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범현

 

'''조범현의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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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범현의 감독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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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범현의 수상 경력/등번호'''
[ 펼치기 · 접기 ]

'''한국시리즈 우승 반지''' [59]
'''1982'''

'''한국시리즈 우승 코치'''
'''2002'''

'''한국시리즈 우승 감독'''
'''2009'''

'''아시안게임 금메달(감독)'''
'''2010'''

[image] '''1977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 MVP'''

'''OB 베어스 등번호 25번'''
팀 창단

'''조범현(1982~1990)'''

김범수(1991~1992)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25번'''
김동호(1990)

'''조범현(1991~1992)'''

김종국(1993~1995)
<color=#373a3c> '''쌍방울 레이더스 등번호 76번'''
유성기(1991~1992)

'''조범현(1993~1999)'''

팀 해체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76번'''
조문식(1994~1997)

'''조범현(1999~2002)'''

김현욱(2005~2009)
'''SK 와이번스 등번호 76번'''
결번

'''조범현(2003~2005)'''

이철성(2010~2011)
'''SK 와이번스 등번호 80번'''
가토 하지메(2005)

'''조범현(2006)'''

가토 하지메(2007~2011)
'''KIA 타이거즈 등번호 99번'''
결번

'''조범현(2007)'''

장준영(2008)
'''KIA 타이거즈 등번호 70번'''
성민규(2007)

'''조범현(2008~2011)'''

홍세완(2012~ )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98번'''
김태욱(2011)

'''조범현(2013)'''

구준범(2014)
<color=#373a3c> '''KT 위즈 등번호 70번'''
팀 창단

'''조범현(2014~2016)'''

배정대(2018~ )


[image]
'''이름'''
조범현(曺凡鉉 / Bum-hyun Cho)
'''생년월일'''
1960년 10월 1일 (63세)
'''국적'''
대한민국
'''출신지'''
경상북도 의성군
'''학력'''
대구초 - 대건중 - 충암고 - 인하대
'''포지션'''
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82년 OB 베어스 창단 멤버
'''소속팀'''
[image] OB 베어스 (1982~1990)
[image] 삼성 라이온즈 (1991~1992)
'''지도자'''
[image] 삼성 라이온즈 2군 배터리코치 (1992)
[image] 쌍방울 레이더스 1군 배터리코치 (1993~1999)
[image] 삼성 라이온즈 1군 배터리코치 (2000~2002)
[image] [image] SK 와이번스 감독 (2003~2006)
[image] KIA 타이거즈 1군 배터리코치 (2007)
'''[image] KIA 타이거즈 감독 (2008~2011)'''
[image]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 (2010)'''
[image] 삼성 라이온즈 2군 포수 인스트럭터 (2013)
[image] kt wiz 감독 (2013~2016)
'''종교'''
개신교(장로회)[1]
1. 개요
2. 선수 시절
2.1. 연도별 주요 성적
3. 지도자 시절
3.1. 코치 시절
3.2. SK 와이번스 감독 시절
3.3. KIA 타이거즈 감독 시절
3.3.3. KIA 감독으로서의 총평
3.4. 야인 시절 1(2012~2013)
3.5. kt wiz 감독 시절
3.5.2. 2016년
3.5.3. kt 감독으로서의 총평
3.6. 야인 시절 2(2017~)
3.7. 지도자로서의 성향
3.7.1. 개관
3.7.2. 선수단 운영
3.7.3. 인간적인 면
4. 김성근과의 인연
5. 기타


1. 개요


'''나의 재계약보다 팀의 모습이 우선이다. 내가 옷을 벗는 한이 있어도 아닌 건 아닌 거다.'''

ㅡ KIA 타이거즈 감독 시절.

OB 베어스, 삼성 라이온즈의 야구 선수이자 SK 와이번스, KIA 타이거즈, kt wiz 초대 감독이다. 또한 KBO 리그 최초로 1위와 10위를 경험한 감독이기도 하다.

2. 선수 시절


대구국민학교 4학년 때 그의 운동 신경을 눈 여겨본 체육 선생님의 추천으로 야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후 대건중학교를 거쳐 대구의 3대 야구 명문고인 대건고등학교 야구부에 들어갔다. 대건고등학교 야구부가 해체되지 않았다면 삼성 라이온즈의 원년 멤버가 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2] 그러나 대건고 야구부 해체설이 돌자 조범현은 당시 재창단하여 외부 전학생을 모집하고 있던 공주고등학교 야구부로 전학가게 된다. 그러나 공주고등학교에는 부산고등학교에서 먼저 전학 온 김경문이 이미 자리 잡고 있었고 조범현은 몇 개월만에 다시 대건고등학교로 돌아갔다. 대건고등학교는 결국 해체되고 말았는데 이때 김성근 충암고 신임 감독이 대구로 내려와 대건고 야구부 출신 28명 전원을 충암고등학교로 전학 시켰고 조범현도 충암고등학교 야구부로 전학가게 되었다. 1977년 봉황대기에서 충암고등학교가 우승하고 조범현은 MVP를 차지했고 이를 바탕으로 1978년 인하대에 진학했다.
[image]
충암고 시절 김성근과 조범현
봉황대기에서 우승하고 MVP를 차지하기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조범현이 인하대 밖에 가지 못한 것은 매우 의아한 일이다. 라이벌인 김경문이 1977년 대통령배에서 공주고가 우승한 후 MVP를 차지하고 고려대에 진학한 것과 너무나 비교된다. 김성근 감독이 선수끼워팔기를 위해 조범현에게 인하대에 진학하기를 강요했을 가능성이 있다. 김성근은 신일고 감독 때인 1981년 이재홍에게 연세대 진학을 포기하고 동기들과 함께 건국대에 진학하라고 강요했다가 이것이 언론에 폭로되면서 파문이 일어나 결국 신일고 감독에서 경질되었던 적이 있다.
[image]
OB 베어스 선수 시절, 감독인 김성근 과 함께 항의하는 모습.[3]
1982년 OB 베어스의 원년 멤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입단 동기로 김경문이 있다.[4] 둘은 포수 포지션을 두고 원년부터 치열한 주전 경쟁을 벌였다. 도루 저지율이 매우 뛰어난 전형적인 수비형 포수였다. 3년 연속 도루 저지율 5할을 넘겼고 1985년에는 당시 프로 통산 역대 최고기록인 5할3푼8리의 도루 저지율을 달성했다. 그러나 공격력이 너무 약한 것이 흠이었다. 데뷔 첫해에 타율 0.271을 기록하며 "공격형 포수"로서의 가능성을 뽐냈으나 이듬해인 1983시즌에 타율이 0.174로 폭락하더니 그대로 은퇴할 때까지 거의 1할대에 머무는 극히 저조한 타격을 보였다. 김경문 역시 수비형 포수로 타격이 나빴고 도루저지율은 오히려 조범현이 조금 더 뛰어났지만 김경문의 타격이 그나마 덜 나빴다. 김성근이 한때 조범현을 선호하여 중용하기도 했지만 출장 경기수를 따져보면 김경문이 조범현을 다소 앞선다.
1991시즌을 앞두고 윤석환과 함께 고향팀인 삼성 라이온즈에 현금 트레이드로 이적했다. 김성근 신임 감독의 강력한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원년부터 삼성 주전 포수 이만수와 매우 껄끄로운 관계였던 김성근은 삼성 감독으로 취임하자마자 삼성의 최대 약점이 포수라고 지적하고 며칠 후 조범현을 영입했다. 1991시즌 초 한때 김성근의 중용을 받았고 고향팀에 입단한 조범현 본인도 완전히 회춘하여 자신의 통산 최고 기록에 근접하는 0.261의 타율을 기록하는 등 최고의 모습을 보였으나 이만수라는 거대한 존재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곧 백업포수 롤을 맡게 되었다. 이듬해인 1992년에는 급격하게 커리어가 하락하고 말았고 시즌이 끝나고 김성근 감독이 경질되자 같이 은퇴하게 된다.

2.1.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82
OB 베어스
48
118
.271
32
7
2
2
9
12
2
6
.415
.307
1983
41
69
.174
12
3
0
0
7
3
0
7
.217
.250
1984
77
175
.194
34
7
2
3
18
16
4
14
.309
.253
1985
87
239
.238
57
8
0
3
33
30
4
15
.310
.281
1986
41
65
.169
11
1
1
1
6
8
3
3
.262
.206
1987
48
80
.150
12
2
0
0
6
3
1
2
.175
.171
1988
58
72
.194
14
0
0
0
3
4
0
2
.194
.213
1989
54
86
.163
14
3
0
1
5
6
1
6
.233
.215
1990
84
102
.137
14
2
0
0
6
8
0
8
.157
.200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91
삼성 라이온즈
51
61
.262
16
3
0
1
10
11
0
3
.361
.297
1992
26
24
.125
3
1
0
1
4
1
0
1
.292
.160
<color=#373a3c> '''KBO 통산'''
(11시즌)
<color=#373a3c> 615
<color=#373a3c> 1091
<color=#373a3c> .201
<color=#373a3c> 219
<color=#373a3c> 37
<color=#373a3c> 5
<color=#373a3c> 12
<color=#373a3c> 107
<color=#373a3c> 102
<color=#373a3c> 15
<color=#373a3c> 67
<color=#373a3c> .277
<color=#373a3c> .246

3. 지도자 시절


역대 감독 전적
'''연도'''
''''''
'''경기'''
''''''
''''''
''''''
'''정규리그'''
'''포스트시즌'''
2003
'''SK 와이번스'''
133
66
64
3
4위
'''준우승'''
2004
133
61
64
8
5위
-
2005
126
70
50
6
3위
4위
2006
126
60
65
1
6위
-
<color=#373a3c> ­'''통산'''
<color=#373a3c> 518
<color=#373a3c> 257
<color=#373a3c> 243
<color=#373a3c> 18
<color=#373a3c>
'''연도'''
'''소속팀'''
'''경기수'''
''''''
''''''
''''''
'''정규리그'''
'''포스트시즌'''
2007
'''KIA 타이거즈'''
1[5]
0
1
0


2008
126
57
69
0
6위
-
2009
133
81
48
4
<color=#373a3c> '''1위'''
<color=#373a3c> '''우승'''
2010
133
59
74
0
5위
-
2011
133
70
63
0
4위
4위[6]
<color=#373a3c> ­'''통산'''
<color=#373a3c> 525
<color=#373a3c> 267
<color=#373a3c> 255
<color=#373a3c> 4
<color=#373a3c>
'''연도'''
'''소속팀'''
'''경기수'''
''''''
''''''
''''''
'''정규리그'''
'''포스트시즌'''
2015
''' kt wiz'''
144
52
91
1
10위
-
2016
144
53
89
2
10위
-
<color=#373a3c> ­'''통산'''
<color=#373a3c> 288
<color=#373a3c> 105
<color=#373a3c> 180
<color=#373a3c> 3
<color=#373a3c>
<color=#373a3c> '''총계'''
<color=#373a3c> '''1331'''
<color=#373a3c> '''629'''
<color=#373a3c> '''677'''
<color=#373a3c> '''25'''
<color=#373a3c>

3.1. 코치 시절


[image]
삼성 라이온즈 배터리 코치 시절.
은퇴 이후 쌍방울 레이더스삼성 라이온즈의 코치를 하였다. 쌍방울에서 박경완을, 삼성에서 진갑용을 국가대표급 포수로 조련하면서 명성을 얻었다.

