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규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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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전규삼 (全奎三)
'''생몰년도'''
1915년 9월 26일 ~ 2003년 5월 8일
'''국적'''
대한민국
'''출신지'''
일제강점기 개성
'''출신학교'''
송도고등학교[1]- 호세이대학교
1. 소개
2. 생애
2.1. 농구선수 출신 사회 교사 전규삼
2.2. 전임 농구 지도자로 변신
2.2.1. 중학생 이충희를 실전에 안 내보낸 이유
2.2.2. 오전 연습이 없는 송도고 농구부
2.2.3. 선수를 체벌하지 않는 선생님
2.2.4. NBA 마니아 전규삼
2.2.5. 초고속 속공 농구의 창시자
2.2.6. '할아버지'라고 불린 감독님
2.3. 말년
2.4. 제자들의 말


1. 소개


대한민국의 전직 농구 지도자 이자 대한민국 체육계에서 다시나올수 없는 명 지도자

'''한국 농구 100여 년 역사에 내로라 하는 슈퍼 가드진을 키워낸 불세출의 명 지도자이자 스타 제조기.'''

대한민국의 역대 체육 지도자 중에서 '''자신의 권위를 내려놓고 제자의 눈높이에서 오로지 기술과 인성만을 지도 과정에서 중요시'''했던 몇 안되는 참교육자.

인천광역시에서 지도자 생활의 대부분을 보낸 이유로 ''''인천농구의 대부''''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2. 생애



2.1. 농구선수 출신 사회 교사 전규삼


전규삼은 개성에서 한 정미소 주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 당시 전규삼의 아버지가 정미소 주인이었다는 것은 집안 형편이 꽤 괜찮았다는 증거. 개성 송도고등보통학교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그는 학교 내 농구부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 [2] 개성의 지역 신문이었던 고려시보에 의하면 타 도시와의 대항전에서 포워드로 활약한 기록이 있다. 서울 경신고교와의 경기에서는 2득점, 서울 연합 팀과의 경기에서는 3득점을 올렸다.
송도고보를 졸업한 그는 일본 호세이대학(법정대학)으로 유학을 떠난다. 경제학을 전공했고 대학에서도 농구선수 생활을 했다고 전해진다.[3] 대학을 졸업한 그는 모교인 송도고보에 교사로 들어오면서 교직 생활을 시작한다. 사회과학 관련(경제학) 전공자 답게 그의 담당 과목은 사회 과목이었다.
그러나 농구선수 출신이자 농구팬의 피는 못 속이는지라 학생들이 농구를 할 때 자주 지도를 했다고 알려져 있다. 특히 볼 핸들링 등 기본적인 기술을 강조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이는 후술할 전규삼의 빛나는 제자들을 가르칠 때에도 그대로 투영된다.
그러던 중 6.25 전쟁이 터지자 송도학원은 인천광역시로 피난길에 오른다. 전규삼도 인천으로 같이 피난길에 올랐다. 그러나 아내와 두 아들은 그대로 개성에 둔 채 내려왔다. 나중에 본인은 "두어달 뒤면 다시 개성에 갈 줄 알았는데 영영 못 가게 됐다"며 씁쓸한 한탄을 종종 했다고 한다.[4]

