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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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前 LG 트윈스, KIA 타이거즈, 삼성 라이온즈, SK 와이번스, 한화 이글스 소속의 내야수. 現 SK 와이번스의 2군 수비코치.
최익성 못지않게 여러 팀에서 뛰어 본 적이 있는 저니맨 중 하나이다. 현역 시절 KBO 리그 최초이자 유일한 무보살 삼중살을 성공한 적 있다. 저니맨이였던 현역 시절에 비해 8년의 지도자 경력 동안 코치 커리어 전부를 SK 와이번스에서만 보내고 있으며, 이 때문에 오랜 기간 코치진을 맡고 있는 백재호, 최창호와 함께 SK의 공무원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휘문고 3학년 때 대통령기와 청룡기를 우승시키며 2관왕을 차지했다. 하지만 졸업을 앞두고 연세대학교 진학이 확정된 상태에서 막판에 LG 트윈스와 입단계약을 체결하여 이중등록이 되었고, 이에 반발한 대학야구 관계자들이 '앞으로 휘문고 선수들을 절대 받지 않겠다'는 폭탄선언을 하면서 프로와 대학이 전면대립하는 엄청난 스카우트 파동으로 비화되었다.[4] 휘문고 측에서는 손지환에게 학교 명예를 실추시킨 책임을 물어 자퇴를 종용했다.[5]
2.2. 프로 시절
LG 트윈스 시절.
우여곡절 끝에 1997년 고졸우선지명으로 김민기, 박만채와 함께 LG에서 데뷔했다.
입단 당시까지만 해도 유지현을 이을 LG의 차세대 주전 내야수로 꼽혔지만 고등학교 시절의 명성에 비해서는 성장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고, 그저 그런 내야 백업에 그쳤다. 그나마 LG에서 많이 나온 해가 2002년. 김성근 감독 시절 내야 백업으로 111경기를 소화하였다. 하지만 그나마 쓸만했던 수비에 비해 타격은 형편없었고, 그래도 고교 시절 보여줬던 모습이 있었기에 끊임없이 트레이드 떡밥이 돌다가[6] 결국 2003년 시즌 후 진필중의 FA 보상 선수로 KIA 타이거즈로 이적했다.
짧지만 전성기를 보냈던 KIA 타이거즈 시절.
진필중의 보상선수로 KIA로 이적한 뒤 성장이 지지부진했던 이현곤을 밀어내고 주전 3루수 자리를 차지했고, 114경기에 나서 타율 0.271, 13홈런, 42타점을 기록하며 LG 시절과 비교하면 환골탈태했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한 방 쳐줄 수 있는 타자로 거듭났다. 2005년에도 타율 0.278, 11홈런, 44타점을 기록하며 2년 연속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하면서 어째 FA로 이적한 진필중보다 더 쏠쏠하게 활약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KIA 시절에는 주로 3루수나 2루수로 출장했고, 가끔 좌익수로도 출장했던 적이 있을 정도로 공격에서는 한 방 기대해 줄 수 있음과 동시에 수비에서는 멀티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는 선수가 되었다.
거기에 2005년 5월 15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친정팀 LG와의 경기에서는 보란 듯이 홈런 2방을 포함해 혼자 '''7타점'''을 뽑아 냈는데, 이중 홈런 1개는 자신과 유니폼을 맞바꿔입은 진필중으로부터 뽑아낸 홈런이었다. 혹자는 '''누가 FA고 누가 보상선수냐?'''라고 하기도….
2006년과 2007년은 예전에 비해 부진한 모습을 보였지만, 2007년 6월 12일 대구구장에서 열린 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에서''' 무보살 삼중살'''을 펼치는 메이저리그식 장면을 연출했다.[7] 그 때문에 삼성은 앙심이 있었는지, 2008년 유용목과 트레이드하여 영입했다. 삼성이 2007시즌 삼중살 때문에 낚여서 손지환을 데려가서 써먹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삼성 라이온즈 시절.
