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다(유행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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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창작물에서 고구마를 먹은 듯 답답한 상황이 사이다를 마신것처럼 '''시원하고 통쾌하게''' 진행되었을 때 쓰이는 용어.심할 때는 '''빵 쏴줬다'''고 할 정도로 파급력이 강하다.(예:거 참 사이다 발언이다!)
체하거나 답답할 때 사이다 같이 톡 쏘는 탄산음료를 먹으면 목넘김이 상쾌한 기분이 들듯, 창작물에서 반동인물에 의해 제약되던 주인공의 행동, 상황 등이 마침내 시원하고 통쾌하게 진행되는 것을 빗대며 쓰이기 시작하였다.[1]
원래는 만화, 드라마, 소설 등 창작물의 사건 전개방식을 지칭하는 표현이었던 듯 하나, 2017년 경 유행어로 부상한 후 현실의 정치, 언론 등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고구마와 마찬가지로 한국 드라마, 막장 드라마 등 에서 자주 보이는 양상이기 때문에 여초 성향이 강한 용어이다.[2]
2. 설명
상술되었듯 사이다는 창작물의 주인공의 행동, 상황이 시원하게 진행되는것을 빗대어 쓰이곤 한다.
또한 답답하고 느리게 진행되던 소설 내용이 주인공에 의해 통쾌히 역전되거나 명확해질때도 쓰이며, 스토리상에서 떡밥 회수나 복선이 명쾌하게 밝혀졌을 때에도 사이다라고 하기도 한다. 궁금한 것을 해결해주었기 때문.
또한 현실에서도 상대방을 논리로 완벽히 반박하거나, 단답으로 싸움을 일단락시켜 버릴 경우 사이다라는 비유가 쓰이곤 한다.
사이다와 비슷한 용어로는 참교육, 정의구현, 팩트폭력 등이 꼽히며, 사이다를 마시고 트름을 하는 것에 빗대어 '꺼어억'이라고 변용되기도 한다.
같은 탄산음료들인 콜라나 환타는 별로 쓰이지 않고 있다. 홍카콜라처럼 아예 없진 않긴 하지만 제한적인 편.
이는 사이다 계통 탄산음료들의 광고 컨셉의 영향인것으로 보인다. 칠성사이다나 천연사이다, 킨사이다 등 대부분의 사이다 제품이 광고에서 청량감을 집중적으로 강조했기 때문. 뿐만아니라 사이다 특유의 맑은 색깔, 첨가제로 주로 쓰이는 레몬이나 라임 등의 상큼한 느낌 때문인 점도 어느정도 영향을 끼친다.
한편 사이다의 반대말로는 고구마가 있는데, 먹으면 목이 막혀서 답답하다는 의미로 사용한다.
3. 발생 원인
3.1. 편당 결제 시스템
통쾌한 전개로 인기를 얻은 작품은 예전부터 많았으나, 최근 들어 이러한 사이다 전개만을 요구하는 경향이 웹툰이든 웹소설이든 대중문화계에 만연하게 된 이유는 대중문화계의 편당결제 구조 때문이라는 의견도 많다.
아주 오래 전에 완결된 작품이거나, 작가가 매일마다 1편씩 써내릴 정도로 대량으로 소설을 찍어내는 것이 아니라면 독자들의 입장에서는 1주일 간격으로 만화든 소설이든 1~2편씩 결제해서 찔끔찔끔씩 봐야하는데 그 1~2편 내내 갈등이 펼쳐지고, 정작 그 갈등의 해결은 다음 편으로 자꾸 미뤄지게 되면 독자들 입장에서는 다음편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답답하고 찝찝할 수밖에 없어 결국 이런 사이다 전개만 가득 찬 작품을 요구하게 된다는 것.
예를 들자면 이렇다. 300쪽짜리 책을 종이로 출판하고 서점에서 판다면, 그 책을 산 사람도 앉은 자리에서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을 것이다. 책을 읽는 데는 1시간이 걸리며 책의 초반부와 중반부가 답답하고 후반부에서 답답함이 해소된다고 하면, 독자들이 답답해하는 시간은 약 40분 정도이다. 하지만 이 책을 20쪽씩 15편으로 나눠서 주간연재를 한다면 독자들은 무려 10주간이나 계속 답답한 이야기 전개를 보고 있어야 한다. 유달리 답답함을 잘 견디는 사람이 아닌 이상 싫어하는 게 당연하다.