3.2. SK 와이번스 감독 시절


[image]
강병철 감독의 후임으로 2003년부터 SK 와이번스의 제2대 감독으로 부임했다. 쌍방울과 삼성의 배터리 코치로서 쌓은 명성 덕분에 야구계에서는 감독감으로 알려졌다고 한다. SK에서 강병철 감독의 후임 감독을 선임하려고 할 때, 프런트 전 직원에게 자신이 생각하는 적당한 감독감을 추천하라고 하자 가장 많은 표가 나온 사람이 조범현이었다고 한다. 이를 보고 당시 초대 SK 와이번스 사장인 안용태 사장이 조범현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프런트가 추천하는 인물이니 그냥 과감하게 임명을 했다고. 정식 감독 부임까지도 우여곡절이 많았는데, 감독 제안이 처음 오고갔을 당시가 2002년 한국시리즈 무렵이었고 일반적으로는 코치에서 감독으로 부임이 영전인지라 축하해주는 것이 평범한 수순이지만, 2002년 한국시리즈가 워낙 처절한 접전이 돼버리면서 감독 영전 공식 발표 시기를 조율하였다. 결국 삼성의 우승으로 한국시리즈가 끝나고 나서 조범현은 SK의 공식 감독으로 취임할 수 있었다.
2003년 초반에 1위에도 잠시 오르는 등 돌풍을 일으켰지만 시즌 후반부터 처지기 시작하면서, 결국 정규시즌 자체는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4위 자리를 놓고 다투던 한화 이글스를 잡아내며 4위로 간신히 준플레이오프에 턱걸이하였다. 어쨌든 팀 창단 첫 번째 포스트시즌 진출에 성공. 그리고 준플레이오프-플레이오프에서 삼성과 KIA를 잇따라 스윕하면서 정규시즌 4위에서 한국시리즈까지 진출하며 이른바 "돌풍의 SK"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그리고 한국시리즈에서도 7차전까지 가는 접전을 펼쳤지만, 아쉽게도 3승 4패로 현대 유니콘스에게 패해 준우승에 머물렀다. 1, 4, 7차전에 모두 등판해서 3승을 따낸 현대의 에이스 정민태를 공략하지 못한 것이 컸다. 43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감독직에 올라[7] 2003 시즌의 예상치 못한 큰 성과로 당시 프로야구계의 감독 40대 기수론이 유행하기도 하면서 이듬해 롯데 자이언츠의 감독에 40대의 젊은 양상문이, LG 트윈스의 감독도 역시 40대의 젊은 그 분이 임명됐다(...).
2004년에는 기존 선수들의 부상과 부진으로 5위에 그쳐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지만,[8] 2005년 박재홍, 박경완, 이호준, 김재현, 이진영을 축으로 한 타선과 김원형신승현으로 이루어진 토종 선발 원투펀치, 정대현, 위재영, 조웅천으로 구성된 계투진 등 팀을 잘 꾸리면서 후반기 최고 승률을 기록하는 등 승승장구하면서 정규시즌 마지막 날까지 시즌 2위를 유지했다. 그러나 시즌 마지막 날 LG에게 덜미를 잡히면서 턱밑까지 따라와 있던 두산에게 역전을 당해 시즌 3위로 내려앉았고, 이 충격 때문에 준플레이오프에서 한화에게 2승 3패로 패하면서 탈락했다.
조범현이 이끄는 SK가 우승 최적기였던 이 시즌에서 허망하게 무너진 후, 2006년에는 초반 팀 타선의 핵이었던 외국인 타자 시오타니 가즈히코의 부상과 투수진의 붕괴로 미끄러지면서 6위에 그쳤다.
결국 2006년까지 감독 생활을 했지만 구단 측이 조범현과의 재계약 대신, 조범현의 스승인 김성근 감독과 계약을 맺으면서 첫 감독 커리어는 이렇게 끝났다. 사실 이때 2006 신인 드래프트에서 인천고의 이재원이 아닌 동산고의 류현진을 2차 1라운드 지명을 했다면 잘리지 않았을 거라는 평이 많은데[9], 당시로서 류현진은 대수술을 한 불안정한 유망주의 신분이라 어쩔 수 없었다. 이때만 해도 유망주의 팔꿈치 수술 경력은 꽤나 큰 마이너스 요소였고, 결정적으로 다음 해에 들어올 괴물 투수가 있었기에...
조범현 감독은 SK의 감독으로 있으면서 강병철 감독이 닦아놓은 토대에 자신만의 색깔을 입히고, 기존의 이호준, 조경환, 김원형, 이승호, 조웅천 등 기존의 선수들과 박경완, 박재홍 등 외부 영입 선수들을 적절하게 기용하여 SK의 허접했던 약체 이미지를 벗겨내고 제대로 된 강팀의 기틀을 닦아 당당히 포스트시즌에 도전할 수 있는 팀으로 성장시켰으며 김성근 감독 부임 후 SK 와이번스의 3차례 우승을 이끌었던 젊은 핵심전력 정근우, 김강민, 최정, 박재상, 조동화, 정우람, 윤길현 등, 팀의 미래를 책임지게 될 선수들을 1군으로 끌어올리는 등 결코 팀의 역사에 있어 무시할 수 없는 성과를 내었던 바 있다.
다만, 조범현의 성적을 낼 수 있던 시절에는 정작 조범현이 SK시절 키운 선수보다 외부 영입의 주효과 조범현 부임이전 기존의 선수들의 활약으로 했다. 롯데에서 20홈런 이상을 처낸 조경환, 현대 시절 이미 최고의 중간계투였던 조웅천, 해태 시절 장타력이 입증된 이호준, 시드니 올림픽 대표팀 출신인 아마추어 최고 유망주 정대현, LG 프런트와의 갈등으로 FA로 팀을 이적한 캐넌히터 김재현, SK 출신 신인왕 투수 이승호, 쌍방울 시절 최연소 노히트노런 등 꾸준히 활역한 김원형, 이미 현대에서 기량을 보여준 위재영, 기아와의 갈등 속에서 트레이드로 영입한 호타준족 박재홍, 그리고 견고한 수비의 베테랑 유격수 김민재와 KBO 리그 최고의 포수 중 하나인 박경완 등.

3.3. KIA 타이거즈 감독 시절


[image]
이후 스포츠 서울의 객원기자로 있다 2007년 6월 KIA 타이거즈의 배터리 코치로 취임했다. 이를 두고 당시 KIA 타이거즈 팬들 사이에는 서정환 감독의 후임으로 구단 측이 데려왔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물론 서정환 감독은 자신이 부탁해서 왔다고 말했지만 서정환 감독과 별로 인연도 없었던 조범현 감독이 선뜻 배터리 코치로 부임한 것은 의문이 가는 대목이다. 전 프런트에 말에 따르면 전 기아차 사장 겸 구단주 조문홍 사장이 인하대 출신이라서 인하대 출신을 원해서 기아로 왔고 감독으로 선임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2007년 10월 시즌 후 서정환 감독 대신 김응용 감독 이후 '''첫 비 해태 출신'''[10] KIA의 감독으로 취임했다.
여담으로 KIA 타이거즈 감독으로 2007년말 취임하자마자 데뷔전 1경기를 치르게 되었다. 보통 정식으로 감독에 취임하는 시기는 정규시즌이 모두 끝난 뒤이므로 이례적인 사례인데, 이는 정식 데뷔전이 하필이면 '''슈퍼 한국시리즈'''(...)이었기 때문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
실질적인 KIA 감독은 2008시즌 부터인데 전년 최하위 팀을 일단 6위까지 올렸다. '''2009년 정규리그 우승'''과 '''2009년 한국시리즈의 우승'''으로 팀에 열 번째 우승을 안겨 주며 일약 명장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2010년에 지독한 16연패의 늪에 빠지는 바람에 지지도가 많이 떨어졌고[11], 2011년에는 전반기 선두를 달리다가 믿을 수 없는 주전들의 줄부상 속에 4위로 추락하면서 결국 2011년 10월 18일 KIA 타이거즈 감독직에서 자진사퇴하게 되었다. 사퇴 전까지 2012년 계획구상에 대한 기사가 나온 것을 보면 구단의 권고에 의한 사실상의 경질로 볼 수 있다.

3.3.1. 2010년




3.3.2. 2011년


전반기엔 잠깐 삽질을 했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연승 행진을 이어가며 1위 자리까지 올라오기도 했다. 하지만 선수들의 줄부상으로 1위 자리를 삼성 라이온즈에게 빼앗기고, 미덥지 못한 불펜 운용으로 4위 자리까지 추락. 포스트시즌에서도 이만수SK 와이번스에게 2009년 코리안시리즈의 리벤지를 당하며 1승 후 3연패로 탈락하며 허무하게 가을 야구를 마감했고, 팬들의 성화에 밀려 결국 KIA 감독에서 물러나게 된다.


