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체첸 전쟁
서방: 종소리 울려라, 종소리 울려...
러시아 전차 측면: 그로즈니가 아니면 죽음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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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시아어: '''Вторая чеченская война'''
1999년에서 2000년까지 러시아 연방과 이치케리야 체첸 공화국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 이치케리야 체첸 공화국의 일방적인 패배로 끝났지만, 잔존 이치케리야 체첸 공화국 세력의 테러 등을 합하면 2009년까지 이어졌다.
2. 과정
2.1. 1차 체첸전 이후 체첸의 사정
제1차 체첸 전쟁은 이치케리야 체첸 공화국의 사실상의 승리로 끝났으나, 체첸인 내에서 리더십이 강했던 조하르 두다예프 사후 체첸 내부에서는 권력 다툼이 심했다. 특히 제1차 체첸 전쟁에서의 승리 이후 수많은 체첸 부족들과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집권을 위해서 다투고 있었고[6] , 그 중 샤밀 바사예프가 다케스탄 침공이라는 희대의 사건을 저지르고 체첸 내에서 샤리아에 입각한 통치가 심각해지자 이에 염증을 느낀 상당수의 체첸인들이 중앙정부를 외면했다. 아슬란 마스하도프가 어떻게든 제어하려 했으나 군권은 이슬람 극단주의자였던 샤밀 바사예프가 잡고 있었기 때문에 소용없었다. 특히 바사예프의 부하들은 체첸 내에서 각종 행패를 부려 체첸인들한테서 분노를 샀다.
2.2. 샤밀 바사예프의 다게스탄 침공
이븐 알 하타브로부터 와하비즘과 전술을 전수받은 샤밀 바사예프는 러시아 내에 이슬람 신정국가를 건설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1999년 8월에 2,000명의 체첸군, 러시아 입장에서는 체첸 반군을 이끌고 다게스탄 공화국[7] 을 침략한다.
이에 러시아는 체첸 반군의 다게스탄 월경을 연방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보아 강력한 군사적 대응으로 반군 세력을 와해했다. 이때 러시아의 스페츠나츠가 대거 투입되어 체첸군을 섬멸했다.
당시 투입된 스페츠나츠의 전투장면
2.3. 러시아군의 체첸 침공
그러나 이후 1999년, 체첸 반군들 주도로 행해진 모스크바 극장 테러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연이은 테러로 수백 명의 러시아 국민이 사망했고, 이는 러시아 전체를 분노하게 만들어 러시아 정부가 체첸에 군대를 파견하면서 2차 체첸전이 본격적으로 발발한다. 이번에 동원한 러시아군의 병력은 5만 명 안팎으로 1994년과 다를 게 별로 없었지만 나중에 가면 8만명으로 증강된다.
2차 체첸전에서 러시아군은 제1차 체첸 전쟁과 달리 철저하게 준비해서 병력을 훈련 및 조직화했다. 특히 러시아군은 제1차 체첸 전쟁에서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어 휴전 기간 동안 러시아군의 전투 능력을 크게 개선했다.
- 체첸 반군은 절대 만만한 집단이 아니다. 체첸 시민들의 적극적인 협조 때문에 대규모 소탕 작전에는 무리가 있다.
그래서 제2차 체첸 전쟁에서는 러시아군이 초토화 전술로 나가 체첸군에 협조적인 체첸 시민들을 찾아내어 전부 사살하여 반군과 민간인의 연계를 차단했다.
- 산간지방에서의 게릴라 유격전에는 정예화된 부대를 투입해 게릴라 유격전으로 대응해 주어야 한다.
1차 전쟁 때처럼 대규모 부대가 이동하면 눈에 띄기 때문에 반군들의 매복에 취약하며, 비효율적이고 인명피해만 많아진다. 그래서 2차 전쟁에서는 스페츠나츠와 공수부대를 대규모로 투입하여 산악 지방의 게릴라들을 소탕하기 위한 유격전을 행했다.
- 공군과 육군의 긴밀한 연결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한다.
CAS요청, 좌표, 통신체계를 새롭게 구축하고 교육을 확실히 실시해서 효율적으로 작전을 수행하고 인명피해를 최소화한다.
- 전차는 멈추지 않는다
시가전에서의 반응장갑은 전차의 생명줄이다. 빠르고 민첩하게 기동하는 동시에 계속해서 돌아다녀야 한다. 1차 그로즈니 전투에서처럼 당황하면 정차해버린다던가, 전차들이 몰려다니다가 선두 전차와 후미 전차가 격파되면 가운데에 있는 전차들이 오도가도 못하고 격파되어 버리는 상황이 있어선 안된다.
