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

 

Diaspora
διασπορά
1. 개요
2. 역사적 사례
2.2. 아시아
2.3. 유럽
2.4. 아프리카
3. 문서가 개설된 디아스포라


1. 개요


고전 그리스어로 파종을 의미하는 단어에서 유래한 표현으로, '''본토를 떠나 타국에서 살아가는 공동체 집단''', 혹은 이주 그 자체를 의미한다.

2. 역사적 사례



2.1. 유대인


기원전 6세기 바빌론 유수로 인하여 중동 전역에 생겨난 유대인 집단이 디아스포라의 시작이자 디아스포라라는 단어가 생기게 된 계기였으며, 이후로도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 재정착과 외세의 침입으로 인한 이주를 반복하게 된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디아스포라는 서기 132년에 일어났는데, 로마 제국을 상대로 일으킨 반란[1]이 진압된 이후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유대인들의 예루살렘 거주를 금지하면서 많은 유대인들이 국외로 이주하게 된다.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일대에서만 살고 있다가 강제로 쫓겨났다는 인식이 있지만, 유대-로마 전쟁 이전에도 많은 유대인들이 '''자발적으로''' 이집트나 소아시아 일대로 이주하고 있었다. 애초에 기원전 4세기부터 서기 1세기까지 약 500년간 이어졌던 헬레니즘 시대의 분위기 자체가 사해동포주의로 가득 차있어서 국외 이주를 그렇게 꺼려하는 분위기가 아니기도 했고, 상대적으로 미개발지역이었던 팔레스타인보다는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는 게 먹고 살기에 유리했다. 중요한 점은 로마 제국예루살렘을 제외한 다른 팔레스타인 지방을 포함한 전 지역에서의 유대인 거주를 허용했다는 것이다. 예루살렘 거주가 금지된 것은 유대교를 믿는 유대인들뿐이었다.

2.2. 아시아


일반적으로 가장 유명한 사례는 중국과 인도다. 중국에서는 명나라 시기부터 이미 많은 한족들이 동남아 일대로 이주해갔으며, 19세기 이후 청나라가 혼란스러워지면서 이민은 급속도로 가속됐다. 당시 중국을 떠난 한족들의 대부분은 캘리포니아를 비롯한 미국 서부 일대로 이주하였으며, 이들중 상당수가 미대륙 횡단철도 건설을 비롯한 일용직 노동자에 종사했기 때문에 이들을 일컬는 쿨리(苦力, coolies)라는 차별적 용어가 유행하기도 했다.[2] 비슷한 시기 인도인들 역시 먹고 살길을 찾아 미국 및 남아공 일대로 대거 이주를 해나갔는데, 속어로 데시(Desi)라고도 불리는 이들의 수는 약 2500만 명 정도인 것으로 추산된다.
한국 역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전반 사이에 상당한 규모의 디아스포라를 경험했다. 그래서 한국계 미국인(260만명)은 일본계 미국인(80만명) 보다 인구가 훨씬 많으며 조선인은 일본(90만명), 중국(250만명), 중앙아시아(50만명) 등에서도 상당한 숫자를 갖고 있다. 조선 말기의 혼란을 피해 1860년대부터 많은 수의 사람들이 연해주만주 일대로 이주하였다.[3] 1910년 국권침탈 이후에는 단순히 경제적인 동기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동기를 가지고 해외로 이주하는 수가 늘어났는데, 일제의 통계자료에 의하면 1920년대 연평균 대략 1만명이 국외 이주를 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1930년대 이후로는 일본의 해외 침략 등에 동원되어 강제로 이주된 사람들의 수가 크게 늘어나서, 1945년 해방 당시의 통계를 보자면 공식적으로만 일본에 약 110만 명, 만주 일대에 120만 명이 이주한 것으로 드러난다.[4] 1948년의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로는 미국으로의 이주가 주를 이루었는데, 1965년 미국 당국이 이민법을 개정하면서 직계 가족들의 경우 제한없이 초청할 수 있게 된다.