2.2. 전임 농구 지도자로 변신


전쟁의 상처가 서서히 아물던 1960년대 중반 송도고등학교는 농구부를 활성화하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농구부를 맡을 전임 지도자로 평소 학생들에게 무료로 농구를 가르쳐주던 전규삼을 임명한다.[5] 전규삼은 1966년부터 송도중·고 농구부 코치로 전임 농구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전규삼은 금전적 손해를 보기도 했다. 그 당시 일반 교원들의 급여는 월 3만원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농구부 코치를 맡자 급여가 깎였다고 한다. 그 당시 체육 지도자들을 괄시했던 사회 풍조가 그대로 드러나는 증거. 그럼에도 흔쾌히 농구부 코치를 맡은 것은 그만큼 전규삼의 농구사랑이 어마어마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농구부 코치를 맡으면서 키워낸 첫 번째 수제자는 서상철[6]과 유희형.[7] 전규삼은 이들에게 기본적인 드리블과 패스 등 기본기에 충실한 플레이를 할 것을 강조했다.
1970년대 한국 농구를 대표했던 장신 포인트 가드 김동광 은 서상철-유희형 콤비의 뒤를 잇는 전규삼의 수제자 중 한 명이다. 김동광은 스카우팅 비화가 있다. 부산에서 인천으로 전학 온 김동광은 같은 혼혈 출신인 문영환을 만나 절친이 됐다. 이들을 눈여겨 본 사람이 있는데 바로 전규삼. 그는 두 사람에게 농구를 권유했는데 이유가 독특하다. "서양의 피를 물려받았으니 나중에 키와 덩치가 훨씬 커지면 농구하기가 좋을 선수"라는 것이 스카우팅 배경이라고 한다.
이후 전규삼은 숱한 인재들을 길러내는데...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초특급 가드들이 줄줄이 소세지처럼 연이어 자라났다. 짧게 요약하자면 이충희, 정덕화, , 신기성, 홍사붕, 김승현, 김현중 등이 그의 손을 거쳐간 선수들이다.
1996년 일선을 떠나기 직전까지 그는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내며 '''한국농구의 대부'''로 명성을 높였다. 그의 지도자 인생에는 일화도 많다.

2.2.1. 중학생 이충희를 실전에 안 내보낸 이유


한국 농구가 낳은 불세출의 슈터 이충희는 송도중학교 시절 농구를 시작했다. 그저 농구가 좋았지만 키가 작아서 항상 문제였던 선수가 중학생 이충희였다. 그가 비빌 언덕이라고는 깨끗한 슛. 그런 이충희를 눈여겨 본 전규삼은 어린 이충희를 혹독하게 기본부터 훈련시켰다.
특히 전규삼은 이충희를 절대 실전에 내보내지 않았다. 대신 무조건 슛의 기본부터 가르쳤다. ''''기본기가 없는 선수는 대성할 수 없다''''는 전규삼식 지도 방침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사례다. 이충희는 하루 최소 1000개의 슛을 밤낮으로 연습하면서 슛폼을 완성한 뒤에야 실전 경기에 나설 수 있었는데 그것이 송도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이후에도 이충희는 미친듯이 슛 연습만 하는 선수로 유명했고 고3이 된 이후에는 그야말로 슛에 도가 텄다. 고려대 진학 이후 아시아의 슛도사로 진화한 이충희의 활약상은... 말 안해도 알 듯.

2.2.2. 오전 연습이 없는 송도고 농구부


탄탄한 기본기 연마와 꾸준한 연습을 입이 닳도록 강조한 전규삼이었지만 그는 절대 학기 중에 오전 훈련을 소집하지 않았다. 송도고 농구부의 연습은 무조건 오후 2시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농구선수라고 하더라도 기본적인 지식을 꾸준히 공부해야 사회에 나가서도 잘 살아나갈 수 있다는 전규삼의 인생 지론 때문이었다. 본인 스스로도 학창시절부터 '''공부하는 농구선수'''였기에 제자들에게도 이것을 그대로 물려준 셈이다.
이 때문에 유희형은 새벽에 슛 연습을 하고 수업시간에 졸지 않기 위해 맨 앞자리에 앉아서 수업을 듣고 연습에 임했고, 신기성은 "농구를 못해서 욕먹은 적은 없지만 숙제를 안 해와서 욕먹은 적은 있다"고 말한 적도 있다.
실제로 신기성의 증언처럼 농구를 못 한다고 욕을 먹지는 않는데 성적이 떨어지면 혼이 났다고 한다. 공부하는 학생인 만큼 영어 단어, 수학 공식 하나라도 더 외우라고 채근했다는 것이 제자들의 증언이다.

