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력전 연구소

 


1. 개요
2. 구성원
3. 설립 목적 및 배경
4. 교육 내용
5. 모의전 연구 내용
5.1. 1차 연구
5.2. 2차 연구: 미일 개전시 일본은 필패
6. 연구 결과에 대한 일본 정부의 대응


1. 개요


1941년 4월 1일에 결성된 일본제국의 내각 총리대신 산하의 싱크 탱크로 'ENREN'이라고 불린다.# 워 게임 대학원으로 설립되었기 때문에 구성원들을 학생으로 지칭했고 총 35명, 평균 연령 33세였다. #

... 총력전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조사를 목적으로 지난해 10월에 탄생한 총력전연구소는 국방국가의 기둥이 될 인물을 양성하는 것이 사명이라는 점에서 ‘장관양성학교’라 불리고 있다. (중략) 군관민 각각에서 “인격, 신체, 지능이 탁월하며 장래 지도자가 될 만한 자질을 가진 인재” 서른여섯 명에 대한 전형을 진행하고 있다. 이외에도 연구생의 자격은 무관의 경우에는 육해군대학교를 졸업한 대위 또는 소령, 문관은 고등관 4등 또는 5등이며, 각각 임관 5년 이상 경과되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다. 민간 분야에서는 이러한 문무관에 해당하는 직업 경력을 가진 인재 여섯 명을 선발하게 된다.(하략)

- 1941년 3월 28일자 <도쿄일일신문> 기사 中 발췌 [1]

민간 분야란 일본제철, 미쓰비시 광업, 동맹통신사, 일본우편기선, 산조중금, 일본은행을 포함한다. 군에서는 일본 육군, 해군의 대위~소령급, 관에서는 고등문관시험 출신의 사무관들과 정보기관, 외교관 출신으로 구성했다.
시나리오 분석을 통한 미래학자의 역할을 수행했다.