3.3.3. KIA 감독으로서의 총평


객관적으로 보면 상당히 유능한 감독이다. SK에서나 KIA에서나 팀을 중상위권에 고정시켰다. 특히 KIA는 조범현 부임 전, 유남호-서정환 때문에 해태의 이미지가 모두 갉아먹히고 엘롯기 시대를 연 약팀으로 일컬어졌으나, 조범현 시절에 이르러선 어쨌든 강팀의 이미지를 되찾게 되었고 삼성, SK 등과 더불어 우승후보에 거론될 정도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그의 부임시기에 선동열, 김경문과 같이 개성있는 젊은 감독들이 맹활약한 탓에 존재감이 다소 밀린 데다가, 후임 감독이 엄청난 성과를 낸 SK나, 비 프랜차이즈 스타 출신이라는 약점[12]이 있는 KIA에서는 자팀 팬들에게도 인정을 못 받은 탓에 저평가를 받았다.
다만 한 박자 늦는 작전 타이밍, 혹사 등 투수 운용의 무리수[13] ,거기에 겹친 여러 선수들의 부상[14] 등등 약점도 뚜렷하게 보이는 면이 있었다. 이 때문에 2011년 전반기를 1위로 마감하고서도 후반기에 성적이 급전직하하여 팬심을 잃어버렸다.[15] 물론 이런 "운"이라는 요소도 감독은 그 여파를 최소화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에 결국 책임을 피할 수는 없다. 또 코치지 선정도 합리적이지 못하고 현장을 떠나있던 이를 별다른 설명도 없이 불러들이거나 방금 은퇴한 선수를 바로 1군타격코치로 올리는 등 주먹구구식 코치진 구성을 하기도 했다.
여러모로 2011년 한 시즌은 조범현식 야구의 축약판으로 볼 수 있는데, SK 시절이나 KIA 시절이나 계약 초반에는 잘 하다가 후로 갈수록, 그리고 주전 선수들이 무너지게 된다면 팀이 급속도로 약해져 가는 식을 반복하였다. 이런 것을 보면 막장화된 팀을 리빌딩하여 중상위권으로 끌어올리고 기회가 오면 상위권으로 팀을 도약시키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으나, 상위권 팀으로 올린 뒤 이 전력을 장기간 유지하는 면에서는 좀 서툰 것으로 보인다. 결국 주전 선수들을 받쳐줄 1.5군 선수 양성을 소홀히 했고 불펜 운용이 서툴렀다는 점 등을 이유로 팬들의 마음이 떠났고, KIA 유니폼을 벗어야 했다.[16]
그렇게 팬들의 지지와 신임을 잃고 물러났지만 KIA 팬들이 잊어서는 안 될 사실이 있다. '''과거의 영광을 잃고 2007년까지 약팀의 대명사인 엘롯기라 조롱을 당하던 KIA 타이거즈에게 V10을 안기고 해태시절의 강팀으로 재도약할 수 있는 기틀을 다져놓은 장본인이 바로 조범현 감독이라는 사실을 말이다.'''[17]
더구나 인수 이후 사실상 야구단을 방치하던 모기업 현대차그룹이 2009년 우승 이후, 적극적인 투자로 돌아섰다.[18] 200억을 투자해서 함평에 최신식 2군 훈련장을 지었고, 광주신구장 건설비 500억도 내놓았다. 그리고 3군 체제를 처음 도입한 것도 조범현 감독 시절 말기의 일. 모두 2009년 우승의 부산물이다.
KIA 타이거즈 갤러리에서는 무난한 평을 받고 있다.[19] 아무래도 기나긴 암흑기를 물리치고 V10을 달성하게 해준 감독인지라... 더군다나 조범현 감독이 리빌딩 하기 전인 2007년도 라인업(소위 송산이 '''4번'''을 치던.)짤만 뜨면 조범현 감독 찬양을 하는 갤러들도 볼 수 있다. 지칭하는 별명은 주로 '''버며니 어빠'''가 되는 듯.
2012년 선동열, 이순철이종범을 사실상 은퇴종용으로 나가게 한데다, KIA가 SK와의 개막 2연전에서 2연패하는 등 지속적인 경기력 난조를 보이자 KIA 타이거즈 갤러리를 중심으로 재평가 운동이 일어났다.
2013년 시즌, 팀 최종 순위가 '''8위'''로 추락해 9위를 확정지은 한화 이글스와 함께 하위권을 형성, 투타에 수비까지 죄다 무너지는 총체적 난국을 연출하였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2000년대 롯데나 LG처럼 최소 수년의 리빌딩이 소요될 것이 분명해진 상황이라 KIA 타이거즈 갤러리 등에서는 '''조뱀을 깐 나 자신을 반성한다'''는 식의 자아비판까지 줄을 잇기도 했다. 호랑이 사랑방에서마저 조범현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나타나기도 했다.
선동열은 3년 계약기간이 끝난 2014년까지의 성과를 보면 정확히 김재박의 전철을 밟았고, KIA 타이거즈가 선동열 지휘 아래서 우승이나 4강권은 커녕 탈꼴지를 걱정해야 할 수준으로 몰락한 시점에서 보면 2011년의 조범현의 계약기간 내 경질과 선동열 선임은 프랜차이즈 선호에 눈이 먼 비(非)이성적인 팬덤 + 팬덤에 휘둘린 구단수뇌부의 경거망동 + 선동열에 대한 과대평가가 빚어낸 최악의 한 수임으로 판명되고 있다. 이 때문에 조범현에 대한 평가는 계속 올라가는 중.
하지만 밑에도 나오듯 홀수해 징크스가 있기 때문에 설상 1년을 더 간다 해도 더 까이면 까였지 덜 까이진 않을 것이란 주장도 존재한다.

3.4. 야인 시절 1(2012~2013)


[image]
삼성 라이온즈 포수 인스트럭터 시절.
2012년 한국야구위원회 육성위원장으로 부임하면서 전국을 순회하며 야구 유망주들을 지도하였다.
2012년 곯을 대로 곯은 한화 이글스에서 한대화 감독이 경질되면서 차기 감독 후보로 떠오르기도 했다. 리빌딩에 있어서는 최고의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한화팬들의 지지를 꽤 받았다. 외에도 이정훈 북일고 감독이나 감독 대행을 맡은 한용덕도 차기 감독 후보로 꼽혔다. 한편 스승인 김성근고양 원더스와 재계약하면서 당분간은 프로로 복귀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하였다.
이르면 9월 말 신임 감독을 최종 결정한다고 한다.
9월 15일, 차기 한화 감독으로 낙점받았음이 밝혀졌다. # 일전에 언급된 시기보다 빨리 밝혀진 셈인데, 한화 구단은 예정 그대로 9월 말에 공식 발표할 예정이었던 듯 하나 정보를 미리 입수한 기자가 단독으로 기사를 낸 것으로 보인다. 기사가 뜨자 마자 한화는 차기 감독에 대해 정해진 것이 없다고 급히 사태를 봉합하였다.
9월 16일 한화에서 이런 서투른 행보를 한 이유가 다른 팀에서도 조범현에게 감독 제의를 했기 때문에 서두른 것이라는 기사가 떴다.# 한화 이외의 일곱 구단에서 경질될만한 감독이 없어보여서 그저 카더라에 그치는줄 알았는데...
9월 17일 김시진 감독이 넥센 히어로즈에서 경질되면서 분위기가 묘해졌다. 넥센 팬들은 구단을 성토하는 한편으로 은근히 조범현을 기대하는 상황이며, 한화 팬들은 반대로 김시진을 모셔오자고 하기도... 덕분에 '밀약'이라도 있던 거 아니냐는 우스갯소리도... 한화 이글스에서 김재박 감독의 선임이 유력하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어서 조범현 감독은 넥센으로 가는게 아니냐는 말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한화 이글스에서는 김응용 감독을 영입하는 강수를 두고, 넥센 히어로즈에서는 염경엽 주루코치를 감독으로 내부에서 승격 시킴에 따라 두 팀의 감독으로 활동할 일은 없게 되었다. 그 탓에 감독직 대신 김응룡의 배터리 코치로 부임하거나[20] 앞으로 창단될 제 10구단 kt wiz의 감독으로 가게 될 것이라는 의견도 제시되었다.
이런저런 하마평이 나오는 가운데 2012년 포스트 시즌이 끝난뒤 롯데감독이 사퇴하면서 롯데로 간다는 소리도 나왔다. 그러나 롯데는 넥센 히어로즈에서 짤린 김시진을 영입하면서 롯데 감독직 획득도 좌절.
결국 2013년 1월 초 삼성 라이온즈의 포수 인스트럭터로 초빙되었다. 스프링캠프 때만 포수들을 지도하게 되었다가 아예 삼성 포수들을 지도하게 되었다. 삼성 팬들은 그가 이지영과 함께 김동명 등 2군 포수들의 실력을 향상시켜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2014 시즌 수술로 빠진 진갑용, 개막전 이후 부상으로 이지영이 결장한 사이 2년차 신인 포수 이흥련이 괜찮은 모습을 보이고 이흥련을 삼성 인스트럭터 시절 조범현 감독이 미친듯이 굴리며 담금질했다는 기사가 나와서 다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진갑용 시즌 말 복귀예정이고 이지영이 결장만 1달에 기존의 제 3 포수였던 이정식은 봉와직염으로 1~3포수가 죄다 아웃인 점을 감안하면 삼성 입장에선 이흥련의 활약이 천만다행인 셈이었기에.

3.5. kt wiz 감독 시절


2013년 8월 2일, 신생구단 kt 위즈의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그리고 8월 5일 취임식을 가졌다. 이전에 감독으로 있었던 SK 와이번스KIA 타이거즈와 맞붙으면 어떤 모습이 나올지 기대를 받기도 했다.
2014년 11월 28일 특별지명에서 KIA 타이거즈이대형을 지목하면서 정작 이대형이 20인 보호 명단에 없자 '''이대형이 무슨 병이 있나 해서 어리둥절'''했다고 하였다. 이에 KIA 타이거즈 갤러리 등에서 '''조리둥절'''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대형을 보호명단에서 빼버린 김기태는 끝까지 그 이유를 말하지 않아서 결국 KIA팬들은 실력 문제가 아닌 개인 감정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렸다.[21]

3.5.1. 2015년



신생팀 감독을 맡으며 감독 생활 중 가장 힘들었다고 토로할 만큼 힘든 한 해를 보냈으나, 그런 와중에도 조무근, 김재윤 등 필승조 발굴과 김상현, 박경수 등 기존선수들의 재발견으로 팀의 기반을 잘 다져놓았다는 평을 받았다.