2.2.3. 선수를 체벌하지 않는 선생님


전규삼의 지도 방식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단 한 차례도 선수들에게 폭언이나 폭력을 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실 대한민국의 학원 스포츠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학생 선수에 대한 지도자의 상습적 폭력과 폭언[8], 선후배 간의 구타 문화, 학부모와의 비리 유착 등인데 전규삼은 이런 것에서 절대적으로 자유로웠다.
전규삼은 30년 넘게 송도 농구부를 지도하면서 한 번도 학생들을 때리거나 욕을 한 적이 없다고 한다. 잘못된 것이 있다면 매를 들어서 바로 잡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죄가 됐는지를 제자의 눈높이에서 설명하는 것이 그의 교육 철학이었다. 그리고 그의 언행에는 '''제자를 향한 칭찬이 먼저'''였다. 이는 체육 지도자를 넘어 이 땅의 모든 교육자들이 배워야 할 철학이기도 하다.
송도 출신 선수들은 선후배 간 알력이 적은 것으로도 유명한데 이 역시 전규삼의 가르침 때문이다. 어느 날 선배 선수가 후배 선수를 때리거나 부당하게 혼내는 것을 전규삼이 봤고 그는 후배를 나무란 선배 선수를 체육관에 들어오지도, 농구공을 잡지도 못하게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규삼은 항상 학생들에게 '''"농구선수이기 전에 사람이 먼저 되거라"'''라는 가르침을 잊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공교롭게도 이는 송도중·고의 교시(校是)인 '사람이 먼저 되라'와도 맥을 같이 하고 있다.

2.2.4. NBA 마니아 전규삼


우리나라에 NBA가 본격적으로 소개된 것은 마이클 조던드림팀이 코트를 휘젓고 다니던 1990년대 초반부터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옛날부터 NBA를 눈여겨보고 당시 선수들이 펼친 고급 플레이를 연구해서 제자들에게 지도시킨 사람이 있다. 그가 바로 전규삼이다.
전규삼은 과거 미국 농구잡지를 즐겨 볼 정도로 선진 농구에 관심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특히 AFKN 등을 통해 NBA 경기를 본 뒤에는 이를 꼼꼼히 메모한 뒤 제자들에게 가르쳐줬다. 그 덕분에 송도중·고 농구부는 선진 농구와 토종 농구의 접목으로 일취월장했고 한국을 대표하는 학생 농구단이 될 수 있었다.
전규삼은 앨리웁이나 훅슛, 비하인드 백 패스 등 1970년대1980년대 학생 농구에서 보기 어려운 기술도 적극 권장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다른 학교 농구부 지도자였다면 하라는 농구는 안하고 겉멋만 잔뜩 들었다면서 귓방맹이를 후려 갈겼을 일이지만 전규삼은 달랐다. 학생들이 즐기는 농구를 하길 바랐고 우리나라보다는 해외 선수들이 펼치는 고급 플레이를 본받길 희망했다. 그 덕분에 선수들의 기량은 한 단계 더 진화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송도 출신 중에 유능한 테크니션 가드들이 많은 것은 NBA를 통해 본 기술을 우리 식으로 맞게 개량해 선수 개개인에게 맞춤형 훈련 프로그램으로 제공했다는 후덜덜한 지도법 덕분이라는 분석도 있다.

2.2.5. 초고속 속공 농구의 창시자


전규삼이 지도한 송도 농구의 가장 큰 특징은 빠른 스피드에 있었다. 드리블을 하지 않고 빠른 스텝으로만 볼을 연결해 상대 진영을 휘저어 득점에 성공하는 것이 전규삼식 속공 농구의 기본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공이 림을 맞은 후 공중에서 리바운드 잡은 볼을 착지 전에 이미 포인트 가드에게 패스하고 볼을 받은 가드는 투 스텝 이전에 상대편 골밑으로 이미 침투한 선수에게 볼을 바로 찔러주는 방법이었다. 더 쉽게 하자면 '''리바운드-패스-패스-패스-슛'''의 테크트리로 게임이 이뤄진다.
신기성, 김승현의 전매특허였던 초고속 속공이 바로 여기서 태어난 셈이다. 초고속 속공의 DNA는 전규삼이 학교를 떠난 뒤에도 송도 농구의 기본 핵심으로 뿌리를 내렸고 초고속 속공의 계보는 역시나 송도에서 농구를 배운 김선형에게로 이어진다.

