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반니 피에를루이지 다 팔레스트리나

 


[image]
'''Giovanni Pierluigi da Palestrina'''
익명의 화가의 1590년경 그림
'''출생'''
1525년 12월 17일 목요일 [image] 교황령 팔레스트리나
'''사망'''
1594년 2월 2일 수요일 (69세) [image] 교황령 로마
'''직업'''
작곡가, 오르가니스트
'''서명'''
[image]
1. 개요
2. 생애
2.1. 중기
2.2. 말기
3. 작품 세계
3.1. 모테트
3.2. 미사곡
4. 기타


6성 모테트 '''Tu es Petrus'''[1]: 바티칸에서 교황이 집전하는 미사에서 교황의 입당 성가로 항상 쓰인다.

1. 개요


팔레스트리나는 이탈리아 출신으로, 르네상스 시대 로마 악파의 음악가이다. 종교 개혁으로 가톨릭 교회가 흔들리던 시기 교회 음악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으며 그의 음악은 그 자체로 중세 시대 그레고리오 성가에 버금가는 일종의 규칙으로 여겨진다. 그의 음악은 종교적 내용을 담은 모테트와 미사가 중심이며, 그중에서도 마르첼로 2세에게 헌정한 <교황 마르첼로의 미사>가 가장 유명하다. 이 미사곡은 아직도 전 세계 합창단이 즐겨 부르는 명곡이다. 그가 죽은 뒤 그의 묘비에는 '''<음악의 황제(Princeps Musicae)>'''라는 찬사가 바쳐졌다.

2. 생애


로마와 가까운 팔레스트리나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로마에서 음악교육을 받았으며, 1537년에는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의 성가 단원이 된다. 1544년부터는 팔레스트리나 성 아가피토 성당의 오르간 연주자로 임명된다.

2.1. 중기


1551년에는 성 베드로 대성당의 줄리아 성가대(Capella Giulia)의 지휘자가 되었다. 1544년에는 자신의 첫 미사곡집을 출판하며, 1547년에 루크레치아 고리(Lucrezia Gori)와 결혼하고, 1551년 1월에는 성당의 공식 가수가 되었는데, 깐깐하고 보수적인 교황 바오로 4세가 9월 새롭게 선출되자, 팔레스트리나는 결혼한 사람은 성가대에서 일을 할 수 없다는 이유로 해고당하게 된다. 1555년에는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의, 1561년에는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의 음악 감독을 돌며 부임하며 모테트미사곡들을 출판한다.

2.2. 말기


1571년에는 해고당했던 성 베드로 대성당의 성가대 지휘자로 다시 부임하게 된다. 그러나 1572년에는 로마에 유행한 흑사병으로 아내와 두 아들을 잃고 만다.
1577년 교황 그레고리오 13세는 팔레스트리나와 안니발레 초일로에게 미사에 사용되는 음악을 모은 책인 『그라두알레』를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권고한 사항에 따라 다시 쓸 임무를 요청했고, 곧 그 작업에 착수하였으나 그의 생전에 완성되지는 못했고 1614년에 그라두알레 메디치판이 출판되었고 이 음악은 1908년까지 사용하게 된다.
가족을 잃은 비극을 겪은 팔레스트리나는 성직자가 되려고 했으나, 결국 1581년에 부유한 과부 비르지니아 도몰리(Virginia Dormoli)와 재혼하는데... 문제는 이미 그의 나이 '''56세'''(...). 여자가 아닌 을 노리고 결혼한 것이니 아무래도야... 그러고는 새 아내의 모피 사업에 몰두하게 된다. -음악가의 알바- 만토바의 굴리엘모 곤차가 공작과 신성로마제국막시밀리안 2세가 팔레스트리나를 초청했으나 로마를 떠나지 않고 생의 마지막도 로마와 함께한다.
1594년 2월 2일 로마에서 흉막염으로 사망했다.

3. 작품 세계


팔레스트리나는 평생을 로마에서 거주하며 역대 교황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았다. 그의 음악에서도 그레고리오 성가처럼 로마 가톨릭 교회의 분위기가 배어나온다. 그의 종교 음악들은 종교 음악 양식의 '최고 완성품'이라 일컬어진다. 그의 합창곡들은 다성종교 음악의 표본으로 요한 요제프 푹스 등 많은 이론가들은 대위법 저서에서 팔레스트리나를 분석하는데 상당 부분을 할애하였다.
그의 음악은 모방 대위법적인 양식에 기초를 둔 것으로, 어떤 악장에는 가사의 각 구절마다 새로운 동기가 도입되고 다른 성부가 모방하는 기법이 사용되고, 다른 악장에서는 화성적, 모방적인 부분이 교차되기도 한다. 또한 반음계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음악의 특징. 그리하여 후대의 작곡가들에게 부드럽고 투명하다는 평을 들었다. 애초에 트리엔트 공의회가 음악을 샅샅히 검열하고, 세속적 기법, 기교나 과도한 악기 사용 금지 등 종교 음악에 크리를 먹였기 때문인 것도 있다.
팔레스트리나의 양식들은 다음 세대 작곡가들에게 <구(옛날) 양식>(stile antico)의 표본으로 많은 종교음악 작곡가들의 모방 대상이 되었다. 몬테베르디는 자신이 말한 '1작법'의 완벽한 예로 팔레스트리나를 꼽았다.
작품들로는 104개의 미사곡, 400개 이상의 모테트, 송가등이 있으며, 140개의 마드리갈도 남겼다.[2]

3.1. 모테트


팔레스트리나의 모테트는 6할은 4성이나 5성부고 나머지는 8성에서 12성부의 곡들이다. 그의 모테트의 특징은 모방 대위법을 제외한 어떤 구조적 방법에 의해 곡을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3.2. 미사곡


팔레스트리나는 그의 미사의 대부분을 그레고리오 성가 선율을 인용하여 작곡하였지만, 추가로 당대의 작곡 기법들을 활용하여 엄청난 미사곡들을 남겼다. 또한 모테트나 세속적 음악을 변용한 미사들도 있다. 단순히 자유롭게 작곡한 미사들도 있는데, 이런 미사의 대표작이 《교황 마르첼로 미사》이다.

4. 기타


이 시대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듯, 우리가 부르는 팔레스트리나는 그의 이름이 아니라 그가 팔레스트리나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한스 피츠너가 그를 주인공으로 하는 오페라 <팔레스트리나>를 작곡한 바 있다. 비슷한 시기에 에스파냐 출신의 토마스 루이스 데 빅토리아 또한 로마 악파의 음악가로 명성을 떨쳤다.

[1] 가사의 내용은 마태오 복음서 16장 18-19절: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라틴어 원문: Tu es Petrus, et super hanc petram aedificabo Ecclesiam meam, et portae inferi non praevalebunt adversus eam: Et tibi dabo claves regni coelorum. Quodcumque ligaveris super terram, erit ligatum et in coelis; et quodcumque solveris super terram erit solutum et in coelis.)[2] 본인은 말년에 이런 세속적인 음악을 쓴 것이 제일 후회된다고 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