2008 시즌을 앞두고 유용목과 맞트레이드되어 삼성 유니폼을 입었지만 부상에 시달리며 이후 이팀 저팀 떠돌아다니는 저니맨 신세로 몰락하고 만다. 그러다가 시즌 막판 4위 자리를 두고 경쟁하던 한화와의 경기에서 박석민의 홈런 이후 송진우를 상대로 역전 솔로 홈런을 쳤으며 팀을 기적의 4강으로 올려야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8] 08시즌에는 패넌트레이스 전용이며 포스트시즌 전용은 '''유혹의 명철신'''에게 돌아갔다. 하지만 시즌 후 삼성으로부터 방출 통보를 받으며 1년만에 유니폼을 벗고 말았다.
SK 와이번스 시절.
삼성에서 방출된 뒤 친정팀인 LG 트윈스로 간다는 말도 있었으나 LG 시절 함께했던 김성근 감독의 부름을 받아 2009년에는 SK 와이번스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 등번호는 67번으로 휘문고 재학 시절 달던 등번호를 다시 달게 되었다. 하지만 시작부터 너무 의욕적이었는지, 스프링캠프 첫 날부터 발목 골절상을 당해 귀국했고, 결국 몸을 제대로 만들지 못하며 시작부터 꼬이게 되었다. 부상 여파인지 1군에는 6경기 출장에 그쳤고 주로 2군에 머물렀다.
2009시즌 이후 다시 방출. 나이도 30대 초반으로 괜찮은 내야수긴 하지만 경쟁자가 '''최정, 정근우, 나주환, 박정권, 김연훈''' 등 손지환보다도 젊은 내야수들이 많아서 괜찮다는 것만 가지고 SK에서 살아남기는 어려울 듯 싶었고, 하필 부상까지 겹치면서 결국 그것이 현실이 되었다.
한화 이글스 시절.
그 뒤 일본 독립리그 팀인 코리아 해치에서 뛰다가, 주전 3루수인 송광민이 시즌 중 군입대라는 초유의 해프닝으로 이탈하여 3루수가 필요해진 한화 이글스가 신고선수로 영입했다.
오선진의 부상으로 2010년 7월 27일 1군에 콜업되어, 몇 경기 안되지만 제법 괜찮은 타격을 선보여주고 있다. 수비야 그다지 만족할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한화 내야가 원래 막장이니….
2010년 8월 14일 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에서 장원삼으로부터 투런 홈런을 치며, 근 2년만의 홈런맛을 봤다. 2:8로 진 한화 이글스의 유일한 득점…. 당연히 빛이 바랬다.
2010년 8월 28일 두산전 임태훈의 공에 번트를 대려다 오른손 엄지골절상으로 6주간 출전 불가. 시즌이 얼마 남지 않은 관계로 시즌 아웃됐다. 결국 또 부상으로 인해 꼬이는 이래저래 기구한 야구인생. 그리고 시즌 종료후 젊은 선수들을 키운다는 명분으로 방출되며 저니맨 커리어를 따라 가게 되었다.
3. 프런트 경력
한화에서 방출된 이후에도 현역 연장을 위해 개인 훈련을 이어나갔으나 그를 원하는 팀은 없었고, 결국 2011년 1월 은퇴를 선언하면서 33세라는 젊은 나이에 유니폼을 벗게 되었다. 이후 한때 몸담았던 SK 와이번스의 프런트로 입사하였고, SK 구단에서 실시하는 사회인 및 여성 야구 교실에서 코치 신분으로 지도해 주었다.
4. 지도자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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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2013년 시즌을 앞두고 SK 와이번스의 3군 선수단에 해당하는 루키팀 수비코치에 선임되어 정식 지도자 경력을 시작했다.
2016년 4월 14일 이후로 루키군 수비코치에서 1군 타격보조코치로 보직이 바뀌었다.
2017년 루키군 야수코치로 보직이 변경되었다.
2018년부터는 2군 수비코치를 맡았으나 전반기 종료 후 평가가 좋지 않았던 박계원을 대신해 1군 수비코치로 보직이 변경되었다.