2. 구성원


이들은 내각을 모의로 구성하여 모의전쟁을 수행하였다. 그 구성은 다음과 같다.[2]
  • 중의원 속기과 과장 오카베 시로: 내각 서기관장 역할
  • 조선총독부 식산국 소속 33세의 히카사 히로타카: 조선총독 역할
  • 북지나방면군 지난(済南) 특무기관[3] 소속 31세의 나리타 겐이치: 흥아원[4] 총무장관 역할
  • 상하이 대사관 3등 서기관 하야시 카오루: 외무차관 역할, 정보국 차장(부장) 겸임
  • 내무부 계획국 사무관 후쿠다 키요시: 경시총감 역할
  • 도쿄 지방사무관 나카니시 히사오: 기획원 차장(부장) 역할
  • 내무성 경찰보안국[5] 사무관 카와구치 쇼지로: 정보국 차장(부장, 겸임) 역할
  • 대장성 이재국 사무관 사카이 토시히코: 기획원 차장(부장) 역할
  • 대장성 주세국[6] 사무관 이마이즈미 카네히로: 대장대신 역할
  • 육군성 야마구치 토시히사 소령: 육군이 연구생으로 보낸 군인 2명 중 한 명으로, 1941년 7월에 대소련전 준비를 위한 '관동군 특종연습'에 관동군 참모로 차출되어 퇴소하게 되었다. 이는 육군이 총력전 연구소를 경시하고 있었음을 드러내준다.
  • 외무성 동아과, 31세의 지바 아키라: 외무대신 역할
  • 내무성 지방국 사무관인 32세의 요시오카 게이이치: 내무대신 역할
  • 육군 대위 시라이 마사타츠: 육군대신 역할
  • 육군 주계[7] 소령 오카무라 슌: 육군차관 역할
  • 해군 소령 시무라 타다시: 해군대신 역할
  • 해군 기관 소령 다케이치 요시오: 해군차관 역할
  • 문부성 종교국 종교과 사무관 조지 히사시: 문부대신 역할
  • 도쿄고등학교[8] 교수 하라 다네유키[9]: 대정익찬회 부총재 역할
  • 도쿄여자고등사범학교[10] 교사 구라사와 다카시[11]: 문부차관 역할. 그는 1년간 총력전 연구소에서 총력전 교육체제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고 그 결과물을 "總力戰敎育の理論"(총력전 교육의 이론)이라는 책으로 펴냈다(1944)[12].
  • 농림사무관 야노 가이세이: 기획원 차장(부장) 역할
  • 농림성 관방문서과 사무관 기요이 타다시[13]: 농림대신 역할
  • 물가국 제2부 화학과장 (사무관) 다마키 게이조[14]: 기획원 총재 역할
  • 상공성 총무국 사무관 노미야마 츠토무: 상공대신 역할
  • 체신성 관방총무과 사무관 모리 이와오: 체신대신 역할
  • 철도성 운수국 사무관 아쿠타카와 오사무: 철도대신 역할
  • 척무성 척남국[15] 사무관 이시이 타카시: 척무대신 역할
  • 후생성 직업국 사무관 미카와 가츠미: 후생대신 역할
  • 대동학원 교관 미야자와 지로: 대만주사무국 차장 역할
  • 동맹통신사[16] 사원 아키바 타케오: 정보국 총재 역할
  • 일본은행 자금 조정국 서기 사사키 타다시[17]: 일본은행 총재 역할
  • 산업조합중앙금고[18] 조사과장 쿠보타 가쿠이치[19]: 일본 내각총리대신 역할. 연구생들의 좌장을 맡았다.
  • 일본제철[20] 총무복리과 사원 치바 유키오: 기획원 차장(부장) 역할. 그러나 오래가지 못 했다. 그는 1941년 7월에 임시 소집되어 동부 36부대 (우쓰노미야)에 입대하게 되었다.
  • 미쓰비시광업[21] 노무부 사원 호시나 레이이치: 기획원 차장(부장) 역할
  • 일본우편기선[22] 기획과 서기 마에다 가츠지: 기획원 차장(부장) 역할. 그는 과거 런던 주재원으로 있으면서 독일의 공습을 체험했다. 또 시애틀 주재원 경력도 있었다.
  • 도쿄 민사 지방재판소 판사 미부치 간타로: 사법대신 역할, 법제국 장관[23] 겸임
  • 육군 중령 간인노미야 하루히토(왕족, 참관인)[24]