3.5.2. 2016년


2015년 후반 사생활 논란으로 중징계를 받은 장성우에 대해 부모가 자식에게 뭐라고 하겠나라며 대인배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었다. 장성우가 욕한 대상에 본인도 포함되어 있음을 감안하지 않더라도 kt 위즈 팬들의 심금을 울린다는 평. 여기에 트레이드 상대였던 박세웅이 어느정도 기량이 성장하면서 개인성적보다 팀이 우선이라는 리더에 적지 않은 타격을 받았다. 2016년 kt 선발투수 상황을 고려하면 더욱 부각된다.
그런 와중에도 2016년 2차 드래프트에서 이진영을 얻어왔다. '''이진영이 보호선수명단에서 빠진 것을 보고 놀라서''' kt 프런트 직원에게 LG 트윈스 프런트에 전화하여 정말로 이진영이 빠진 것이 맞냐고 확인을 시켰다고 박동희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어쨌든 단번에 영입하는 데 성공했다고. 이대형 때도 그랬지만, 어쨌든 주전급 선수를 거저 얻은 격.
2월 3일 박동희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장성우의 잘못에 대해 야구팬들에게 용서를 구한다며 머리를 숙이셨다. 본인 또한 뒷담화의 피해자이면서도 결국 고개를 숙이기까지 했다는 부분에서 kt 팬들은 피눈물을 흘리고 있다.
3월 13일 오정복이 음주운전으로 입건돼 징계를 받으면서 '조범현 감독님 수명을 얼마나 깎아먹을 셈이냐'는 드립이 베스트댓글이 되었다.
5월 말이 되면서 선발진이 완전히 무너졌음에도 6선발을 고집하는 것과 6선발 고집으로 인한 장시환고영표의 혹사, 부진한 상태인 김상현, 앤디 마르테 등을 과도하게 기용하는 것 등으로 비판을 받기 시작하고 있다.
여기에 5월말부터 6월초 심재민을 9경기중 무려 '''8경기'''에 등판시켜 논란이 되고 있다.
7월 12일 이번에는 김상현이 약 한달전 익산의 2군 구장에서 경기가 끝난후 차내에서 밖에 서있는 여성을 보며 음란행위를 하여 수사를 받고 있음이 뒤늦게 알려졌다. 이쯤되면 조범현 감독 몸에 사리가 생기는거 아닌가 싶다(...) 이번 사건에 휘말린 선수가 다른 선수도 아니고 KIA 시절부터 연을 맺었으며 올 시즌 죽을 쑤고 있음에도 무한 신뢰를 하며 꾸준히 주전으로 출장시켰던 김상현이라 전보다 속이 엄청 많이 쓰릴 것이다.
전반적으로 위의 'KIA 감독으로서의 총평' 문단에 적힌 평가와 크게 다르지 않은 야구를 보여주면서 경기운영이 답답하다는 팬들의 성토가 나오고 있다. 또 본인의 재계약보다 팀 성장이 우선이라는 말을 했으나 선발투수가 조금이라도 흔들린다 싶으면 퀵후크를 남발하고 불펜은 그 반대급부로 지독하게 혹사하는 등 팀 성장에도 도움이 안 되고 성적을 내서 재계약을 노려보겠다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경기운영을 반복하고 있다.
2016년에도 이창재와 고영표 등이 혹사지수 상위권에 올랐기에 유일신 김성근, 혹사에서도 콩라인인 김경문에 이어 '''혹사 3위, 혹은 인간계 혹사 2위'''라는 평가를 받으며[[22], 이는 육성형 감독이라는 조범현 감독의 최대 장점을 크게 갉아먹는 요소이다. 비슷하게 경기운용에 꽤나 부족함이 있지만 미래의 팀을 잘 만들어놓았다는 김진욱 전 감독의 경우 혹사는 비교적 확실하게 배제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조범현 감독의 평가가 내려갈 수밖에 없다. 특히 지금 데리고 있는 투수코치인 정명원 코치가 바로 두산 시절 김진욱 전 감독과 함께하던 코치이며 2군의 차명석 코치도 LG 시절부터 명코치 평가를 받는다는 것을 감안하면 혹사에 관해서는 이미 다른 팀에서 전과가 있는 조범현 감독에게 제일 많은 비판의 화살이 쏠리는 편이다. 팬들의 인식만큼 나이가 많은 편이 아니지만 김성근 선동열 김경문으로 대표되는 타이트한 불펜야구 시대에 감독을 하고 우승을 했던 것이 오히려 젊은 감각으로 변화를 받아들여야 하는 2010년대에는 발목을 잡고 있다는 평가도 있다.
시즌 초반 선전하며 좋은 출발을 보이는 듯했으나 여름 들어 영 시원찮은 경기력으로 결국 10위로 곤두박질친 팀, 불펜 혹사 논란, 선수들의 잇따른 야구 외적 사건사고 등 때문에 재계약은 힘들 듯하다. 8월 24일 이런 이유를 들어 '프로야구 kt wiz, 조범현 감독과 재계약 안할 듯'(경기일보)이라는 기사가 올라왔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삭제되었다.
10월 12일 새벽 1시 30분경 결국 kt가 조범현 감독과 결별을 택했다는 기사가 올라왔다. 후임 감독은 김진욱두산 베어스 감독.

3.5.3. kt 감독으로서의 총평


팀이 창단하자마자 주력 전력의 노쇠화와 유망주 투수들의 혹사로 인한 부상 및 수술 위험이라는 문제점을 남기고 떠난 감독. kt팬들과 팬이 아닌 사람들 사이에서의 평가가 극명하게 갈린다. kt팬이 아닌 사람들은 기존에 알려진 바와 같이 조범현이 리빌딩의 달인이라는 멘트와 함께 구단이 투자를 안 해서 kt가 실패한 것이라며 조범현이 원했던 그림 중 제대로 된 게 하나 없다는 평가를 한다. 그러나 팀이 투자에 소극적이었고 사건사고가 지나치게 많았던 부분을 인정하더라도 조범현의 kt 운용은 비판받을 여지가 충분히 있다.
우선 상단 KIA 감독으로서의 총평 문단에도 언급된 '한 박자 늦는 작전 타이밍, 투수 운용의 무리'에 대해서는 kt 감독으로 있는 동안에도 전혀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투수운용은 팬들도 답답함을 토로할 정도로 교체 타이밍이 너무 늦는 경우가 잦았다. 딱 한 번 귀신같은 투수교체로 승리를 챙겼던 2015년 9월 21일 경기가 있긴 한데, 잘했던 것보다는 못했던 게 더 기억에 남는다지만 투수교체를 잘했던 경기의 대표적 예시로 꼽을 것이 이 경기뿐인 수준이다.
연패를 끊어내는 능력도 제로에 가까워 한번 연패에 빠지면 계속 무기력한 경기력을 선보이며 팬들을 허탈하게 만드는 재주는 덤.
또 신생팀 감독으로서 전력의 내실화에 힘을 쏟아야 했음에도 조급증에 걸린 것처럼 유망주 선발투수가 조금만 흔들려도 바로 불펜을 가동시키고, 이는 불펜의 과부화로 이어져 장시환, 조무근이 2016년 들어서 전년도의 페이스를 완전히 잃었으며, 2016년 4월과 5월에 걸쳐 고영표심재민을 타자 수준으로 출전시키는 등 두 번째 해에도 이런 모습은 개선되지 않았다. 고영표와 이창재 등이 혹사지수 상위권에 랭크되었지만 '''한마디로 혹사지수보다도 더 혹사가 심하다.''' 2010년대 중, 후반 감독치고는 연투와 집중투에 무심한 편으로, 2013년 초반 김승회를 미친척하고 굴려서 후반기에 뻗게 만든 롯데의 김시진 감독이나 4월 송창식 애니콜 논란을 일으킨 한화의 김응용 감독처럼 시즌 끝나고 보면 등판횟수가 적어서 혹사가 아닌 것 같지만 단기간 집중적으로 무섭게 굴려서 여러 투수의 폼을 떨어뜨리는 행동을 저질렀다. 다르게 말하면 이건 김성근이나 김경문처럼 알고도 총 이닝을 많이 먹이는 혹사를 저지르는게 아니라 투수운용을 그냥 못하는거다. 이닝 천천히 고르게 먹였으면 아무도 혹사 안할 수도 있었다. 심지어 정명원-차명석 등 다른 팀에서 좋은 의미로 검증된 투수코치 라인을 데리고도 과거 자신이 고집하던 투수운용을 그대로 반복했다.[23]
야수의 경우 주력선수들은 이적생 출신의 베테랑 타자들(김상현, 박기혁, 박경수, 이대형, 유한준, 이진영 등)이 대다수이고 여기에 트레이드했거나 팀 창단 시 뽑았던 노망주들(오정복, 하준호, 김사연 등)이 주전과 백업을 오가는 상황이다. 2016년 신인드래프트에서 투수를 거르고 야심차게 1픽으로 지명한 남태혁조차 2016시즌 내내 모습도 드러내지 않다가 이미 순위가 다 결정난 시즌 막바지에 와서야 1군에 콜업되는 등 유망주로서 포텐을 터뜨린 선수는 단 한 명도 없다. 야수 육성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2군에서 아무리 잘 쳐도 항상 베테랑 위주로 라인업을 구성하기 때문에 2군 선수들을 잘 콜업시키지 않으며, 어쩌다 올라와도 단 한 번의 기회만을 제공한 후 뭔가 보여주지 못하면 금방 내려버리는 식의 운용이 시즌 내내 반복되었다. 야수 주전 육성 0명이라는 결과는 조범현이 리빌딩과 육성을 잘하는 감독이라는 인식을 완전히 뒤집어 놓는 것으로, 조범현이 kt에서 실패했다고 볼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단순히 결과만 좋지 않았다면 야수 자원의 부족이나 시간의 부족 탓을 해도 되지만, 조범현 감독의 경우는 그 과정도 많은 비판을 받았다.
아무리 봐도 타격 컨디션이 별로인 김상현을 믿음의 야구로 일관하며 타율이 2할 초반대에 머무는데도 꾸준히 4번에 기용하거나, 기계적인 수준의 좌우놀이에 집착하는 등 현대야구 추세인 데이터 야구를 전혀 하지 않는 모습도 신생팀으로서 신선한 야구를 보여줬으면 하는 팬들의 기대치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오랜 경력에 비해서는 비교적 나이가 젊은 편이지만, 나이가 무색하게 확실히 옛날 야구를 한다.
박세웅을 보내고 장성우를 영입한 것도 후대엔 재평가가 될지 모르겠지만 2016시즌을 마친 현재로서는 실패한 트레이드에 가깝다. 박세웅이 롯데에서 쌓은 승수만큼 kt에서 기록한 투수는 외국인 중에도 없다. 반면 장성우는 인성이 별로 좋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굳이 데려왔고 결국 사고를 내는 바람에 2016시즌 내내 전력외가 되고 말았다. 다 큰 성인이 자기 앞가림이야 자기가 하는 것이 맞지만, 선수들의 사건사고를 책임질 사람을 찾는다면 당연히 감독이 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박세웅이 2017시즌에 완벽히 성장을 하여 롯데의 우완 에이스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망한 트레이드가 될가능성도 충분하다.
신인지명에도 문제가 많았다. 2015년 특별우선지명에서 황금사자기대통령배를 석권한 서울고 우완에이스 최원태를 즉전감 필요하다며 거르고 주권홍성무를 골랐다. 주권은 '16시즌 한해 반짝이라도 했지 홍성무는 아무것도 없다. 이듬해 2차 지명에선 다들 야수 최대어 최원준 아니면 투수 김재영을 뽑을 걸로 예상하고 있었는데 둘다 제끼고 나이 많고 수비 안되고 미국가서 루키리그에서 빌빌거리다 온 남태혁을 골랐다. 이러한 한심한 선택은 박세웅 트레이드와 함께 선발육성을 제대로 망쳐서 신생팀으로 여러 혜택을 받았음에도 김진욱 시대까지 키워낸 국내 선발이 고영표 한 명 뿐 이다. 박세웅을 남겨두고 관리해 주면서 최원태를 뽑아 고영표까지 3명을 묶어 선발 코어로 키우고 최원준을 지명해 고정 포지션주며 나중에 들어올 강백호와 함께 타격 리빌딩 코어로 썼으면 이 사단 안났다.[24]
해임 일주일 전에는 신인들과 잡힌 상견례에 참석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구단 직원들을 난처하게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많은 팬들이 크게 실망했다. 비록 구단이 구두로 재계약 약속을 한 상황에서 김상현 사건으로 유야무야 넘어가버리는 등 조범현이 구단에 불만을 가질 만한 상황이 조성되기는 하였으나 진정 팀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신인들을 다독여주는 지도자로서의 책무를 다했어야 하는데 구단 하는 짓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꼬장을 부리는 듯한 행동을 보인 것.
조범현이 잘했던 점으로는 박경수의 포텐셜을 알아보고 홈런타자의 재능을 일깨운 것, 포수로 뽑은 김재윤을 투수로 전향시키고 필승조로 자리잡게 한 것, 방출된 선수였던 김종민이해창을 백업포수로 길러낸 것 정도가 있다.[25]
결국 성적 부진과 선수 관리 실패라는 표면적 이유로 단장과 함께 해임되었으나, 엉뚱하거나 불가항력적인 원인으로 인해 억울하게 재계약에 실패했다고 평가하기에는 실제 문제는 공식입장에서 언급된 것보다 훨씬 많았으며, 그를 그리워할 kt팬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라고 예측했지만 2017 시즌 초반 반짝 이후 오히려 퇴보한 경기력을 보이면서 KT 관련 기사마다 그의 이름이 간간히 보인다. 하지만 기사상의 이런 언급이 나와도 조범현을 절대 좋게 평가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인 것이, 드래프트 지명 문제와 함께 기존 투수의 혹사 단 두 가지만으로도 이미 조범현은 내실을 다지는 데에 실패했기 때문. 그 때문에 후임 감독이 덤터기를 더 쓸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된 것이다. 결국 2017년의 최악의 시즌을 딛고 2018년에 후임 감독은 순위는 둘째치더라도, 팀 역사상 최다 승수를 찍을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 이 때문에 kt wiz는 2018년을 기점으로 스카우트 팀이 완전히 물갈이되고 이강철 감독이 부임한 후에야 팀이 웬만한 타 구단과 맞불을 놓을 수 있는 경쟁력을 갖추기 시작했을 정도로 팀의 내실을 다지는 시기가 굉장히 늦어지고 말았다. 그 이강철 감독조차 2020년을 기준으로 불펜진의 문제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여전히 이 당시의 덤터기가 완전히 빠지려면 멀었지만 말이다.