지난해까지 불안한 수비를 선보였던 김성현이 2019년 37경기에서 단 2실책을 기록하고 신예 안상현 역시 안정된 수비를 보여주는 데에는 손지환 코치의 공이 큰 듯.'확 달라진 SK 센터라인' 손지환 코치는 약속을 지켰다 비록 김성현의 수비는 이닝소화로 인한 체력저하 등으로 인하여 6~7월부터 퇴화되었으나 시즌을 최소 실책 2위로 마무리했다.
2020년부터는 김일경 코치와 보직을 맞바꿔 2군 수비코치를 맡는다.
2021 시즌부터는 김일경(야구) 코치와 보직을 맞바꿔 1년만에 1군 수비코치를 맡게 된다.
5. 여담
- 친정팀인 LG 트윈스와의 경기에 강한 선수다. KIA 시절이던 2005년에도 LG를 상대로 연타석 홈런을 쳐낸 바 있고, 2008시즌에서는 시범경기때에 LG 투수로부터 홈런을 쳤다.
- 최익성 못지않은 저니맨 커리어를 보냈다. 선수 커리어 14년간 입은 유니폼이 무려 5개.[9] 정식 프로 구단은 아니지만, 2010년 잠시 몸담은 일본 독립리그 팀 코리아 해치까지 포함시킨다면 6개의 유니폼을 입어본 셈.
- 현역 시절 5개의 팀에서 몸담았던 시절 우승 반지는 껴보지 못했고, 준우승만 4회나 맛봤을 정도로 대표적인 콩라인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은퇴 후 SK 수비코치 시절인 2018년 팀이 2018년 한국시리즈에서 극적으로 우승하면서 드디어 우승반지를 처음으로 껴보게 되었다.
6. 연도별 주요 성적
7. 관련 문서
[1] 일본 독립리그 구단. 2011년말 해체.[2] 날려버려 손지환! 날려버려 손지환! 1루타 2루타 3루타 홈-런! 날려버려! 손지환! 날려버려 손지환! 날려버려 손지환 안타손지환![3] (빰빰빰빰 빠밤빰) 안~타! 손!지!환![4] 1990년대 까지는 프로의 신인드래프트와 대학의 신인선발이 매년 가을에 동시에 진행되었다. 당시만 해도 대학야구의 위상이 대단히 높았기 때문에, 우수한 고졸예정자들을 두고 대학과 프로구단 사이에 스카우트 전쟁이 벌어졌다. 대학감독이 입단예정인 고3 선수들을 지방호텔에 감금(?)해놓고, 이들을 프로팀 스카우터들이 빼돌려서 무인도로 잠적하고...온갖 해프닝이 많았다.[5] 이 사건 때문에 휘문고를 이끌던 이명섭 감독이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여기에 휘문고 저학년 선수들 일부가 감독을 따라 춘천고로 전학을 가게 되면서 휘문고는 1997년에 처참하게 몰락했다. 이명섭 감독은 춘천고를 1999년 청룡기 준우승으로 이끌었으나 2000년 초 아마야구 지도자들의 비리 문제에 연루되어 이미지에 흠집을 남겼고 이후 오랜 기간 야인으로 있다가 2011년 휘문고 감독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여기서도 또 비리 문제가 발생해 2015년을 끝으로 물러났다.[6] 2002년 시즌 중 롯데 자이언츠와 트레이드 성사 직전까지 갔다가 막판에 파토났고, 2003년에도 한화에서 트레이드 매물로 나온 송지만을 LG가 영입하기 위해 한화에 제시한 카드가 손지환과 투수 1명(대체로 장문석이라고 알려져 있다)이었다고 한다.[7] KBO 역사상 유일하게 무보살 삼중살을 성공시킨 사례. 그 덕분에 올스타전에 뽑힌 적도 있다.[8] 무엇보다 이상목의 100승과 박한이의 분전, 양준혁과 전병호의 부활과 타선의 세대교체가 결정적이긴 했다.[9] 최익성은 삼성-한화-LG-해태/KIA-현대-삼성-SK 순으로 무려 6팀에서 커리어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