3. 설립 목적 및 배경


이후 영국세계전략연구소로 개칭되는 영국의 국방대학(Royal Defence College)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당시 영국은 국방대학에 각계각층의 유망한 인재들을 입학시켜 유사시 민관군의 협력체계가 원활히 이루어지도록 교육하고 있었다. 당시 주영일본대사관 파견무관이던 다쓰미 에이이치는 여기에 깊은 감명을 받고 적극적으로 비슷한 기관의 설치를 추진했다. 그러나 인사배치상 본인이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못했고 니시우라 스스무 중령[25]이 그 아이디어를 이어받아 기관 설립을 추진하게 된다. 니시우라는 육군성 군사과 고급과로 발령받자 본격적으로 육군 고위 장성들을 설득했으며, 당시 해군차관이던 야마모토 이소로쿠까지 설득해 해군의 동의도 받는 한 편 대장성[26]의 동의까지 받아냈다.
총력전 연구소가 구체적으로 설립되기로 확정된 것은 1940년 8월 16일의 일로 당시 밝힌 목적은 다음과 같다.
* 총력전 연구소는 국가총력전에 관한 기본적인 조사연구를 행함과 동시에 총력전 실시의 중심에 해당하는 자의 교육훈련을 그 목적으로 할 것.
* 총력전 연구소는 내각 총리대신의 감독에 속하는 것으로 할 것.
* 총력전 연구소는 소장[27] 및 연구소원 수 명으로 구성하고 각 청 및 민간에서 우수한 인재를 선발할 것.
* 연구원은 당분간 문무관 및 민간에서 선발한 수 명으로 충당하며 그 교육기간은 대체로 1년으로 할 것.
* 연구소는 서둘러 개설하며 우선 연구원으로 하여금 총력전에 관한 기본적인 조사연구를 행하여 1941년도부터 연구원의 교육훈련을 실시하기로 예정할 것.
* 본건에 관한 경비에 대해서는 적당한 조치를 강구하기로 할 것.
- 이상 참고문헌: '쇼와 16년 여름의 패전'
육군 무관이 설립을 추진한 것과는 별개로 육군 자체의 반응은 꽤나 미온적이거나 무관심했다. 육군은 연구소장으로 장성급 장교 한 명을 내준 것과 연구원 몇 명 파견한 것으로 소임을 다했다고 생각해 신경을 꺼버렸다. 심지어 나중에는 관동군을 훈련한답시고 파견했던 장교(야마구치 토시히사)를 도로 불러들인다거나 연구원 중 한 명(치바 유키오)을 예비군으로 편입시켜 소집하기까지 했다.
반면 해군의 경우는 상당한 관심을 가졌다. '''정말 미국과 한 판 붙었을 때 일본의 국력이 이를 감당할 수 있는가'''에 관해 기존의 연구기관인 기획원의 분석 능력을 신뢰하지 못해 나름대로 유능한 인재들을 모아뒀다는 총력전 연구소에서 밝혀보고자 한 것이었다. 이 때 이미 일본은 중국과의 전쟁에 있어 교착상태에 빠져들어 수렁 속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음에도 해군의 전쟁을 독자적으로 수행할 능력이 되는지 알아보고자 한 것이다. 즉, 이미 이 때부터 해군은 육군과는 별개로 영국 및 미국을 적국으로 생각하고 전쟁 연구에 돌입한 것이다.
행정부는 행정부대로 총력전 연구소에 무관심하거나 심지어는 경계했다. 인재가 차출될 무렵부터 이미 총력전 연구소가 뭐하는 기관인지 제대로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28] 기획원의 경우는 자신들과 일이 겹치기 때문에 업무의 주도권을 빼앗기는 것은 아닌지 노심초사했다.

4. 교육 내용


강의와 세미나, 토론의 복합적인 형태를 띠었으며 토론과 세미나가 주가 되었다. 이외에도 체육시간을 두어 책상물림들이 대부분인 연구원들의 건강을 신경썼으나 체육시간에 대한 반응은 썩 좋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각층의 유망 인재들[29]을 뽑아놓다보니 되려 강의를 진행하는 교관보다 아는 내용이 충실한 경우도 많아 뒤에서 교관들을 비웃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처음에는 이들을 무슨 목적으로 뽑았는지 가르쳐주지 않아 연구생들이 자조에 빠져 있었다. 연구소라고 해서 연구를 한다고 데려온 줄 알았더니만 시시한 강의, 체조를 하고 국회의사당 주변을 뛰어다니게 하는 등 시간 때우기 같은 짓을 한다는 푸념이 있었다. 그러나 본 업무를 맡기면서부터 다들 열심히 하기 시작했다. 특히 현장 견학으로는 꽤나 진척이 있었던 모양이고 육군사관학교에 대해서는 "너무 정신주의를 강조하니 아무래도 과학적이지 못하다"는 문제점을 정확하게 짚어냈다. 해군에 대해서는 "포격전이나 대잠전력은 충분해보이나 대공방어가 취약하다"고 짚어냈다.