3.6. 야인 시절 2(2017~)


kt wiz 감독 퇴직 이후 스포츠동아 기고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어 비정기적으로 '조범현의 폴 인 베이스볼'이라는 Q&A 형식의 칼럼을 쓰고 있다. 전국의 학교를 돌아다니며 야구부 학생들을(특히 포수) 간간히 지도하기도 하고 있다고 한다.

3.7. 지도자로서의 성향



3.7.1. 개관


코치 시절에는 훌륭한 배터리 코치였다.[26] 이 사람 밑에서 제대로 포수로 조련받은 선수가 '''박경완''', 진갑용 등 현 한국프로야구 최정상의 포수. 특히 쌍방울 배터리 코치시절 박경완을 새벽 6시부터 저녁까지 지옥훈련으로 굴린 일화는 유명하다.[27]
그러나 삼성 배터리 코치 시절에는 LG의 주전 포수이자 당시 최고의 포수였던 김동수가 삼성으로 오자 김동수와는 궁합이 안 맞는다며 갈등을 빚었고 결국 김동수는 SK로 트레이드되었으나 2002년 말 조범현이 SK의 감독으로 오자마자 가장 먼저 김동수의 골글 라이벌이었던 국가대표 포수 박경완을 영입한 뒤 '''김동수를 방출해 버렸다.'''[28] SK 재임시절 정상호는 결국 조범현 재임 시기에 재능을 터뜨리지 못했으며[29] KIA에서도 제대로 키운 포수 자원이 없어서[30] 정말 포수 육성 능력이 있기는 한 거냐는 의견도 존재한다. 다만 포수라는 게 원래 프로에서 성장시키기도 어렵고 시간도 오래 걸리는 포지션이고, SK 시절부터 조범현은 감독으로 활동했기에 포수 육성에만 집중할 수는 없었던 터라 전문적으로 배터리 코치로 활동하던 시절에 비해 성과물이 안 나온 거라고 보는 이들도 있다.
2013년 삼성 라이온즈 포수 인스트럭터로서 이흥련을 과거 박경완처럼 지옥훈련으로 조련해서 쓸만한 포수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다.[31]
참고로 우승 경험이 선수(1982년 OB), 코치(2002년 삼성라이온즈 배터리 코치), 감독(2009년 KIA 타이거즈) 다 있는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하였다. 거기에 더불어서 국제대회(2010년도 아시안게임 금메달)까지 우승하며, 한국프로야구에서 '''골든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유일한 사람'''이다!
김상엽처럼 홀수 해에는 좋은 성적을, 짝수 해에는 나쁜 성적을 거둔다는 징크스가 있다. '''2003년 2위'''[32], 2004년 5위, '''2005년 3위''', 2006년 6위, , 2008년 6위, '''2009년 1위''', 2010년 5위, '''2011년 4위''' 그러나 이 법칙은 2015년에 kt wiz가 '''KBO 사상 첫 10위'''를 찍으며 깨지고 말았다. 물론 신생팀이라서 꼴찌만 안해도 다행인 시즌이었고 그나마 4월의 부진을 뒤로 하고 댄 블랙 영입 이후로는 그럭저럭 선방했던 시즌이었다.

3.7.2. 선수단 운영


세밀한 작전 지시에서는 능력이 떨어진다는 평이 많지만, 양현종, 곽정철을 비롯한 젊은 투수진의 수준을 끌어올려 리빌딩에 성공한 것은 조범현의 공으로 볼 수 있다. 팀 성적에 따라 별명도 '''조뱀'''에서 '''조백사''', '''조갈량'''으로 진화.
SK 감독 시절을 보면 여러모로 미숙한 점이 많았다. 전임 강병철 감독 시절의 열악한 투수진 때문에 데뷔 첫 해부터 모든 부담을 짊어지고 혹사 당해 반드시 쉬어야 했던 에이스 이승호는 혹사 여파로 인해 관리가 필요했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 더 굴려지며 결국 3년을 부상으로 날렸고 복귀 후에는 선발로 나오지 못하고 중간계투가 되었다. 선수단 관리도 미숙해서 1차 지명 출신 송은범은 멘탈 케어가 안되어서 놀아버렸고[33] 제춘모는 2003년 한 해 반짝한 후 자기관리 실패로 인해 다시는 그 때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으며 신승현, 엄정욱 등은 부상의 늪에 빠졌다. 그나마 정우람윤길현에게 원 포인트부터 시작해서 1군 경험치 먹인게 유일한 장점인데 정우람은 조범현때 굴려져서 김성근 1년차에 안식년 들어갔다.[34] 야수 기용도 마찬가지라서 자질있는 젊은 야수들을 키우려는 시도는 했지만 정작 키우는 방식은 미숙해서 제대로 된 포지션 하나 못잡아주고 여기 박았다 저기 박았다 하면서 정처없이 떠돌게 만들었다.
시즌 구상에도 문제가 있었는데 2006년 시즌을 앞두고 어깨부상 당한 이승호와 인저리프론 엄정욱이 건강하게 돌아온다는 별 신빙성 없는 구상을 바탕으로 타자 용병만 2명 뽑았다가 6위로 실패하고 결국 본인은 재계약 불가 크리[35]로 물러나고 말았다.
리빌딩의 대가인 김응용, 강병철이나 화수분 야구의 김경문 수준에는 못 미치지만 야수 부문에서 장기적인 안목의 리빌딩을 무난하게 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강병철의 양아들이 워낙 유명해서 그렇지 조범현 역시 젊은 선수들 위주로 기용하며 양아들 키우냐는 비아냥을 많이 들은 편. SK 시절만 해도 정근우, 김강민, 박재상, 조동화, 최정 등 타자 유망주들을 어떻게든 쓰기 위해 제 포지션이 아닌 땜빵 포지션이라곤 해도[36] 꾸준히 1군에 등록하며 경험을 많이 제공했다. 뒤이은 KIA 시절에도 김선빈, 안치홍으로 이루어진 젊은 키스톤 라인을 구축했고, 나지완을 팀내 4번 타자로 성장시켰다. 트레이드로 데려온 채종범은 끝끝내 부활하지 못했지만... 부임 첫해에는 성적이 안 나온다고 욕먹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이로 인해 2009년의 우승이 가능했다고 보는 사람이 많다.
다만 육성 관련해서는 이 선수가 이 포지션에 적합하다고 생각하고 그 능력을 키우는게 아니라 '''쓸만한 선수 여기 써보고 저기 써보고 하는 식으로 돌려쓰다 어디 한 군데 적응하면 좋고 아님 말고 식'''이라 한계가 있었다. 당장 최정은 조범현 시절 불안한 수비로 인해 1루와 3루를 떠도는 등 고정된 포지션이 없어 정처없이 떠돌아 다녔다. 포수를 잘 키운다는 주장도 있으나 정작 감독이 되고나서 제대로 키운 포수가 단 한 명도 없어서 그냥 박경완, 진갑용이 얻어 걸린거라는 반론도 있다.
선수 보는 안목도 기묘해서 SK 시절에도, KT 시절에도 '''눈뜬 봉사'''가 아닌가 싶은 선택을 자주했다. SK에선 그 유명한 류현진 대신 (2라운더에서도 충분히 지명할 수 있는)이재원과 김성훈을 선택했고 FA로 한화에 간 김민재의 보상선수로 신체 건장한 양훈 대신 김인식의 혹사로 맛이 간 정병희를 선택했다. KT에서는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는 신인지명을 자주 했는데 2015년 특별우선지명에서 황금사자기와 대통령배를 석권한 서울고 에이스 최원태를 즉전감 필요하다며 거르고 주권홍성무를 골랐다. 이듬해 2차 지명에선 당연히 뽑을 줄 알았던 김재영 대신 나이 많고 수비 안되는 남태혁을 골랐다.
두산의 김경문 감독과 같은 포지션에 같은 팀에서 뛰었지만 감독이 된 후의 성향은 상당히 차이가 많이 난다.[37] 둘 다 포수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블로킹에 관한 견해가 다르다는 것이 재미있다. 김경문이 포수는 막으라고 있는 포지션이라고 가르치는 반면 조범현은 선수생활 오래하고 싶으면 주자가 뛰는 길은 막지 말라고 가르친다.
또 다른 문제는 KIA의 감독을 맡은 뒤 2007년이후 수술을 해야하는 한기주에게 '''갑자기 마무리 투수가 빠지면 안 된다면서 한기주의 수술을 반대했고''' 그렇게 수술을 하지 못하고 2009시즌까지 뛰게 만들고 한기주가 부진하자 수술을 허락해줬다. 그리고 한기주는 다시는 2006~2008년도 모습을 보여주지못하고 '''혹사의 피해자'''가 되었다. 6선발 체제의 선발 중심 야구를 하는건 좋은데 불펜 운용에 취약한 면을 드러냈다는 것. 한 템포 느린 터프한 상황에서 교체, 손영민, 김희걸 등의 잦은 등판으로 인한 혹사 논란 등을 들 수가 있겠다. 이점은 kt에서도 변하지 않아 2016 시즌에 신인 투수들이 선발을 소화할 상태가 못되는데도 무리하게 6선발을 고집했고 그 결과 한화 버금가는 불펜 혹사를 기록하고 있다.