특히 보병과 기갑이 합동으로 작전을 펼쳤는데 체첸군의 대전차 부대를 러시아군 보병이 상대하고 그들을 사살하며 기갑 부대가 지원을 해주어서 1차 전쟁 당시의 체첸군이 하던 대전차 공격을 무력화시켰다. 이때 러시아군은 고속기동전술 같은 새로운 전법을 개발하고, 여기에 처음부터 시가전 과정에서 사용 가능한 건물의 수를 최대한 줄일 목적으로 항공기까지 동원해 항공 공격과 포병의 대규모 포격과 공습 이후 진입한다는 결정을 내렸다.이에 따라 1999년 말부터 전쟁이 시작되었고, 러시아군의 주도면밀하고 압도적인 총공세에 체첸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이후 2000년 1~2월에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권한대행의 지시로 러시아군이 강력한 공세를 펼쳐 체첸군을 격파하고 그로즈니를 최종적으로 점령하게 된다. 그런데 사전포격과 공습으로 그로즈니 시가지를 콩가루로 만들어놔도 막상 러시아군이 진입했을땐 반군이 워낙 거세게 저항해서 러시아군도 굉장히 고생하면서 싸웠다. 그래도 최종적으로 러시아군은 그로즈니를 장악하고 체첸군은 큰 피해를 입었다.
체첸군은 22,000명[8] 중 14,113명이 사살되었고 살아남은 체첸군은 그로즈니 남부의 산악 지대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는데, 샤밀 바사예프가 지휘하는 이들은 포위된 와중에 한 러시아 육군 대령을 매수, 탈출로를 벌어 보려 했으나 사실 그 육군 대령은 FSB 소속으로 바사예프의 병력에게 매수된 척 하고 러시아 육군 병력을 그 지역에 매복시켜 뒀기에, 이들은 기다리고 있던 러시아군의 매복에 당하여 꽤 큰 타격을 입었다. 결국 유일하게 봉쇄되지 않은 지뢰 지대를 도보로 강행돌파하던 중 바사예프가 한 쪽 다리를 잃고 사경을 헤매다 겨우 살아남는 등 사상자를 잔뜩 내고 겨우 일부가 도망쳤다.[9]
여기서 도망치지 못하거나 러시아군 눈 밖에 난 체첸인들은 러시아군에게 붙잡혀 감옥으로 끌려갔으며 그들 대부분은 테러 혐의로 재판을 받고 살아서는 더 이상 감옥에서 나올 수 없었다. 고문이 의심되지만 테러리스트의 시신을 반환하지 않는 법안[10] 이 통과되면서 이들이 어떻게 죽었는지는 알 수 없게 되었다.
공격 후의 사진을 보면 건물의 그림자가 거의 없다. 왜냐면 건물이란 건물은 거의 다 부숴놓았기 때문이다. 남은 것은 건물이 있었다는 사실만을 알려주는 잔해들. 얼마나 심하게 포격해댔는지 러시아군의 공격 후, 그로즈니 시내는 그냥 '''녹아버렸다.''' 그로즈니 뿐만 아니라 '''체첸 전체가 러시아군의 공격으로 초토화'''되었다. 하지만 2차 그로즈니 전투 항목에서 설명되듯이 안개가 짙은 날이 많은 그로즈니의 특성상 포병과 공중 폭격이 불가한 날이 많았다. 그래서 러시아군 보병들이 굉장히 고생하며 전투했다는 점은 여전히 존재한다.
아예 대놓고 열압력탄이나[11] 신형이었던 TOS-1A 부라티노, BM-30 스메르치 다연장로켓 등, 거의 신무기 실험장으로 썼다. 러시아 정부는 생화학 무기도 고려해봤지만 부작용을 우려해서 취소했다. 군에 채택되지 않은 AEK-971 같은 프로토타입형 총기도 러시아 특수부대가 극소수로 사용했다.