5. 모의전 연구 내용



5.1. 1차 연구


  • 미국과 전쟁을 피할 수는 없어보인다. 그러나 미국과 전쟁을 벌인다면 기본적으로 장기전을 고려해야 한다.
  • 단기전으로 첫 전투에서 승리한 후 강화조약을 끌어낸다는 것은 상대를 전혀 생각하지 않은 발상이다.
  • 증세를 통해 당장은 재정파탄을 막을 수 있을 테지만, 국민 모두가 전쟁에 충분한 결의를 다지지 못했다면 오래 지속할 수는 없을 것이다.
  • 일본이 사무라이 정신을 운운하지만 미국도 양키 정신이 있기 때문에 순순히 굴복하려 들지는 않을 것이다. - 진주만 공습 이후 90%에 달했던 반전 여론은 역전되었고, 분노에 찬 미국인들은 전쟁을 적극 지지했다. 또한 자원 입대율도 90%를 기록한 만큼 이는 정확한 분석이었다. 그리고 저때 당시 일본 지휘부에게 있던 '물질문명에 찌들은 나약한 미국인'이란 시각은 이미 1929년의 경제 대공황으로 진작에 틀려버렸다. 저 무렵 미국 빈곤층들은 물질과 가정의 상실등으로 자신의 것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으며, 빈곤층 특유의 깡따구를 갖추었기 때문에 군 인력으로 굴리기도 매우 좋았다. 따지자면 오히려 저때의 미국인들은 정신력으론 미국의 전 세대들 중 최고 수준이었다.[30] 그만큼 저때 일본의 지휘부가 상대를 얕보고 너무나도 안이하게 생각했다.
  • 남방에 석유를 가지러 간다지만 쉽지 않을 것이다. - 이 또한 미국 잠수함과 항공대들의 통상파괴전으로 인해, 원유와 자원이 있어도 필요한 곳으로 수송하지 못해 일본은 고질적인 물자 부족에 시달렸으니 정확한 분석이다. '쇼와 16년 여름의 패전'에서는 이를 두고 '구멍난 양동이로 물을 퍼오는 격'이라고 표현했다. 무엇보다 당장 동맹국인 독일부터 통상파괴전으로 영국에게 엄청난 타격을 주었고, 미국 또한 미영전쟁 당시 해군력이 밀리는 탓에 일찌감치 통상파괴전을 시행하여 당대 세계최강이던 영국군을 고전시킨 등 통상파괴전에 이미 도가 텄다. 이러한 사실들은 염두에 두지도 않고, 당시 일본 지휘부는 너무나도 안이하게 생각했기에 이를 비판하며 나온 말이다.
전체적으로 미국을 얕보는 일본군 지휘부를 비판하는 내용이다.

