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성촌

 

1. 개요
2. 특징
3. 해외
4. 기타


1. 개요



같은 성씨의 씨족이 모여사는 마을. 직접 마을 단위로 모여 살지는 않아도 특정 시나 군에 여러 친척이 모여 살아서 사실상 집성촌이나 다름없는 형태도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집성촌은 17세기 후반부터 나타난다. 중국은 일찍이 종법질서가 확고히 자리잡아 역사가 오래된 집성촌이 많이 있지만, 한민족은 전통적으로 남녀가 결혼하면 남자가 처가에 들어가 살았다.[1] 고려 때에도 그랬고 조선 중기까지도 그랬다. 조선은 유학을 근본으로 삼았지만 남자가 처가에 들어가는 풍습은 사라지지 않았다. 달리 말하면, 우리 문화는 가부장제가 절대 뿌리내릴 수 없는 문화였다.[2] 그래서 집성촌이 생길 수 없었고, 하나의 마을에 다양한 성씨를 가진 사위가 유입되는 이른바 각성받이 마을이 전국적으로 많았다. 저 아래에 언급된 하회마을양동마을도 원래부터 풍산 류씨와 월성 손씨, 여강 이씨가 대대로 살았던 게 아니라 17세기 그 마을에 있는 집안에 사위로 들어갔다가 사회 풍조가 변해 대대로 거기 살게 된 것이다.
집성촌이 생기게 된 것은 양반들의 경제적 문제, 특히 재산 상속과 관련이 깊다. 유산 상속을 할 때 본래 남녀 관계 없이 균등하게 물려주는 게 전통이었는데, 부모는 두 명뿐인데 자녀가 여러 명이면 그만큼 재산은 흩어지기 마련이다. 최근 연구 결과 조선 후기는 평민들이 못 사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이전보다 잘 먹고 잘 살게 되는데[3], 양반 재산이 평민보다 적으면 당연히 위신이 설 수 없고, 양반들은 재산이 흩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방법을 생각해낸다. 결국 아들에게만 균분 상속하는 과도기를 거쳐 장남에게만 몰아서 상속하는 시스템으로 정립된다. 그러자 문중 재산이라는 개념이 생기고, 집성촌이라는 게 생긴다. 이게 그리 오래 된 일도 아니고, 17세기 즈음의 일이다.[4]
과거에는 전국에 수많은 집성촌이 존재했고 한때는 인구 대부분이 집성촌에서 거주한 적이 있다. 하지만 도시화와 이촌향도, 그리고 댐 건설 등으로 마을이 없어진다거나 결정적으로 남북분단~6.25 전쟁 기간 동안 같은 마을 안에서도 이념으로 나뉘고 타 지역으로 피난을 갔다가 정착해버리는 등 전통적 향촌구조가 많이 파괴된 탓에 집성촌도 많이 없어졌다.
지금은 전쟁의 피해를 받지 않거나 덜 받은 경상도 지역에 집성촌이 많이 남아있지만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인근 도시로 나가 있거나 돌아오지 않아서 저출산 고령화 현상이 심하며 근근히 유지되는 곳이 많다. 생각 외로, 지금의 30대 초반 세대까지만 하더라도 집성촌이 있던 시골 지역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상경한 사람들이 꽤 많다[5].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안동시 하회마을은 풍산 류씨 집성촌이고 경주시 양동마을은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의 집성촌이다.

2. 특징


집성촌은 대부분의 동네 사람들이 같은 부계 혈통의 친척이기 때문에 조상에게 공동으로 제사를 지내고 벌초 같은 일도 같이 하는 문화가 있다. 그리고 결혼은 웬만하면 다른 지역 출신인 사람과 하는 편이다. 불과 90년대까지만해도 인근의 타 가문 집성촌과 혼사를 논하는 경우가 흔했다. 물론 지금도 아주 가끔씩 볼 수 있긴 하다. 집성촌이라 해도 마을을 이룰 정도면 팔촌을 넘는 먼 친척도 마을에 많기 때문에 요즘 같으면 동네 안에서 결혼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동성동본 결혼이 합법화 된 것도 얼마 안 되었고, 일족이라는 의식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눈 맞기도 힘든 지라...
그리고 집성촌이라는게 꼭 단일 가문만의 집성촌이 아닌 경우가 많다. 둘 혹은 서너가문이 같은 마을에 모여살면서 주변 다른 마을들까지 포함해서 서로 겹겹히 사돈을 맺는식으로 혈연적으로 연결되어있는 경우도 많다. 집성촌이 본격적으로 생겨나기 시작한 1600년대 중반 이전에는 사위가 처가마을로 들어와서 눌러사는 경우가 많았고 그런식으로 기존 특정가문 집성촌에 유입된 사위가문의 후손들이 수백년간 눌러살면서 그 마을들이 점차 서너개 가문의 집성촌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집성촌을 기반으로 한 씨족사회 문화가 학벌의식을 조장시킨다는 견해도 있다. 이러한 씨족사회 문화에서 장원급제자가 나오면 그 동네 사람들이 그 장원급제자를 빽이나 방패막이, 총알받이 등으로 삼아 부정부패 등 나쁜 짓들을 저지를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한 입장에서는, 지금도 농어촌 지역에서 그 마을에서 고시 합격자가 나오면 동네잔치를 크게 여는 이유가 이런 이유 때문에서라고 주장한다. # 다만 상기한 폐단의 경우는 작은 사회 특성상 벌어지는 탓이 크고, 출세 목적 교육의 경우 집성촌과 거리가 먼 아파트단지로 이루어진 대도시의 부촌 및 신도시에서는 더 과열되었다는 것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대도시라 할지라도 아직까지는 학부모들은 대부분 농경사회를 경험한 데다가 집성촌 출신들이 많기도 할 뿐더러 공부 강요하는 이유가 학생보다는 그 학생이 속한 가문을 위하는 것이라고 직설적으로 말하는 학부모들도 많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6]