1차 체첸전에서는 큰 전과를 올리지 못했던 러시아의 스페츠나츠를 포함한 특수부대들도 대규모로 투입되었으며, 많은 전과를 올린다. 다만 특수작전 과정에서 전쟁범죄가 잦았다는 증언이 있다. 여기서 러시아군은 체첸 반군과 결탁하거나 그들에게 호의적이며 도움을 준 체첸 민간인들도 찾아내어 사살했다. 이때 러시아군에게 살해된 체첸 민간인들이 공식적으로는 2만 5천명이라고 하지만 실제론 15만~25만명으로 추정한다. 당시 체첸의 인구가 110만이었는데 이정도면 전체 인구의 22%가 학살당한 셈. 이때 러시아 정부는 체첸인 학살에 대한 정보를 철저하게 차단했고 세계 언론들과 인권 운동가들의 입국도 금지했으며 국내의 언론들과 인권 운동가들이 체첸에 대해 알아보려는 것을 금지했다. 특히 러시아군의 체첸인 학살을 폭로하고 비난한 러시아 언론인들과 인권 운동가들이 처벌받고 암살당하는 일까지 있었다.
이 때 활약한 언론인 중의 한명이 바로 안나 폴릿콥스카야다.
2.4. 2차 그로즈니 전투 (1999.12.26 ~ 2000.2.5)
1999년 12월 26일, 러시아군은 그로즈니의 동부와 북서부로 나뉘어 들어갔다. 첫 전투는 러시아 내무부 병력이 진입하기로 한 그로즈니 북부에 위치한 Staropromyslovsky지구에서 벌어졌으며, 제 21 독립 작전 여단(Sofrinsk Brigade, 소프린스크 여단)의 정찰병과 공병, 21여단 330번 독립 작전 대대와 21여단 674 내부 부대 운영 연대였다. 12월 28일 소프린스크 여단은 해당 지구를 2부분으로 분할해 진입하려 했지만, 29일 9번가에서 체첸반군이 심각한 저항을 해서 30명이 넘는 인원이 사망하고 실종되었다. 12월 29일 체첸 반군은 '''염소탱크와 암모니아 용기를 폭파'''시켜 화학공격을 '''러시아군에게''' 시도했지만, 바람은 체첸 반군 점령지로 불어서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다. 하지만 이 바람이 계속 불어 그로즈니 동부에서 진입하고 있던 러시아 연방군 기계화 보병병력이 피해를 볼 위기에 처했다.
12월 26일 그로즈니 동부로 진입한 러시아 연방군 병력은 그로즈니 동부 근교에 있는 마을에 진입했고 이곳에서도 역시 소규모 전투가 일어났다. 이곳에서 33 기계화보병 여단, 101 기계화보병 여단의 대대가 전투를 벌였다. 12월 29일 연방군 현장 사령관이었던 Yevgeny KuKarin 대령은 체첸 반군이 터뜨린 화학 물질들이 자신의 병력이 있는 곳으로 오고 있고 이미 도시 전역이 화학물질로 오염되었다는 보고를 받게 되었다. 대령은 바로 생화학경보령을 내렸으며, 기술병들에게 계속해서 바람의 방향과 속도를 측정할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이미 그로즈니 시내로 진입한 부대들에게는 민간인들과 함께 그곳에서 후퇴하라고 명령했으며, 러시아군은 민간인들을 BMP와 APC에 실어서 빠르게 대피를 시켰다. 기술병들은 바람의 방향과 속도를 측정하기 위해서 조명탄을 쏘아올리는 형식을 취했다. 이때 영국의 종군기자였던 Marcus Warren은 해당 이벤트를 함께 했었고, 체첸 반군이 화학공격을 시도했다는 사실을 서방국들에게 널리 알리게 되었다. 이후 바람은 무자헤딘 세력과 다른 체첸반군들이 있는 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하지만 화학공격을 받은 무자헤딘과 체첸 반군세력은 오히려 러시아군이 생화학공격을 했다며 주장했다. 이 시점엔 영국 종군기자가 아직 기사를 낸 시점이 아니라서 국제적 비난이 러시아에게 향할 뻔했지만, 이후 영국 종군기자가 사실을 보도하면서, 체첸 반군과 무자헤딘은 비난과 비웃음의 대상이 되었고 체첸 클리어 사건에 이어 해당 사건이 보도 되면서 서방국들은 체첸에게 완전히 등을 돌리게 되었다.