5.2. 2차 연구: 미일 개전시 일본은 필패


이하는 시뮬레이션 내용이다.
  • 개전(開戰) 제4기, 1941년 9월
미국과의 전쟁은 피할 수 없다 하더라도 그 시점은 최대한 뒤로 미루어야 하며 소련과는 불가침, 태국과 제휴, 독일과는 동맹 유지, 베트남에 대해서는 공동방위 강화, 인도네시아와 경제협력, 미국•영국•인도네시아• 중남미로부터의 수입단절 대비, 재정 및 보급체계 재정비 등이 반드시 필요하다.
  • 개전 제5기, 1941년 10월
물자동원의 재검토가 필요하다. 미국, 영국, 인도네시아, 중남미로부터의 수입이 단절되며 선박 징발에 따라 근해 수송력은 저하될 것이다. 노동력 및 국내수송력 또한 징발로 인해 영향을 받을 것이고 증산, 회수, 저금 및 인근 동맹국과 식민지의 대일 공급능력을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의 수중에 있으므로 미영 양국과 개전시 비협조적으로 나올 것이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2월 1일 이후 인도네시아로 진주한다. 석유는 최대 11월 개전시 인도네시아로부터 인수한 석유까지 총 30개월, 3월 개전시 21개월치까지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 개전 제6기, 1941년 11월
독소전쟁은 모스크바 및 레닌그라드 동쪽에서 교착상태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영국과 독일의 전쟁은 수에즈 및 지브롤터까지 확대될 조짐 이외에는 소강 국면이 될 것이다. 여기서 일본의 의도가 미국, 영국, 인도네시아에 간파될 경우를 대비해 모든 작전을 서둘러 진행시키도록 한다. 군부는 11월 중순까지 긴급조치가 끝날 것이다. 여기까지 진척됐다면 개전은 피할 수 없으므로 선제공격이 불가피하다. 군부는 개전을 촉구하지만 행정부는 아직까지도 미국과의 개전은 회피하려 하므로 11월 중순까지는 미국을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인도네시아의 석유를 확보해야 한다. 미국과의 개전은 빨라도 11월 하순에 실시하며 동시에 평화교섭을 시도한다.
  • 개전 제6기 - 신규 정보로 인해 수정
일본군은 11월 15일을 기해 인도네시아를 침공, 요충지를 확보한다. 인도네시아군은 항전하며 미국과 영국의 원조를 요청할 것이나 일본군의 압박을 이겨낼 수 없다. 인도네시아로부터 원유 21만 톤 등의 자원을 압수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지만 미국과 영국은 즉시 불법 침략을 주장하며 일본과 단교하려 할 것이다. 그와 별개로 미국과 영국이 실제로 참전할지는 불분명하다. 동양의 영국군과 미군은 긴장하기 시작하나 적극적인 행동을 하지는 않을 것이고, 대미 개전을 위해 새로 병력을 징집하고 선박을 징발한다.
  • 개전 제7기, 1941년 12월
인도네시아 침공은 순조로울 것이나 12월 초순 미국이 필리핀해 인근을 중립으로 선포하고 일본의 군함을 격침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일본 내 개전 여론이 높아진다. 행정부는 여전히 개전을 반대하지만[31] 군부의 강경한 주장으로 결국 12월 중순 대미 개전이 결정된다. 행정부 각료들은 전쟁을 어디까지 끌고 갈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인도네시아의 원유를 확보한다 한들, 원유가 ABCD포위망을 뚫고 본토까지 도달할 해상교통로를 확보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선박이 부족했고, 수송 중 얼마나 격침될지, 일본이 그 선박의 소모를 메울 수 있을지도 몰랐다.
  • 개전 제8기, 1942년 1월 ~ 1942년 3월
소련이 미국과 연계할 조짐이 보인다. 소련에게 항의하는 한 편 미국이 소련으로 보내는 물자를 열어주는 밀약을 체결한다. 소련이 동남아에서 자원수급을 요구한다면 거부한다. 중남미 선적의 배로 미소간 교역이 확대된다면 근해에서 중립국 선박의 이동을 차단한다. 이 때문에 중남미에서 단교를 요구하거든 그에 응해도 좋다.
  • 개전 제9기, 1942년 4월 ~ 1942년 10월
미국이 잠수함 및 항공기로 공격을 개시한다면, 미소간 연계가 확실시되기 때문에 기존 소련 선박의 통행을 차단하며 불가침조약 위반을 항의한다. 그러나 미국이 시베리아를 이용하는 것을 이유로 소련에 강경 항의한다면 소련이 일본을 공격할 가능성도 고려해야만 한다. 독일이 소련을 상대로 개전할 것을 요구하는 경우 소련의 압박을 근거로 독일과 협정을 체결한다. 이제는 석유 비축분도 바닥이 드러났고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할 여력이 없다.
  • 결론
'우리 국력이 허하는 바가 아니라는 견해가 유력하며, 각의는 일치를 보지 못했다.\'는 선언 이후 모의내각 총 사퇴.

