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함흥교구
1. 개요
함흥교구는 함경도[1] 를 관할하는 한국 가톨릭의 교구이다.
그러나 현재의 교구는 실질적으로 종교의 자유가 없는 땅이기에 침묵의 교회로 존재하고 있으며, 함흥교구장은 춘천교구장이 겸직하고 있다. 실질적으로 유효한 교구가 아니기에 교구장이 아닌 교구장 서리로 불리고 있으며, 현재 함흥교구장 서리는 춘천교구장인 김주영 시몬 주교이다.
2. 역사
1920년 7월 5일 경성대목구에서 원산대목구로 분리되었다. 함경남도, 함경북도, 간도지역까지 관할했으며, 해당 지역은 오틸리엔의 포교 성 베네딕토회에 위임되었다. 이를 위해 현재 서울의 혜화동[2] 에 위치했던 베네딕토회 수도원이 원산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1924년 원산의 베네딕토회 수도원장에 크리소스토모 신부가 임명되고, 1925년 11월 툿찡 포교 성 베네딕토 수녀회가 원산에 진출했다. 이때부터 빈민학교 및 야학교와 의료사업, 유치원 등을 설치해서 사회사업에 주력하게도 되었다. 또한, 1926년부터 작업해서 1927년 3월 덕원으로 수도원이 이전했고, 결국 그 노력으로 1940년 원산대목구를 해체한 후 함흥대목구와 면속구인 덕원자치수도원구가 독립되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말부터 탄압과 방해로 원산대목구 시절의 주교좌이던 원산성당이 덕원수도원자치구로 편입된 후 함흥대목구의 주교좌 성당을 건설할 수 없었고, 1945년 해방과 동시에 주둔한 소련군으로 말미암아 종교탄압은 심해졌고, 1949년 5월 9일 밤 신상원 보니파시오 대목구장(수도원장)을 비롯한 사제와 수도자들이 전부 체포되어서 상당수 사제 및 수도자들은 처형 및 병에 의해 사망했다.
그 후 함흥교구는 침묵의 교구로 남아 있는 상황이다. 이후 함흥교구장 서리는 덕원수도원자치구장 서리와 함께 베네딕토회 수도회 장상인 아빠스가 자동계승 되었으나, 2005년부터 한국 천주교 주교협의회 및 베네딕토회 왜관수도원의 동의를 얻어, 현재의 상황이 계속되는 한 춘천교구장이 함흥교구장 서리를 겸직하는 걸로 바뀌었다. 그로 인해, 장익 십자가의 요한 주교가 함흥교구장 서리로 임명되었다.
2009년부터 신학생을 모집하기 시작한 평양교구와 같이, 함흥교구도 2016년부터 신학생을 모집한다. 함흥교구 사제를 지망하는 신학생들은 수원가톨릭대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사제서품을 받은 후에는 임시로 춘천교구에서 사목하다가 남북통일이 되거나 북한 지역에서 사목활동이 가능해지면 함흥교구 지역에 우선 파견되어 사목활동을 하게 된다. 참조.
3. 역대 교구장
- 1대 신상원 보니파시오(Boniface Sauer) 주교 아빠스(베)[3] (1920년 8월 25일 ~ 1950년 2월 7일) : 초대 원산대목장 및 함흥대목구장
- 2대 이성도 티모테오(Timotheus Bitterli) 몬시뇰(베) (1952년 ~ 1981년 5월 22일) : 교구장 서리
- 3대 이동호 플라치도 아빠스(베) (1981년 5월 22일 ~ 2005년 11월 21일) : 교구장 서리
- 4대 장익 십자가의 요한 주교 (2005년 11월 21일 ~ 2010년 3월 25일) : 교구장 서리
- 5대 김운회 루카 주교 (2010년 3월 25일 ~ 2021년 1월 6일) : 교구장 서리
- 6대 김주영 시몬 주교 (2021년 1월 6일 ~ 현재) : 교구장 서리
[1] 단 덕원자치수도원 관할인 원산시, 안변군, 문천군, 고원군은 제외.[2] 현재 가톨릭대학교/성신교정이 위치한 그 부지가 바로 베네딕토회 수도원 위치였다.[3] 서울대목구장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 주교에 의해 한국에 왔으며, 백산수도원과 덕원수도원 자치구를 세운 인물이다. 일제강점기의 탄압에서도 수도원을 지켜냈지만, 결국 공산화에 의해 1949년 5월 9일 수도원의 사제와 수도자와 함께 체포되어서 결국 평양노동교화소에서 72세를 일기로 옥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