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태조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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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어진. 현재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의 어진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대한민국 국보 제317호로 지정되어 있다. 전신정면의좌상(全身正面椅坐像) 초상화로, 총 26축으로 이루어져 있던 태조 어진 중 현존하는 유일한 본이다.
건국왕인 태조 이성계는 조선의 시조인 만큼 특별히 국초부터 경복궁 내에 선원전(璿源殿)이라는 어진 봉안처를 만들어 보관하였고, 각 지방에도 서울 문소전(文昭殿), 영흥 준원전(濬源殿), 평양 영숭전(永崇殿), 개성 목청전(穆淸殿), 경주 집경전(集慶殿), 전주 경기전(慶基殿) 등에 각각 어진을 모사하여 봉안하였다.
기록에 남아있는 이성계의 어진 26축 중 현존하는 유일한 이 어진은 태조 말년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태종 10년인 1410년에 경기전에 봉안되었던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모든 이성계의 어진들이 왜군의 손에 불타 사라질 때 전주 경기전에 있던 이 어진만은 유일하게 안의와 손홍록이라는 두 인물이 죽음을 무릅쓰고 조선왕조실록, 고려사 등의 다른 중요 문적들과 함께 보관하여 무사할 수 있었다.[1] 전쟁이 끝난 후 경기전이 재건되면서 다시 소장되었고, 이후 시간이 지나며 낡아진 원본을 고종 9년인 1872년에 원본 모습 그대로 옮겨 그린 것이다.
어진상단에 ‘太祖大王御容小子嗣服之九年壬申移摸’와 ‘太祖高皇帝御眞’이라는 표제가 있다. 전자는 위와 같이 1872년 고종 9년 임신년에 어진을 새로 이모하면서 붙인 것이고, 후자는 1899년에 태조를 고황제로 추존하면서 고종이 써서 규장각에 봉안해 두었던 어진표제로, 1900년 9월 29일에 윤용선의 건의로 날을 받아 10월에 원 표제 안쪽에 5푼分간격으로 붙였다고 한다.
조선 후기에 가면 실록에 "왜 태조대왕께서는 곤룡포가 청색이시지?" 하고 후대 임금들이 궁금해하는 대목이 간간히 보인다. 당시에 신하들이 내놓은 답은 "아마 고려의 곤룡포를 입으셔서 그런듯 합니다"였고 , 그래서 1837년에 헌종이 이 그림을 그릴 때 조선의 곤룡포인 홍색 용포로 바꿔 그리라고 했다고 한다. 네이버 캐스트 자료.
2020년 12월 기준 경기전 진전에 태조어진 뒤에 있던 경기전일월오봉도를 비롯해 1872년 봉안 당시 사용한 가마와 의장물들이 전라북도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2. 다른 어진
원본은 위에 나온 청포 어진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현존하는 다른 조선 시대 어진들과 마찬가지로 한국전쟁 기간 동안 부산에 옮겨져 있던 중 화재로 '''얼굴을 포함한 절반'''이 타버렸다. 그래도 태조는 위의 어진이 남아 있었던 덕분에 얼굴은 그대로 옮겨서 그릴 수 있어서 붉은색 용포 버전의 어진은 복원할 수 있었다.[2]
신숙주가 쓴 《영모록(永慕錄)》에 따르면 당시 선원전이라는 경복궁내 열성어진 봉안처에 받들던 태조 어진이 무려 26축[4] 이나 있었으며 그중에는 말을 타고 있는 태조의 어진도 있었다고 한다. 반쯤 타버린 홍룡포 어진은 전주 경기전에 있는 청룡포 어진을 참조해 복원한 것이다.
청룡포 어진 원본은 태조가 승하한지 2년뒤인 태종 10년(1410년)에 이성계가 64세 때 모습이 담긴 경주 집경전 어진을 모사해 제작되었다. 여러가지 일을 겪으며 현재까지 남았는데 한반도에 있었던 주요 사고들을 볼 수 있다.