6. 연구 결과에 대한 일본 정부의 대응


연구에 대한 제군의 노고가 크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책상에서 이뤄진 연습으로 실전이라는 것은 제군이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 러일전쟁에서도 일본이 이길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겼다. 그 당시에도 삼국간섭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일본이 일어선 것이지, 이길 수 있다는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다. 전쟁은 계획대로만 되는 것이 아니며, 생각하지 못한 것이 승리를 부르기도 한다. 따라서 제군의 성과는 단순히 탁상공론이라 부를 수는 없겠으나 그 의외성이 반영되지 못했다. 제군은 이 책상연습의 결과를 경솔하게 발설치 말라. - 도조 히데키

'''연구 성과를 전혀 반영하지 않았다.''' 애초에 반영했으면 태평양 전쟁이 없었을 것이다. 잘 알다시피, 석 달 뒤 도조 내각은 미국을 상대로 전쟁에 돌입하였으며, 그 결과는 연구 결과대로 일본의 패망이었다. 현실의 일본 내각은 모의내각보다는 전쟁에서 오래 버텼으나, 모의내각은 그나마 국력이 남았을 때 포기한 반면 현실의 도조 내각은 나라가 막장이 될 때까지 버텼기 때문이었다.
한편 연구진이 예측한 전쟁의 판도는 상당부분 실제로 일어났다. 1941년 겨울 동부전선의 교착 상태와 북아프리카 전역의 전황까지 비교적 정확하게 예측했다. 게다가 랜드리스에서 미국이 태평양으로 소련에게 지원할 텐데 이를 일본이 막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는 점도 예측했다. 무엇보다 연구진들이 지적한 가장 큰 문제점인 석유의 수급과 일본 본토와 동남아 점령지 간의 해상 수송 라인의 위협도, 미국 잠수함대와 항공대의 공격을 통해 실제로 일어났다. 그리고 독일이 일본에 소련에 대한 선전포고를 요구하는 것까지 똑같이 이뤄졌다. 만약 이때 일본이 흔히 밀덕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그리고 위의 총력전 연구소의 임시내각에서 계획한 것처럼 그 요구를 수락하고 랜드리스 항로를 차단하거나 소련군에 압박을 가했다면, 전쟁은 좀더 질질 끌릴 수도 있었다.
또한 도조 히데키의 주장에 상당히 심각한 문제점이 있었다. '''러일전쟁은 영미가 지원해준 전쟁이었지만 태평양 전쟁은 영미를 적으로 돌리는 전쟁이었다.''' 더군다나 예기치 못한 변수로 인한 승리를 고려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정상적인 정신머리가 박힌 수뇌부는 예상 외 변수를 골칫거리로 여기지 유리한 변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예측할 수 없는 '변수'란 당연히 전략을 불투명하게 하는 요소이므로, 최대한 부정적으로 생각해서 작전을 구상하는 것이 기본이다. 일본 수뇌부가 얼마나 안이한 생각으로 전쟁을 벌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한편 총력전 연구소는 저 브리핑 후 미운털이 박혔다. 총력전 연구소는 주어진 자료 내에서는 정확하게 예측했지만, 내각이나 군부는 총력전 연구소의 귀중한 예측이 입맛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철저하게 무시했다. 1942년 4월 2기, 1943년 3기를 받았지만 개점 휴업 상태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 1945년 1월 해산되고, 패전 후에는 일본 총력전의 배후세력으로 의심받아 GHQ의 조사를 받았다.