문제는 이런 시스템의 웹소설의 1편은 보통 20~30페이지 내외다. 1, 2편 내에 갈등 발생과 그 수습을 전부 몰아넣으라는 건 지나친 요구이고, 작가들이 이를 받아들이면 막장 드라마스러운 초전개로 얼렁뚱땅 끝내버리거나 주인공이 다 때려부숴서 갈등관계를 없던 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결제-수익 구조에 의해 소설 문화가 스낵컬쳐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3.2. 답답한 현실
2010년대 이후의 한국에서 사이다가 유행하게 된 다른 원인 중 하나로는 답답한 현실의 상황이 꼽힌다. 헬조선이라는 말로 대표되는 현실에서의 각종 부조리와 갑질, 노력충 드립, 청년실업, 열정 페이, 수저계급론 등에 시달리는 2010년대 이후 한국의 상황에서 독자들은 옛날처럼 주인공 굴리기 및 노력 우정 승리 같은 클리셰나 고생하는 주인공보다는 막막한 현실을 뻥 뚫어줄 사이다와 주인공 편의주의를 통한 대리만족에 열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3]
이는 단순한 대리만족으로 치부할 정도로 일차원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이다물에서 소위 고구마라고 불리는 노력, 주인공 굴리기, 시련과 성장 등의 성장물 요소 자체가 이미 지금 시대의 사람들한테는 매력적이지 않은 요소가 되어버렸다는 걸 의미한다. 이에 대한 원인을 따져보자면 2010년대 후반의 사이다 유행은 2010년대 초반에 있었던 개인의 의지와 노력을 강조하는 아프니까 청춘이다 같은 자기개발서들의 유행과 그로부터 비롯된 사회 전방위적인 힐링 열풍이 불러온 역풍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노력, 시련, 성장 등은 전부 힐링 열풍 당시 자기개발서에서 강조한 가치들이었으나, 힐링이나 아프니까 청춘이다/비판 및 논란 문서에서도 나와있다시피 이는 근본적인 대책이 아닌 미봉책에 불과했으며, 현실에서 당면한 문제를 해결해줄 수도 없는 등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고, 돈 내고 잔소리를 받는 것, 희망고문이라는 악평까지 들으면서 힐링 열풍은 얼마 가지 않아 사그라들게 된다.
즉 성장이나 노력 등의 성장물 요소들은 2010년대 이후 한국의 독자들한테서는 자기개발서를 포함한 각종 매체에서 지겹게 들었던 공허하다 못해서 오히려 듣기 싫은 잔소리, 노력드립, 구시대적인 정신력 강조, 철 지난 힐링 얘기, 희망고문 쯤으로 인식되게 되었고, 이에 반대되는 가치인 사이다가 유행하기 시작한 건 필연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마치 힐링이라는 '술'을 마셔도 현실은 바뀌지 않고, 오히려 희망고문, 노력드립 같은 '숙취'만 남으니 사이다라는 '해장국'을 찾게 된 격이다.[4]
창작물을 통해 현실의 고통을 대리만족하려는 욕구는 수천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국경을 가리지 않는다. 대표적인 한국 고전 중 하나인 박씨전도 이런 요소가 있으며 이는 일본의 라이트 노벨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사이다의 유행도 이러한 답답한 현실의 변화에 더불어 힐링 열풍의 역풍까지 더해져서 나타난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하나의 유행이자 트렌드라고 볼 수 있다.
사실 사이다 양판소가 흥하게 된 원인은 막장 드라마 항목에서 분석하는 막장 드라마가 흥하게 된 원인과 놀랍도록 흡사하다. 막장 드라마에 익숙해진 시청자들의 외면으로 평범하고 정석적인 드라마가 고전하게 된 양상도 거의 똑같다.
다만 사이다를 까는 것도 어디까지나 재미로, 혹은 창작물 비평의 차원에서 할 수 있지, 지나치게 원론적인 비난과 나아가 작가나 독자층에 대한 인격적 비난은 미성숙의 증거가 될 뿐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때로는 한국 서브컬쳐계가 나아갈 길에 대해서 논의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지만, 그것이 사이다물에 대한 윤리적 비난이나 사이다물 작가와 독자들에 대한 지적 우월감이 되거나 사이다물을 재밌어하지 말라고한다면 심히 우스워진다. 모든 창작물은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일 뿐, 타인이 나서서 왈가왈부할 수 없는 것이다. 이를테면 아이돌 음악처럼 대중적 인기를 얻는(혹은 강한 지지층이 있는 대중문화인) 문화를 비하하고 스스로가 즐기는 특정한 문화(음악으로 치면 락부심처럼)를 우월함의 증거로서 생각하는 것은 전형적인 스노비즘이자 문화컨텐츠에 대한 선민사상일뿐이다.
본래 강인한 주인공이 짜증나는 악당을 시원하게 쳐부수는 전개는 수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받아 왔다. 킹스맨의 해리가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면서 양아치들을 토벌하고 후술할 쿠죠 죠타로가 오라오라 러시로 적을 곤죽으로 만드는 상황은 누구든 좋아한다. 작가는 사이다패스 풍조를 병적으로 바라보지만은 말고 적합한 대책과 사이다를 극대화시킬 수 있는 플롯을 세우는 설계 역시 필요하다.
3.3. '디지털 혁명'의 산물
‘해장국 언론’에 대한 강한 수요가 '디지털 혁명'의 산물인 것처럼, '사이다 전개'의 작품에 대한 수요 또한 디지털 혁명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디지털 혁명'은 '미디어 공급의 개인화'를 가져왔는데 이는 '누구나' 공급자가 될 수 있다는 것(평균적 완성도의 저하)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누군가들, 즉 불특정 다수가 볼(읽을) 작품'''이 아니라 '''이 사람들, 즉 특정 대상이 볼(읽을) 작품의 탄생'''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즉 누구나 다 쉽게 인터넷을 통해 소설을 써서 올릴 수 있다는 것 뿐만 아니라, 누구나 다 쉽게 인터넷을 뒤지면서 '자기 취향에 맞는' 소설을 손쉽게 접할 수 있게 된 것이기도 하다.
