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창호
1930 ~ 2006. 11. 19
1. 개요
대한민국의 군인. 6.25 전쟁 당시 포병간부후보생 13기로 임관하여 육군 포병 소위로 참전, 1951년 5월 강원도 인제전투에서 중공군에게 납치되었고, 북한에서 국군 포로의 신분으로 43년간 강제 노역에 동원되는 등 고초를 겪었다. 국내에서는 1951년에 전사자로 처리됨과 동시에 육군 중위로 추서되어 있었다. 대한민국으로 귀환 후 정식 전역하였다. 인간승리의 표본.
2. 일생
평안남도 평양의 부유한 가정에서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경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50년 연희대학교에 입학하던 해에 6.25 전쟁이 발발했다. 그는 대한민국 육군에 자원 입대, 갑종장교 포병간부후보생으로 육군 소위 임관하여 육군본부 직속 포병 101대대 관측담당으로 참전하였다가, 1951년 5월 강원도 인제군 현리 전투에서 중공군에 포로로 붙잡힌 뒤 북한으로 끌려갔다.
이후 조선인민군 육군의 국군 포로들이 강제 편입되어 편성된 의용군에 배속되었으나, 1952년 동료 포로들과 탈출을 계획하다가 정치부에 발각되어 월남기도와 반동분자의 혐의로 13년간 서흥군, 덕천시, 함흥시, 아오지 탄광, 강계시 광산 등지의 강제 노역소에 복역하였다.
13년 동안의 강제 노역소 생활을 마친 후에는 자강도에 광부로 배치되어서 노역에 동원되었으며, 오랜 광산에서의 노역으로 인해 지병인 규폐증을 얻게 된다. 하루 10시간여의 중노동에 동원되었으나 일일 식량 배급량은 고작 300g[1] 정도였다.
이후 규폐 증세가 심해져서 산간 마을로 보내지게 되었는데 거기서 알게 된 중국 상인을 통해서 귀환을 결심하게 되고, 목선을 타고 중국을 통해 북한을 탈출하여 해상을 표류하다 1994년 10월 23일 새벽 대한민국 수산청 어업지도선에 의해 구출되었고, 병원에 입원하여 가족 상봉을 하였다.
그런데 그는 왜 '대한민국' 수산청의 어업지도선에 의해 구출될 수 있었을까? 한겨레21 1994년 11월 10일자 기사 <국민들의 시선을 돌려라>에 그 전말이 나와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애당초 정부(안기부)는 조창호씨의 귀환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조씨는 10월 20일 대한민국 영해상까지 밀항했으나 돌아가야 했다. 그로부터 이틀 뒤 발생한 성수대교 붕괴사고(21일)를 고비로 정부(안기부)는 마음을 180도로 돌려 먹었고 22일 조씨 가족의 지원 요청을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조씨가 두번째로 표류하고 있던 해상에 어업지도선이 '우연히' 나타날 수 있었고 조씨는 무사히 남한에 안착했다.
즉 성수대교 붕괴사고라는 초대형 사고를 더 큰 뉴스로 덮기 위해 원래 구해줄 생각도 없던 사람을 필요에 의해 구해줬을 뿐이다. 그 증거로 김영삼 정부는 북에 남은 조창호 자녀(3남매)의 안전을 위해 언론 공개를 하지 않거나, 적어도 자녀들이 피할 수 있도록 발표를 미뤄달라는 통사정마저 뿌리치고 귀환 발표를 강행했다. 이에 대해 조선일보 10월 25일자 기자수첩 <이례적 신속발표>에선 "국가안전기획부의 조창호 씨 북한 탈출/귀환 발표는 전례 없이 신속하고 친절해 언론사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고 했고, 동아일보도 다음날 기자의 눈 <안기부의 구태(舊態)>에선 안기부의 이와 같은 행태를 '3류 소설'이라 평했다.
곧이어 그는 국군수도병원으로 옮겨지고, 같은 해 10월 25일에는 입원한 병실을 찾아온 국방부 장관 이병태에게 귀환을 보고하였으며, 10월 27일에는 육군 장교의 정복을 지급받아 착용하고 육군참모총장에게 귀환을 보고하였다. 11월 25일에는 국립서울현충원에 있는 현충탑 지하 영현 봉안실의 대리석 위패에 새겨져 있는 자신의 이름을 손수 지웠다. 왜냐하면 1951년에 육군 중위로 추서됨과 동시에 전사자로 처리되었기 때문이다. 군인 정신에 귀감이 된 점을 평가받아 보국훈장 통일장을 받았다.
11월 26일에는 육군사관학교에서 전역식을 가짐으로써 43년 3개월이라는 최장기록의 군생활을 마감하였다.
그는 6.25 전쟁 당시에 포로로 잡힌 많은 국군포로들이 여전히 북한에 생존하고 있음을 증언하였고, 이는 북한에 생존해 있을 많은 국군포로들과 강제 납북자에 대한 사회적인 관심을 환기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들이 처한 참혹한 인권환경에 대한 논의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말년에 그는 미국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 북한에 남아 있는 국군포로와 납북자들의 생활상을 증언하고 그들의 귀환을 위한 활동을 벌여왔다.
2006년 11월 19일, 북한에서의 오랜 노역으로 인한 지병이 악화되어서 76세의 나이로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영면했으며, 11월 21일에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1, #2
3. 여담
그는 전역식에서 길고 참담했던 북한 억류생활을 이겨낸 힘은 신앙심과 전쟁터에서 배운 군인 수칙이었다고 회고하였다. 6.25 전쟁 당시 국군포로 가운데 320여 명이 회유와 협박에 굴복해 전향한 사실에 비춰볼 때 그가 40여 년 만에 탈출해서 돌아온 것은 군인정신의 귀감으로 평가되고 있다.
조창호의 실화를 영화로 만든게 당시 군복무 중이던 연예인들을 총동원해서 만든 알바트로스... 그러나 작품은 괴작으로 묻혀졌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으로.
[1] 참고로 일반적인 성인 기준으로 1인당 하루 최소 권장량은 600g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