이후 12월 31일 연방군은 원래라면 '새해'공격을 위해 공수부대 투입을 계획했지만, 반군의 저항과 도시의 오염이 심각한 수준이고, 대부분의 민간인들을 대피 시켰으니 결국 러시아군은 대규모 포병 공격으로 작전을 변경했다. 내무부 병력은 오염되지 않은 그로즈니 북서쪽에서 계속 전투를 치뤘으며 손실이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그로즈니 산업지대에서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고 체첸 반군은 이곳에서 방어를 이어나갔다. 화학 공격으로 인한 오염때문에 진군 속도는 작전 초기 계획보다 훨씬 늦어졌으며, 동시에 체첸 반군은 전술을 변경하기 시작했다. 체첸반군 지휘부는 체첸의 거대 무장갱단과 연합해서 러시아군을 혼란을 주는 작전으로 변경했다.
2000년 1월 3일, 그로즈니에서 남서쪽으로 20km 떨어진 마을의 상황이 급격히 악화되었다. 체첸 반군과 연합한 무장갱단이 내무부와 연방군 그룹의 일부를 산개 시키려는 작전을 행했다. 해당 마을과 그 옆에 있는 마을에서 갱단 세력은 내무부 부대의 호송대를 공격 했다. 상황이 악화되자 내무부 병력의 일부가 Staropromyslovsky 지구를 떠나 해당 마을로 향해 방어에 성공했지만, 1월 7일 야간을 틈타 갱단 세력이 마을을 떠나 Sunzha 강을 건넜다. 1월 9일부터 10일까지 이슬람 테러리스트 Khattab이 이끄는 300명의 산적들이 러시아군의 지원병력들중 일부를 우회 시키려고 시도했다. 산적들은 후방부대와 사령관 사무실, 임시 내무부 후방 호송대를 공격했다. 2~3일간의 전투 끝에 러시아군이 산적들을 모두 사살하면서 상황은 진정 되었고, 그 과정에서 러시아군도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 하지만 그로즈니 작전에 큰 영향을 끼치진 못했다.
2000년 1월 17일, 그로즈니 작전의 두번째 단계가 시작되었다. 지원 부대가 그로즈니 시내로 도착하면서, 군단의 재편성, 휴식 및 보충 후, 내무부 부대 OMON 및 SOBR(부대 코드명)은 서부, 북부, 동부방향으로 그로즈니로 진입하면서 적극적인 소탕작전을 개시했다. 날씨가 허락하는한 탱크와 자주포 부대의 원거리 지원을 받으며 진격했다.(그로즈니는 주기적으로 짙은 안개가 끼기 때문에 공중지원과 포병지원이 힘든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전투는 정말 치열했는데, 1월 17일 최전방에서 지휘를 하던 그로즈니 특별지구 서부 그룹 사령관 Mikhail Malofeev 소장이 전사했다. 이런 손실에도 불구하고 러시아군은 점차 무장 세력의 저항을 극복해 나갔다.
1월 19-20일 동안 그로즈니 북쪽의 산업지구의 통조림 공장과 낙농장에서 저항을 이어가던 무자헤딘 세력들이 완전히 소탕되었다. 1월 25-26일, 보스톡 그룹의 부대는 다른 부대보다 더 진격을 감행해서 도심 중심지에 있는 체첸반군의 가장 중요한 전략 방어 센터인 미누카 광장에 거의 도달했다. 1월 31일, 미누카 광장에서의 치열한 전투끝에 러시아군대의 승리로 끝났고 주요 반군세력과 무자헤딘 병사들은 패배했다.
포위를 진행하는 동안 러시아군은 체첸반군과 무자헤딘 세력들이 캅카스 산맥쪽으로 후퇴하는 것을 막기위해 포위망중 한 곳을 느슨하게 해 놓고 그 곳에 지뢰를 엄청 많이 심어놓았다. 아니나 다를까 1월말 러시아 사령부는 반군 지도자들이 도시에서 대규모 철수를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를 받았다. 러시아군은 지뢰를 매설해 놓음과 동시에 그곳에 기관총 초소와 박격포와 전차를 미리 배치해 놓으며 만반의 준비를 했다. 2월 1일 밤, 그로즈니에서 후퇴하는 2000여명의 무장세력들이 지뢰밭에 도달했고, 이곳에서 러시아군은 일방적으로 무장세력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생존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근처 마을에 숨으려 했으나 곧 러시아군에 의해 막혔다. 그중 정말 일부는 산으로 갈 수 있었고, 나머지는 항복했으며, 항복을 안한 나머지는 2월 2-5일의 전투에서 제거되었다.