과거에는 누구건 작품을 만들 때는 자극적인 요소에 충실할망정 지켜야 할 최소한의 선은 있었다. 공모전이나 TV, 라디오, 신문과 같은 대중매체가 아니면 소설을 올리기 힘들기 때문에 수준 이하의 작품은 거기서 대부분 걸러져 버리기 때문이다. 무조건 내지르고 보는 전개로는 시장에서 퇴출된다는 정도의 경계심이 있었다. 즉 TV나 라디오, 신문과 같은 대중매체는 오롯이 주 대상만이 수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회 전체의 반응을 신경쓰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인 것이다. 소설을 올리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검증과 자격이 필요했다.
그러나 '디지털 혁명'으로 인하여 '볼 사람만 찾아 보는'[5] 작품들이 늘어났고, 공급자도 그런 선을 신경쓸 필요가 없게 되었다. 검증이나 자격은 필요없이 그냥 소설을 써서 인터넷이 올리면 그만이었다. 공급자들로서도 더 이상 사회의 반응을 신경쓸 필요가 없게 되어 더욱 자극적인 작품들이 늘어나게 된 것이다. 즉 '''유튜브 논객들이 점점 자극적인 주장을 쏟아내는 것과 비슷한 맥락'''.
4. 비판
인물간의 갈등관계나 주역의 결점 같은 조금이라도 복잡한 요소를 싫어하고, 오직 이 대리만족성 사이다만을 지나치게 요구하는 게 문제다. 갈등 구도가 조금이라도 생길라치면 '답답하니 좀 막 나가면 안 되겠느냐, 고구마가 아니라 사이다가 필요하다'며 작가를 부추기는 독자들을 일컬어 '''사이다패스'''[6] 라는 신조어까지 나왔다. 과격하고 극단적인 정신적 쾌감만을 추구하는 현대 인터넷 문화의 문제를 단편적으로 증명하는 예시가 된 것.[7]
대중문화 쪽에서도 사이다를 지향하는 작품들은 독자/시청자들 사이에서 호불호가 갈린다. 이런 작품들은 초기에는 누구나 공감할 법한 점을 짚어서 좋은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지나치게 공격적인 태도와 연출, 그리고 악역보다 더 문제가 많은 주인공(혹은 작가), 그저 먼치킨 주인공이 깽판칠 뿐인 단편적인 스토리텔링, 그리고 그런 레퍼토리를 가진 흔하디 흔한 작품들이 우후죽순으로 양산되는 악순환에 질리는 독자들이 많다.
때문에 사이다 전개를 우선시하는 풍조에 대한 반감도 만만치 않은 상황이다. 특히 대중문화 계통에서는 독자가 작가에게 이런 사이다 전개를 강요하거나, 혹은 작가 스스로가 사이다 전개를 펼치기 위해 무리수 전개를 펼치는 것 때문에 안 그래도 빈약한 스토리가 한층 개판이 된다는 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오죽하면 위에서 언급된 '사이다패스'라는 신조어가 나오면서 무조건 갈등구조도 없이 사이다 전개만을 요구하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나올 정도일까 생각해보자.
이런 작품들은 더 큰 호응을 유도하거나, 본인의 주장을 강조하려다 보니 너무 멀리 나가버리기도 한다. 작품의 선정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작품에서 드러나는 주장이나 내용에 공감하더라도 지나치게 공격적&폭력적인 연출은 눈을 찌푸리게 하기에 충분하다. 여기서 더 엇나가면 자기 입맛에 맞게 사건을 왜곡하거나, 상대방이 저지른 잘못을 부풀려놓고 피해자 코스프레 혹은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 사건의 전후관계나 상대방의 관점, 입장 등을 이해할 수 있는 묘사를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것이다. 작품의 주제를 강조하기 위해 감정 표현을 과장하는 것은 창작에서 많이 쓰이는 기법이지만, 자기한테만 유리한 판을 깔아놓고 쉐도우 복싱을 한다며 싫어하는 독자도 많다.
4.1. 작품 질 저하 문제
사실 사이다물이 욕을 먹는 이유는 사이다 때문만은 아닌 것이 문제다. 사이다물의 대표 주자들을 예로 들어보자.
원펀맨의 경우, 주인공은 말도 안되는 최강자에 갈등 요소도 없고, 무쌍의 극치를 보여주는 걸어다니는 사이다 제조기다. 하지만 원펀맨이 비판받는 일은 거의 없다. 사이다물이지만 작가가 최대한 신경써서 성의있게 개연성을 맞춰 체계적인 스토리텔링을 하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너무 강하니까 주인공 외적의 인물들의 일인극과 군상극을 디테일하게 그리다가 주인공은 클라이막스에서 막타를 쳐주는 식으로 조절을 하며 조연, 악역들도 다들 개성적이다.
