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체첸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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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그로즈니[5]
가 아닙니다.'''이곳은 연옥입니다!'''
- 그로즈니 시가전에서 적의 대전차보병 수십 명을 발견한 제81 기계화보병연대 소속의 T-80BV의 전차장
1. 개요
1994년과 1995년 사이에 있었던, 러시아 연방과 체첸 분리주의 세력을 대표하는 이치케리야 체첸 공화국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
2. 과정
1994년 12월 체첸 내부의 상황이 악화됨에 따라, 당시 러시아 대통령인 보리스 옐친은 직접 정규군을 투입하기로 하였다. 당시 러시아군의 전략은 1950~1960년대 헝가리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성공했던 것처럼 기갑부대를 중심으로 상대의 수도를 급습하여 정권을 전복시키고 친러시아 정부를 수립한다는 것이었다. 러시아 정부는 이러한 외과 수술적 공세를 통해 20일 내로 전쟁을 끝마칠 수 있을 것이라고 낙관하였다.
1차 체첸전쟁 당시 러시아군의 장비
- 전차 : T-64, T-72A, T-72B1,T-72BV, T-80U, T-80BV
- 장갑차: BMP-2, BMP-3, BTR-80, BTR-40, 쉴카
- 포: 81mm 박격포, AGS-17, SPG-9, 9K111-1 콘쿠르스(BMP-2 거치형),9K115 메티스, KPV
- 헬기: Mi-28 하인드, Mi-8 수송헬기
하지만 당시 러시아 육군의 대부분은 신병들이었는데, 공격 개시 직전까지 어디로 가는지조차 알려주지 않은 상황이었다.[6] 이후 목적지가 체첸이라는 것을 알게된 러시아 병사들의 사기는 바닥을 쳤다. 또한 3년전 걸프전에서 러시아제 T-72 전차가 미군의 M1 에이브람스와 영국군의 챌린저 1에게 압살당하며[7] 러시아 전차의 취약성을 드러냈음에도, 걸프전을 연구한 러시아군은 자신들은 이라크군과 다르다며 러시아 기갑부대를 지나치게 과신하고 있었다.
걸프전의 이라크군과 1차 체첸전쟁의 러시아군의 훈련상태를 떠나서 걸프전 당시 이라크군은 강력한 미군과 영국군의 제대로된 공세를 겪어보기도 전에 겁을 먹고 제대로 싸울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이 점이 '러시아군은 이라크군과 다르다'고 한것이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긴 했다. 걸프전때의 이라크군과 달리 그로즈니 전투 이후 러시아군들과 러시아인들은 많은 피해를 봤어도 사기가 꺾이긴 커녕 오히려 체첸군에 대한 반감심과 분노로 사기가 올라갔다.
러시아군은 진격로에서 산개된 체첸군과 민병대의 저항에 부딪쳤는데, 사기가 바닥에 떨어지고 훈련이 부족한 러시아군은 이러한 친정부 체첸인들의 저항을 뚫어내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공군의 지원과 로켓포의 화끈한 화력을 통해 체첸군의 반격을 분쇄하면서 12월 31일 예정보다 늦게나마 그로즈니로 접근할 수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체첸정부 청사와 주요 정부시설등의 요충지가 별 저항 없이 접수되면서 작전이 성공했다는 낙관론이 돌았다.
그러나....
2.1. 1차 그로즈니 전투 (1994.12.31~1995.2.8)
[image]'''"동무들, 지옥에 온 것을 환영하네."'''
- 그로즈니 중앙기차역을 공략하기 직전 러시아군 무전수가 체첸 반군으로부터 수신한 무전
러시아군의 포격으로 파괴된 그로즈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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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첸반군
12월 31일 러시아군이 그로즈니 시가에 진입하기 시작한 뒤에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민간인들 틈에 숨어 그로즈니 시내에 매복하고 있던 체첸반군의 기습으로 러시아군은 많은 피해를 입어, 그로즈니 시가전에서만 전차 62대, 기타 장갑차 163대를 손실하는 피해를 입은 것이다.