2.2.6. '할아버지'라고 불린 감독님


수많은 전규삼의 제자 중에서 전규삼을 감독님, 내지는 코치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한다. 전규삼 감독의 젊은 시절에 가르침을 받은 유희형이나 서동철, 김동광, 이충희 등은 '전규삼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신기성, 김승현 등 그 이후 세대들은 '''"전규삼 할아버지"'''라고 불렀다고 한다.[9] 심지어 송도 출신이 아님에도 전규삼으로부터 농구를 배웠다고 전해지는 서장훈도 "전규삼 할아버지께 농구를 배운 기억이 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권위를 내려놓고 친근하게 다가가는 선생님이었다. 감독님이라는 딱딱한 호칭보다는 할아버지라는 친근한 호칭으로 진짜 손자처럼 어린 제자들에게 한 가지라도 더 알려주고자 하는 것이 그의 지도 철학이었다고 한다.

2.3. 말년


여러 제자들을 실업과 프로무대로 진출시키며 한국 농구의 대들보로 성장시킨 대부였으나 그에 대한 보상은 사실상 없었다. 송도고 측은 그의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그를 송도중 농구부로 발령보낸 적도 있다.
더구나 나름대로 부유했던 학창시절과 달리 혈혈단신으로 피난 온 실향민 생활이었고 교원에 대한 급여나 대우도 박했던 시절이기에 금전적으로 풍족하지 못한 말년을 보낼 수 밖에 없었다. 그는 타계하기 전까지 인천 송림동의 한 주택에서 부인과 살고 있었는데 이 또한 동생의 집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자 1990년대 중반 성인으로 장성한 수십여명의 제자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전규삼에게 전달하려 했지만 전규삼이 받지 않겠다고 거절한 적도 있다고 한다.
전규삼은 1996년 공식적으로 농구계를 떠났다. 그러나 이후에도 어린이들의 농구 기본기를 다듬어주는 역할을 자처했고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인천 신포동 송도중학교 체육관을 찾아 손자뻘 되는 중학생 선수들의 연습 장면을 지켜보고 갔을 정도로 농구에 대한 열정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그러던 중 지병인 심근경색으로 고생했고 결국 2003년 어버이날 인천의료원에서 향년 8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영결식은 그가 평생의 열정을 바친 송도중학교 체육관에서 열렸고 수많은 제자를 대표해 첫 제자인 유희형이 조사를 낭독하기도 했으며, 신포동을 떠나 옥련동에 자리잡은 송도고까지 운구행렬이 지나가기도 했다. 그의 묘소는 휴전선과 가까운 파주에 있다. 그가 실향민이었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추억하는 일화를 인터넷 기사에서 많이 볼 수 있다.무엇이 송도고를 특별하게 만들었나
매년 5월 2주차에 제자들이 모여서 추도식을 가지고 있다.

2.4. 제자들의 말


"[2005년 프로농구 최우수선수(MVP) 수상 후 소감]“고 전규삼 할아버지께 감사드린다. 농구뿐 아니라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려주신 분이다. 그 후엔 진짜 농구가 어떤 건지, 즐기는 농구가 어떤 건지도 배울 수 있었다" - 신기성

"가끔 이야기합니다. 어쩌면 대한민국 제1호 스킬 트레이너는 할아버지였을지도 모른다고요" - 김현중

"지금도 대단하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플로터, 스텝백 점프슛, 페이더웨이...어떻게 그 시절에 그런 기술을 가르치실 생각을 하셨을까 말이죠" - 김동광

"제가 농구를 한 번 그만둔다고 했었는데 그때 당시에 저를 사춘기 시절에 다잡아 주셨던 정말 지금의 제가 있게 만든 분이죠. 전규삼 할아버지가 개인기와 기본기를 충실히 가르쳐준 덕분에 오늘의 내가 있었습니다. 할아버지 항상 제 옆에서 지켜보고 계실 거에요. 저를 있게 해 주셔서 정말 너무 감사드립니다" - 김승현