80-90년대 명작 중 하나로 꼽히는 북두의 권, 죠죠 3부를 예로 들어보자. 북두의 권은 복잡한 갈등구조보다는 힘세고 강한 주인공이 악당들을 멋지고 통쾌하게 쳐부수는 전개로 컬트적인 인기를 얻어 흥행했다. 특히나 켄시로가 악행을 일삼는 모히칸들을 통쾌하게 쳐부수며 일갈하는 "네놈들에게 내일을 살 자격은 없다!!!", "돼지는 도살장에나 가라.", "인간의 탈을 쓴 짐승놈들!", "아아, 오물은 소독해야지"등의 촌철살인급의 대사와 호쾌함은 놀라울 정도의 희열을 가져왔다. 물론 되레 인물관계를 어거지로 집어넣고 설정을 배배 꼬다가 수라국들어서 평가를 깎아먹기도 했다. 쿠죠 죠타로 또한 마찬가지다. "심판하는 건 나의 스탠드다!", "너무나도 같잖아서... 아무 말도 안 나온다." "용서는 네가 죽인 엔야 할멈한테나 구하시지." 라면서 사정없이 비정한 독설을 퍼붓고 오라오라 러쉬로 적을 작살내준다. 비굴하게 울부짖고 자비를 구걸해도 용서는 없고, 역으로 악역들의 절망감만 한층 더 커진다.[8] 또한 GTA 5의 트레버 필립스는 GTA 시리즈 최악의 악인이지만 켄시로나 죠타로같은 주인공에 해당된다. 또한 GTA 5는 트레버보단 마이클과 프랭클린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고 트레버는 이 둘한테 양념을 쳐주는 캐릭터로 묘사된다.
반대로 먼치킨 사이다물의 대표주자인 데스마치와 마고열을 보자. 켄시로와 마찬가지로 사토 펜드래건도 시바 타츠야도 압도적인 힘으로 적을 아무런 피해없이 간단하게 쳐부순다. 하지만 호쾌함이나 통쾌함은 약하게 느껴진다. 당연한 일이다. 켄시로, 죠타로와 달리 사토와 타츠야는 감정적으로 기복이 없어서 분노하거나 포효를 하거나 격한 대사를 하는 일도, 속이 시원한 독설을 날리는 일도 없고, 악역들은 비중이 없어서 악행을 저지르기도 전에 퇴장하기 때문이다.[9] 사이다를 만들려면 악역들이 나와서 뭔가 악행을 하거나 비중이 있거나 하다못해 최대한 화려하고 처참하게 박살나야 하는데, 그 전에 박살나거나 간소하게 죽으니 바퀴벌레 잡아죽이는것처럼 보인다. 악역들의 절망감과 비참함도 강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분노를 담아 있는 힘껏 샌드백 패듯 공격을 퍼붓는 켄시로와 죠타로에 비해 저 둘의 공격이나 대사는 무척이나 절제되어 있고 깔끔하다. 특히 사토와 타츠야는 어떤 상황에서도 전력을 다해 싸우지 않는다. 반드시 무조건 힘을 숨기면서 여유를 부리며 독자가 보기에 답답하게 싸운다. 마치 자신이 전력을 다해 싸우지 않아도 상대를 이길 수 있다는 걸 자랑하는 것처럼.
작가가 쿨하고 냉정한게 멋지다고 생각해서 너무 주인공의 감정과 행동을 자제하다보니, 그냥 주인공 메이킹에만 몰두하다보니 이렇게 된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분신인 주인공에 대한 총애에 빠져 주인공만을 보고 있는 것이다. 다른 주인공 외의 모든 것을 발판으로 만들어가면서까지 주인공의 대단함과 훌륭함, 강함을 세상에 알리려고 용을 쓴다. 독자가 원하는 건 주인공이 적을 처참하게 박살내는 사이다지, 주인공의 멋짐과 강함을 아는 것이 아니다. 특히 대개 이런 작가들은 주인공에게 온갖 기술들과 복잡한 설정, 떡밥등등을 우겨넣는데 이게 오히려 너무 장황하고 많다보니 머리를 비우고 아무 생각없이 보는 사이다물에 있어서 역으로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많다.
북두의 권이나 죠죠 3부, 원펀맨처럼 단순하고 호쾌한 주인공이 나오는 작품이 인기를 끌었던 것도, 단순히 사이다라서가 아니라 누가 봐도 정의롭고 멋진 주인공이 호쾌하게 행동하는 모습이 빛나 보였고 통쾌하고 화끈했기 때문이었다.[10] 배트맨이나 퍼니셔처럼 법적, 윤리적으로 아슬아슬한 선을 오가는 다크 히어로가 나오는 작품 또한 단순히 범죄자를 시원하게 때려 패는 작품이라고 인기를 끈 것이 아니다. 배트맨과 퍼니셔가 시달리는 과거의 트라우마, 신념과 사회 사이에서의 갈등, 아치 에너미와의 대립, 개성적인 조연과 악역등 다양한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더해져 독자들을 매료시킨 것이다. 또한 주인공 설정과 기술도 간결해 생각없이 보기 어렵지 않다.
한국고전인 박씨전 또한 그렇다. 저것 또한 시대를 앞서간 사이다물, 대리만족물이지만 수능에도 나올 정도로 작품성은 충분히 인정받고 있다. 대리만족물이지만 작가가 여러모로 신경써서 훌륭하게 써냈기 때문이다. 현대에 쏟아져 나오는 수준 이하의 먼치킨물과는 아예 격이 다르다.
하지만 상당수의 작가들은 그런 사이다 주인공들이 '왜' 멋있었느냐, '왜' 좋은평가를 받느냐에 대한 고찰 없이[11] 사이다 자체에만, 아니 주인공을 멋지고 대단하게 만드는 데에만 집착하게 되었고, 절제 없이 점점 자극적인 장면이나 주인공이 멋지게 나오는 장면만을 쓰다가 수습을 도저히 하지 못하고 폭주하게 되곤 한다.