12월 31일에 총 6,000여명의 러시아군이 그로즈니로 진입했었다. 이때 그로즈니에 주둔하던 체첸군은 공식적으로 밝혀지지 않아서 자료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무장한 시민군을 군이라고 한다면 10,000명이 러시아군을 기다리고 있었고, 정규군만 센다면 2,000명 정도였다.
2.1.1. 중앙기차역
이때 가장 치열한 전투를 펼친 제131 마이코프 기계화보병여단은 중앙 기차역을 점령하려다 ''' 작전 개시 이후 60시간동안 1,469명의 대원중 160명만 생존'''하는 너무나도 큰 피해를 본다. 거기다 제131여단은 42대의 장갑차, 20대의 전차, 16문의 포가 파괴되었다.
당시 131여단은 알파 대대와 베타 대대로 나뉘어서 기차역을 향해 진격했다. 이중 알파 대대는 최선봉대대였는데, 알파 대대의 BMP와 T-80들은 기차역을 보지도 못하고 파괴되었으며, 이때 대부분은 장비가 파괴되기 직전에 승무원들과 탑승한 보병들이 탈출하게 된다. 이때부터 제131 여단의 알파대대는 '''본격적으로 지옥'''을 보게된다. 탈출한 보병들과 승무원들은 각개전투를 실행했으며, 알파 대대는 포병지원을 요청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알파 대원들은 포병지원은 보지도 못하고 죽었으며, 그 이후에도 포병지원은 없었다. 알파 대대장은 공중지원을 요청했지만, 이마저도 공군의 오사로 인해서 후방의 남아있던 BMP가 모두 파괴되고, 러시아군이 엄폐해있던 건물을 무너뜨려 버린다. 알파 대대장은 각개전투를 시작한 시점부터 계속해서 구조요청무전을 보냈지만, 후에 조사 결과 본대에서는 수신된 바가 없었다고 한다. 알파 대대장은 최후의 명령으로 각자 알아서 이 지옥에서 어떻게든 탈출하라고 명령했다. 알파 대대의 남은 생존자들은 3일간 사력을 다해 그로즈니를 빠져나오려했지만, 알파 대대의 생존자는 거의 없었다.
베타 대대의 상황은 알파 대대보다는 아주 조금 나았을뿐 이곳도 지옥이었다. 기차역 부근에서 24시간동안 포위되었으며, 베타 대대의 진입로 특성상 전차들과 장갑차들이 엄폐할 곳이 상대적으로 많았다.[8] 그래서 제131여단의 생존 전차와 장갑차는 대부분 베타 대대의 장비들이다. 알파 대대의 장비는 대부분 파괴되었거나 살아남았어도 노획당했다. 베타 대대는 포위망을 뚫기 위해서 처음엔 전차를 엄폐물로 앞세웠지만, 당연히 바로 격파되었고, 주변의 보병들마저 싹쓸이 당한다. 당시 육군의 엄호를 위해 떠있던 공군기는 러시아의 대표적인 공격헬기인 Mi-24 하인드였는데, 그 유일했던 헬기는 도시 전체를 엄호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따라서 베타가 CAS요청을 하면 다른 곳을 엄호하고 돌아와야 해서 지연시간이 있었고, 막상 하인드가 공격을 개시할 때엔 이미 적은 다른 건물로 도망을 가버린 상태였다. 따라서 베타 대대는 땡보병으로 포위망을 뚫어야 했다.
1월1일 제131여단의 여단장이었던 Ivan Salvin 대령은 알파와 베타 대대의 보병과 승무원들 중 기차역에 도달한 인원들로 기차역을 사수하려고 했다. 하지만 부상자가 속출했고 상황은 러시아군에게 너무 불리했다. 설상가상으로 아침에 131여단이 기차역에 도착한뒤 원래는 503기계화보병여단과 8기갑대대가 지원을 해줬어야 했지만, 체첸 반군이 131여단을 포위하고 503여단을 함정으로 유인해버린 바람에, 503여단 또한 포위가 된다. 8기갑은 도시 진입을 하다가 먼저 도착해있던 다른 부대들에게 오인사격을 받고 6시간동안 서로 총질을 하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기차역으로는 단 한 명도 지원을 오지 못했으며, 1월 1일 저녁이 되자 여단장인 살빈 대령은 부상병 40여명을 5대의 APC에 태우고 탈출을 하려했다.