3.7.3. 인간적인 면


전 소속 팀의 팬들에게 인간적인 면에서는 그리 좋은 평가를 못 받는데, SK 와이번스 시절에는 송은범을 할아버지의 발인식[38]에 보내지 않음으로 인해 상당히 비난이 많았다.[39] 이에 대해 송은범이 엇나간 것이 조범현의 책임이라는 비난은 옳지 않고, 그가 학창 시절부터 이미 '''잘 노는''' 선수로 유명하여 구단 차원의 관리 대상이었다는 반박도 있다# . 하지만 저 사건이 송은범에게 크나큰 정신적 데미지를 주었을 것은 자명한 일이며, 관리 대상이라 하더라도 직계 존속의 발인에 참석하지 말라고 지시한 감독과 구단의 행태는 당연히 비난감이다. 조범현은 이미 인간적으로 배려도 없이 한참 모자란 것이다.
한국 야구계 자체가 인간적인 부분에 대한 배려가 부족해 이 사건과 비슷한 이야기가 너무 많다. 후에 이종운 감독과 손아섭 관련 사건으로 다시 불거지지만, 그전의 김성근 당시 SK감독만해도 2군 코치가 부친 기일에 잠깐 다녀와도 되느냐고 당시 이만수 2군 감독에게 허가를 요청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만수 2군 감독은 야구가 없는 휴일이라 괜찮겠지 하면서 김성근 감독에게 허락을 받지 않고 OK를 했는데, 2군 훈련과 재활까지 모두 챙기는 김성근 감독이 '''어딜 감히 장수가 전쟁 중에 전쟁터를 비우냐'''라고 화를 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40] 이와 정반대되는 일화를 전하는 가장 확실한 인물은 제리 로이스터 감독,[41] 한국프로야구 최초의 외국인 감독이다.
2009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지 4일 만에 수석코치인 김종모를 경질하고, 타격코치 황병일을 수석코치에 앉혔고 kt wiz에 와서도 황병일을 불렀다.[42] 김종모에겐 부임할 때 끝까지 같이 가자고 말해 놓고 우승하고 나니 껄끄럽다고 경질해 버린 것. 김종모가 타이거즈 프랜차이즈 스타였음던지라 배타적이던 기아팬들에게 많은 비난을 받았다. 조범현이 김종모를 경질한 이유를 추측해 보자면, 당시 김종모는 차기 감독을 염두에 두고 감독의 의중과 상관없이 KIA 구단에서 수석코치로 임명된 사람이었다. 즉 '김성근 감독 - 이만수 수석코치'와 비슷한 예. 우승 이후 이방인으로 지역색이 강한 선수단을 장악하기 위해 잠재적인 라이벌을 내치는 것은 이해 못할 일은 아니다. 코치 관련 문제는 누굴 내보냈냐가 아니라 그래서 누굴 무슨 명분으로 데려왔냐에 있었다.
팀 프랜차이즈 스타인 장성호를 찬밥 취급하여 결국 한화 이글스로 트레이드하게 만들었다고 비난을 받았는데, 조범현 감독의 부임기간 동안 장성호의 성적은 하락세였고 2009년에 1루수 경쟁자 최희섭은 골든 글러브를 받는 등 전성기를 맞았다. 1루를 빼더라도 좌익수에도 유망주 나지완의 육성을 위해 주전 좌익수로 기용했기에 장성호는 백업 좌익수로 밀리고 만다.. 2010시즌 중 장성호가 원하는대로 팀을 옮겨준것이 조범현이다. 2014년 11월 장성호의 인터뷰에 따르면 본인의 훈련 태만으로 인해 화가 난 조범현 감독에게 오히려 대들며 트레이드 요청을 했다고 하며, 이는 4년간 서로간의 앙금으로 남아 있다가 2014년 5월 조성환의 중재로 인하여 풀어지게 되었다.[43] 여기에서 조범현 감독의 대인배적인 모습이 드러나는데, 훈련 태만과 관련된 다툼이 있었다고 언론에 언급했다면 자신에게 가해지는 비판은 상당 부분 줄일 수 있었겠지만 조범현은 일언반구의 말도 하지 않고 그 모든 비난들을 참아넘겼다.[44] 그리고 장성호가 2014 시즌을 마치고 롯데 자이언츠에서 방출된 후, kt wiz 감독으로 부임했던 조범현 감독은 장성호를 다시 받아들여 현역 생활 마지막을 보낼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감독으로 부임한 후 조경환을 방출한 것을 두고도 뒷말이 많았었다. 조경환은 조범현에게 밉보였는지 SK 와이번스에서 2006년 6월 26일에 웨이버 공시됐고, KIA 타이거즈가 계약 양도를 신청하여 이적했다. 그런데 '''조범현이 KIA의 감독으로 오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이 조경환을 내친 것이었다.''' 비슷한 경우로는 김동수가 있었다. 조범현이 삼성 라이온즈의 배터리코치 시절 진갑용을 밀어주는 등 조범현과 김동수는 사이가 나빴고, 결국 김동수는 진갑용에게 밀려 2002년 SK로 트레이드되었지만 2003년 시즌을 앞두고 조범현이 '''SK 와이번스의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김동수부터 SK에서 제거해 버렸다.''' 그리고 FA 자격을 얻은 애제자 박경완을 영입했다.[45]
이재주의 경우는 방출당하기 직전이던 2009년 말 딸의 출산을 앞두고 있던 상황이어서 아무리 프로라도 이것은 좀 아니지 않냐는 말도 나왔지만 사실 이것은 이재주 자신이 자초한 일이다. 이재주는 말년에 2군 훈련 시간에 늦게 나오는 데다가 좀 더 훈련하라는 코치들의 말을 무시하고 그냥 자신의 벤츠를 몰고 가 버렸다. 이렇게 팀의 케미를 해치는데 더불어 성적까지좋지 않았으니 방출하는 건 당연했다. 2008년까지야 거포가 너무 부족했지만 2009년부터는 최희섭 김상현 나지완등이 버티고 있으니 자리도 없었다. 그나마 친정이라고도 할 수 있고 선수를 팔아먹기도 했던 넥센 히어로즈[46]에서 영입하려고 했으나 계약하기 직전에 본인이 연락을 끊어 없던 일이 되었다.
부임 내내 팬들에 의해 저평가되고 안 좋은 모양으로 사실상 경질당했음에도 2012년 언론기고에서도 KIA 타이거즈에 대한 애정을 나타내고, 선동열 신임 감독을 격려하는 대인배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 팀 성적도 부침이 심했고 가는 곳마다 대인관계에 있어서 잡음이 심했던 건 사실이라, 일각에선 '정치력'이 부족한 것 아니냔 평도 있다.
2015년 장성우 사생활 폭로 사건에서 조감독도 장성우가 뒷담화를 한 사람들 중 한명이었다. 이 일은 큰 화제가 됐고 장성우는 프로야구 팬 전체에게 가루가 되도록 욕을 먹었다. 조범현 감독 본인도 큰 데미지를 받았지만 '''성우가 내게는 이미 고개를 못 들 정도로 사과를 했다. 부모가 자식한테 어찌 모질게 하겠느냐. 선수단 전체에게 새로 교육을 해야겠고 성우가 이번 일을 계기로 다시 태어난 마음으로 살았으면 한다. 명포수로는 못키우더라도 인간은 만들어 놓겠다.'''라고 조감독 본인은 장성우를 용서하였다. 여기에 박동희의 기사로 화제가 되었던 폐지 위기의 모가중 야구부를 kt 코치진들과 함께 지도하고, 2015년에는 홈경기에 초청하기도 했다는 사실도 알려지며 점점 이미지가 좋아지고 있다.