그리고 저 데스마치와 마고열과 북두의 권, 죠죠와의 비교에서 알 수 있듯 제대로 된 작품과 양산형 사이다물의 차이는 당연히 작가의 역량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작품 질의 저하를 문제삼는건 단순히 갈등관계가 없다거나 주인공 무쌍이라서 문제삼는 것이 아니다. 사이다물이 문제인게 아니라, 사이다물을 쓰는 작가의 역량이 문제인 것이다. '''똑같은 사이다 인기작인데도 퀄리티와 작가 역량이 하늘과 땅 차이다.'''
특히 이런 사이다물의 고질적인 문제점이 사이다를 쓸 때마다 약발이 점점 떨어진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적을 압도적으로 해치우는 주인공의 강함에 매료된다. 하지만 그게 계속 반복되거나 똑같은 패턴으로 계속 우려먹으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질리고 무덤덤해진다. 호러 무비를 처음봤을때는 공포에 질려 덜덜 떨지만 반복해서 시청하면 질리는 것과 같은 원리다. 다 아는거니까.
이렇다보니 다른 요소 없이 사이다 하나만 가지고 어떻게든 독자를 끌리게 만들어야 하는데, 단순 사이다, 특히나 변화가 없는 원패턴 반복만으로는 독자들이 빠르게 질리게 되기 때문에 자극을 더하는 것만으로 재미를 유지하려 하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주인공에게 판을 유리하게 깔기 위해 무리수나 치트를 놓고, 거의 빌런 수준까지 타락한 주인공을 미화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를 쓰거나,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다른 모든 것들을 무시해버리는 작품을 단순히 보기 재밌다는 이유만으로 '좋은 작품'이라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사이다물이 비판받는 진짜 이유는 사이다때문이 아니라, 그저 작가가 프로의식 없이 소설을 너무 쉽게 쓰고, 그리고 퀄리티가 지나치게 떨어지기 때문일 뿐이다. 깊이 생각하지 않고 자료조사나 전문가의 자문을 구하지도 않고, 아예 표절하거나 흔하디 흔한 클리셰까지 만들어서 베껴서 그저 비슷한 물건을 만들어내는데에만 혈안이 되어있다. 사실 작가들이 사이다물을 쓰는 이유 중 상당수는 사이다물이 가장 쓰기 쉽고 간편하기 때문이다. 여러모로 파워 밸런스나 조연 캐릭터의 개성, 비중, 스토리등 신경쓰고 머리 쓸게 많은 다른 장르와는 달리 사이다물은 그저 주인공에게 비중을 올인하고, 내용은 주인공 무쌍만 반복해서 쓰고 나머지는 신경쓸 필요가 하나도 없어서 머리 쓸 필요가 전혀 없기 때문.
주인공이나 악역들이나 다 그냥 거기서 거기인 마치 판에박힌 똑같은 타입의 놈들 뿐이니, 주인공이 악역을 박살내는게 반복되어도 신선함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12] 하다못해 그 사이다 터트리는 장면이라도 공과 시간을 들여서 치밀하게 만들었으면 나름대로 인정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사이다물이라고 해도 개연성과 퀄리티를 잘 지키고 생각을 여러모로 해서 공을 들여 스토리텔링과 캐릭터를 체계적으로 쓰면 욕을 먹을 이유는 전혀 없다.''' 라이트 노벨 문서에도 나와있지만, 독자가 쉽게 읽을 수 있는 소설과 작가가 쉽게 쓰는 소설은 엄연히 다르다. 사이다 이전에 성의와 퀄리티 문제다. '''취향이 아니라 프로 작가로서의 기초적인 성의 문제인 것이다. 독자는 생각없이 작품을 읽어도 된다. 하지만 작가는 생각없이 작품을 써서는 결코 안되기 때문이다.'''
팬을 대상으로 선동질을 한다는 비난도 나오고 있다. 작가라는 직업이 독자를 넘어서 팬[13] 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작가가 섣불리 특정한 사상이나 주장을 강력하게 표현하는 것이 꼭 긍정적인 결과만 낳진 않는다. 말이나 단어는 쉽게 왜곡되어 받아들여질 수 있고, 여기에 과격한 표현이 섞인다면 더욱 위험하다. 무엇보다 작가가 지닌 사상과 주장이 도덕적으로 완벽히 옳다는 보장이 없다. 그럼에도 팬들은 작가의 말을 전혀 의심하지 않고 옹호하는 경향을 보일 수 있어 문제시되고 있다. 또 연출이나 묘사 또한 비아냥거리는 듯 표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이런 점을 불편해하는 독자도 많다. 네이버 웹툰의 불만시대, 레진코믹스의 데명의 그림일기, 권기린툰, 저스툰의 썅년의 미학등이 받은 비판과 유사하다.
결국 결론은 현세대가 막장이 된 것은 힘겨운 삶의 위안을 찾기 위해 돌파구를 원하는 독자와 '''별 힘을 들이지 않고 돈을 쉽게 벌고 싶어하는 작가의 안이함'''의 복합적인 작용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어떤 장르건 유행을 타기 시작해서 많은 수의 작품이 쏟아져나오면 질적 저하가 동반된다는 건 필연적이긴 하다. 꼭 사이다물만 그런 건 아니라는 이야기. 하지만 문제는 인터넷 사이트 특성상 진입장벽이 낮은 데 있다. 소설가가 되자나 문피아를 비롯한 인터넷 창작 사이트들은 누구나 작품을 올릴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이러한 창작 사이트의 구조 때문에 창작의 진입장벽이 낮아졌으니 실력과 마음가짐이 부족한 사람들이 우후죽순 뛰어들게 되는 것이다.