- 1763년엔 한 차례 수리를 했고, 1767년에 일어난 전주성 대화재 당시엔 전주향교로 옮겨지기도 했다.
- 동학농민운동 당시 위봉사 법당으로 이안된 뒤 다시 돌아왔다.
청룡포의 어진의 경우 곤룡포의 각진 윤곽선은 물론 양쪽 트임새로 보이는 내공(內工)과 첩리(帖裏)의 형태가 조선 초기 초상화법을 닮았으며, 정면관을 훌륭히 소화해 낸 작품으로 보(補)와 견룡(肩龍)의 이금(泥金) 효과에 의하여 왕의 품위가 돋보이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참고로 태조 이성계의 최초 어진은 1389년 고려 공양왕이 왜구 토벌을 성공적으로 마친 이성계의 공적을 치하하면서 그의 초상을 벽화로 그리라는 명에 따라 그려진 벽화다. 조선 왕으로써 그려진 어진은 1398년으로 왕위에 오른지 7년째 되던해에 그린 어진인데 그해 함주(함흥)의 준원전에 자신의 진영을 봉안토록 하였고 8월에는 계림(경주)의 집경전, 문소전, 장생전 등에 봉안되었는데 이는 고려를 무너트리고 세운 조선 왕실의 권위와 왕조의 정통성을 세우려는 의도로 보여진다.
현재 경기전 정전의 어진의 원본은 2008년 보존 처리후 2010년 부터 경기전 경내 어진 박물관에 있으며 1999년 전주시가 권오창 화백에게 모사를 의뢰해 제작된 모사본은 어침실 문앞에 전시되어 있다. 원래는 전주시에서 어진 원본을 박물관으로 옮기고 모사본을 배치하려 했으나 전주 이씨 종친회의 강력한 반발로 모사본과 원본 2개를 보유하게 되었다.
붉은색 홍룡포 어진은 1837년 영흥 준원전에 있던 어진을 모사한 것인데, 헌종이 용포의 색깔을 붉은 색으로 바꿔 채색하도록 지시하여 홍룡포로 채색되었다.
함흥본궁에 봉안되어 있'''던''' 태조 어진. 위의 어진보다는 이전 시기에 그려진 듯한 모습이며, 곤룡포에 가려져 있지만 기골이 가려지지 않아 왕년의 역전의 용장 포스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6] 이 어진은 일제강점기 때 촬영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함흥본궁이 한국전쟁 때 소실된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현재 행방을 알 수 없다고 전해진다. 따로 들고 나오지 않았다면 소실됐을 확률이 높다.
1913년, 일본인 순사가 촬영한 사진이다. 함흥 준원전 어진은 전주 경기전 어진과 마찬가지로 전란을 피했던 어진이었기에 1398년에 제작된 것으로 보여지는데 당시 이성계의 나이는 64세가 되었을 때다. 저 얼굴이 예순넷이라면...흠좀무(아닌게 아니라 저그림 그릴시점에 이성계는 딸(숙신옹주)도 하나 만들었다. 흠좀무).
2013년 국립고궁박물관에서 함흥 준원전 태조어진을 복원하였는데 일본인 순사가 남긴 준원전의 태조 어진 사진을 참고하였다고 한다.
일제시대 만들어진 열성어진에 실린 태조의 모습이다. 매우 간략한 그림이지만 복식이나 수염의 형태를 보면 실제 어진을 보고 그렸을 확률이 있어보인다. 조선시대 초상화는 초기에는 정면상이었다가 중기로 접어들면서 묘사가 쉬운 측면상으로 바뀌었고, 조선말에 이르러 서양식 화법이 가미되어 정면상으로도 충분히 개성을 나타내기 쉬워지면서 정면상으로 회귀했다. 열성어진의 다른 초상과는 달리 조선초기 양식대로 태조만은 정면상으로 그려진 것으로 볼 때 최소한 열성어진을 그렸을 때 뭔가 보고는 그렸을 확률이 있어보인다. 다만 어떤 어진을 보고 그렸을지는 짐작하기 힘들다. 열성어진이 편찬될 당시에는 전주 경기전, 함흥 준원전, 한성 선원전에 각각 태조의 어진이 있었기 때문에 그 중 하나를 참고해 그렸을 것이다. 우측에 있는 초상화와 매우 흡사한 것을 알 수 있는데 이 초상화를 보고 그렸을지도 모른다.