하지만 체첸반군의 RPG 공격으로 27명이 즉사, 13명은 체첸의 포로가 되었으며 대령은 구사일생으로 탈출한다. 1월 2일 기차역에 남은 본인을 포함한 다른 장교들과 의논해 결국 기차역을 버리고 후퇴하기로 한다. 그렇게 그들은 쓸만한 BMP-2를 찾았고 탈출을 시도했으나, 시가지에서 체첸반군의 공격을 받고 전사한다. 그의 시체는 파괴된 차량 근처에 있었으며 파편에 짖이겨진채로 발견되었다.
이런 사태가 벌어진 것은 러시아 전차의 취약점을 노린 체첸군의 전술 때문이었다. 전통적으로 러시아의 전차는 피탄면적을 줄이기 위해 크기가 작은 포탑을 사용하기 때문에 전차포의 최대 부양각이 낮아서, 높은 곳을 공격할 수 없다.[9]
이를 노려 체첸군은 시내 건물의 2층이나 3층에 매복하고 있다가 진격해 오는 러시아군 전차의 취약한 전차 상부를 노리고 대물저격총으로 반응장갑을 기폭시킨후 RPG-7 등의 휴대용 대전차로켓으로 공격했다. 또한 건물 사이의 길을 따라 일렬로 진격해 오는 전차 대열의 앞부분과 뒷부분을 먼저 공격해 격파하거나, 건물을 무너뜨려 전차의 이동을 차단한 다음 오도가도 못하는 전차들에게 포탄 세례를 퍼부었다. 결국 러시아군은 속수무책으로 격파당하거나 전차를 버리고 탈출하는 수 밖에 없었다.
물론 러시아군이 제대로 싸웠다면 이야기가 달라졌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시의 러시아군은 너무나 형편없었다. 당시 러시아군은 어차피 그깟 체첸반군의 저항은 별로 없을거라고 예상했고, "상대 수도로 진격하면 전쟁 끝"이라고 안일한 계획을 세운 나머지 시가전에 대한 대비가 전혀 없었으며, 러시아군 정보부는 체첸군이 그로즈니 시내에 긴급히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했다는 것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시가전에서는 적 대전차보병으로부터 전차를 엄호해 줄 보병이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장갑차에 승차할 보병이 아예 없거나, 운전병이 없어 영관급 장교가 차량을 운전하는 경우가 빈번할 정도로 보병 전력이 매우 부족하였다. 물론 이는 대다수의 보병과 승무원들이 전투 중 전사해서 후퇴시 벌어진 일들이다. 그리고 러시아군 전차들이 장착한 반응장갑 중 상당수가 '''화약 없는 종이호랑이였다고 한다'''.[10] 그래서 RPG에 맞으면 여지없이 파괴되는 셈.
또한 지도조차 소축척 지도뿐이어서 단위 부대들은 시가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저격수와 부비트랩의 희생양이 되었다. 부대 간 지경선은 복잡한 시가에 모호하게 그어졌고, 위에서 서술 되어있듯이, 인접 부대 사이에 통신 수단도 부족해서 오인 사격과 오폭이 잇달았다. 러시아 기갑부대의 장교들은 지원 포격이나 근접항공지원 유도에 서툴렀다.
또한 시가전 교리 역시 제2차 세계 대전 경험은 어디에다가 가져다 버리기라도 했는지, 81전차연대의 총 120여대의 T-80BV전차와 장갑차가 투입되었지만 유기적인 연결이 이루어지지 않아 시가 중심부로 돌진하다가 무려 105대가 파괴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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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 하나로 당시 상황이 설명 가능할것이라고 본다. 엄폐물을 끼기 위해 발악한 모습이 역력하다.
반대로 체첸군은 두다예프가 소련 공군 소장 출신에 참모총장 아슬란 마스하도프는 소련 육군 포병대령 출신이었던 데다가 소련군 복무자, 러시아에서 훈련받은 압하스 전쟁 참여자가 다수를 이루어 경험도 풍부했고, 러시아의 전술에 능통했다. 즉 간단히 말하면 베테랑들 이었던것이다.