“물론 화려한 시도를 하다가 실패하는 것에 대해선 책임을 묻지 않았습니다. 선수들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유롭게 자신의 실력을 뽐낼 수 있었죠. 전 사실상 (전규삼) 할아버지한테 딱 한 번 배웠어요. 중학교 1학년 때였어요. ‘백 드리블’(등 뒤로 하는 드리블)은 이렇게 하는 거야. 그땐 이 기술이 얼마나 위력적이고 고급기술이라는 것을 몰랐어요.” - 김선형

“농구뿐 아니라 기계체조도 가르쳤다. 신체밸런스 등 신체의 기초를 잘 갖춰야 한다며 매트를 깔아놓고 구르기, 튐틀 등을 했다. 심지어 낙법까지...” - 정태균

"개인기에 역점을 두었다. 드리블 없는 속공을 국내 최초로 도입하신 분이다. 속공할 때 드리블을 하지 말고 패스로만 진행하게끔 했다. 관중들이 보기에는 간결하고 깔끔하니 즐거웠을 것이다. 선생은 ‘이게 발전하면 탭(tab)으로도 가능하다’고 했다. 그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공을 잡기 전에 패스할 곳도 봐둬야 한다. 그러다보면 시야가 넓어진다. 선생은 포지션 구분 없이 드리블과 슛 연습을 시키셨다. 그 때도 빅맨은 밀고 올라가서 슛을 던져야 파울도 얻어낼 수 있다는 생각이 대세였는데, 페이더웨이 슛이나 턴어라운드 점프슛 등을 반복 훈련했다. 또 합숙 훈련할 때는 오른손을 묶어버렸다. 아예 못 쓰게 말이다. 그렇게 일주일간 식사도 왼손으로만 하게 했다. 왼손이 익숙해야 드리블도 왼손으로 가능하다는 의도였다." - 유희형

“할아버지는 절대 혼내지 않았다. 백패스 훅슛 등 무엇을 하든 혼내지 않으니 창의적인 플레이가 나왔다. 할아버지께서 가드와 센터 포지션을 바꿔서 운동을 시킬 때도 있었다. 가드가 센터처럼 골밑에서 비비고, 센터는 밖에서 패스를 넣어주게 했다. 센터들은 패스를 주는 게 얼마나 힘든지, 가드는 포스트에서 얼마나 자리를 잡는 게 어려운지 알아봐야 한다는 거였다. 매치업도 무조건 섞어서 했다. 가드가 센터를 달고 레이업을 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런 게 특이했다. 또 가장 기본적이고 우리만의 운동, 드라이브인과 드리블이 있다. 지금 송도고 아이들에게도 시키지만, 사실 이 기술들은 정상적인 시합에서 쓸 수 없는 것이다. 자유투 라인에서부터 원 드리블에 가랑이 사이로 빼서 넣는 것, 당연히 경기 중에 못 한다. 드리블 밸런스를 잡기 위해서 하는 훈련이었다. 3점슛 라인 부근에서 훅 슛, 옛날에 운동할 때 그런 걸 했다. 이러한 엉뚱한 운동을 자연스럽게 하니까 창의적인 플레이가 나온다.스승의 날이 다가오면 故전규삼 선생님의 모습이 문득 떠오를 만큼 나와 선, 후배들에게 큰 스승이었다. 선생님께서는 돌아가셨지만 그 마음과 뜻을 이어 받아 송도고 선수들을 앞으로도 열심히 지도하겠다” - 최호(송도고 코치)