3. 해외


중국에도 집성촌이 존재한다. 대표적인 게 푸젠성 토루들. 특징은 각 건물이 하나의 집성촌 역할을 하는 다세대주택이자 마을이며, 동시에 '''요새'''라는 점이다. 이 토루를 만든 이들은 객가라는 한족의 일파인데, 이들은 오래 전 북방의 난리를 피해 남방으로 대규모로 이주한 난민의 후손들이다. 이들은 새로 정착한 지역의 원주민들과는 문화, 언어적 차이가 컸고, 한정된 자원을 두고 경쟁해야 했기에 두 집단 사이엔 자주 계투가 벌어졌다. 때문에 방어 구조물 안에 일족 전체가 생활하는 특이한 생활양식이 생긴 것. 객가인들 말고도 푸젠성의 토착 주민들인 민어 사용자들도 토루를 지어 생활했다. 한국의 양동마을, 하회마을처럼 이 토루들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독일에도 집성촌이 존재한다.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의 할아버지인 프리드리히 드룸프가 독일 칼슈타트에 있는 드룸프(Trump) 마을에서 미국으로 이민왔다. https://www.newyorker.com/culture/culture-desk/the-ancestral-german-home-of-the-trumps
터키 공화국 초기 가족법을 만들어서 성씨를 가질수 있게 되자 몇몇 공무원들이 귀찮아서 아예 한 마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성을 폴라트(Polat)로 정해놓는 만행을 저지른바가 있다. 무서운건 이 폴라트 뿐만 아닌 여러 사례가 존재한다.

4. 기타


양준혁은 이 단어를 몰라서 집장촌이라고 불렀다.#

[1] 기록상 가장 오래된 것이 부여 때이다. 즉 이 전통의 시작 시기를 아무리 늦게 잡아도 2천 년이 넘었다. 단, 신라는 이 전통이 보이지 않는다. 아예 문화가 다른지라...[2] 현대 대한민국에서 자행되고 있는 가부장제는 일제 강점기 때 시작된 것이다. 일본은 원래부터 가부장제가 강했는데, 일제 때 그 문화가 조선에 들어온 것이다.[3] 평민들이 너도나도 비단옷을 입으니까 사회문제가 될 정도였다. 생각해보면 너무 못 살면 당장의 한 끼가 급하므로 합심해서 민란을 일으키기도 어렵다. 평민들이 잘 먹고 잘 살게 되니까 사회문제를 돌아볼 여유가 생기고 합심해서 운동도 하는 것이다. 양반과 평민이 사이가 안 좋았을 것 같지만, 이들이 세금에 불만을 품고 합심해서 관아를 습격한 사건도 있다.[4] 달리 말하면 돈 주고 족보를 사는 일이 불가능했다는 말이 된다. 사실 돈 주고 족보 산다는 말은 식민사학자 시카타 히로시(四方博)의 이론에서 비롯한 말인데, 조선 후기에 되면 평민이 양반 문화를 따라하고자 자기들끼리 집성촌을 만들지, 양반 가문에 편입시켜달라는 요구는 안 한다. 못 하기 때문이다.[5] 특히 집성촌이 경북 쪽에 많이 남아있다보니 대구광역시에서는 지금의 20대 중반 세대에서 출생지가 BYC(...)인 경우도 심심찮게 보인다.[6] 더 쉽게 설명하자면 할머니댁 외가댁 동네분들이 살기좋게 하기위해 희생해달라는 말. 당장 2020년 현재도 초중고생들이 명절 청문회때 집안 어른들한테 성적에 대한 질문을 듣는 식으로 무언의 압박을 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