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낸스 가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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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제32대 부통령, 텍사스의 주화(州花)를 선인장으로 채택하자고 주장하면서 "선인장 잭(Cactus Jack)"으로도 불렸다.
2. 생애
텍사스 주 래드리버 카운티 블라섬 프레이리의 통나무집에서 전 남부연합군 기병의 아들로 태어났다. 테네시 주의 명문사립 밴더빌트 대학교를 1986년 입학했지만 중퇴하고 1890년 변호사가 되었고 이후 1893년부터 3년간 유밸디 카운티의 판사로 선출되어 지방판사로 살았다. 당시 그곳의 판사는 선출직으로 행정도 담당했으며, 선거에서 그의 경쟁자는 메리엇 라이너라는 여성이었는데, 후에 두 사람은 결혼하여 부부가 되었다.
이후 1898년부터 텍사스 주의회 하원의원으로 재직하다가 1902년 연방의회 하원의원에 당선되어 1903년부터 약 30년간을 하원의원으로 보냈다. 그 긴 시간만큼이나 노회한 정객이 되어 막후정치에 매우 능했다고 알려져 있다. 1930년에는 하원의장에 올랐다.
1932년의 당내 대통령 경선에는 남부의 지지를 받았으나 애송이에 가까웠던 쉰 살의 프랭클린 D. 루스벨트에게 패하여 64살의 나이로 부통령 후보로 나섰고 여기서 당선되었다. 부통령(겸 미국 상원의장)은 사실상 명예직이었기 때문에 그는 이 자리에 불만이 많았는지 부통령에 대한 독설을 남겼다. 이 독설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부통령 항목을 참조하기 바란다.
8년간 부통령을 했으나 대통령직에 욕심이 생겨 72세의 나이에 1940년 다시 경선에 도전했다. 하지만 상대는 미국 역사상 유일무이하게 4번이나 대통령에 당선된 프랭클린 D. 루스벨트였다. 결국 그는 당내 경선에서 패배하고 루스벨트는 그 대신 헨리 월리스를 부통령 후보로 선택하고 가너는 다음해 1월 20일에 정계를 은퇴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1]
미국 권력서열 3위인 하원의장에 이어 권력서열 2위인 상원의장 겸 부통령을 지내 미국에서 19세기 스카일러 콜팩스 부통령과 함께 상원과 하원 양원의 의장을 모두 지낸 인물이다.
이후 텍사스에서 여생을 보내며 조용히 살았고, 텍사스 정계의 원로로서 린든 존슨 같은 텍사스 정계 신인들에게 조언을 하기도 했다.[2]
은퇴 이후 무려 27년간 더 살다 '''만 99세 생일 보름 전에 사망'''하여 미국의 역대 부통령 중 가장 오래 살았다. 14살 어렸던 루스벨트보다도 22년 더 산 셈이다.
3. 평가
그는 권력을 갈망했으나 대다수 역사가의 평은 '''"그가 대통령이 될 기회가 없어서 참 다행이었다"'''는 식이다. 개인적으로는 인간미나 눈치는 찾을래야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이었을 뿐더러[3] , 뉴딜 정책의 적극적인 반대파였는데 이는 그가 미국 서부의 중산층인 대농장주이자 은행가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뉴딜 정책 같은 정부의 적극적인 경제정책 간섭에 대해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무엇보다 가너는 자신이 부통령 재직 및 경선에 도전했던 시기에 유럽 대륙에서 벌어지던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해 불간섭주의를 취했다. 대외적으로도 그는 나치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에게 대단히 우호적이었고 나치가 '''미국을 직접 침공하지만 않는다면 유럽에서 전쟁을 벌인다고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홀로코스트에 개입하는 것도 '''내정간섭'''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집권했다면 이후 세계사는 확실히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미국이 2차대전에 참전하어 세계 최강대국이 될 수 있었으니, 그가 활약하지 못한 것이 미국으로선 천운이었다.그는 만고불변의 제퍼슨주의자(반연방주의자)였는데, 대공황 3년째 되는 해 이렇게 말했다. "엄청나게 고통스러운 오늘날 우리에게는 법률이 너무 많습니다. 나는 정부가 오직 시민의 생명과 사유 재산권을 보호하는 두 가지 기능만을 가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정부가 그보다 더 많은 기능을 가질 때 정부는 국민에게 부담스러운 존재가 됩니다." (그 후 1937년 4월, 그는 내각 회의에서 도시 거주자들을 설득하여 한꺼번에 시골로 이주시킬 수만 있다면 국가의 많은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말했다.)
- <만약에 2 일반 역사편>(빅터 데이비스 핸슨 외 지음, 이종인 옮김, 세종연구원, 2004년) p 330에서 발췌.
사실 그가 집권할 기회는 '''딱 한 번 확실하게 있었다.''' 1932년 부통령 당선 직후 취임 직전에 루스벨트 암살 미수[4]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4. 매체에서
해리 터틀도브의 대체역사소설 Steele[5] 에서는 강철의 대통령 가카와 함께 6번이나 부통령을 해먹는다. 1953년 강철의 대통령 가카가 사망하자 곧바로 대통령직을 승계하여 대통령이 되었으며, 이후 권력을 확고하게 하기 위해서 경쟁자인 존 에드거 후버를 제거하려고 하나 오히려 후버에게 역관광당한다음 후버한테 대통령직을 빼앗겨버린다. 이후엔 당연하게도 가너 본인은 당연히 후버에 의해서 숙청 당하게 된다.
루스벨트의 암살 및 가너의 집권을 가정하여 최종적으로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이 승리한 평행우주를 상상한 작품이 바로 필립 K. 딕의 대체역사소설 <높은 성의 사나이>와 겁스 무한세계의 라이히-5 평행계이다.
[1] 이후 미국 부통령은 취임일이 1월 20일이 되었는데, 가너의 임기 만료부터가 연초 레임덕을 방지하기 위한 수정헌법 20조를 따른 것이다(부통령 항목 참조.).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경우 수정헌법 통과 이전에 당선되어 적용받지 않았는데, 가너가 일부러 이를 근거로 사임한 것. 1945년 루스벨트 사후 부통령이었던 해리 S. 트루먼이 대통령을 승계하면서 그 임기를 1월 20일에 마무리하였고, 이후 미국 대통령의 공식 취임일도 3월 4일이 아닌 한 달 보름 앞당겨진 1월 20일이 되었다.[2] 존슨은 가너가 부통령 재직 당시인 1937년 가너의 고향 근처인 텍사스 남부를 지역구로 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이후 1960년 부통령에 당선되면서 가너와 유사한 행보를 보였다.[3] 1939년 성악가 마리안 앤더슨이 미국을 방문한 조지 6세 부부를 위해 백악관 이스트 룸에서 노래를 불렀는데, 노래가 끝나자 이스트 룸에 모인 손님들 중 유일하게 박수를 치지 않은 사람이 바로 그였다. '''말 그대로 센스 제로.'''[4] 시카고 갱단이 이탈리아계 살인청부업자 주세페 장가라를 고용하여 시킨 일이다. 그 이유는 지금도 밝혀지지 않았으며 일부에서는 그들의 목표가 루스벨트가 아닌 당시 시카고 시장인 앤턴 서맥(Anton Cermak)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서맥은 루스벨트와 같은 자동차에 타고 있다가 장가라의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5] 스탈린의 부모가 미국으로 이민와서 스탈린을 낳아 스탈린이 미국 대통령이 된다는 내용. 제목은 스탈린의 작중 미국 성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