4. 김성근과의 인연


감독으로는 김성근 감독의 제자[47][48] 데이터 야구를 표방한다.[49] 그러나 KIA 타이거즈 감독으로 부임하고 2008 시즌을 보내며 악평이 많았는데, 대표적으로 타자에게 맡기는 팀컬러와 다른 감독 스타일과, 2008년 시즌중에 있었던 전병두를 포함한 2대3 트레이드 건이 있다. 주전 포수 김상훈이 부상 당함에 따라 별 수 없었던 트레이드였지만, 해태 시절부터 대대로 좌완, 특히 좌완 투수는 귀한[50] KIA에서 딱 둘 있는 좌완투수 중 한 명인 전병두를 트레이드했기에 팬들이 분노했다. 거기에 대 SK전에는 거의 조공식으로 지다시피했다[51].
김성근 감독과 인연이 상당히 각별했고, 김경문 감독과 악연이 많았다. 조범현은 대구 대건고 야구부였는데, 팀이 해체위기에 놓이자 공주고로 가는데, 김경문에게 밀린다(…). 다시 대건고로 돌아갔지만 대건고는 결국 해체되고, 결국 서울 충암고로 전학을 가서 야구를 계속한다. 이때 감독이 김성근이었다. 1977년 황금사자기 8강전서 충암고신일고에 패했는데[52], 이때 조범현은 포수마스크로 땅을 치며,“이제 우리 대학 우찌 가노, 우찌 가노...”했다 한다.[53] 여담으로 이는 김성근 감독이 야구인생에서 울어봤던 단 2번의 일 중 하나라고 한다.[54] 다른 한번은 2002년 한국시리즈 6차전.
그러나 2009년 한국시리즈 당시 SK의 관중석에서의 수비 시프트 지시, 사인 훔치기 논란 등으로 인해 사이가 틀어진것으로 팬들은 추정하고 있었으나 이는 전혀 아니었다. 우승 후 조범현이 직접 김성근을 찾아가 인사까지 했고 김성근도 답례를 했었다. 다만 조범현의 kt를 김성근이 비하하는 듯한 발언을 2016 시즌 초에 하고도 대첩급 경기를 여러 개 만들더니 끝내 상대 전적에서 kt가 8승 1무 7패로 한화에 앞서게 되면서[55] 현재도 좋은 사이일지는 의문이라는 서술이 있었으나 그 이후에도 덕담을 잘만 나눌 정도면 분명히 친한 사이이니 뇌피셜은 자제하자.