2.3. 유럽


디아스포라의 어원이 고전 그리스어에서 유래되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고대 그리스부터 잦은 대규모 이주가 행해졌다. 폴리스를 생활단위로 삼았던 고대 그리스인들은 유럽 전역에 진출하여 도시 국가를 건설하였고, 이 중 일부는 지금까지도 대도시로 생존해있다. 프랑스의 마르세유나, 이탈리아 남부의 나폴리, 타란토 등이 대표적인 사례. 또한 알렉산더 대왕동방 정복과 대제국 건설 이후로는 많은 그리스인들이 동방에 식민시를 건설하기도 했다. 고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가 대표적인 사례.[5] 덧붙여서 게르만족의 대이동도 디아스포라에 해당한다는 시각도 일부 존재한다.
중세에는 봉건제의 특성상 고대만큼 잦은 이주가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십자군 전쟁을 통한 기독교도 집단들의 중동 이주나 유럽 남부에서부터 아메리카까지 사실상 당대 전 세계를 누빈 바이킹 혹은 동방식민운동 같은 사례도 있기는 하다. 1492년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 이후로 유럽에서의 대규모 이주는 다시 시작된다. 유럽 각국에서 미대륙 내의 식민지 개발에 나서기도 했고, 비슷한 시기 유럽 전역을 뒤흔든 종교개혁과 맞물려서 종교의 자유를 찾아 많은 사람들이 이주했기 때문.
아일랜드에서도 대기근을 피하여서 많은 사람들이 미국으로의 이주를 택했다. 대기근 직전 아일랜드의 인구수가 850만 명 정도였는데, 대기근 직후 400만으로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고 2세기 가까이가 지난 지금도 인구수가 600만 명 정도에 불과하다. '''3분의 1은 굶어 죽고 3분의 1은 미국으로 가고 보니 3분의 1만 남았다.'''라는 블랙유머까지 있을 정도. 같은 켈트계인 스코틀랜드 또한 잉글랜드의 박해 및 비슷한 기근을 피해 북미, 호주로 대거 이주하여, 현재 5백만 남짓한 본토 인구수에 비해 스코틀랜드계 캐나다인, 미국인, 호주인의 수는 그 두 배를 넘는다. 켈트계 이민자의 대규모 유입은 미국식 영어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신생 미합중국의 경제적 발전이 본격화된 19세기 중반 유럽에서는 경제적 동기와 기술적 발달[6]이 결합하여 역사상 최대 규모의 민족 이동이 이루어진다. 독일에서만 1840년부터 1870년까지의 약 30년 남짓한 기간동안 공식적으로만 240만 명이 미국으로 이주했으며[7], 19세기 후반부터는 폴란드를 비롯한 동유럽이나 이탈리아를 비롯한 남유럽 일대에서의 대규모 북미 이주가 이루어진다.

2.4. 아프리카


자발적 동기로 이루어진 다른 지역에서의 이주와 달리, 아프리카의 디아스포라는 인신매매의 성격이 아주 짙다. 16~19세기 사이의 약 4세기동안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행해진 노예무역으로 인하여 천만명 이상의 아프리카인들이 노예로 전 세계 곳곳에 팔려나간 것으로 추정되며, 이 중 상당수는 미주대륙으로 끌려갔다.

3. 문서가 개설된 디아스포라



[1] 유대-로마 전쟁(AD 66~70), 바르 코크바의 난(AD 132~135년).[2] 다만 쿨리라는 단어 자체가 중국인만을 지칭한 것은 아니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 당시 유럽 및 미주에서 육체 노동직에 종사하는 황인종이면 다 쿨리라고 불렸다. 심지어 혈통적으로 백인들과 공통의 조상을 두고 있는 인도인들도 쿨리라고 까였다.인도인 같은 경우는 상류층만 백인과 같은 조상, 백인이다.[3] 20세기 초반부터 하와이를 비롯한 미주로의 이주도 시작되었지만, 이 시기 주된 이민지는 만주와 연해주일대였다.[4] 이 중 일본으로 이주했던 사람들은 다수가 해방과 동시에 귀국하지만, 만주에 이주한 사람들은 해방 이후에도 절반 이상이 현지에 머무른다.[5] 사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가 독보적인 인지도를 지니고 있을 뿐이지, 알렉산더 대왕의 이름을 딴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는 제국 전역에 무수히 많았다.[6] 증기선과 같은 당시로는 신식 교통이 개발되면서 해외 이주가 훨씬 쉬워졌다.[7] 1865년 당시 독일 연방의 공식 인구가 3500만 명 정도였다. 인구의 7~8%가 빠져나갔던 것.[8] 알제리 전쟁 후 거의 소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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