4.2. 소비자들의 태도 문제
반대로 주인공이 조금만 갈등이 있으면 왜 고구마만 먹이냐고 사이다가 필요하다는 댓글도 많이 달린다. 사이다가 터지는 장면에서는 아예 개연성을 신경쓰지 않으면서, 고구마 장면에서는 개연성을 칼같이 따진다. 특히 주인공에게 주변인물들이 조금만 방해가 되어도 고구마라고 욕하거나, 심지어는 혼자 무쌍 찍는 주인공은 사이다라고 좋아하면서 주인공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딱히 방해조차 하지 않은 주변인물을 욕하기도 한다. 심한 경우에는 싫은 소리 좀 들었다고 주인공이 민간인을 죽여버려도 사이다라고 환호하거나, 남도 아닌 가족에게 뭔가를 베풀어도 호구, 고구마라고 비난하는 어처구니없는 댓글이 달릴 정도다.
이런 전개가 문제가 되는 먼치킨물은 보통 주인공이 너무 강해서 갈등 요소가 주인공 자체보다는 주변인물들의 위기를 통해 나타나기 마련인데 소비자층에서 '갈등 그 자체'를 용납하지 않는 것. 정석적으로 좋은 작품을 내놓아도 대다수의 소비자들이 그런 정석적인 작품에서 나오는 약간의 갈등관계조차도 감당하기 귀찮아하고 재미없어한다. 이는 2010년대 들어 주요 소비자층으로 자리잡은 10~20대가 창작물 내의 경쟁관계나 등장인물이 겪는 시련 등으로 인해 겪는 답답한 상황, 복잡한 전개 등을 매우 싫어하고 빠르게 진도를 빼는 것과 걸리적거리는 것 없는 거침없는 전개를 좋아하는 경향성이 두드러지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소비자층의 성화를 작가들이 제대로 검토하지 않고 받아들이면 독자들의 입맛에 맞게 주변인물들은 등장 자체가 줄어들면서 공기가 되고, 강한 주인공이 아무런 정당한 이유 없이 다 때려부수는 막장 전개로 치달아 대충대충 스토리를 전개시키거나, 주인공에게 도덕적 우위를 제공하기 위해 척 봐도 강한 주인공에게 시비를 거는 바보들만 적으로 나오게 되고 그냥 사이다만 보여주는 작품이 나오는 것이다. 이게 심해지면 누가 봐도 기겁할 만한 위업을 세운 게 소문나더라도 '우연인 거겠지'라면서 정신승리하는 막장스런 자들이 강자나 현자 타이틀을 달고 나타나기까지 한다.
이런 식으로 질적 저하가 일어나는데도 몇몇 소비자들은 이러한 질적 저하를 전혀 신경쓰지 않고 오직 자신의 취향에 맞기만 한다는 이유로 사이다가 계속되는 상황만을 좇는다. 위에서 언급한, 마고열과 일본에서 범람하는 이세계물들이 작품성에서 큰 비판을 받고, 그 문제점이 개선되지 않는데도 높은 수익을 벌어들이는 건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독자층의 지나친 '''사이다 강요와 고구마 비난은''' 사이다패스라는 멸칭과 함께 사이다물에 열광하는 독자층이 '''비판받는 가장 큰 이유'''이다. 상술했듯 사이다물을 좋아하는 독자층은 사이다물 또한 하나의 문화적 경향성이며, 이러한 취향을 가진 독자층이 원하는 사이다물이 나오는 것에는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 이는 분명히 맞는 말이다. 문화 산업이 커지며 저마다의 취향을 만족시킬 수 있는 여러가지 작품들이 나오고 있는 현실에서 사이다물을 좋아하는 독자층은 사이다물을 향유할수 있으며 이에대해 거센 비판을 가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카카오스토리는 남성향 작품과 여성향 작품이 공존하는 플랫폼이다. 그러나 해당 플렛폼 내에서 로맨스 판타지같은 여성향 작품을 두고 남성향스럽지 않다고 비판하는 독자나, 반대로 무협같은 남성향 작품을 두고 여성향스럽지 않다고 비판하는 독자는 보기 힘들며, 보이더라도 바로 다른 독자들의 비판을 받는다. 사이다물 또한 하나의 장르이며 좋아하는 계층이 확연히 구분되는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사이다물을 지나치게 사이다만 추구한다고 비판하는 것에 대해 '''사이다물이 싫다면 다른 작품을 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사이다물에 대한 비판을 차단했던 사이다물 독자층은 정작 사이다물이 아닌 작품에 대해서는 사이다물이 아니다고 격렬하게 비판한다. 이렇게 취향을 존중해달라 말하는 사이다물 독자층은 정작 사이다물이 아닌 작품에 대해서는 거센 비판을 가하며 작품을 사이다물로 바꾸려고 하는 모습을 지속적으로 보여왔으며, 이러한 행패들이 사이다물이 취향에 맞지 않아 그렇지 않는 작품들로 눈을 돌린 독자층의 눈에 계속 들어와 '''사이다패스라는 신조어와 함께 비판받는 것이다.'''