2.5. 계속되는 전초전
그러나 러시아군은 그로즈니 함락으로는 체첸 반군을 모두 섬멸할 수 없었다. 특히 동원된 러시아군의 병력도 10만~수십만의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던 소련 시절과 달리 10만 이하의 병력이기에 완벽하게 저지하기엔 인원이 부족해서 체첸군의 퇴로 저지를 완벽하게 해내는것은 불가능했다.[12]
따라서 이후에도 전쟁은 지속되었고, 2004년에는 그로즈니에서 폭탄 테러가 발생해 아흐마드 카디로프 체첸 공화국 대통령과 수행원 수십 명이 사망하는 등, 크고 작은 테러가 발생했다. 계속된 테러는 체첸 반군의 이미지를 크게 악화시켰다. 특히 체첸 반군은 러시아군 포로를 전기톱으로 썰어죽이고 러시아인 소녀를 윤간한다음 그녀의 손가락 3개를 총으로 쏘는 악행을 저질렀고 이를 영상으로 찍어 소지까지 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영상을 노획하여 보게 된 러시아 군인들이 경악하고 분노했을 정도였다.[13]
체첸 내부도 러시아에 충성하는 친러계인 체첸 공화국과 독립을 희망하는 이치케리아 체첸으로 나뉘었다. 물론 이치케리아 체첸이 구 체첸 정부. 그나마 서방의 동정 여론과 이슬람권의 지원 속에 저항을 지속하지만 샤밀 바사예프가 또 2004년 베슬란 학교 인질사건을 통해 러시아에 공격당할 명분을 제공하자 깜짝 놀란 체첸인들과 지원 세력들이 등을 돌림과 동시에 서방의 동정어린 시선도 일거에 싸늘해졌고, 전 대통령이자 저항세력의 지도자인 아슬란 마스하도프가 2005년 전사, 샤밀 바사예프가 2006년 잉구세티야에서 러시아 특수부대에게 사살되면서 적어도 세속적인 의미에서의 체첸 저항세력은 완전히 무력화되었다. 이후 도쿠 우마로프를 중심으로 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실권을 잡으면서 체첸 정부는 소멸되었다. 이후로도 러시아군은 토벌을 계속하여 체첸 반군 2,186명을 추가로 사살했다. 결국 체첸 반군은 대원들이 러시아군의 회유에 넘어가 항복하거나[14] 사살되어 수가 극도로 감소했고 수뇌부도 러시아군한테 대부분이 암살되거나 사살되었기에 사실상 궤멸되었다. 반군이 멸망하자 러시아 정부는 승리를 선언하며 자축했고 체첸은 완전한 러시아 영토가 되었으며 러시아에서 푸틴 대통령의 지지율이 크게 오른다.
2009년에는 러시아 정부가 체첸의 '반테러 작전'을 종결한다고 선언하여 전쟁은 러시아의 승리로 확정된다. 일반적으로는 이 시점을 제 2차 체첸 전쟁의 종결 시점으로 본다.
살아남은 극소수의 체첸 반군 중 일부는 터키로 피신 중인데, 당연히 러시아에서 가만 놔두지 않고 '''암살팀'''을 보내 3명을 사살하자 터키 경찰에게 신변보호를 요청하기도 하였다. 기사 2019년 8월에는 독일로 망명한 체첸 반군 지도자가 암살되었다.# 오스트리아에서도 망명한 체첸 반체제 인사가 총격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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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이 바로 체첸전쟁 당시 체첸클리어가 행해진 것을 보고 매우 화가난 푸틴의 모습이다.
제2차 체첸 전쟁은 푸틴을 대통령직으로 올려놓는데 공헌하였다. 2차 체젠 분쟁 당시 러시아는 1990년에 전후 최초로 마이너스 성장을 찍은 이래로 경제가 좋았던 적이 없었고, 1998년에 모라토리엄을 선언하는 등 정국은 혼미의 연속이었고 아예 2000년 대선에서 공산당이 집권할것이라는 예상까지도 나왔을 정도였다. 또한 1차 체첸 분쟁 당시 러시아군이 자국 내 분리독립 세력도 통제를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며 러시아의 국가적인 위상마저 망신창이가 되었다. 그러나 지지율이 바닥을 찍던 옐친은 탄핵위기를 가까스로 넘긴 뒤에 푸틴을 총리로 임명했는데 그 이전까지 러시아 대중들에게 무명의 인물이었던 푸틴은 체첸 반군을 강하게 찍어내리며 러시아인들에게 오래간만에 사이다를 안겨주었다.