5. 기타


아는 사람은 다 아는 프로야구 계의 독실한 크리스천이다. 1995년, 2녀 1남 중 막내인 국민학생 아들을 희귀 신장병으로 잃은 비극이 있다. 당시 조범현은 쌍방울 코치였기 때문에 전주시에서 주로 지내야 했고, 아들과 마지막 시간들을 함께 보낼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야구인이 된 것을 너무나 후회했다고 한다. 원래는 크리스천이 아니었는데 아들이 희귀병에 걸리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에 교회에 다니게 되었다고 한다. 자신이 자주 지방으로 자리를 비워야 할 때 교인들이 가족처럼 아들을 위해 기도해 주는 게 눈물이 나도록 고마웠다고 한다. 아들을 잃고 방황했으나 종교의 힘으로 간신히 극복하고 일어설 수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잃은 아들 생각만 하면 감정이 격해진다고... 물론 현장에서는 슬픈 티를 안 내려고 선수들을 더 열심히 훈련 시켰다고 한다.
별명은 조뱀.[56] 덕분에 최훈카툰에서 모자쓴 으로 묘사된다. 2009시즌 초반의 부진한 모습이 점차 사그라들고 결국 시즌 중반 1위에 오르게되자 조갈량으로 레벨업(?)이 되었다. 최훈카툰에서의 캐릭터묘사도 제갈량 복장의 뱀으로 변경. 그리고 삼국전투기조범도 이 뱀 캐릭터로 등장한다.
야구친구의 2014년 3월 6일자 상식과는 조금 다른 야구 이야기 코너에 의하면, 500경기 이상 출전했던 은퇴 선수들 중 타율이 낮은 순대로 뽑은 '역대 최악의 타자 2위'라고 한다. 가장 최악이라 할 수 있는 1위인 염경엽과는 불과 6리(=0.006) 차이. 그 외에도 역대 최악의 타자 톱10에 조범현 자신을 포함해서 현역 감독3명과 단장이 1명….[57]
현역시절, 1987년 7월 26일 무등에서 열린 해태 타이거즈와의 경기에서 11회말 2사 만루 상황에서 포일을 범해 '''역대 최초로 끝내기 포일'''을 기록하였다.
50대 초반이라는 비교적 이른 나이할아버지가 되었다.
개그맨 이휘재와 친분이 있는 듯 하다.[58] KBS 예능 프로그램 슈퍼맨이 돌아왔다에서 이휘재가 한 결혼식의 사회를 봤는데, 그 결혼식이 바로 조범현 감독의 결혼식이었다.
[1] 기타 문단에 후술하겠지만 크리스천이 된 계기가 1995년에 2녀 1남 중 막내인 국민학생 아들을 희귀 신장병으로 잃은 비극이 있었는데 당시 조범현은 쌍방울 배터리 코치였기 때문에 전주시에서 주로 지내야 했고, 아들과 마지막 시간들을 함께 보낼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야구인이 된 것을 너무나 후회했다고 한다. 원래는 크리스천이 아니었는데 아들이 희귀병에 걸리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에 교회에 다니게 되었다고 한다.[2] 실제로 삼성 라이온즈 원년 멤버의 거의 3할을 대건고 출신들이 차지하고 있다.[3] 심판과 조범현 사이에 서있는 타자는 당시 롯데 자이언츠 소속이였던 포수 심재원.[4] 공주고 출신 김경문은 OB의 충청도 연고지 출신 선수로 먼저 입단이 결정되었고, 충암고 출신 조범현은 MBC와의 서울 연고 2:1 드래프트를 통해 선발되었다.[5] KBO의 막장 리그 운영때문에 벌어진 촌극. 자세한 내용은 슈퍼 한국시리즈 문서 참조.[6] 준플레이오프에서 SK에게 패배[7] 감독직을 처음 맡은 2003년 당시 팀내 최고참 김정수와 불과 '''2살 차였다.'''[8] 당시 LG에서 갈등을 일으키던 이상훈을 데려와 기존 마무리 조웅천과 함께 더블 스토퍼로 기용하려고 했으나 이상훈의 은퇴 선언과 조웅천의 부진으로 인한 뒷문 부재가 SK의 포스트시즌 탈락에 한 몫 하였다.[9] 단, 이때의 류현진은 수술 경력때문에 타 구단들에서도 지명을 기피하는 상황이었는데 한화가 복권 긁자는 심정으로 덥썩 낚아챈 것이다.[10] 사실 김응용 감독의 장기 집권으로 해태 - KIA는 30여년 세월 동안 단 8명의 감독만이 취임했다. 김동엽 - 김응용 - 김성한 - 유남호 - 서정환 - '''조범현''' - 선동열 - 김기태. 김응용 이후 비 해태 출신 감독은 조범현, 김기태 2명밖에 없다. 그나마 김기태 감독은 해태-KIA의 연고지인 광주광역시에서 태어나 광주일고 출신이지만 조범현 감독은 연고지와도 전혀 상관없는 경북 출신인데다가 서울에 위치한 충암고 출신이다.[11] 그래도 5위였다.[12] 대구에서 태어나 OB에서 선수생활을 했다. KIA 내지는 해태하고는 이렇다 할 접점이 없다.[13] 조범현 감독도 워낙 거물들에게 묻혀서 그렇지 투수들을 혹사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2009년 한정 곽정철이 있고 KIA 시절 조범현의 투수혹사의 상징인 손영민도 그러했다. 특히 한기주는 고교혹사와 전임감독의 혹사로 인해 2008년 수술을 받을예정이였으나 조범현의 반대로 수술을 자꾸 늦추게 되었다. 그 이후는......자제한건한기주참고[14] 다만 부상 문제는 악명높은 광주 무등야구장, 군산야구장과 2군 함평구장이 부상 선수를 양산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무등야구장은 심심할 때마다 선수 무릎을 아작내는 걸로 유명하고, 군산구장의 펜스도 사람을 여럿 잡았다. 논 한가운데 야구장 하나 덜렁 있는 함평 연습장은 고교야구부보다 못한 수준이었다. 거기다 막장 수준인 제휴병원과 부실한 재활시스템도... 일단 2010년대로 접어들면서 광주-KIA 챔피언스 필드, 함평-KIA 챌린저스 필드의 건립 등으로 조금씩 인프라가 나아지기 시작했다.[15] 물론 연쇄적인 부상은 열악한 무등야구장의 환경 및 다른 팀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적은 우천취소에도 원인이 있었다.[16] 다만 조범현의 경질은 구단 고위층에서 내려진 지시라는 설이 있다. 프런트는 큰 이변이 없는 이상 2012년에도 조범현과 함께 가려고 했던 듯.[17] 양현종, 나지완, 안치홍, 김선빈, 손영민 모두 조범현이 중용하여 타이거즈의 핵심 전력으로 만들었다. 이범호 역시 조범현 감독 시절 영입했다. 그 후 암흑기를 겪긴 했지만 이 핵심 전력들에 후임 감독인 김기태가 백업 멤버들을 강화시켜 지금의 탄탄한 타이거즈가 완성되었다.[18] 현대차의 후계자인 정의선(정몽구의 장남) 기아차 사장이 우승 직후 선수들에게 '그동안 지원이 미흡했던 걸 인정한다. 앞으로는 달라질 거다'라고 직접 약속하였다.[19]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 비유하면 허정무 감독 정도.[20] 다만, 잘 알려져있듯 조범현은 학생시절부터 코치시절까지 김성근과 함께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과연 김응용이 코치로 기용을 할까라는 의견도 있었다. 다만 조범현은 2001년부터 2002년까지 김응용 삼성 감독 밑에서 배터리코치로 있긴 하였다. 실제 한화 이글스의 신임 배터리코치로는 조범현이 아닌 전종화가 부임했다.[21] FA로 계약금까지 주고 데려온 이대형을 풀어버리는것은 금전손해도 상당한데 타팀으로 보낸것이다. 이후 김기태 감독의 행보를 보면 합리적인 추론이다.[22] 심지어 일각에서는 혹사지수는 누적스탯(...)이기 때문에 김경문이 아닌 조범현이 인간계 혹사 1위라는 의견도 있다. 이번 시즌 kt 불펜은 번갈아서 혹사로 뻗어버려서 풀시즌을 못던졌고 그래서 혹사지수 상위권에 올라가지 못했기 때문. [23] 그리고 이후 조무근은 결국 재기에 실패하고 황재균의 보상 선수로 롯데 자이언츠로 이적했지만, 여기에서도 재기하지 못하면서 그대로 커리어 아웃의 위기에 놓였다. 사실상 이 시기의 혹사가 선수 커리어를 완전히 아작냈다는 것.[24] 결국 야수진 문제는 2018년 이후에야 황재균과 조용호 등 외부 영입과 함께 강백호가 지명된 이후에서야 제대로 구색을 갖추기 시작했으며, 선발 투수 문제는 김진욱 감독 시기만 해도 기회를 받은 고영표 단 한 명뿐이었다가 금민철, 김민, 배제성 등이 자리잡기 시작한 이강철 체제에서야 로테이션이 제대로 잡혔을 정도. 그리고 불펜진은 김민수 등이 합류하며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 kt의 전력 빌딩이 굉장히 늦어진 이유가 이 시기 조범현의 삽질이라고 봐도 무방한 이유가 다 있었다.[25]김종민장성우 사생활 폭로 사건으로 인해 사실상 땜빵으로만 뛰다가 2017년 시즌 중에 NC 다이노스로 이적해버렸고, 거기에서도 전력 외 취급을 당하고 있는 현 시점인 것을 생각하면 조범현이 키웠다고 보기에도 애매한 상황이 되었다. 그 당시에도 고질적인 수비력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 이해창에게 완전히 밀려버리기도 했고. 그리고 김종민은 그 이후 NC에서도 방출되면서 커리어가 사실상 끝났고, 이해창도 얼마 못 가서 kt를 떠났기 때문에 조범현이 키웠다고 볼 수가 없게 되었다.[26] 인터넷방송 라디오볼 2014년 4월 28일 방송에서 정철우 야구전문 기자는 "대한민국에 조범현, 김경문 이후에 배터리 코치라고 불릴만한 배터리 코치가 나오고 있지 않다" 라고 언급하였다.[27] 특히 홈경기가 끝나면 집 근처 놀이터에서 훈련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28] 그리고 김동수는 박경완의 이적 후 포수 자리에 공백이 생긴 현대로 이적, 2003년 생애 첫 3할을 기록하고 골든글러브를 한 번 더 차지하게 된다.[29] 그나마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상무에 입대시켜 군 문제를 해결하게 하였고 제대 후 20대 중반의 '''군필 포수'''가 되었다. 실제로 후임 감독 김성근이 군 문제가 해결된 20대 포수라는 정상호의 장점을 살려 트레이드 카드로 사용하려고 하였던 바 있다.[30] 조범현이 온 이후 두각을 보여준 포수가 차일목인데 사실 2008년 주전 포수 김상훈의 장기 부상으로 백업포수 차일목을 무조건 기용할수밖에 없던 상황이었다. 그래도 기용만 한다고 다 크는건 아니니 조범현의 공이라 보는 사람도 있긴 한데 감독이 포수에게 붙어서 훈련을 같이 하는 자리는 아니니 가려서 듣자. [31] 진갑용, 이지영이 줄부상으로 쓰러지면서 좌절하던 2014 시즌 삼성팬들에게 이흥련이 지금 한줄기 빛으로 다가온 걸 보면... 이지영과 달리 이흥련은 실질적인 데뷔 첫 해부터 홈런도 쳤고.[32] 정규시즌 4위.[33] 다만 이 쪽은 송은범이 고교 재학 시절부터 놀기 좋아하는 성격이었다는 걸 감안해야 한다.[34] 즉 SK 시절 조범현은 투수진에 있어서는 정우람과 윤길현을 제외하면 투수진 발전에는 남긴 게 없다. 당시 19세의 신인이었던 송은범이 (부모님과 다름없는)조부의 발인식에 가는 걸 못가게 해서(발인식은 아침에 하니 경기 전까지 돌아오는 것도 가능했고 결정적으로 이날은 우천취소가 되었다.)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건 덤, 실제로 이 두가지가 SK 와이번스 창단후 4년만에, 자신이 감독으로 부임한 해 바로 코시에 진출했음에도 SK 와이번스 팬덤들로부터 저평가를 받는 가장 큰 이유다.[35] 우승을 걸고 이미 재계약을 한번 해주었는데 상승하는 전력에도 불구, 최종 성적이 오히려 더 내려갔다.[36] 정근우는 좌익, 2루, 3루, 유격을 오가다가 2년차인 2006년부터 주전 2루수 자리를 꿰차고 그해 골든글러브를 수상하였고, 김강민, 박재상, 조동화는 이진영과 박재홍이 외야 주전 두 자리를 차지한 가운데 나머지 한 자리에 돌려가며 꾸준히 기용되었고 최정 역시 장타 부문에서는 김재현-이승엽-김태균에 이어 10대 나이에 두 자릿 수 홈런을 치는 등 괜찮은 모습을 보였으나 1, 3루를 번갈아가면서 보았다. 물론 포지션 문제가 있었고 전임자만큼 타격 코칭을 해주지도 못했지만 적어도 1군 경험은 충분히 쌓아주었다.[37] 김성근 감독의 말에 따르면 선수 시절 김경문 감독은 '여기서 맞아도 괜찮다'는 식으로 전체적으로 큰 틀을 그리고 게임을 할 정도로 대범한 성격이었던 반면에 조범현 감독은 상황 하나하나를 노트에 빼곡히 적고 밤새 분석했을 정도로 치밀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성격이 감독이 된 후의 철학에서도 나타나는 듯.[38] 장례식으로 오해하고 있는데 불타는 그라운드에서도 송은범이 "할아버지 발인하는 날 있잖아요. 묘로 가는 날. 비가 진짜 많이 왔어요. 게임이 취소 된 거예요."라고 장례식이 아니라 죽은 이를 장지로 이동하는 "발인식"에 가지 마라는 지시를 했다고 인터뷰했다. 이게 와전돼서 장례식 자체를 못 가게 한것으로 팬들이 오해한 것. 이후 기사에서도 장례식에는 단 하루지만 다녀왔다고 밝히고 있다.[39] OBS에서 SK 선수들의 일상을 방영해주었던 불타는 그라운드라는 방송을 통해 송은범의 눈물과 함께 그 사연이 소개되어 송은범은 긍정적으로 이미지가 좋아졌고 조범현 전 감독에 대한 비난은 더 거셌다. 방송 캡쳐는 이쪽[40] 물론 그래놓고 6년 후 자기가 급해지니 경기 중 자리를 비워 병원으로 가버리는 등 졸렬하기 그지 없었다. 자세한 건 2016년 송창식 혹사 사건 참조.[41] 제리 로이스터는 "가족과 관계된 일"이라면 무조건 가족이 우선이라고 강조했다. 한 일화를 들자면 송승준의 경우에는 4강싸움을 하고 있던 와중에도 아내의 출산일에 맞춰서 선발도 무기한 연기시켜줬었다.[42] 그래서 황병일 수석코치도 kt와 조범현 감독의 재계약이 불발되자, 두산에서 함께한 적이 있는 김진욱이 왔음에도 조범현 감독 보좌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43] 여담으로 조범현, 조성환, 장성호는 모두 충암고등학교 선후배 지간이다.[44] 또한 장성호가 트레이드 될때 사석에서 성호 덕분에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할 수 있었고 한화에서 잘하라는 말을 기자에게 남기기도 했다.[45] 그리고 김동수는 박경완의 이적으로 포수진에 공백이 생긴 현대 유니콘스에 이적해 생애 첫 3할을 치는 등 완벽히 부활하며 골든글러브까지 수상한다.[46] 이재주는 태평양-현대에서 뛰다가 2002년 KIA 타이거즈에 현금 트레이드되었다. 넥센은 공식적으로는 현대 유니콘스와 별개의 구단이지만 삼청태현의 선수단과 일부 코치진을 승계했다.[47] 김성근이 충암고 감독을 맡았을 때 대구에서 전학온 조범현을 받아 주었고, 이후 OB 감독-선수, 삼성 감독-선수, 쌍방울 감독-배터리코치로 인연을 이어갔다. 이후 쌍방울이 해체된 뒤 2000년부터 조범현은 삼성 1군 배터리코치로 옮겼고, 김성근은 삼성 2군 감독으로 오면서 어찌어찌 인연을 이어갔다.[48] 현역 선수 시절 혹은 코치 시절 김성근 감독 아래서 있었던 걸로 김성근의 제자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있는데 조범현의 경우 그중에서도 애제자로 불렸을 만큼 김성근 감독과 각별한 사이였다. 실제로 김성근 감독의 딸들도 조범현을 '오빠' 라고 부를 정도라고 한다.[49] 이와 이름으로 인해 얻은 별명이 조뱀이다.[50] 김응용강영식을 그렇게 아낀 이유가 있다. 원래 좌완 파이어볼러는 지옥에서라도 끌고 오라는게 야구계의 격언이기는 하지만.[51] 2008시즌 대 SK전 4승 14패. 그러나 2009 시즌에는 상대전적에서 앞섰고, 결정적으로 한국시리즈에서 SK를 이기고 우승했다.[52] 전국대회 4강은 대학스카우트가 보장되는 어마어마한 메리트였다.[53] 이 이야기는 김성근 감독이 쓴 책에도 나와 있다.[54] 그래도 충암고는 그 해 봉황대기배 우승에 성공해서 조범현은 특기생으로 대학을 갈 수 있었다.[55] kt의 창단 이래 첫 팀 상대전적 우세다.(...)[56] 조범현을 경상도 사투리로 발음하면 조배맨. 주로 ㅓ,ㅕ 발음을 ㅐ 로 한다. 주호민 을 보면, 후임들이 주호민을 쭈뱀~ 등의 호칭으로 부르는 것을 볼 수가 있다. 2008년의 부진한 성적을 빗대어 호랑인줄 알았는데 뱀이네~ 등의 비하적인 의미도 있었다.[57]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현역 감독들은 모두 2015년 기준으로 21세기에 창단한 야구팀의 감독들이란 점이다.[58] 여담으로, 이휘재는 충암고등학교 출신으로, 조범현과는 동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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