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채기
1. 남성 인권 운동가
鄭菜基, 1962 ~ 2013
한국에 최초로 남성 인권 운동을 소개한 인물. 1992년 한국에 남성 인권 운동을 처음 소개하였다.
2006년 남성연대[1] 를 만든 성재기처럼 주목받지는 못했다. 그러나 1990년대 TV와 방송에서 가부장제나 남자가 가정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주장을 비판했고, 남성에게 가부장 역할을 사회가 강요한다고 비판했던 인물이다.
여성의 인권과 평등에 대한 의식이 시작됐지만 아직 '''남자가 가족을 책임져야 된다, 남성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는게 당연하다'''고 여겨지던 시절이라 아침마당이나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등에 출현했다가 여러번 강제하차 당하거나, 생방송 중 추방당하거나, 방송 편집이 잘리기도 했다.
1990년대 말~2000년대 초 TV방송과 라디오 방송에서 여러번 수난을 겪었다. 그 결과 부각된 인물이 정채기보다 훨씬 더 강력한 존재가 성재기이다.
1.1. 생애
한국 최초의 남성 인권 운동가.[2] 이름이 자모음이 비슷해서 혼동할 수 있지만 성재기와는 동일인이 아니다. 건국대학교와 명지대학교, 경기대학교의 심리학, 교육학 교수를 지낸 인물이다. 1994년 한국에 최초로 남성주의 운동 매스큘리즘을 소개하였다.
1920년대에 나혜석, 허정숙, 김일엽, 김명순 등에 의해 한국에 페미니즘이 소개된 것에 비교하면 늦게 소개된 편이며, 남성운동 자체가 1970년대에 미국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90년대 일본에서 활발해졌으며 정채기에 의해 한국에도 소개되었다.
좋은 아버지 되기, 자녀들과 친밀한 아버지 되기, 좋은 남편이 되기, 남성도 눈물흘릴 수 있다 등 남성도 사람이라는 주장을 처음으로 하였다.
1.1.1. 교수 생활
전남 광양 출신으로 어릴 때 여수, 순천에서 거주했다. 밑의 동명이인 정치인과는 동향 사람이다.순천고등학교와 목포대학교를 졸업했다. 목포대 졸업 이후 서울로 가서 다시 건국대학교를 다녔고, 졸업 후 건국대 대학원에서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2년 건국대학교에서 교육학, 심리학 강사가 되었고 1994년부터 건국대학교, 명지대학교, 경기대학교의 보육학, 교육학, 심리학 강사를 역임했다.
숙명여자대학교에도 보육학, 심리학 강사로 출강했다.
1992년 일본을 방문했다가 일본남성협회에 가입하고, 귀국해서 바로 한국에 남성주의, 남성 인권 운동을 방송, 언론을 통해 소개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비난과 왜곡, 비웃음 뿐이었다. 1994년부터는 본격적으로 남성운동에 들어간다.
1995년 5월 한국남성연구회를 조직했고, 1997년 5월 남성학연구회를 설립했다. 2005년 강원관광대학교 영유아보육과 교수, 이후 교육학과 교수가 되고 강원관광대학 평생교육원장으로 있었다. 만년에는 경기도 하남에 정착하였다.
1.1.2. 남성 인권 운동
1.1.2.1. 매스큘리즘 국내 소개
그는 1992년부터 매스큘리즘과 남성 인권 운동을 대한민국에 소개했다. 페미니즘이 1910년대 후반~1920년 무렵에 한국에 소개된 것에 비하면 늦게 소개된 것이다.[3]
1992년 일본 남성학회를 방문했다가 남성 인권 운동 매스큘리즘의 존재를 접하고, 귀국 후 한국 국내에 소개하기 시작했다.
남성 인권 운동은 초창기에는 호응을 얻지 못했으며, 모든 남성을 가부장제의 수혜자로 지목하는 것에 반대, 비판하는 운동을 해왔고, 권위주의, 가부장적 의식 버리기, 자녀들과 놀아주는 다정한 아버지 되기, 가사업무 남편도 분담하기 등의 운동을 벌였다.
여성의 인권과 평등에 대한 의식이 시작됐지만 아직 '''남자가 가족을 책임져야 된다, 남성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는게 당연하다'''고 여겨지던 시절이라 아침마당이나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등에 출연했다가 여러번 강제하차 당하거나, 생방송 중 추방당하거나, 방송 편집이 잘리기도 했다.