상업적인 컨텐츠에서 가장 중요한 건 돈이며, 만일 사이다가 돈이 되지 않는다면 사이다물에 대한 유행도 자연스럽게 사그라들 것이라지만 그게 사그라드는 것을 기다리려면 한참은 걸릴 것이다. '''카카오게임이나 양산형 게임도 같은 현상을 겪고 있다.''' 카카오게임/비판과 논쟁점 문서에도 있듯이 이런 식의 질적 저하가 만연한 것도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저 소비를 할 뿐인 독자들의 책임 또한 상당히 크다. 오로지 사이다만을 과하게 요구하는 소비자들의 수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작가들 역시 수요를 맞추기 위해 이런 독자들에게 끌려다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
한편 개연성을 의도적으로 파괴하는 장르(코미디, 호러물)는 특성상 개연성(떡밥 회수)이나 명확한 결말하고는 인연이 없을 수밖에 없는데 해당 작품을 평론할 때 사이다를 주지 않았다며 비판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개연성이 작품 평가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해당 장르에서만큼은 예외라는 게 전혀 알려지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심지어 이 위키에서는 코미디, 호러 장르인 작품을 두고 떡밥 회수를 안 했다고 비판하는 경우도 많은데 떡밥의 회수를 안 하는 것은 코미디, 호러의 기본적인 작법 중 하나이다. 그런데 떡밥 회수를 안 했다고 뭐라고 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해당 장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이다. 자성이 필요한 부분이다.
4.3. 사회 이슈에서의 태도
사회 이슈를 대하는 것도 당장의 속시원한 것만 중시한 나머지, 그로 인한 문제를 경시하거나, 문제가 생기면 태세전환 해서 사이다 먹여주던 사람을 비판하는 일이 발생한다. 조두순 출소 당시, 출소 직전 인터넷은 그가 받은 형량을 문제삼으며 답답해 하고, 그를 대상으로 하는 사적 제재를 긍정하는 여론이 압도적이였다. 이러한 여론을 바탕으로 실제 조두순이 출소하자 사이다를 준답시고 그의 집 앞은 인터넷 방송인들의 깽판이 이루어졌다. 이로 인해 지역 주민들이 피해를 호소하자 태세를 전환해 이번에는 방송인들을 비판하게 되었다. 이슈가 잠잠해지기 전에 문제 제기가 되면 고칠려는 여론이라도 형성되지만, 대부분의 이슈는 관심이 오래가지 않고 금방 사라지는 휘발성이 특징이기 때문에, 관심이 사라진 후에 문제가 나오면 대부분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해 문제를 고치기조차 쉽지 않다. 이러한 모습은 여론에 민감한 정치인들에게도 영향을 미쳐서, 사이다만을 중시하는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또한 당장의 이슈에는 열정적으로 달려들지만 관심이 사라지면 정치인 역시 관심을 끊어버리는 모습을 보인다. 일을 벌였는데 그로 인한 피해가 발생할 쯤에는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다보니, 아무도 피해를 책임지지 않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창작물보다 현실에서 더 큰 문제가 발생하는데, 창작물은 속시원한 일처리나 전개로 인한 피해자가 나와도 허구의 피해자지만, 현실은 진짜 피해자가 나온다는 것이다. 현실의 피해자는 창작물처럼 일방적인 악인이 아닌 선의의 피해자인 경우도 대단히 많다. 여론에 민감한 정치인이 개입하기 때문에 공권력이라는 실행력이 생겨 실제 피해가 발생하기 쉽다는 것도 문제가 된다.
5. 대안
현실적인 대안은 작가가 작품의 형식을 피카레스크나 옴니버스로 미리 기획해두고 연재하는 것이다. 기승전결이 짧은 간격으로 반복되는 형식 상 독자들이 작품의 구조를 파악했다면 지치지 않고 호응해줄 수 있다. 다만 이는 기승전결의 호흡이 긴 작품을 쓰지 말라는 말과 다를 바 없어서 다양한 창작 환경을 조성해주는 방안은 되지 못한다.
작가가 긴 분량을 몰아서 쓰고, 한 번 결제에 많은 비용을 받는 것도 하나의 대안이다. 다만 이는 플랫폼-작가-독자와의 삼자 협의가 충분히 이뤄져야 하는 어려운 작업이므로 어디까지나 이론 상 대안 중 하나에 속한다.
처음에는 사이다의 전개로 독자들의 이목을 끌고 독자들을 만족시켜주고, 여러 번 사이다를 부어주다 독자들이 사이다에 무심해질 때 쯤 갈등 구조를 주인공이 힘들게 또한 길게 잡아 독자들에게 의외의 전개를 선사하는 대안도 있다. 한 마디로 적절하게 완급을 조절하는 역량을 발휘하는 것이다. 사실 가장 왕도적인 전개 방법인데 역시 왕도는 시대를 타지 않는다.
6. 기타
- 극단적인 경우, '농약 사이다[14] '처럼 비하 목적으로도 쓰인다.
- 예시2: 요즘은 드라마의 빠른 전개도 사이다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 박원순 서울특별시장이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를 두고 페이스북 방송에서 "유쾌, 통쾌, 상쾌한 '사이다 선거'였다"고 발언한 적이 있다.경향신문 기사
- 칠성사이다와 스프라이트에서 답답함을 통쾌하게 날려준다는 내용의 광고가 나왔는데, 칠성사이다에서는 '사이다'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지만, 스프라이트 광고에서는 사이다라는 표현이 빠지고, 조별과제에서 무임승차하려는 선배를 응징(?)하는 대사가 나왔다.