3. 바깥고리
4. 국보 제317호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로 가로 150㎝, 세로 218㎝이다. 태조의 초상화는 한 나라의 시조로서 국초부터 여러 곳에 특별하게 보관되어 총 26점[8]
이 있었으나 현재 전주 경기전에 있는 태조 초상화 1점만이 남아있다.이 초상화는 임금이 쓰는 모자인 익선관과 곤룡포를 입고, 정면을 바라보며 용상에 앉아있는 전신상으로 명나라 태조 초상화와 유사하다. 곤룡포의 각진 윤곽선과 양다리쪽에 삐져나온 옷의 형태는 조선 전기 공신상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다. 또한 바닥에 깔린 것은 숙종 때까지 왕의 초상화에 사용된 것으로, 상당히 높게 올라간 것으로 보아 오래된 화법임을 알려준다. 의자에 새겨진 화려한 용무늬는 공민왕상에서도 보이는 것으로, 고려말에서 조선초까지 왕의 초상화에서 나타나고 있다. 익선관은 골진 부분에 색을 발하게 하여 입체감을 표현하였고, 정면상임에도 불구하고 음영법을 사용하여 얼굴을 표현하였다.
고종 9년(1872)에 낡은 원본을 그대로 새로 옮겨 그린 것인데, 전체적으로 원본에 충실하게 그려 초상화 중 가장 표현하기 어려운 정면상임에도 불구하고 훌륭하게 소화해 낸 작품으로 조선 전기 초상화 연구에 있어 귀중한 자료가 된다.
[1] 이 때 만들어진 책이 수직상체일기이다.[2] 순조와 문조는 두 점 모두 얼굴을 포함한 절반이 타서 복원이 불가능하다. 철종은 구군복본 얼굴이 남아서 복원할 수 있었다.[3] 출처 [4] 개수를 뜻하는 단어.[5] 세초란 실록이나 어진을 새로 작성한 뒤 오래된 기존의 어진이나 실록을 파기하는 것이다. 즉 모두 물로 빨아 내용이 보이지 않게 한다. 실록의 경우 물에 씻어서 글을 지우거나 불에 태우는 방법으로 세초를 했다. 하지만 어진의 경우 어떻게 세초하고 매안 했는지 구체적 기록은 없다. 다만 태조의 어진을 고종 때(1872년) 세초하여 백자 항아리에 넣고, 경기전 북편에 묻었다는 기록이 있으니 이 항아리를 발굴하면 자세한 방법을 알 수 있을 듯 하다.[6] 이성계가 태조가 됐을 때 나이가 50대 후반이라는 것과 당시 평균 체격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타고난 체격.[7] 1926년 6월 10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태조 어진 사진이다. 일제시대 기록에 따르면 선원전에 태조의 어진 3축에 봉안되어 있었다고 한다. 흐릿한 형상이지만 현재 전주 경기전에 남아 있는 어진과 사진으로만 남아 있는 영흥 준원전 어진과 모습이 다름을 알 수 있다. 선원전에 모셔졌던 3축의 어진이 각각 전주와 함흥의 어진을 이모한 것이라 해도 나머지 1축은 분명 다른 어진 있었을 확률이 있다. 그런 점에서 미루어 볼 때 선원전에 봉안 되어 있던 어진이 아닐까 싶다.[8] 명종 시점까지만 해도 이 만큼 남아있었다고 한다. 특히 이 중에는 말을 탄 채로 그려진 어진도 있었다고 한다. 사진으로 남은 함흥본궁 봉안 어진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