1.1.2.2. 방송에 출연
2003년 6월 30일 SBS 여성주간 특집으로 7월 4일까지 방송된 5부작 TV 특강 '21세기 신 여성 백서'에 패널로 참석했다. 제1부 '양성 평등, 새로운 문화의 시작'에서 그는 김미경 미래여성 연구원 원장, 이숙경 인터넷 잡지 '아줌마'편집장, 강주헌 종합경제사회연구원 언어문학연구실장, 김준기 정신과 전문의, 방송인 이연경 등이 토론자로 나섰다.
2003년 10월 31일에는 KBS1 라디오의 열린토론에 패널로 참석, '기러기 아빠, 어떻게 볼 것인가' 라는 주제로 변호사 손광운, 명지대 산업대학원 이민학 전공 박화서 교수, 사회심리학자 인하대 겸임교수 최창호 등과 함께 참석하여 토론하였다.
이 방송에 패널도 나온 정채기는 “우리나라의 교육 경쟁력에 문제가 있다”며 “현재 아이가 유학을 떠났고, 아내를 보낼 용의도 있다”며 기러기 아빠의 선택을 옹호하였다. 이에 대해 명지대 산업대학원 박화서 교수는 “가족들이 각기 다른 나라에 머무르는 것은 글로벌 시대에 나타난 새로운 가족형태”라며 “이런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가정만이 서로 떨어져 생활해야 한다”며 반박했다. 이때 성재기는 왜 남자들만 뼈빠지게 일하느냐며 반박했고, 자녀의 탈선을 우려해 아내를 보내는 것까지는 이해한다면서도 자녀의 삶을 위해 부모가 희생하는게 당연하냐고 반박했다. 성재기의 주장은 당연히 주목받지 못하고 묻혔다.
2004년 2월 5일에는 KBS 강릉방송총국의 지역방송 '목요일 태백전망대'에 출연하였다. 8월 5일 KBS 강릉방송총국의 지역방송 '목요일 태백전망대'에 출연하였다.
2005년에 KBS2 방송의 <주부, 세상을 말하자!>라는 프로그램에 패널로 출연하려 했다가 취소당했다. 2005년 5월 25일 그는 당시 해당 프로그램의 당일 주제인 '아버지의 자리와 문제'에 전문가 패널로 출연하기로 했었는데, 여성단체들의 항의전화와 압력을 받고 결국 방송사의 모 부장에 의해 강제로 방송 출연이 정지당했다.[4] 모든 남성이 가해자, 가부장제 수혜자가 아니라는 주장이 일부의 심기 를 건드린 것. 온갖 전화협박과 조롱, 악플로 정채기 교수를 비방하고 비난했다. 정채기는 단지 남자에게 책임감 강요, 가부장적 부양을 전부 요구하지만 말아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몇년 뒤에는 아예 여성가족부 해체, 탈가족, 탈가정, 여성단체 폐지까지 주장하는 성재기가 지상파에 등장하게 되었다.
1.1.2.3. 결혼에 대한 관점 및 이혼비판
성재기는 남성도 여성, 가정에서 해방되자는 주장을 펼쳤다. 정채기는 이혼은 잘못된 것이며 자녀들 문제, 사회적 폐해와 손실이라고 지적했다. 그에 대해 성재기는 이혼은 당연한 권리라고 응수했다. 성재기는 결혼, 가정의 이름으로 남자들을 구속하고 속박하는 것은 잘못이라며, 이혼은 밥먹듯, 떡먹듯이 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채기는 "애초 남녀가 교제할 때 그렇게 ‘영원’의 이름으로 죽고 못 살 것 같이 하였던 언약과 행위들은 무엇이며, 수많은 하객들을 증인으로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되도록 사랑하리라 맹세해 놓고, 그렇게 철 천지 원수 같이 갈라서는 까닭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럴 바에는 당초 공개적인 맹세와 약속을 하지나 말든지, 아무리 남녀간의 사랑의 화학반응식 유효기간이 3년 전후, 아니 이제는 그보다 더 짧다는 긍정이나 부정도 곤란한 보고가 있기로서니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당사자들이야 그렇다 쳐도, 그 와중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자녀들은 무슨 봉변인가! 그리고 사회적인 폐해와 손실 등은 또 얼마인가?[5] "라고 하였다.