[1] 딴지일보에서 재인용[2] 참조문헌: 쇼와 16년 여름의 패전[3] 당시 관동군은 산둥성 지난시에 군사정보기관(특무기관)을 두었다.[4] 중국에 관한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문제를 통일적으로 처리하는 중앙기관. 중국의 경제를 장악하거나 아편을 퍼뜨리는 등의 공작을 했던 기관이기도 하다. 왕징웨이 공작 문서 참조.[5] 방첩기관. 휘하에 검열과(도서과), 외사과, 보안과가 있었는데 검열과는 불온도서를 검열하는 역할, 외사과는 현대 일본 경시청의 공안부 외사과, 보안과는 고등경찰과 특별고등경찰을 지휘했다.[6] 대장성의 3대 권력 부서가 주계국(예산 담당), 주세국(조세 담당), 이재국(재정 투ㆍ융자,국유재산관리 담당)이다. 최고 권력 부서인 주계국에서는 파견하지 않았지만 나머지 두 부서에서 파견했다.[7] 일본군에서 회계, 재무, 병참 등을 담당했던 병과.[8] 구제고등학교로 현 도쿄대학 교양학부에 해당한다.[9] "다이쇼, 쇼와 시대사" (Taisho-Showa jidai shi, 1939)라는 논문을 출간하는 등 일본 현대 역사학 연구에 종사했던 Hara Taneyuki일 수 있다.[10] 고등사범학교는 구제전문학교에 상당하는 고등교육기관이었다. 현 오차노미즈여자대학이다.[11] 倉沢 剛, 1903-1986. 전후에 도쿄 학예대학 부속 세타가야소학교 교장, 센슈대학 명예교수를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는 소학교의 역사 1-2(1963-1965), 학제의 연구(1973), 학교령의 연구(1978), 막말교육사 연구 1-3(1983-1986) 등이 있다.[12] 출처: 논문, 제국주의 일본의 총력전 교육이론과 비판[13] 清井 正, 1910-2006. 1956년 농림 사무차관을 역임했다.[14] 玉置 敬三, 1907-1996. 전후에 통산 사무차관을 역임했다.[15] 척무성(拓務省, 타쿠무쇼)은 1929년부터 1942년까지 존재했던 일본 내각 관청으로 식민지 통치기관 사무 감독과 해외 이민 관련 문제를 다루던 곳이다.[16] 현 교도(共同)통신. 비영리 언론기관이지만 일본 언론계에 현대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17] 佐々木 直, 1907-1988. 1969년 일본은행 총재를 역임했다.[18] 産業組合中央金庫. 현대에는 농림중금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에서 농협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19] 1905-1985. 저서 목록[20] 현대에는 세계 3위, 일본 1위 제철업체다. 구 명칭인 '신일본제철, 신일철주금'으로도 알려져 있다.[21] 현 미쓰비시머티리얼. 현대에는 25,000여명의 직원을 지닌 자원 대기업이다.[22] 현 일본우선. 현대에는 일본 3대 해운회사에 속한다. 당시 미쓰비시그룹에 속해 있었다. 일본이 제해권을 빼앗기기 전에는 이들 해운회사가 당대 최고 인기 직장이었다.[23] 내무대신 휘하 직책[24] 1902-1988. 간인노미야 7대 당주. 패전 후 신적강하를 당했으나 카스가 흥업이라는 회사를 차려서 부유하게 살았다.[25] 이쪽은 주 프랑스 일본대사관 파견무관이었다. 프랑스도 비슷한 기관을 운영중이었기 때문에 그도 해당 기관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었다.[26] 현재 재무성[27] 육해군 장관 또는 칙임문관[28] 사실 이는 군부도 마찬가지였고 전후에 총력전 연구소 인사들을 심문한 미군 GHQ도 이름 때문에 이들이 태평양 전쟁을 배후에서 조종한거 아니냐는 의심을 품기도 했다.[29] 지식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실무경험도 풍부했다.[30] 현대의 미국인들도 대공황기와 2차 대전을 모두 겪은 이 세대를 '위대한 세대the greatest generation'라 부르며 배우려고 하고, 경제 위기가 올 때마다 그들의 행적을 참고하려 한다.[31] 모의내각 내 경제부처의 반발이 제일 심했다. 요지는 '일본의 공업능력은 우리가 잘 아는데, 그걸 갑자기 다섯 배로 늘리라니 무슨 개소리냐? 전쟁은 불가능하다.\'는 것. 일본이 당시 자원 자급도는 다음과 같다. 원유 16%, 소금 22.6%, 철광석 28.5%, 알루미늄 53%