3일간의 기갑부대를 앞세운 혼란스러운 공격이 처절한 실패로 돌아가자, 러시아 지휘부도 뒤늦게나마 상황을 파악하고 야포와 로켓포의 포격과 공군의 공습을 동원하여 건물을 하나씩 무너뜨리면서 시내로 진격해 나갔다. 결국 1995년 1월 대통령 관저를 장악했고 2월 말에는 그로즈니 전부를 확보하는데 성공하였다. 한편 당시 시내에는 민간인들과 체첸군이 뒤섞여 있었는데,[11] 포격을 동원한 격렬한 시가전이 벌어지면서 수만 명의 민간인 희생자가 나왔다.
2.1.2. 그로즈니 전투 결과
러시아 연방
- 사망: 1,426명 ~ 2,000명 이상
- 실종: 약 500명[12]
- 부상: 4,670명
- 포로: 96명
이치케리야 체첸 공화국
?
민간인
사망: 35,000명 이상 [13]
2.2. 그로즈니, 그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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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즈니 함락 이후 두다예프는 그로즈니를 빠져나와 남부로 이동하며 저항을 계속하였고, 러시아군은 그로즈니 주변 지역을 천천히 확보하면서 1995년 6월에는 남부를 제외한 체첸의 대부분을 점령하였다. 하지만 체첸 남부는 해발 5000m나 되는 산맥 지역이어서, 러시아군은 체첸군의 게릴라전을 상대로 허우적대고 있었다.
한편 체첸군은 체첸의 러시아 점령 지역 뿐만 아니라 러시아 남부 지역에서도 각종 테러를 벌였는데, 특히 1995년 6월 샤밀 바사예프가 이끈 부됴놉스키 병원 인질극으로 러시아군의 발목이 잡히면서, 체첸군이 재정비를 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체첸 각지에 민병대가 결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해외 이슬람 국가들에서 최대 5,000명으로 추정되는 지하드 전사들이 자원을 해왔다.
러시아군은 1996년 6월 두다예프를 공습으로 암살하는데 성공하지만, 체첸군의 게릴라전에 지속적인 출혈을 강요당하고 있었으며, 1996년에는 러시아 점령지조차 안전하지 않았다. 1996년 8월 19일 샤밀 바사예프의 지휘 하에 체첸군은 그로즈니 중심가를 성공적으로 기습하여 3,000여 명의 러시아군 병력을 포위하였다. 러시아군의 거듭된 구출작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러시아군은 그로즈니 시내를 향한 대규모 무차별 폭격을 예고하며 체첸군에게 항복을 종용하였다. 하지만 많은 민간인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에 대한 폭격 위협은 오히려 대내, 대외적 여론의 악화만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8월 31일 러시아와 체첸 사이에 평화 협정이 체결되면서 전쟁이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 3,000명은 대부분 전사하고 남은 생존자들은 체첸클리어의 희생자들이 되었다.
러시아는 개전 초기 3만 8천 여명, 최대 7만명의 병력을 동원했지만, 약 21개월의 전쟁 기간 동안 최소 5,700명의 전사자만을 남기고 체첸을 정복하는데 실패하였다. 그 결과 체첸 전쟁 이후 한국군 등 일부를 제외하면[14] 전 세계적으로 냉전 시대의 대규모 정규전보다는 소규모 국지전을 연구하는 풍조가 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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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체첸 전쟁에서 희생된 수많은 러시아 젊은이들을 추모하기 위해 위령탑이 세워졌다.
평화 협정의 내용은 1997년 1월 1일까지 러시아군의 철군, 5년간 체첸의 지위에 대한 결정 유보, 러시아-체첸 연합 행정 기구 구성, 체첸 정규군의 유지 등으로 사실상 러시아의 패배로 볼 수 있다. 또한 러시아는 냉전 기간만 해도 소련 눈치만 보던 영국, 프랑스 와 같은 서유럽 선진국들한테 경제 제재 압력을 당하는 대굴욕을 겪었다.
여기서 굴욕을 맛본 러시아는 1999년에 제2차 체첸 전쟁에서 그로즈니를 초토화하고 분리독립 세력을 박멸하는 것으로 복수한다.
