 듯. 사실 잘 보면 알겠지만 폐비 신씨나 사정옥이나 남편을 잘못 만나서 개고생을 해야 했었다. 단, 폐비 신씨 쪽은 사관의 안타까움도 나름 논거는 있는데, 행위 자체는 결코 나쁜 것이 아니지만 당시엔 위계질서가 엄격했기에 사관이 한탄한 이유는 "착한 것은 좋은데, 저러다가 아랫사람들에게 호구로 보이는 거 아닌가?" 이란 이유였을 것이다.[10] 사실 그 욕 먹은 내용마저도 '''남편 때문에 억울하게 먹은 것뿐이다.''' [11] 사관이 답답하다 할 정도로 궁인들에게 예의를 잘 갖추는 태도를 보였다.[12] 집안의 노비들이 떠나지 않고 그녀의 옆에 남아 있었다.[13] 1436년 (세종 18년) ∼1502 (연산군 8년). 세조 12년인 1466년 문과에 장원급제했으며, 예종의 즉위년 (1468년) 때 익대공신으로서 거창군에 임명된 후 고위직을 역임하다 신씨가 중전이 된 것을 계기로 영의정에 올랐다. 다만 과거 장원급제 등 본인의 능력도 좋은 인물이다.[14] 신극성, 이장길과 더불어 삼맹호(三猛虎)라 불리며 가렴주구를 일삼았다 한다.[15] 외할아버지가 세종의 4남인 임영대군이므로 외가와 시가가 같다.[16] 《세자빈녀수억아기씨태지》에는 1491년 9월 22일 해시에 태어났다고 적혀있고《선원록》에는 1492년 생이라고 적혀있다.[17] 추정이다. 1495년 1월, 성종이 죽은 이후에 쓰인 《성종대왕묘지문》에 "신씨가 두 딸을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라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아 성종이 죽기 전 태어난 것은 확실하고, 휘신공주와 원자의 출생연도를 감안하면 1492년, 혹은 1493년에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18] 사실 미묘한 차이가 있는데, 당대 기록에서 단경왕후의 경우는 '성+비'로 된 명칭인 신비(愼妃)로도 호칭하는 경우가 많으나 폐비 신씨는 그렇지 않다.[19] 왕의 남자와 같이 아예 등장하지 않는 경우도 존재한다.[20] 하필이면 자신의 처소에서 아버지와 오빠와 함께 폐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가 예상치 못하게 연산군이 처소에 들어와서 "폐비에게는 아들이 있었다지요?"라고 물을 때 엄청 뜨끔해한다. 이 때 아직 연산군은 성종의 함구령으로 인해 자신이 폐비의 아들이란 사실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