전규삼 선생님을 처음 만난 것은 인천 송도중학교에 입학한 직후 감독님과 상견례하는 자리였다. 키가 크고 혈기왕성한 감독을 생각한 나의 예상은완전히 빗나갔다. 내 앞에 나타난 송도중ㆍ고교의 전규삼 농구 감독님은 70세가 다 된 분이었다. 전규삼 선생님은 평범한 할아버지처럼 선수들을 친손자 대하듯 가르치셨다. “농구선수는 농구에 미쳐야 한다”는 것, 농구에 대한 열정이 없으면 훌륭한 선수가 될 수 없다”는 것이 그분의 철학이었다. 선생님은 송도중ㆍ고 농구 선배들이 어떻게 훌륭한 선수로 성장했는지를 들려 주시면서,“잠을 잘 때도 농구골대의 림을 보고 자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그래야슛을 던질 때 이 림이 커보이고 많은 골을 성공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중학교에 들어온 지 얼마 안된 어느 초겨울, 나는 선생님의 말씀을 실행에옮기기로 마음먹었다. 아무도 없는 체육관에 남아 연습을 한 뒤 농구골대림 밑에 매트리스를 깔고 잠을 청했다. 이런저런 생각이 머리 속을 가득채웠다. ‘정말 림이 커 보일까?’ ‘난 정말 훌륭한 선수가 될 수 있을까?’ 뒤척이며 림을 보던 중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남에게 의존하지 말고스스로 즐겁게 농구를 해보자!’ - 강동희

“할아버지는 남들 다 하는 뻔한 농구 말고 창의적인 기술을 익히라고 항상 강조했다. 그래야 농구가 재미있고 실력도 는다고 했다. 실수해도 괜찮으니 남들보다 세 단계 높은 기술을 연마하라고 주문했다. 노룩패스, 훅슛, 비하인드 백드리블 같은 미국 프로농구(NBA) 선수들이 쓰는 기술을 몸에 익히라고 했다. 이러니 경기 중에 3점슛 라인보다 먼 곳에서 훅슛을 날리는 일이 생길 수밖에…” 즉 이기고 지는 승부를 위한 농구가 아니라 재미있는 운동을 시켰다고나 할까. “멋있게 흉내내봐. 재밌잖아!” - 신기성

“체벌을 가하면 당장은 고친다. 그렇지만 일주일 있으면 또 못 한다. 그렇게 한 달, 두 달 또 때리면 면역력이 생겨 1대가 10대가 된다. 스스로 느끼면 창조적인 플레이가 나온다. 시간이 걸리지만, 자기 것이 되면 영원히 이어진다” - 전규삼

[1] 인천광역시 연수구 옥련동 소재. 원래 개성에서 개교한 이 학교는 6.25 전쟁 전때 인천으로 학교가 옮겨왔으며 중구 답동에 송도중학교와 같이 있다가 고등학교만 연수구로 이전했다. 참고로 송도중·고 교명의 송도는 인천 송도(松島)가 아니라 개성의 옛 이름인 송도(松都)다.[2] 대부분 본인이 현역 때 맡은 포지션에서 제자를 배출하는 경우가 많다. 야구에서 예를 들자면 조범현-박경완·진갑용 사례와 같은 수준?[3] 이 당시 일본에서 경제학도로 유학을 할 정도면 그의 지식 수준이 상당했다는 것을 볼 수 있다.[4] 피난 후 남한에서 재혼을 했다. 그러나 재혼한 부인 사이의 자녀는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5] 사실 전규삼은 1961년 교직 생활을 청산했다. 후술할 제자 유희형의 증언에 따르면 송도중학교 교감 승진에 실패한 뒤 교편을 내려놨다고 한다.[6]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한국산업은행 농구단(현 원주 DB 프로미) 감독을 역임했다.[7] 한국 농구 역사의 가드 계보에서 첫 머리에 꼽히는 인물. 1970년 방콕 아시안게임 금메달 획득의 주역이었다. 이후에는 스포츠 행정가로 많이 활동했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은 KBS 농구해설위원. 1980년대 농구대잔치 중계 영상 속 해설위원의 목소리는 백이면 백 이분이다. 최근까지 KBL 심판위원장을 맡았다.[8] 여자 선수에 대해서는 폼을 고쳐준다며 성추행도 일삼는 인간말종이 있으니 말 다했다.[9] 김승현아프리카TV 방송 도중에 채팅창에서 전규삼 감독 이야기가 나오자, "전규삼 할아버지 기억이 많이 나네요. 참 좋은 분이셨어요."라는 코멘트를 한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