성재기는 무조건 가정을 지키고, 가족, 가정의 울타리 안에서만 안식을 느낄 필요는 없다고 반박했다. 반드시 가정을 지켜야 될 의무는 없다고 주장했다. 성재기는 남자들도 가정, 가족에서 벗어나고, 의무와 책임감의 굴레에서 벗어나 한 사람의 인간, 자유인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정채기는 아름답게 영원할 것이라 여겼던 부부와 가족 관계의 파괴에, 어떠한 미사여구나 변명을 전제하지 않는 가운데 “최소한으로 못한 결혼은 있어도 최대한으로 잘한 이혼은 없다." 하였다. 그러나 성재기는 사람의 마음은 수시로 바뀌거나 변할 수 있으며 마음에 안 들면 이혼할 수 있고, 이혼도 밥먹듯, 물 마시듯 쉬워야 한다고 반박했다. 그의 견해에 대해 성재기는 모든 남자가 아버지가 될 의무는 없다, 아버지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남자, 한 사람의 자유로운 인간으로 거듭나야 된다고 반박했다.
1.1.2.4. 군가산점 폐지 반대 운동
1999년 10월부터는 한지환, 성재기 등과 군가산점 폐지 반대 운동에 참여했다. 이화여대생 6명이 연세대생 남성 1명과 함께 군 가산점에 헌법소원을 내자 정채기, 한지환, 성재기, 이경수, 김재경[6] 등은 군필자에 대한 보상이 전혀 없고 군복무를 가볍게 여기는 사회분위기를 예로 들어가며 군 가산점 폐지 반대 캠페인을 벌였다.
그러나 1999년 12월 헌법재판소는 군 가산점 폐지를 합헌 결정을 내린다.
1.1.2.5. 호주제 폐지 사건
그러나 2004년부터 2005년까지 논란이 된 호주제 폐지 문제 에는 성재기 등과 의견이 갈리게 되었다.[7] 정채기와 한지환은 호주제 폐지 주장에 일부 동의하였지만, 성재기, 이경수 등 다른 남성운동가들은 이에 반대하였다.
특히 성재기는 호주제 폐지에 일부 동의한 정채기나 한지환 등의 주장에 심하게 반발했다.
성재기는 호주제도는 상징적인 것이라 주장했다. 성재기는 가부장제는 이미 소멸했는데, 그나마 상징적인 것마저도 없애려 든다고 격하게 반발한 것.
1.2. 사망
2013년 서울에서 52세에 사망했다. 죽기 전 까지도 활발히 활동을 했으나 사인이나 부고 기사가 확인되지 않는다. 페미위키에 따르면 13년 6월 사고로 사망했다고 한다. 참고로 그의 부모,동생들은 현재까지 생존해있다.
1.3. 저서
남성 인권 운동에 관한 저서 외에도 전공인 교육학이나 심리학 관련 저서들과 논문들이 여러 편 있다.
《남성학과 남성 운동》, 《교육 심리학》 (학문사, 2003), 《성격심리학》 (교육아카데미, 2004), 《이상 심리학》 (학문사, 2003), 《남자도 사람이다》 (집현전, 1998), 《남성운동의 이론과 실재》, 《아버지가 나서면 딸의 인생이 바뀐다》, 《아버지 학교》, 《불편한 진실의 남자 수다》, 《이것이 남성학, 남성 운동이다》 등의 책을 저술하였다.
2. 정치인
鄭採基, 1948~
지역의회 의원이자 정치인. 전라남도 광양시 광양읍 덕례리 덕산마을 출신이다.# 포스코 광양제철소 토건정비과장을 지냈고, 1995년 동광양시 시의원, 1999년 광양시 시의원을 지냈다.
[1] 단체 이름 변경이 몇번 있었지만......[2] 성재기가 보통 최초로 알려졌지만 남성운동인 매스큘리즘을 한국에 처음 소개한 사람은 이 사람이다.[3] 그러나 페미니즘이 18세기 여성 참정권 운동부터 시작된 것에 반해, 남성운동 자체가 미국, 프랑스, 독일 등에서도 20세기 초에 처음 시작된 운동이기도 하다.[4] http://cafe.naver.com/amjang/564 원본 링크는 http://www.cyworld.com/library28[5] http://www.gycitizen.com/news/articleView.html?idxno=1172[6] 가수 2명과는 동명이인인 남성이다.[7] 정채기, 한지환 등은 호주제 폐지에 동의하는 입장이었고, 성재기는 상징적인 의미마저 없애려 든다며 호주제 폐지를 반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