이를 통해 주가노프, 프리미코프와 호각을 다투며 대권주자로써 지지율을 올렸고 1999년 총선에서 친 옐친파가 당초 예상을 완전히 뒤엎고 선전하는데 성공. 옐친이 푸틴에게 조기에 대통령직을 물려준것은 물론 2000년 대선에서 푸틴이 과반수 이상의 득표를 확보하며 대통령에 당선, 1990년대에 망가졌던 경제도 어느정도 복구하는데 성공하며 장기집권의 길을 열었다. 푸틴이 1차 체첸 분쟁때와 마찬가지로 고전했었으면 그저 그런 정치인으로 남았을 것이고, 옐친도 말년을 별장이 아닌 감옥에서 보냈을 가능성이 높았다는 점에서 이 전쟁이 끼친 나비효과는 엄청났다고 평가할 수 있다.
4. 관련 문서
제1차 체첸 전쟁
체첸 전쟁
[1] ~ or bust라는 영어 표현은 '~아니면 아무 의미없다, 무조건 ~, ~가 아니면 죽음을'이란 의미기 때문에 Grozny or Bust는 러시아군의 진격의지를 표현한 것이라고 해석하면 된다.[2] 잔존 세력의 반란 기간까지 합하면 2009년까지이다.[3] 당시 러시아 국방장관[4] 체첸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자 람잔 카디로프의 아버지다.[5] 최대 추정치이다.[6] 조하르 두다예프는 체첸 부족들과 이슬람 근본주의자들 양쪽 모두를 끌어안는 정치를 펼쳤는데 문제는 이게 두다예프 사후 체첸 정치에서 독이 됐다. 특히 두다예프의 후임인 바사예프는 두다예프만큼의 정치력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성과를 좇으며 나대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7] 옆동네 체첸과 달리 다게스탄은 예전부터 러시아 정부와 딱히 문제 없이 잘 지냈고 샤밀 바사예프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침공 이후에는 다게스탄과 러시아 연방정부의 사이가 더 좋아졌다. 거기다 복잡한 민족 분포에도 불구하고 "자마트(djamaat)"라 불리는 전통적인 정치 체제 덕에 어느 한 민족이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지는 것도 견제되는 등 정치 면에선 오히려 체첸보다 나았다. 그러나 이 동네는 캅카스 에미레이트의 하부 조직인 빌라얏 다게스탄이 발호해 혼란스러운데, 2013년 볼고그라드 폭탄 테러도 이들이 주범이었다. 이들은 캅카스 에미레이트 따위 쌩까고 지들 맘대로 ISIL에 충성 맹세를 했다. 다만 다게스탄의 여러 민족들, 특히 캅카스어족계 민족들도 과거엔 체첸 못지않게 분리독립을 강하게 시도하였던 적은 있었다. 그러나 소련 붕괴 이후에도 여러 번 분리독립을 시도했던 체첸과는 달리 다게스탄은 소련 또는 러시아와의 갈등이 일부 있었지만 소련 붕괴 이후 딱히 이렇다 할 분리독립을 다시 시도하려는 모습은 없었다. 몇몇 분리독립주의자나 살라피스트 정도만 제외하면 조용했고, 이들도 이츠케리야 체첸의 광신적 극단주의자들이나 캅카스 에미레이트를 포함한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들에 동화되거나 선동되어 이들을 도운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8] 혹은 3만 명으로 추정한다.[9] 러시아에서는 우르스 케르트 전투라고 불린다. 초반에는 매복중이던 러시아 공수부대 1개 중대를 역으로 포위하여 궤멸하는 등 꽤 선전했지만 이후 복수심에 불타는 러시아군들에게 있는대로 두들겨 맞으면서 개발살이 났다.[10] 러시아는 체첸 저항세력을 테러리스트로 취급한다. 특히 러시아 같은 비민주 국가에서는 고문이 일어난다 해도 이상할 게 없다. 러시아에는 사형이 사실상 폐지되었지만 체첸 반군 출신 수감자들을 린치해 사실상의 사형을 집행한다는 소문이 돈다.[11] 주로 체첸군이 저항하거나 숨어있는 지하실이나 벙커에 투입하여 체첸군을 대량으로 몰살했다.[12] 사실 어쩔수없었던것이 이때 러시아의 재정이 좋지 못해서 10만~수십만 단위의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면 재정에 심한 부담을 줄수 있었다.[13] 나중에 이 영상을 보게 된 푸틴과 러시아 수뇌부도 경악했을 정도.[14] 대원들의 가족 전체를 인질로 잡고는 항복하도록 했다. 물론 항복을 거부하면 가차없이 사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