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승남
1. 개요
LG 트윈스에서 활약했던 사이드암 투수. 선수 은퇴 후에는 해설가로 활동한다. 사이드암 투수의 전형적인 레파토리인 싱커-슬라이더를 주무기로 했는데, 싱커의 구속보다는 페이스 조절로 승부를 봤던 유형으로 안정된 폼, 탄탄한 투구 밸런스에 제구력이 대단히 뛰어났던 투수. 다만 선발투수로 발돋움할 찰나에 부상을 입고 스윙맨으로 활동하는 바람에 관리를 잘 받지 못해 선수 생활을 길게 하지 못한 건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2. 생애 및 선수 시절
1974년생으로 인천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랐으며, 전 농구선수 서장훈과 NC의 배터리코치인 이도형과는 학동초등학교 동창이다. 1997년 LG 트윈스의 2차 2순위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1]
LG 입단 전인 중앙대 4학년 때 이병규, 조인성, 김선우 등과 함께 애틀랜타 올림픽에 국가대표로 참가한 적이 있다. 그는 1997년 입단 첫 시즌부터 불펜 투수로 뛰며, 1군 32경기에 등판해 123이닝 6승 5패 ERA 3.29로 선전했다. 신인왕을 노려봤지만 하필이면 입단동기가 무려 라뱅 '''이병규'''라서 신인왕 수상에는 실패했다. 참고로 이 시기에 이만수가 은퇴하기 전 현역에서 마지막으로 친 홈런을 맞은 투수가 그였다.
1998 시즌은 ERA가 4.15로 상승했지만, 1군 33경기에 등판해 112⅔이닝 6승 7패로 필승조로 활동했다.
그러나 1999 시즌은 부상으로 말아먹고 만다.
2000년은 2점대 ERA를 찍었지만 1군 19경기 40이닝 소화에 그쳤다. 아무래도 입단 초기 2년간 워낙 굴려진 탓에 부상을 입어 소화 이닝이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 그 뒤로 2001~2002 시즌은 불을 지르며 잊혀지나 싶었다.
하지만 2003년에 필승조로 다시 부활하였다. 시즌 초반 36⅓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으며 좋은 활약을 펼치며 68경기 106⅔이닝 8승 2패 2세이브 11홀드 ERA 2.45로 커리어 하이를 기록했다.
그러나 이듬해 24경기 18이닝 5점대 ERA로 제대로 시즌을 말아먹으며 다시 전승남은 소리없이 사라진다.
하지만 그보다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으니, '''2004년 9월에 리그를 강타한 병역비리 사건에 연루됐다'''. 결국 재검에서 공익 판정을 받았다. 시즌 후 전승남 본인은 공익으로 입대하면서 소집 해제 후 팀에서 입지가 좁아질 걸 우려해, 2004 시즌 후 LG 구단에 자진 방출을 요구하며 팀을 완전히 떠나 버렸다. 이는 본인이 프로 무대 복귀를 하지 못하고 쓸쓸히 은퇴하는 원인이 되고 말았다.
2006년에 소집 해제된 후 미국 무대를 노크하며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팀에서 입단 테스트를 받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2007년 말에는 한국프로야구 복귀를 노리며 이적을 시도했지만, 결국 활동할 팀을 못 찾고 은퇴했다.
2010년 4월에는 이상훈과 함께 경기도 하남시에서 사설 야구 클리닉을 운영했다고 한다. 클리닉 이름은 J-47 스포츠 스쿨. 황덕균은 NC 다이노스 트라이아웃이 있기 전에 이곳에서 이상훈과 전승남의 손을 거치며 훈련했다고 한다. 2012년부터 SPOTV의 KBO 퓨처스리그 해설과 olleh tv와 함께 제작하는 편파중계 해설을 맡기도 했으며, 2015년 현재 skySports의 먼데이 나잇 베이스볼에 고정 출연하고 있다. 방송에서 꽃집을 운영하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3. 연도별 성적
4. 관련 문서
[1] 참고로 당시 LG에서 1차 지명으로 데려간 선수는 단국대 외야수 이병규. 2차 1라운드는 투수 장문석, 2차 3라운드는 내야수 안재만이었다. 그리고 고졸연고 우선지명으로는 내야수 손지환, 투수 김민기가 입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