3. 참상
위 동영상의 5분대를 보면 1차 체첸전쟁 당시 그로즈니 시가전의 131st Maikop Motor-Rifle Brigade (131 마이코프 기계화보병 여단)의 최선봉대대였던 알파대대의 생존자의 인터뷰인데, 인터뷰하는 군인들의 모습을 보면 왜 체첸전쟁이 '''JOURNEY TO HELL''' 이라는 별명이 붙었는지 알 수 있다.
제 1차 체첸전쟁의 그로즈니 전투에서 생존한 제131마이코프여단의 알파대대의 중대장을 인터뷰한 내용이다.
기자: 여러분의 소속과, 현재 그로즈니에 잔존해있을 병력은 얼마나 될지, 지금 기분은 어떤지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병사 1: 12월 31일에 진입하기로 했을겁니다. 근데 막상 기차역에 진입한건 1월1일 오전 10시였어요. 우리는 별다른 문제 없이 도심지를 돌파했습니다. 곧 우리는 도시 중심부(중앙기차역, 대통령 관저 근처)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잠시 대기했습니다. 정말 많은 전차들이 그곳에 뭉쳐있었습니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장비들이 파손되고 손상을 입었습니다. 우리가 쏘면 그들도 쐈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완전히 이겼고, 그게 다입니다.
기자: 그러고 나서는요? 어떻게 탈출했나요?
병사 1: 우선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채로 도시에 진입했습니다. 정말 아무것도요. 아무런 노트나 상부로부터 온 정보도 없었고, 보급된 지도는 우리의 현위치를 알기엔 아무 쓸모없는 종이쪼가리에 불가했습니다. 우리들은 그저 막무가내(randomly)로 도심지에 진입했습니다. 제 중대는 궤멸되었고, (우리가 도착한) 기차역은 지옥이었습니다. 모두가 사력을 다해 그곳으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지려 했습니다.
기자: 아군을 만나기까지 얼마나 걸렸나요?
병사 1: 우리는 3일동안 걸었습니다.
기자: 그 3일동안 무슨일이 있었나요?
병사 1: (불쾌한 표정으로) 그다지...별거 없었습니다. 그날 밤에 우리쪽 병사들과 만났고, 우리의 131연대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실종자목록에 있을줄 알았습니다.[15]
기자: 두다예프 병사들(체첸반군)과 교전하지 않았나요?[16]
병사 1: 네 교전을 했었죠.[17]
그들은 우리를 막강한 화력으로 제압했습니다. 제 APC는 완파되었고요.
기자: 그럼 그곳(기차역)에서 당신과 당신의 친구(옆에 앉아있는 병사)만 그곳에서 탈출을 한건가요?[18]
병사 1: 아니요.(뭔 개소리냐라는 표정으로) 전 제 중대원들에게 먼저 기차역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3대의 APC로요. 나중에 제가 기차역에 도착해보니, 그곳에는 훨씬 더 많은 체첸군들이 있었고, 우리는 그들이 어디서 공격하는지도 모른채로 당했습니다. 5대의 APC로 다른 중대와 같이 탈출을 한다고 (무전으로) 들었는데, 전 그들의 행방을 모릅니다.[19]
쨌든 저의 APC는 (진입)도중에 파괴되었기 때문에, 저와 비슷한 상황이여서 도보로 탈출해야하는 소대들과 함께 탈출을 시작했습니다.
기자: 주로 어디에 숨었나요?
병사 1: 뭐 당연히 빌딩, 야지에 숨었고, 웬만하면 밤에만 움직였습니다. 3일뒤에 우리들만 (본인과 친구) 시가지를 벗어나왔습니다.[20]
(표정이 어두워지면서) 그리고 어떤 연대를 만났습니다. 어떤 연대였는지는 모르겠고, 그 본대는 시가지 외곽에서 대기하고 있었고, BMP-3를 갖고있었습니다. 저희는 그쪽 연대의 병사들과 합류해 제 중대원들과 다른 생존자들을 구출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그 연대는 시가지 진입을 포기했다 하더군요..(씁쓸한 표정) 모두가 다른 방향으로 각자가 무사히 탈출했을겁니다...
잠깐의 정적...
기자: (옆의 병사에게) 더 붙이고 싶은 말이 있나요?
병사 2: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습니까?'''
4. 관련문서
제2차 체첸 전쟁
체첸 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