- 쌤통과 뜻이 겹치기도 한다.
- 2017 사이다를 부탁해! 라는 네이버 웹툰도 있다. 캐치프레이즈는 고구마 10000개를 삼킨 것 같은 실제 사연을 독자들로부터 직접 받아서 네이버 웹툰 작가들이 새롭게 들려드립니다! 보러 가기
- 가우스 전자에는 사이다를 담당하는 사이다가 등장한다. 본래 당당하고 속 시원한 성격으로 그리려 했으나 등장 후의 모습은 상황판단도 못하고 직설만 해대는 캐릭터가 되어버렸다. 작가가 독자들의 반발을 의식했는지 이후에 그냥 평범한 모습만 보여줬지만 이번에는 이름이 '사이다'인데 왜 부조리한거 보고도 그냥 가만히 있느냐면서 캐붕아니냐는 의견도 많다. 이후엔 그냥 적당히 때에 맞춰 직설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서 별 말은 안 나오는 편.
7. 관련 문서
[1] 단 실제로는 체했을 때 사이다를 마시면 오히려 소화에 악영향을 미치므로 보리차나 매실차, 소화제를 권장한다.[2] 보통 남성 커뮤니티 등지에선 내용의 갈등과 해소를 표현할 땐 고구마, 사이다 보다 발암, 뽕을 더 자주 사용한다.[3] 반대로 막장 상황속에서 불안감의 발로로써 나타나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가 국뽕. 한국에서는 2000년대 초 시작되어 잠시 사그라들었다가 다시 활개치는 중이고 일본의 국뽕도 유서깊은 전통으로 최근에도 기승을 부리고 있다. 뭘 하든 한국어 잘하는 외국인 불러다 앉혀놓는 프로그램을 만들거나 관광시켜주고 반응을 보는 컨텐츠가 난립하는 것을 보면 일본 대단해 보고 뭐라 할 상황이 아니다. 물론 이런 국뽕이 가루가 되도록 까인다는 건 말할것도 없다. 그리고 이 '국뽕'의 극단적인 예가 다름아닌 나치 독일이다. 1차대전 패전 후, 좌절감과 패배감에 빠져 있던 독일 국민들에게 히틀러의 선동은 말 그대로 '사이다'였기 때문.[4] '해장국'을 사이다의 유의어로 쓴 강준만 칼럼[5] 물론 '디지털 혁명' 이전에도 영화나 책과 같이 볼 사람만 찾아 보는 대중매체는 있었다. 그러나 엄연히 극장과 서점이라는 '양지'에 올라오기에 수요층이 아니더라도 존재 자체는 알 수 있었다.[6] 사이다+사이코패스[7] 이와 아주 비슷한 사례가 존재하는데, 바로 '''막장 드라마'''다. 막장 드라마 역시 과격하고 극단적인 쾌감만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맥락이 같고 각본가가 가장 싫어하는 전개다.[8] 북두의 권은 작은 악행에도 가차없는 죠죠와는 달리 천하의 악당일지라도 이 녀석도 사실은 좋은 녀석이었어라는 전개로 마무리를 짓는 편.[9] 물론 이런 죠타로와 켄시로조차도 평소에는 무뚝뚝하고 재미없는 군상인지라 인간미가 부족하다고 싫어하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적어도 저 둘은 빡칠때는 정말 무서울 정도로 분노를 표출하고 과격한 말을 퍼붓는 성격이다.[10] 이런 스타일은 사람들의 심리 속에 내재된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영웅상을 자극한다. 단순하고 오래된 클리셰이지만, 그만큼 효과적이다.[11] '즉사 치트'의 작가는 후기에서 '어차피 마지막에는 이기니까 배틀 따위는 필요없지 않나?'라는 심정으로 주인공에게 무적의 즉사능력을 주었다고 밝혔다. 이 또한 주인공의 승리가 '왜' 쾌감을 주는지를 고려하지 않고서 이겼다는 결과에만 주목했기 때문이다.[12] 데스마치와 죠죠를 알기 쉽게 비교해보면 죠죠 3부의 경우 다양한 타입의 악역이 나온다. 물리공격이 안먹히는 타입(옐로 템퍼런스), 수중전에 능한 타입(다크 블루문), 물체를 통째로 동화시켜 조종하는 타입(휠 오브 포춘, 스트렝스). 거울속으로 이동하는 타입(행드맨)등등 똑같은 타입의 적은 거의 나오는 일이 없기에 지루함이 덜하고, 악역들이 잠깐 나왔다가 개발살이 난다고해도 독자에게 인상 하나는 확실히 남긴다. 하지만 데스마치는 다들 그냥 레벨, 스텟이 높고, 파괴력 높은 마법만 쓰는 타입만 줄곧 나온다. 특수한 타입이나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마법이나 스킬을 응용해서 쓰는 타입은 절대 안 나온다. 그냥 다 주인공 사토의 하위호환이라고 보면 된다.[13] 단순히 어떤 작가의 작품을 즐겨보는 게 아니라 작가를 아이돌급으로 좋아하는 독자.[14] 농약 사이다는 실제 존재했던 사건의 키워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